[스토리텔링이 있는 맛집]
시래기국밥 등 전통국밥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일미옥불고기>
서리에 맞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
저것은 맨 처음 어둔 땅을 뚫고 나온 잎들이다
아직 씨앗인 몸을 푸른 싹으로 바꾼 것도 저들이고
가장 바깥에 서서 흙먼지 폭우를 견디며
몸을 열 배 스무 배로 키운 것도 저들이다
더 깨끗하고 고운 잎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가장 오래 세찬 바람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
저들이고 마침내 사람들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
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
그나마 오래오래 푸르른 날들을 지켜온 저들을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
사람들의 입맛도 바닥나고 취향도 곤궁해졌을 때
잠시 옛날을 기억하게 할 짧은 허기를 메꾸기 위해
서리에 맞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
우리 주위에 시래기가 되어
생의 겨울을 나고 있는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도종환 시인의 시래기 전문)
얼마 전 지인과 이야기를 하다가 시래기국밥 이야기가 나왔다. 그 지인이 몇 년 전 우즈베기스탄 고려인 마을에 갔을 때 고려인들이 시래기국밥을 먹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우즈베기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의 고려인은 1930년대 스탈린의 잔혹한 소수민족 분산정책에 강제로 이주를 당한 가슴 아픈 역사가 있다. 애초 생존 길을 찾아 한반도에서 연해주로 이주한 고려인들은 화물열차에 실려서 중앙아시아 허허벌판에 버려졌다. 1만명 이상이 이주 중에 사망했다. 독재자 스탈린은 소수민족에게도 가혹했다.
그러나 고려인(카레예츠)은 강인한 생존력으로 황무지를 개척하고 농장을 일구었다. 고려인들에게는 추운 겨울철을 버티게 하는 시래기 같은 질긴 생명력이 있었다. 고향에서 머나먼 곳에 삶의 터전을 잡아 주거환경이 모두 바뀌었지만 식생활 문화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시락장물’이라 칭하는 시래기국밥은 고려인들이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 중 하나라고 한다.
시래기는 우리 한국인의 정서를 그대로 담은 식재료다. 구한말 일본은 밀정을 보내 조선을 염탐했다. 일본 밀정이 조선 각지 주막의 시래기국밥에 질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거의 대부분의 조선 주막에서 시래기국밥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시래기는 너무나 흔한 먹을거리였다. 필자가 판단하건데 시래기국밥은 한국의 음식 중 가장 상징성 있는 소울 푸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몇 달 전 필자는 설렁탕 관련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설렁탕 역시 마찬가지로 한국의 탕반 중 상징성 있는 먹을 거리였는데 요즘 소비자들은 설렁탕을 거의 안 먹는다. 1960~70년대에 설렁탕은 짜장면과 더불어 서민물가를 재는 지수 품목이기도 했다. 그런 설렁탕이 소비자의 인식 속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전통탕반인 설렁탕이나 시래기국밥 모두 점점 쇠락하고 있다.
한국인을 닮은 먹을거리 시래기국밥
어렸을 때 시래기국이 식탁에 자주 올라왔다. 식감이 부드럽지 못한 시래기국은 다소 기피음식이었다. 먹기는 먹어도 즐겨 먹지 않았다. 맑은 육수의 무국이나 콩나물국 혹은 사골국 등이 더 맛났다. 같은 된장이라도 시금치나 배추를 넣고 끓인 토장국이 더 입에 맞았다. 시래기 특유의 식감이 좀 억세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그 시래기국을 본능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아마도 한국인의 타고난 유전자적 기질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철이 들면서 시래기국을 찾았지만 어느 덧 우리 주변에서 먹기가 힘들어졌다.
원래 대부분 시래기국밥은 멸치가 기본 베이스다. 그리고 가격도 헐하다. 그러나 이 집 시래기국밥은 한우를 사용해 조리했다. 주인장 왈, 홍성 사람들은 멸치 국물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한우사골로 끓이고 한우사태를 듬뿍 넣은 한우시래기국밥이 나왔다. 시골 된장의 구수한 맛이 코를 찌른다. 한 숟가락 들어보았다. 맛있다. 30년 조리 경력은 분명 내공이 있었다. 사실 두 시간 전 다른 곳에서 식사를 해서 국물만 살짝 맛보려고 했지만 구수하고 진한 국물 맛이 필자의 폐부를 파고 들어온다. 배가 불러도 계속 먹게 된다. 필자가 동경하던 그 시래기국이다.
시래기는 무엇보다 된장과 잘 어울리는 식재료다. 어느 덧 훌훌 먹다가 보니 한 그릇을 싹 비웠다. 동행한 입맛 까다로운 일행도 이 시래기국밥을 아주 좋아한다. 더도 말고 이 국밥 맛만 유지해도 우리 같은 중년층에게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막걸리 한 사발이 생각났지만 장거리 주행 관계로 꾹 참았다. 이런 국밥에는 탁주가 제격이다. 필자의 의견으로 도입한 시래기국밥이지만 시래기국밥이 많이 팔려 전국 도처에서 먹었으면 좋겠다. 이상하게 나이가 들수록 된장찌개, 비지찌개, 시래기국밥 등이 당긴다. 필자의 주관적 견해지만 시래기국밥은 분명 한국인의 영혼이 담긴 먹을거리다.
<일미옥불고기> 충남 홍성군 홍성읍 남장리 114-6 (041)632-3319
글·사진 김현수 외식콘셉트 기획자(blog.naver.com/tabula9548)
외식 관련 문화 사업과 외식업 컨설팅에 다년간 몸담고 있는 외식콘셉트 기획자다. ‘스토리텔링이 있는 맛집’은 대부분 사전 취재 없이 일상적인 형식으로 콘텐츠를 작성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