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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구려 궁중비사 (13) - 長髮의 佳人

호젓한오솔길 2007. 12. 22. 20:53
고구려 궁중비사 (13) - 長髮의 佳人 우리나라 궁중비사

 

 
  동천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은 제 12대 중천왕(中川王)이다.
 
  왕은 이름을 연불(然弗)이라 했는데 동천왕의 아들이며 일찍이 동천왕 17년에 태자가 되었다. 준수한 외모와 탁월한 지력으로 새 임금의 자격이 충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정권의 계승에 따르는 분쟁을 모면할 수 없었다.
 
  왕이 즉위한 해 11월 그의 아우 예물(豫物)과 사구(奢句) 등이 불평을 품고 모반했다. 왕은 원래 과단성 있는 임금이었다. 즉시 두 아우를 잡아 죽여 버리고 새 정권을 공고히 했다. 왕의 이와 같은 과단성은 다른 면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유명한 관나부인(貫那夫人)의 이야기가 가장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관나는 얼굴이 아름답고 특히 머리채가 九척이나 되는 장발의 미녀였다. 왕은 그 용모를 사랑하고 장차 소후로 삼으려 했다.
 
  왕의 마음이 관나에게로 기울게 되자 누구보다도 투기의 불길을 태운 것은 왕후 연씨(椽氏)였다. 연씨는 일찍이 중천왕이 즉위하던 해 10월에 왕후가 된 몸이었다. 연씨는 여러 가지로 궁리 하던 끝에 왕과 관나를 갈라놓을 한 가지 계책을 세웠다.
 
  “지난날 선왕께서는 중국을 잘 섬기지 않았으므로 병화(兵火)를 입고 거의 나라를 잃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지금 대왕께서 그들의 뜻을 맞추신다면 그들은 기뻐하고 다시는 침범하는 일은 없을 줄로 아옵니다.”
 
  조용한 틈을 타서 연씨는 이렇게 진언했다. 그 말만 듣는다면 여성답지 않은 정치적인 진언이었다.  왕은 그 진의를 알 수 없어 물어보았다.
 
  “중국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자면 어떠한 방도가 있겠소?”
 
  그러니까 연씨는 무슨 대단한 계책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싹 다가앉아 은근히 말했다.
 
  “제가 듣기에 지금 위나라에서 긴 머리카락이라면 천금을 아끼지 않고 사들이는 풍습이 한창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나라 안 여인들의 머리채를 모조리 베어서 위나라에 바치자는 거요?”
 
  왕은 약간 비꼬는 투로 되물었다. 그러나 연씨는 절레절레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대왕 그게 어찌 될 일이옵니까? 만일 그런 일을 단행한다면 온 나라가 당장 어지러워질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어려운 방도가 아니라 아주 손쉬운 방법이 있사와요.”
 
“그건 또 어떠한 방법이오?”
 
“관나부인 말씀이에요.”
 
“관나부인?”
 
“관나부인의 머리채는 아홉 자(尺)나 되니 중국에서도 아마 보기 드문 장발미인일 것이요. 죽은 머리만도 천금으로 사는 그 나라의 풍속이온데 장발미인을 산채로 보낸다면 그 나라 임금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이제 연씨의 의도는 완연히 드러난 셈이었다. 왕은 원래 부왕과 백성들이 위나라의 침공을 받고 심한 곤욕(困辱)을 받은 것을 분하게 생각해 온 터였다. 그러므로 위나라에 기회가 있으면 크게 복수할 생각을 가지고 있던 참인데 그 비위를 맞추느라고 사랑하는 여인까지 보내다니 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왕후의 말은 잘 알겠소. 내가 적절히 처리할 것이니 다시 그런 말, 입 밖에도 내지 마오.”
 
  이렇게 물리쳤다. 왕후 연씨가 관나부인을 멀리하려고 꾀한다는 소문은 관나의 귀에도 들어갔다. 관나는 연씨 못지않게 잔재주를 잘 부리는 여인이었다.
 
“제가 나를 쫓아버리려 한다구? 어림도 없는 수작이지. 그렇다면 내게두 생각이 있단 말이야.”

  관나가 이렇게 벼르고 있는 중에 하루는 왕이 기구(箕丘)로 사냥을 떠나게 되었다. 때는 왔다고 생각한 관나는 거짓 눈물을 흘리며 왕의 소매를 잡았다.
 
“대왕, 대왕께서 멀리 떠나신다면 저는 어찌하옵니까?”
 
“어찌하다니? 조용히 내가 돌아올 때만 기다리면 될 것이 아닌고?”
 
왕은 사랑하는 가인이 잠시의 이별이나마 애석히 생각하는 것으로 알고 이렇게 말했다.
 
“대왕, 그것은 모르시는 말씀이에요.”
 
“모르는 말이라니?”
 
“대왕이 잠시라도 궁궐을 비우시면 저의 목숨은 아마 당장 없어질 것이에요.”
 
“목숨이 없어지다니? 누가 그대를 해친단 말인고?”
 
왕이 의아한 눈초리를 보내자 관나는 한층 더 흐느껴 울며 말했다.
 
“대왕, 저는 두렵사와요.”
 
“두렵다니? 글쎄 누가 두렵단 말인가?”
 
“왕후마마가 두렵사와요.”
 
“왕후가?”
 
“왕후마마께선 항상 저를 꾸짖으시며, 시골 계집이 어찌 이곳에 있을 수 있느냐, 돌아가지 않는다면 크게 뉘우치게 될 거라고 하시지 않다면 제 몸이 어떻게 되겠사와요? 왕후마마의 손에 죽고 말 것은 환한 일이 아니에요?”
 
  그 말을 듣자 왕은 관나에게 동정심이 가기보다도 오히려 지겨운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에는 연씨가 관나를 물리치려 하고 이번에는 관나가 연씨를 참소하는 모양이다.
 
‘여자들이란 모두 이런 것일까?’
 
왕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사냥길을 떠났다.
 
며칠 후 왕이 사냥터에서 돌아오자 관나부인은 궁궐문까지 달려 나오며 통곡을 한다.
 
“왜 이리 상스럽지 못하게 울기부터 하는고? 먼 길에서 돌아오는 사람을 반길 줄도 모르는고?”

왕이 꾸짖으니까 관나는 더욱 울음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대왕, 이런 일을 당하고 어떻게 울지 않겠사와요?”
 
“무슨 일이냐?”
 
“글쎄 왕후마마가 저를 바다에 던지려고 하시는군요. 대왕께서는 저를 아끼시는 뜻에서 저의 집으로 돌려보내 주시어요. 이곳에서 대왕을 모시다간 언제 어떻게 죽을는지 알 수 없는 일이옵니다.”

“아니 왕후가 아무리 그대를 싫어하기로 바다에 던질 만치 잔인하지는 않을 텐데…”
 
“못 믿으시겠으면 이것을 보세요. 이 가죽주머니에 저를 넣어서 바다 속에 던지려고 하셨어요.”

  왕은 아무래도 관나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궁인들을 불러 추궁해 보니 관나의 말은 전혀 거짓말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왕이 자기를 사랑하는 품으로 보아 눈물로써 호소한다면 자기 말에 속아 넘어가서 왕후를 멀리할 것이라는 얕은 생각에서 꾸민 연극이었다.
 
관나의 미모를 극진히 사랑하던 왕이었지만 한 나라의 국모를 참소하고 기강을 어지럽히려고 하는 것을 버려둘 만치 깊이가 없지는 않았다.
 
“이 요사한 계집아!”
 
왕은 무섭게 꾸짖었다.
 
“네가 그렇듯 물고기의 밥이 되고 싶다면 네 소원대로 바다에 처넣어 주마.”
 
그리고는 자기 손으로 만들어 연극을 꾸민 가죽주머니 속에 관나를 처넣고 바다로 던져버리게 했다. 중천왕 4년 초여름의 일이었다.
 
중천왕은 그 후 여색에 현혹됨이 없이 나라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왕후 연씨의 의견을 따라 위나라를 떠받드는 것 같은 허술한 외교정책을 취하지는 않았다.
 
중천왕 20년 위장 위지(魏將尉遲)가 군사를 이끌고 침입하는 일이 일어나자, 왕은 정병 5천을 뽑아 거느리고 양맥곡(梁貊谷)에서 싸워 크게 격파하고 적군 8천여명을 참살했다.
 
  이와 같이 안팎으로 나라 일에 힘을 쓰고 왕은 23년 10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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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궁중비사 (12) - 亂中의 烈士 우리나라 궁중비사

 

 

 

  그 당시 중국 땅에는 위(魏)를 비롯하여 오(吳), 촉(蜀)이 정립(鼎立)되어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바로 소설 <삼국지(三國志)>에 묘사된 그 시대였다.

 
그리고 위는 우리의 강토에 설치된 군현(郡縣)을 지배하고 있던 공손씨(公孫氏)를 멸하고 그 군현을 장악하게 되자 그와 이웃한 고구려 땅을 엿보게 되었다. 그것은 고구려가 동방의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강성하므로 그 힘을 꺾어야만 동방을 지배하기 수월한 때문이기도 했다.
 
한편 고구려 역시 중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요동(遼東), 현도(玄菟), 낙랑(樂浪) 삼국의 존재가 서쪽과 남쪽으로 뻗는 힘을 가로막는 장해물이었다. 이때 압록강 유역에 있는 여(麗),  위(魏) 두 나라의 경계는 압록강 하류의 한 지류(支流)인 안평하(安平河)방면이었는데 고구려로서는 이 경계를 뚫고 나가야 강토의 확장을 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동천왕 16년, 왕은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한 일이 있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동천왕 20년 8월, 위나라에서는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을 시켜 군사 만명으로 현도를 거쳐 고구려를 침공케 했는데 동천왕은 적군의 배가 되는 2만 대군을 거느리고 마주 싸워 비류수(沸流水)에서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적군 3천여명을 몰살시켰다.
 
이런 대승리에 동천왕은 지나친 자신을 가진 모양이었다. 여러 장수를 모아놓고 큰소리를 쳤다.
 
“위의 장졸이 강하다는 말을 들었으나 우리 장졸 앞에는 감히 대적하지를 못하고 적장 관구검은 명장이란 말을 들었지만 그의 목숨이 이제 내 손아귀에 들어 있지 않은가?”
 
그런 다음 철기(鐵騎) 5천기를 거느리고 관구검을 멸하고자 돌진했다. 그러나 관구검은 철통같은 방어진을 펴는 한편 교묘한 전술로 역습을 감행해서 전세는 역전되고 고구려군은 마침내 1만8천명이나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다.
 
동천왕은 하는 수 없이 겨우 1천여기를 거느리고 압록원(鴨綠原)으로 도주했는데 그 해 10월, 관구검은 다시 환도성(丸都城)을 공격해서 함락시키고 장군 왕기를 보내어 동천왕을 추격케 했다,
 
왕은 하는 수 없이 다시 남옥저(南沃沮)를 향해서 도망하다가 죽령(竹嶺)에 이르렀는데 이때 수하 장졸들은 거의 다 흩어지고 곁에는 겨우 동부 사람 밀우(密友)가 따를 뿐이었다.
 
왕의 신변이 심히 위태롭게 되자 밀우는 왕을 향해서 “지금 적병의 추격이 매우 다급해서 이대로는 빠져나갈 것 같지 않습니다. 신이 결사대를 이끌고 잠시 적군을 막고 있겠사오니 그 동안에 대왕께서는 속히 피신하시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이렇게 말한 다음 곧 결사대를 조직하고 적군을 가로막아 분투했다.
 
밀우 등이 분투하는 틈을 타서 왕은 겨우 그 곳을 빠져나가 산골로 피신한 다음 여기저기 흩어진 장졸을 모아 겨우 신변을 호위하게 했다. 그러나 위기를 모면하고 나니 염려되는 것은 밀우의 운명이었다. 왕은 좌우에 모인 장졸들을 향해서 물었다.
 
“그대들 중에 밀우를 구해 오는 사람이 있으면 후한 상을 주겠다. 누구, 나설 용사는 없느냐?”

그랬더니 하부(下部) 사람 유옥구(劉屋句)가 앞으로 나오며 “신이 가겠습니다.”
 
말하고는 즉시 달려가서 분투하다 쓰러진 밀우를 찾아 업고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밀우는 심한 상처와 피로로 말미암아 정신을 잃고 있었다.
 
“나를 위해서 그대가 이 지경이 되었구나.”
 
왕은 밀우의 머리를 친히 자기 무릎에 눕히고 정성껏 간호하니 밀우는 겨우 소생할 수 있었다. 한때 위기를 모면했다고는 하지만 적군의 추격은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왕은 다시 적군의 손아귀를 벗어나기 어려운 곤경에 빠졌다. 그래서 장졸들을 향해 대책을 물으니 동부 사람 유유(紐由)가 한 계책을 진언한다.
 
“신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사옵니다.”
 
“어떤 계책인가?”
 
“신이 음식을 차린 다음 위군 진영을 찾아가서 질탕히 먹이며 기회를 엿보다가 적의 주장(主將)을 찔러 죽이겠사오니 신의 계책이 성공했다는 기별을 받으시거든 대왕께서는 적이 어지러운 틈을 타서 기습하시기 바랍니다.”
 
유유의 계책은 자기 한몸을 던지고 나라를 구하겠다는 결사적인 계책이었다. 왕은 눈물을 흘리며 그 계책을 허락했다.
 
위군 진중을 찾아간 유유는 거짓 항복하며 말했다.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짓고 이렇게 바닷가로 도망해 왔습니다만 이제 힘은 다하고 계책은 궁해서 하는 수 없이 장군께 항복하고자 소신에게 먼저 변변치 못한 물건을 보냈사오니 여러 장졸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십시오.”
 
“그래? 고구려왕이 항복한다면 어찌 더 싸울 필요가 있겠는가?”
 
위장은 크게 기뻐하고 유유가 차려 가지고 온 음식을 여러 장졸에게 나누어 주며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유유는 적장에게 음식을 권하는 척하며 그릇을 받들고 다가가서 갑자기 그 그릇 속에 감추어 두었던 비수를 뽑아 적장의 가슴을 찌르고 자기도 자결해 버렸다.
 
적장이 죽고 나니 유유가 예견했던바와 같이 적군은 크게 어지러워졌다. 우왕좌왕 소란을 피우는 틈을 타서 동천왕은 휘하 장졸을 세 길로 나누어 급히 공격했다. 그런즉 위군은 미처 진영을 갖추지 못하고 낙랑 땅을 거쳐 도망해 버렸다.
 
이 난을 겪고 나서 국권을 회복하자 왕은 밀우와 유유의 공로를 일등으로 삼았는데 밀우에게는 거곡(巨谷), 청목곡(靑木谷)을 식읍(食邑)으로 주고, 유유를 추종하여 구사자(九使者)란 벼슬을 주었으며 유유의 아들 다우(多優)를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국권을 회복하기는 했으나 환도성은 적군에게 짓밟혀 다시 왕도로 삼을 여지가 없었을 뿐 아니라 백성들도 환도성에 돌아가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 이듬해인 21년 2월,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들과 종묘사직(宗廟社稷)을 그리로 옮겼다.
 
심한 전란으로 말미암아 심신이 소모될 대로 소모되었던지 동천왕은 평양성에 천도한 이듬해인 22년 9월, 세상을 떠났는데 상하가 모두 다 왕의 승하를 슬퍼해 마지않았으며 군신들 중에는 왕의 무덤 앞에서 자살하는 자가 많았다.
 
그래서 나라 사람들은 나무를 베어 그 시체를 덮어 주었는데 그 때문에 그 곳 이름을 시원(柴原)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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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궁중비사 (11) - 太后의 最後 우리나라 궁중비사

 

 

 

  주통촌 여인 소후의 몸에서 난 왕자가 태자로 책봉되자 왕후 우씨는 더욱 슬프고 외롭고 분함을 이길 수 없었다.

 
아무리 왕후라는 귀한 자리에 있고 왕의 사랑 역시 아직도 극진하긴 하지만 열매 없는 꽃의 슬픔은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것이었다.
 
우씨는 그런 괴로움을 죄 없는 어린 태자를 들볶는 것으로 풀어보려고 했다. 어린 태자는 당나귀를 타는 것을 즐겨했다. 티 없는 웃음을 띠며 당나귀를 모는 것을 보자 여러 궁녀들은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손뼉을 치며 환성을 올리곤 했다.
 
그러나 그런 광경이 열매 없는 꽃에게는 무엇보다도 심한 아픔이었다. 어린 태자가 귀엽게 굴면 굴수록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사랑스럽게 보면 볼수록 질투의 불길은 치열해질 뿐이었다. 태자가 한바탕 당나귀를 몰고 나서 잠깐 쉬고 있을 때, 우씨는 은밀히 사람을 시켜 그 당나귀의 갈기를 잘라 버리도록 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그 이유를 태자의 마음을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그 보다도 너무나 행복해 보이는 태자의 놀이를 방해하려는 충동에서 취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태자는 다시 나귀를 타려고 가까이 갔다. 그리고는 갈기가 없어진 것을 보자 이내 울상이 되었다.
 
“어유, 불쌍해.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하며 나귀의 목덜미를 어루만져 주었다. 이 광경을 보자 구경하던 사람들은 태자의 고운 마음씨에 새삼 감탄했다. 말하자면 우씨의 심술은 태자의 주가(株價)를 올리는 결과만 초래하고 만 것이다.
 
또 이런 일이 있었다. 태자를 모시는 궁녀가 태자에게 식사를 바칠 때 우씨는 일부러 국물을 태자의 옷에 엎지르도록 시켰다. 국물을 옷에 엎지르면 웬만한 사람은 펄펄 뛰며 노할 것이다. 태자도 역시 노한다면 그것을 빙자해서 태자의 옹졸한 성품을 비웃어 주리라, 그런 의도에서 시킨 일이었다. 그러나 태자의 태도는 예상밖이었다.
 
“어머! 이 일을 어쩌나?”
 
국물을 엎지른 궁녀가 일부러 쩔쩔매는 척하면서 수선을 떠니까 어린 태자는 급히 자기 손으로 국물을 닦고 “괜찮아. 사람이란 누구나 다 실수를 할 수 있는데 너무 걱정하지 말어.”하며 달래는 형편이었다.
 
산상왕(山上王) 31년 5월, 왕이 세상을 떠나자 태자가 그 뒤를 이었으니 바로 제11대 동천왕(東川王)이다.
 
왕은 일찍이 출생할 때부터 성장하기에 이르기까지 왕후 우씨의 학대를 심하게 받아 왔지만 조금도 우씨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위에 오르자 우씨를 높이어 태후(太后)로 삼고 극진히 받들었다. 그러니 우씨로서는 스스로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동천왕 8년 9월, 태후 우씨는 마침내 복잡한 생애를 마쳤다. 그러나 임종할 때엔 그렇듯 투기와 집념의 화신 같던 우씨의 마음도 딴 사람처럼 누구려져 있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좋은 행실을 못했으니 장차 무슨 낯으로 지하에서 국양(國讓=故國川王)을 뵙겠는가? 내 죄를 생각하면 길거리나 개울 속에 던져 버려도 마땅하겠지만 대왕께서나 여러 신하들께서 그래도 나를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산상왕릉 곁에 묻어 주기 바라오.”

이렇게 유언했다. 많이 누구러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사랑하던 산상왕에 대한 집념만은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디까지나 마음이 어진 동천왕이었다. 그 유언을 따라 우씨의 유해를 산상왕릉 곁에 장사 지냈다. 그러나 산상왕의 마음은 우씨와 같지 않았던지 한 무당이 왕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선왕께서 저에게 강림하시어 ‘우씨가 내 곁으로 온 것을 보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그와 더불어 싸웠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부끄럽기도 하고 지겹기도 한 일이다. 너는 이 일을 조정에 알려서 나와 우씨 사이를 가로막아 주도록 해라’ 이렇게 분부하셨사옵니다.”
 
이에 소나무 일곱겹을 심어 막았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생전이나 사후나 남이 보는 바와는 딴판으로 우씨는 외로운 여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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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궁중비사 (10) - 妖花 于太后 우리나라 궁중비사

 

 

 

  신대왕에게는 발기(拔奇), 남무(男武), 연우(延優)등 세 아들이 있었는데 왕은 생전부터 장자 발기보다도 그의 아우 남무를 더 사랑했다.

 
그러므로 신대왕 12년 3월에는 형을 제쳐두고 남무로서 태자를 삼았던 것이다.
 
선왕의 뜻이 이러했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이 보기에도 왕위 계승자로서 어느 모로 보나 남무가 훨씬 뛰어났다. 웅위한 자표(姿表), 큰 가마솥을 혼자 들을 만치 강한 완력, 어진 사람의 말은 잘 듣고 옳고 그름을 똑바로 판단하며 과감히 싸울 줄 아는 용맹, 남무는 왕으로서 더 바랄 수 없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즉위한 남무가 바로 제9대 고국천왕(故國川王)이다. 왕은 즉위한 이듬해 2월 우씨(于氏)를 세워 왕후를 삼았는데 우씨는 제나부 우소(提那部 于素)의 딸이다.
 
왕은 왕후 우씨를 극진히 사랑했다. 그러므로 우씨의 연척들은 그것을 믿고 세도를 잡아 나라 일을 심히 어지럽혔다. 특히 좌가려(左可廬) 등 몇몇 친척은 왕후의 권세를 믿고 사치한 생활을 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자녀를 약탈하고 토지와 집을 빼앗으므로 백성들은 격분한 나머지 왕에게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아무리 우씨를 사랑한다지만 그 친척들의 횡포를 그대로 버려둘 왕은 아니었다. 크게 노한 왕은 즉시 좌가려 등을 잡아 처단하려 했다. 이 눈치를 알아 챈 좌가려 등은 이왕 죽을 바에야 한 번 싸워보고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13년 4월 무리를 모아가지고 왕성을 침범했다.
 
이에 왕은 노하여 기내(畿內)의 병마를 징집해거 좌가려 등을 모조리 토벌해 버렸다. 그리고 그 기회에 왕은 크게 반성을 하게 되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모두 내가 어진 신하를 쓰지 않고 인재에 적합한 관직을 주지 않은 때문이다. 그러므로 널리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등용하겠으니 사부(四部)에서는 마땅한 인물을 천거하도록 하라.”
 
이렇게 영을 내렸다. 그랬더니 사부에서는 다함께 동부(東部)의 안류(晏留)를 천거했다. 그래서 왕은 안류를 불러 국정을 맡기려 했으나 안류는 굳이 사양하며 이렇게 진언한다.
 
“보잘 것 없는 신은 성품이 용렬해서 국정을 맡기엔 너무나 적합지 않습니다. 서쪽 압록곡(鴨綠谷) 좌물촌(左物村)에 을파소(乙巴素)란 사람이 있사옵는데 그 사람이야 말로 이 나라를 바로 잡기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을파소란 어떠한 인물이기에 그렇듯 칭찬하는 거요?”
 
“을파소는 유리왕 때의 대신 을소(乙素)의 후손이온데 성품이 강직하고 지려(智慮)가 심원하건만 세상에서 알아주지 못하고 쓰지 않으므로 시골에 파묻혀 농사에 힘쓰고 있사오니 대왕께서 등용하심이 가한 줄로 압니다.”
 
왕은 곧 사람을 보내어 예를 두텁게 하고 을파소를 궁중으로 맞아들였다. 그리고는 중외대부(中畏大夫)에 우대(于台)를 가작(加爵)하는 극진한 대우를 한 다음 말했다.
 
“내가 외람되어 선업(先業)을 계승해서 왕위에 올랐으나 덕이 박하고 재주가 부족해서 국정을 보살피는데 부족함이 많소. 그러므로 어진 인물을 심히 갈구해 왔는데 공이 이렇듯 기꺼이 와 주니 내 기쁨일 뿐 아니라 나라와 백성들의 복이라고 할 수 있소. 공의 가르침이라면 어떠한 일이든지 기쁘게 받겠으니 정성을 다해 주기 바라오.”
 
왕은 간곡히 부탁했다. 을파소도 이와 같은 왕의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정을 과감히 쇄신하려면 그가 받는 벼슬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솔직히 말할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슬쩍 이런 말로 자기 뜻을 비쳐보았다.
 
“신은 원래 불민하므로 그와 같이 큰일을 감당할 수 없사오니 달리 어진 사람을 뽑아 높은 벼슬을 주고 대업을 이룩하시는 것이 좋을 줄로 압니다.”
 
현명한 왕은 을파소의 뜻을 당장 알아차렸다. 즉시 그에게 최고관직인 국상(國相)을 제수하고 나라 일을 맡아보도록 했다. 이렇게 되니 역대 조신들과 왕족들은 불만이 대단했다. 시골에 파묻혀 있던 촌부가 하루 아침에 자기네들보다 윗자리에 앉게 된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왕에게 참소하여 을파소를 몰아내려고 했지만 왕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구신(舊臣)들에게 강경한 태도로 나왔다.
 
“제 아무리 관직이 높은 자라도 국상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 당자를 즉시 처단 할 뿐 아니라 일가 친척까지 모조리 멸해 버리겠다.”
 
이 말로 미루어 왕이 을파소의 인물을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왕이 이와 같이 강경한 태도를 보인 후부터는 을파소는 자기 능력껏 정치를 할 수 있데 되었다.
 
정교(政敎)를 밝히고 상벌을 삼가고 백성들을 배부르고 편안케 하는 데만 힘을 기울였다. 이렇게 되니 나라 안이 태평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 소문이 외국에까지 퍼지어 그때 마침 전란으로 시달리던 한인(漢人)들까지도 뒤를 이어 피란올 정도였다고 한다.
 
19년 5월, 현신 을파소의 보필을 받아 각 방면으로 치적을 남긴 왕이 뜻밖에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왕이 세상을 떠난 것은 한밤중, 왕후 우씨와 동침하던 중이었다. 그러므로 왕이 죽었다는 사실은 우씨 이외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왕이 죽은 것을 보자 우씨는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급히 단장을 하더니 시체는 그냥 두고 몰래 침전을 빠져 나갔다.
 
우씨가 간 곳은 왕의 형 발기(發岐)의 집이었다. 발기는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밤중에 왕후가 찾아온 것을 보고 그저 놀라며 책망하듯 말했다.
 
“어쩐 일이시오? 이런 이슥한 밤중에 갑자기 찾아 주시니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나요?”
 
왕후는 한참 동안 발기의 얼굴을 건너다보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대왕의 뒤를 이을 사람에 대해서 의논하려 왔소.”
 
“대왕의 뒤를 이을 사람이라니요?”
 
“아시다시피 대왕께서는 후사(後嗣)가 없소. 내 생각으로는 그대가 대왕의 뒤를 잇는 것이 마땅할까 하오.”
 
한밤중에 찾아와서 이런 말을 하니 웬만한 사람이면 왕의 신변에 이변이 생겼음을 짐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듣자 우둔한 발기는 오히려 훈계하듯 말했다.
 
“하늘의 역수(曆數)는 스스로 그 이치를 따라 돌아가는 법이외다. 어찌 가벼이 의논할 일이겠소? 오늘밤 왕후의 처사는 실로 아름답지 못하오. 여인된 몸으로 한밤중에 남자를 찾아다니며, 그런 일을 의논하다니 예의에 어긋나는 일로 아오.”
 
왕후가 임금의 죽음을 숨기고 한밤중에 찾아와서 왕위의 계승을 의논한 것은 새 임금이 될 자에게 그만한 성의를 베풂으로써 서로 정을 두텁게 하고 훗날 이(利)를 보려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니 이렇게 정면으로 따지자면 떳떳한 일이 못되었다. 그런 만큼 발기의 책망을 받자 왕후는 부끄러웠다.
 
왕후는 그길로 발기의 아우 연우(延優)의 집을 찾아갔다. 연우의 성격은 고지식한 발기의 성격과는 딴판이었다. 사람들을 대하는데도 지극히 부드러워 많은 사람이 따랐다. 왕후가 문을 두드리자 그는 급히 의관을 갖추고 문까지 뛰어 나와 맞아 주었다.
 
“귀하신 몸으로 이런 누추한 델 찾아주시니… 자 어서 들어오십시오.”
 
연우는 왕후를 안으로 모셔 들이고, 한밤중인데도 있는 음식을 다 차려내어 후대했다. 발기의 푸대접을 받다가 연우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니 고맙고 흐뭇한 마음에 왕후는 모든 일을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대왕께서 세상을 떠나시다니요?”
 
연우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서 발기 왕제를 찾아가지 않았겠소? 그랬더니 마치 내가 딴 마음이라도 품고 있는 듯이 말하고 그 대하는 폼이 무례하기 짝이 없구료. 그런 옹졸한 사람과 어떻게 왕위 계승의 큰일을 의논하겠소.”
 
“그래서 저를 찾아주신 거군요. 황송합니다.”
 
연우는 기뻤다. 왕후의 말투로 보아 왕위를 자기가 계승할 수 있도록 힘써 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리따운 왕후 우씨와의 거리가 가까워진 게 기뻤다. 나라의 왕후이며 형수인 까닭으로 먼 발치에서 우러러 보기만 하던 꽃송이, 이제 그 꽃송이가 자기 손에 꺾이려 한다.
 
그는 상을 차리는데도 하인을 시키지 않고 손수 차렸는데 고기 한 덩이를 들고 오더니 손수 칼을 들어 저몄다. 서투른 솜씨지만 그 모양을 왕후는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너무 신이 나서 그랬던지 손을 베었다. 연우의 손가락에서는 붉은 피가 번져 나왔다. 왕후는 밥술을 던지고 연우에게로 다가와서 피나는 손가락을 잡았다. 그리고는 자기 옷자락을 찢어 동여매어 주었다.
 
“황송 합니다.”
 
연우가 정중히 사례하는데 첫닭이 울었다. 왕후는 황급히 일어서며 말했다.
 
“궁으로 돌아가야겠는데, 도중에 무슨 일이 생길는지 알 수 없으니 바래다주오.”
 
“그저 분부를 따를 뿐입니다.”
 
연우는 기꺼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두 사람은 손을 마주잡은 채 궁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왕후는 임금의 죽음을 밝혔다. 그리고 선왕의 유언이니 연우에게 왕위를 계승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왕의 유언이라고 하니 반대할 자가 있을 수 없다. 마침내 연우는 그 자리에서 왕위에 오르니 이가 10대 산상왕(山上王)이다.
 
연우가 왕위를 계승했다는 말을 듣자 발기는 노발대발했다. 곧 군사를 모앙 궁성을 포위했다. 그리고는 성 안을 향해 소리 소리 질렀다.
 
“연우놈아. 듣거라. 세상을 떠난 왕에게 아들이 없으면 다음 아우나 형이 마땅히 왕위를 계승해야 할 것인데 네놈은 무례하게 차례를 건너 왕위를 빼앗으니 그 죄가 이루 비길 데 없이 크다. 당장 왕위를 내놓고 나오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네 목숨은 없을 줄로 알아라.”
 
그러나 연우는 성문을 굳게 닫고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발기의 발악은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다.
 
신하들과 백성들은 모두 연우를 지지하고 수하 장졸들도 하나, 둘 도망쳐 새 임금에게 투항했다. 발기는 하는 수 없이 처자를 거느리고 요동(遼東)으로 도망가 태수 공손탁(公孫度)을 만나 애걸했다.
 
“고구려왕 남무(男武)가 세상을 떠났소만 뒤를 이을 아들이 없음을 기화로 아우 연우가 형수 우씨와 더불어 모반하여 나를 제쳐놓고 왕위를 빼앗았소. 이는 곧 천륜에 어긋나는 짓으로서 나는 그에 분격하여 상국(上國)에 달려온 것이외다. 태수께서 군사 3만만 빌려주시면 그 자를 쳐서 평정할까 하오.”
 
공손탁은 그전부터 고구려를 칠 야망이 있었다. 그래서 발기의 청을 들어 주는 체하고 군사를 냈다. 발기가 요동태수와 합세해서 쳐들어온다는 보고를 받자 연우는 곧 아우 계수( 須)에게 군사를 주어 맞아 싸우도록 했다.
 
계수는 날래고 슬기로운 장수였다. 몸소 선봉이 되어 한병(漢兵)을 공격하니 적의 3만 대군은 여지없이 대패했다. 이때 한병과 함께 도망치던 발기는 그만 고구려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아우 계수 앞에 끌려오자 발기는 애걸복걸했다.
 
“이제 늙은 형이 싸우다 이롭지 못해 이렇게 사로잡혔지만 우리는 같은 핏줄을 타고난 동기가 아니냐. 그래도 너는 감히 나를 죽이려 드느냐?”
 
그 말을 듣자 계수는 가슴이 메어지는 듯 아팠다. 군률로서는 마땅히 죽여야 하겠지만 형제의 의리로서는 차마 해칠 수가 없었다.
 
“작은 형님이 차례를 어기고 즉위한 것은 비록 의리가 아니라 하더라도 큰 형님은 한때의 분을 못참고 외세(外勢)를 빌어 고국을 멸망시키려 하셨으니 이 무슨 처사시오? 이토록 나라를 배반하는 처사를 하였으니 죽은 후에 무슨 면목으로 선인(先人)을 뵙겠소?”
 
이렇게 책망하니 발기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군률로서는 엄히 다스려야 하겠소만 동기의 정으로 차마 해칠 수는 없소. 형님 좋을 대로 아무데나 가시오.”
 
계수가 말 한 필을 내어 주니 발기는 말에 올라 정신 없이 달렸다. 어느덧 배천(裵川)에 당도했다. 말도 지치고 임자도 지쳤다. 발기는 떨어지듯 말에서 내려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한 때 아우에게 포로가 되었을 때에는 구차한 목숨이라도 살아보려고 애걸도 했지만 막상 이렇게 몸둘 곳도 없이 되고 보니 생에 대한 애착도 남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스스로 칼을 뽑아 목을 찌르고 자결하였다. 발기가 자결했다는 기별을 받자 계수는 그리고 급히 달려갔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형을 보자 한참 통곡을 한 다음 시체를 거두어 묻고 왕성(王城)으로 돌아갔다.
 
계수의 개선(凱旋)을 맞아들인 연우는 처음에는 크게 잔치도 베풀고 후대했지만 그 심중은 결코 편치 않았다.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자 연우는 책망하는 듯한 말을 꺼냈다.
 
“나라를 배반하고 다른 나라에 군사를 청한 발기의 죄는 지극히 크다. 그대는 비록 그를 쳐서 이겼지만 죽이지 않고 목숨을 살려 준 것만도 과한데 그가 자살한 것을 슬퍼하고 그 시체를 묻어 주기까지 했으니 그 말을 들은 백성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골육지정(骨肉之情)도 모르는 잔인한 인간으로 알 것이 아니냐?”
 
그러자 계수는 그 자리에 꿇어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신은 이제 한마디만 아뢰고 죽기를 바랍니다.”
 
“무슨 말이냐?”
 
왕은 물었다.
 
“왕후께서 비록 선왕의 유명(遺命)으로 대왕을 세웠다고는 합니다만 그 때 대왕께서 마땅히 예로써 사양하시었어야 옳은 줄로 압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곧 형제 간에 우애가 없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겝니다. 신이 시체를 거둔 것은 오직 대왕을 위하는 뜻에서였는데 이렇게 노여움을 살줄이야 미처 몰랐습니다.”
 
“나를 위해서 그런 처사를 했다구?”
 
“그렇습니다. 신은 대왕의 아우이며 신은 분부를 받들어 발기를 치러 간 장수입니다. 신이 형의 시체를 거두고 묻어 주는 것을 볼 때 그 누가 계수 한 사람의 소행으로 보겠습니까? 곧 대왕의 분부로 알 것이니 신의 소행에서 우애를 느낀다면 대왕에게도 우애를 느낄 게 아닙니까?”

말을 마치자 계수는 다시 엎드려 절한다.
 
“이제 아뢰고 싶은 말 다 아뢰었습니다. 비록 죽더라도 속이 후련합니다.”
 
그제야 왕의 노기는 가시었다. 왕은 다가 앉이 아우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내 어리석어 공연히 너를 의심했구나. 지금 네 말을 들으니 진실로 내 허물을 알겠다.”
 
그리고는 왕과 신하로서가 아니라 다정한 형제로서의 하루를 지냈다. 자기 허물을 뉘우친 왕은 그해 9월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발기의 영구를 영봉하고 왕례(王禮)로써 배령(裵嶺)에 장사지냈다.
 
연우에게는 원래 처자가 있었지만 발기가 반군을 일으켰을 때 희생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마땅히 새로 왕후를 세워야 했다. 왕족과 중신들은 많은 여인을 후보자로 천거했다.
 
그러나 왕은 어느 여인에게도 마음이 가지 않았다. 오직 마음이 기우는 것은 우씨뿐이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사모해 온 여인이었다. 오늘의 영광 된 자리를 마련해 준 여인이기도 하다. 그는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우씨를 왕후로 삼았다.
 
왕이 즉위하고 우씨를 비로 맞은 지도 7년이나 지났다. 그러나 우씨에게는 소생이 없었다. 그래서 그 해 3월, 왕은 참다못해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산천(山川)에 기도했다. 그랬더니 이달 보름날 왕은 한 꿈을 꾸었다.
 
문득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말하기를 “내 너의 소후(小后)로 하여금 생남(生男)하게 할 것이니 과히 염려하지 말아라.”하는 것이었다. 꿈에서 들은 하늘의 말을 왕은 혼자 새기기 어려워 국상 을파소(乙巴素)에게  의논해 보았다.
 
“소후로 하여금 생남토록 한다고 하지만 내게는 소후가 없으니 어찌 그것을 바라겠소…”
 
“하늘의 뜻은 인간으로서 헤아릴 수 없사오니 그저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기다려 보십시요.”

이렇게 말했다. 그 해 8월, 국상 을파소는 병을 얻어 상하가 슬퍼하는 속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후 그의 예견은 적중되었다.
 
산상왕 12년 11월, 들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려고 묶어 놓았던 멧돼지 한 마리가 줄을 끊고 도망쳤다. 그 일을 맡아보던 사람은 대단히 당황해서 그 뒤를 쫓아갔더니 멧돼지는 주통촌(酒桶村)이라는 마을로 도망쳐 들어갔으나 이리저리 피하며 도저히 잡히지 않았다.
 
이 때 마침 20세 가량 되는 한 처녀가 지나가다가 방긋이 웃으며 손을 들어 막았다. 그랬더니 그때까지 그렇게 도망치던 멧돼지가 어쩐 까닭인지 잘 길이 든 개처럼 처녀의 발 아래 넙죽이 엎드려 버렸다. 그래서 그 멧돼지를 쫓던 사람은 다시 그것을 묶고 돌아가서 이 일을 왕에게 보고했다.
 
“네가 잡지 못하던 멧돼지를 그 처녀가 잡았다?”
 
왕은 그 처녀가 보통처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야릇한 호기심을 느끼고 어느날 기회를 보아 그 처녀의 집을 찾아갔다. 처녀와 가족들은 뜻하지 않게 찾아온 왕을 맞이하자 크게 놀랐다. 그러나 그 사람들보다 더 놀란 것은 왕이었다.
 
그저 신기한 처녀거니 생각하고 찾아갔는데 그 처녀의 용모가 너무나 아름답고 그 언동이 너무나 매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왕후 우씨 이외의 다른 여자는 거의 모르던 왕도 그 처녀를 보자 몹시 마음이 동했다.
 
‘저런 처녀에게서 아기를 낳는다면 얼마나 영특한 왕자가 될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왕은 시신을 시켜 그 처녀를 가까이 하겠다는 뜻을 그 부모에게 넌지시 전했다. 처녀의 부모들은 대단히 기뻐했다. 일찍이 처녀의 모친이 처녀를 낳았을 때 한 무당이 “얘는 반드시 왕후가 될 거요.”라고 말하므로 이름을 후녀(后女)라 지었는데 그 예언이 이제 들어맞은 셈이었다.
 
부모들은 즉시 왕과 처녀가 동침할 자리를 베풀었다. 그러나 후녀는 부모들처럼 덮어놓고 왕의 명을 따르지는 않았다.
 
“이 나라 누구를 가릴 것 없이 죽이고자 하시면 죽일 수 있고 살리고자 하시면 살릴 수 있으신 대왕의 분부이니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마는 한 가지 간청할 말씀이 있습니다.”
 
“어떠한 청이냐? 네 청이라면 못들어 줄 것이 어디 있겠느냐?”
 
이미 후녀에게 마음을 다 빼앗긴 왕이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이렇게 말하자 후녀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만약 아기가 생기는 날에는 저를 버리지 말아 주십사 하는 것이 단 한 가지 청이옵니다.”

“아기가 생기면 버리지 말라? 아기는 바로 내가 무엇보다도 바라는 바인데 어찌 아기의 어미를 버리겠느냐?”
 
왕이 단단히 약속하자 후녀는 비로소 몸을 허락했다. 그러나 왕은 그 집에서 밤을 새우지는 못했다. 우씨가 두려웠던 것이다.
 
왕은 날이 밝기도 기다리지 않고 밤중에 그 집을 떠나 왕궁으로 돌아갔다. 총총히 돌아가는 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후녀는 어쩐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저렇듯 왕후의 눈초리를 살피는 왕의 사랑을 받는다고 과연 자기의 앞날이 평탄할까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후녀의 예감은 들어맞았다. 그 이듬해 3월 왕후 우씨는 왕이 주통촌 후녀와 관계한 것을 알게 되었다. 남달리 성격이 강한 우씨가 그냥 있을 리 없었다. 질투에 불탄 나머지 몰래 군사를 내어 후녀를 죽이려 했다. 이 소식이 후녀의 귀에 들어갔다. 후녀는 급히 남장(男裝)을 하고 자기 집에서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군사들의 추격을 받아 잡히고 말았다.
 
“그년을 잡거든 불문곡직하고 죽여 버려라.”
 
군사들은 왕후로부터 이런 명령을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후녀를 잡자 당장 칼을 뽑아 목을 치려했다. 그러나 영리한 후녀는 호락호락하게 그 칼을 받지는 않았다.
 
“너희들이 누구의 명령으로 나를 죽이려 하느냐?”
 
후녀는 매서운 눈초리로 군사들을 쏘아보며 소리쳤다.
 
“대왕의 명령이냐? 왕후의 명령이냐?”
 
군사들은 잠깐 그 기세에 눌렸으나 왕후가 골라 보낸 심복들이었다. 언제까지나 망설이고만 있지는 않았다.
 
“누구의 명령이면 어떠냐? 우리는 웃어른의 명령을 받고 너를 죽이러 온 것이니 아무소리 말고 이 칼을 받아라.”
 
“그럴 수는 없다. 나는 죽어도 좋지만 내 뱃속에 들은 아이까지 죽일 수는 없다. 이 아기는 바로 대왕의 아기다. 장차 왕위를 계승할 왕자마저 너희들은 죽이겠단 말이냐?”
 
이 말을 듣자 군사들은 그 이상 더 칼질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되돌아가 왕후에게 그대로 보고했더니 왕후는 더욱 노하며 후녀를 죽이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주통촌 후녀가 아기를 잉태했다는 말을 듣고 왕이 급히 손을 쓴 것이다. 왕은 사람을 보내 후녀의 신변을 보호하는 한편 기회를 타서 친히 그 집을 찾아갔다.
 
“네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하는데 그것은 누구의 아이냐?”
 
왕은 물었다.
 
“대왕, 어쩌면 그런 것을 다 물으시오.”
 
후녀는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왕을 쏘아 보았다.
 
“저는 평소엔 남자 형제와도 한 자리에 않고 몸을 지켜왔어요. 그런데 어찌 다른 남자와 가까이 하겠어요. 하늘에 맹서하겠습니다만 지금 밴 아이는 바로 대왕의 아기입니다.”
 
후녀의 말을 듣자 왕은 대단히 기뻐했다. 좋은 말로 위로한 다음 후한 선물을 주고 왕궁으로 돌아갔다. 아무리 우왕후를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왕이었지만 10여년 동안이나 기다리던 아기를 낳게 된 이상 그 아기만은 고이 낳아 키워야 했다. 왕은 왕후에게 그 사실을 솔직히 말한 이렇게 못을 박았다.
 
“만일 생남하면 내 뒤를 이을 왕자이니 왕후도 특히 애호하도록 하오.”
 
그러니 아무리 사나운 우씨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해 9월, 후녀는 마침내 옥동자를 낳았다. 바라고 바라던 후사를 얻은 왕의 기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늘이 무심치 않아 나에게 후사를 베풀어 주셨으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느냐?”

그리고는 곧 왕자의 생모 후녀를 소후(小后)로 삼았고, 그 후 왕자가 나이 다섯 살이 되자 즉시 왕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그 경사를 계기로 민심을 일신하는 뜻에서 왕도(王都)를 환도(丸都)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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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구중비사 (9) - 산중에 숨은 왕자 우리나라 궁중비사

 

 

 

   차대왕에게는 추안(鄒安)이란 태자가 있었다.

 
차대왕이 죽었으니 왕위를 계승할 자는 바로 태자 추안이었지만 그는 부왕이 죽은 이상 자기의 신변이 안전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깊이 산중으로 도망해 버렸다. 그리고 태조왕과 차대왕의 아우 백고(百固)도 일찍이 차대왕의 절제 없는 생활을 충고 했다가 오히려 미움을 사게 되었으므로 산중에 숨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차대왕이 피살되자 백고의 거처만은 자연히 여러 사람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혁명의 주동이 된 명림답부는 좌보 어지류를 비롯한 여러 대신들과 의논한 끝에 백고를 새임금으로 삼을 것을 결정하고 사람을 보내어 그를 궁중으로 맞아들였다. 백고가 궁중에 돌아오자 어지류는 여러 대신을 대표해서 국새를 바치며 간곡히 말했다.
 
“선군께서 나라를 버리고 또 비록 왕자가 있으나 종적을 감추어 나라 일을 맡아볼 수 없게 됐습니다. 무릇 인심은 어진 분에게 돌아가는 것이므로 삼가 절하며 청하는 것이오니 대위를 계승하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백고는 엎드려 세 번 사양한 다음 대답했다.
 
“내 왕족으로 태어났으나 아우로서 원래 덕이 없고 형이 두 분이나 왕위에 있었으나 아우로서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일신의 화를 두려워하고 멀리 숨어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대위를 계승하기에는 부족한 자이외다. 그러나 백성들이 나를 추대하고 공들이 굳이 권하니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 스스로 마음을 고치고 힘을 다하도록 하겠소.”
 
이렇게 말한 다음 마침내 즉위하였으니 그가 바로 제8대 신대왕(新大王)이며 그때 그의 나이가 77세였다. 역시 연로한 임금이었다.
 
신대왕은 즉위하는 즉시로 국내에 대사령을 내렸다. 그런즉 백성들은 크게 기뻐하며 새임금의 덕을 칭송했을 뿐만 아니라 산중으로 도망했던 차대왕의 태자 추안까지도 스스로 궁중에 나타났다.
 
“전에 나라에 재화가 있었을 때(차대왕이 피살되었을 때) 두려운 나머지 산속 깊이 숨어있었습니다만 대왕께서 어진 정사를 베푸신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대왕께서 인자하신 덕으로 목숨만 살려 주시고 멀리 놓아 주신다면 더 바랄 나위 없이 고마운 일이겠습니다만 어찌 감히 그것을 바라겠습니까?”
 
말하자면 대사령을 듣고 자수했으니 목숨만은 살려 달라는 것이었다. 신대왕은 곧 그를 양국군(讓國君)으로 봉하여 여생을 편안하게 했다.
 
왕은 누구보다도 명림답부에게 크게 보답했다. 즉 그를 국상(國相)으로 삼았으니 좌우보(左右輔)를 고쳐 국상으로 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다시 가작(加爵)하여 패자(沛者)로 삼고 내외병마(內外兵馬)를 맡아보게 하는 한편 양맥부락(梁貊部落)을 겸영(兼領)하게 했다. 명림답부는 혁명의 공신일 뿐 아니라 능력 있는 현신이기도 했다.
 
신대왕 8년(西紀 172년) 11월, 한(漢)의 현도군 태수(玄 君太守) 경림(耿臨)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침공하리라는 정보가 들어 왔다. 그래서 왕은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국경으로 마주 나가서 싸울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농성을 하고 수비할 것이냐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다른 신하들의 의견은 공격쪽이었다.
 
“한나라의 군사는 그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거볍게 여기고 있습니다. 만약 나가서 마주 싸우지 않는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용기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자주 쳐들어와 시끄럽게 굴 것입니다. 비록 나가서 싸운다 하더라도 우리의 지세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으므로 적은 군사로 대군을 맞아 싸우기에 적합하다니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명림답부만은 홀로 수 비(守備)를 주장했다.
 
“적군은 그 수가 많은 데다 지금 사기충천한 기세이므로 마주 싸운다면 그 예봉을 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자기편이 우세하면 나아가 싸우고 열세하면 물러서서 지키는 것이 병가의 상사입니다.”
 
“그렇지만 농성을 한다고 언제까지나 하겠소? 적군이 끝내 우리를 에워싸고 물러나지 않으면 나중에는 우리가 항복할 수밖에 없지 않소?”
 
한 신하가 이렇게 반문하자 명림답부는 거기에 대한 견해를 거침없이 밝혔다.
 
“그 점도 과히 염려할 것은 없을 줄로 아오. 지금 한병은 천릿길에 군량을 운반해야 되므로 오래도록 버티고 지키기만 하면 마침내 군량이 떨어져서 회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우리가 버틸 수 있는 방책은?”
 
“높은 보루를 쌓고 깊은 구렁을 판 다음 양식과 백성들을 모두 다 보루 속으로 들여 놓는 거요. 그렇게 되면 적군은 곡식 한 알 구할 길 없으니 어떻게 오래 우리를 포위하겠소?”
 
명림답부의 전략은 가장 사리에 맞고 현실적인 것이었다. 왕은 그 전략을 채택하고 농성을 단행했더니 적군은 명림답부가 예언한대로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서 마침내 회군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보자 명림답부는 날쌘 군사 수천을 거느리고 적의 퇴로를 맹렬히 공격하니 적군은 당황실색해 모조리 섬멸되고 필마도 돌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신대왕 50년(西紀 179년) 국상 명림답부가 세상을 떠났다. 왕에게는 오른 팔을 잃은 것이나 다름  없는 슬픔이었다. 왕은 스스로 그 영구를 얼싸안고 통곡했는데 그 슬픔이 원인이 되었던지 90이 넘은 고령 때문이었던지 그 해 겨울 12월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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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궁중비사 (8) - 호랑이와 표범 우리나라 궁중비사

 

 

 

  왕자 호동이 자결하자 대무신왕은 그 다음 달인 12월에 해우를 태자로 삼았다.

 
원비의 강청을 물리치기 어려운 때문이었을 것이다. 해우가 태자가 된지 12년만인 대무신왕 29년에 왕이 승하했다. 그러니 응당 해우태자가 왕위를 계승해야 마땅할 것이지만 대신들은 그를 제쳐놓고 대무신왕의 아우인 해색주(解色朱)를 추대하여 왕위에 올려 앉혔다. 그가 곧 제4대 민중왕(閔中王)이다.
 
해우가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데 대해서 사기(史記)에는 나이가 어린 때문이라고 되어 있지만 태자가 된 후 12년만이니 적어도 거의 다 성장한 젊은이였을 것이다. 사실은 해우의 사람됨이 사납고 어질지 못한 때문에 그를 멀리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민중왕은 즉위한지 겨우 5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마침내 해우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니(西紀 48년) 제5대 모본왕(慕本王)이다.
 
5년 전에는 왕위 계승에 실패했던 해우가 거기 성공한데에는 여러 가지 기반을 닦아 두기도 했을 것이며 또 왕위 계승의 경쟁자가 별로 없었던 때문이었을는지도 모른다.
 
모본왕은 왕위에 오르자 그 사납고 잔인한 성격을 여실히 드러냈다. 앉을 때는 비록 대신이라도 그 등을 깔고 앉았으며 누울 때는 허리를 베고 누웠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아래 깔린 사람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용서 없이 목을 베어 죽였고 신하들 중에 그 포악한 행동을 간하는 자가 있으면 당장에 활을 당겨 쏘아 죽였다고 한다.
 
이렇게 되니 백성들은 모두 왕을 원망하고 군신들은 언제 왕의 손에 죽을는지 알 수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두로(杜魯)라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겁을 먹고 있었다. 두로는 항상 왕의 걸상 노릇을 하는 처지이므로 언제 몸을 움직였다가 화를 당할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두로가 두려워하는 것을 보자 그의 친구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그래도 자네는 사내대장부라고 자처하나?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를 사랑하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라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지금 왕은 함부로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니 곧 백성의 원수라. 자네가 아무래도 죽을 몸이라면 백성을 위해서 옳은 일을 하고 죽는 것이 좋지 않은가?”
 
그 말을 듣고 두로는 분연히 결심했다. 그 이튿날, 두로는 품에 칼을 품고 입궐했다. 그러나 왕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소리쳤다.
 
“이놈아! 어서 거기 엎드려.”
 
두로는 왕의 앞에 엎드렸다. 임금은 그의 등에 걸터앉았다. 그 순간 두로는 칼을 뽑아 밑으로부터 왕을 찔러 죽였다. 모본왕이 즉위한지 6년째 되던 해 11월이었다.
 
모본왕에게는 익(翊)이라는 왕자가 있었으며 즉위하던 해 10월에 태자를 삼았다. 그러므로 모본왕이 세상을 떠나자 응당 익이 왕위를 계승할 처지였지만 부왕을 닮아서 성품이 용렬하고 사납기만 하므로 대신들은 다른 왕족을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유리왕의 손자 즉 재사(再思)의 아들인 궁(宮)이라는 어린이를 맞아 태조왕(太祖王)을 삼았다. 궁은 아직 나이 7세밖에 안되는 어린아이였지만 세상에 태어나는 즉시 눈을 떠서 만물을 바라보았다고 전해지는 만큼 영리한 아이였으므로 잘 성장하면 누구보다도 훌륭한 왕이 되리라 생각되었던 것이다.
 
왕은 과연 어진 임금이었다. 많은 치적을 남겨 백성들의 칭송을 샀으므로 사상 유래가 드물게 오래도록 왕위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영주(英主)라도 너무 오래 집권하면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왕에게는 수성(遂成)이라는 아우가 있었다. 성품이 용감하고 위엄이 있어서 여러 번 크게 전공을 세웠으며 그를 따르는 심복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심복들은 연로한 왕을 몰아내고 수성을 세울 모의를 하고 있었다. 왕이 즉위한지 80년 되던 해 7월, 수성이 왜산(倭山)에서 사냥을 하고 사람들과 술자리를 벌였을 때 심복 미유(彌儒)가 어지류(於支留), 양신(陽神) 등 왕의 친구들을 보며 이런 말을 꺼냈다.
 
“전에 모본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태자가 불초하므로 여러 대신들이 왕자 재사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재사는 연로한 것을 빙자하고 그 아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지 않았습니까? 이와 같이 부형이 늙으면 자제에게 양위하는 것이 도리인데 지금 왕은 너무 연로했으면서도 양위할 의사가 없으니 왕제께선 마땅히 일을 도모하시는 게 좋을 줄로 아오.”
 
이 말은 수성에겐 무엇보다도 반가운 말이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의 눈치를 살펴보니 몇몇 심복들을 제외하고는 그 말을 옳지 않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말하자면 때가 아직 성숙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능청스러운 수성은 이렇게 말하고 심복들의 입을 막아버렸다.
 
“왕위 계승은 반드시 적자로 하는 것이 천하의 상도요. 지금 왕은 비록 늙었다 하더라도 적자 막근(莫勤)이 있으니 내가 어찌 감히 왕위를 엿보겠소.”
 
그러나 수성의 마음은 초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의 나이 벌써 60이 넘었으니 이러다가는 권력을 잡아보지도 못하고 늙어 죽을 판이다. 그 초조함을 달래기 위해서 수성의 생활은 날로 거칠어져 갔다. 항상 궁궐을 비우고 사냥이나 하러 돌아다녔으며 한 번 사냥을 나가면 닷새고 이레고 돌아오지 않았다. 왕제의 몸으로서는 마땅히 비난을 받아야 할 방종한 생활이었다.
 
수성에게는 백고(伯固)라는 아우가 있었다. 수성과는 딴판으로 총명하고 인자한 인물이었다. 그는 야망을 누를 길 없어 거친 생활을 하는 형 수성이 몹시 민망하게 보였다.
 
“형님, 복과 환난은 따로 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사람이 부르는 것인데 형님은 왕제(王弟)된 몸으로 지위가 백관의 으뜸이니 마땅히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서 마음을 써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지금 형님이 누리시는 부귀가 몸을 떠나지 않을 것이지 한 때 환락에 빠지면 어찌 화를 스스로 부르는 태도라 아니하겠습니까?”
 
그러자 수성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네가 나를 훈계하는 거냐? 그러나 백고야 듣거라. 사람치고 부귀와 환락을 바라지 않는 자가 어디 있겠느냐? 다만 그것을 누릴 복을 타고난 자가 만에 하나도 없을 따름이다. 그러나 나는 다행히도 부귀와 환락을 누릴 처지에 놓여 있으니 그것을 마음대로 누리지 않고 늙어 죽는다면 오히려 억울할 뿐이 아니겠느냐?”
 
두 사람의 인생관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러므로 말이 통할 까닭이 없었다. 그리고 후에 제7대 차대왕(次大王)이 된 수성과 제8대 신대왕(新大王)이 된 백고의 운명도 역시 판이했다.
 
90년 9월 어느 날 밤, 왕은 꿈을 꾸었다. 한 표범이 호랑이의 꼬리를 물어뜯는 꿈이었다. 
 
이상히 여긴 왕이 좌우에게 그 길흉을 물었다.
 
“호랑이는 백수(百獸)의 장(長)이며 표범은 그 동류이지만 호랑이보다는 작고 약한 자입니다.  그런데 그 표범이 호랑이를 물었다면, 왕족 중에서 대왕의 뒤를 끊으려고 도모하는 자가 있는 징조로 압니다.”
 
왕제 수성이 딴 뜻을 품고 있다는 것을 은근히 고한 것이다. 그러나 너그러운 왕은 아우를 의심하는 걸 즐기지 않았다. 그래서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에게 다시 해몽을 명해 보았다. 고복장은 원래 강직하면서도 원만한 중신이었다. 그러므로 해몽 역시 상식적이고 온건한 것이었다.
 
“옳지 못한 일을 하면 길한 것도 흉한 것으로 변하는 법이오며 옳은 일을 하면 재앙도 복이 되는 법입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나라를 내 집같이 염려하시고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하시는데 비록 이상한 징조가 있기로 어찌 염려하겠습니까?”
 
그러나 왕의 꿈은 결국 불길한 일의 징조였다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수성의 마음 속에서는 왕을 물리치고 정권을 잡을 야망이 나날이 자라가고 그의 심복들도 그 일을 위해서 은밀히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 그리하여 왕이 흉몽을 꾼지 4년이 지난 94년 7월, 수성은 왜산(矮山) 밑에서 다시 사냥을 했는데 이때 숲 속으로 심복들을 불러 놓고 자기 야망을 털어놓았다.
 
“지금 임금은 백 살이나 나이를 먹고 90여년 동안이나 임금 자리에 있으면서 죽지도 않고 왕위를 물려 줄 생각도 없는 모양이다. 이제 내 나이 70이 넘었으니 이 이상 기다릴 수는 없다. 그대들은 나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일을 꾸며 주겠는가?”

수성의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심복들은 입을 모아 외쳤다.
 
“삼가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단 하나 꼬장꼬장한 사람이 있었다.
 
“지금 왕제께서는 옳지 못한 말씀을 하셨는데 그럴 때엔 좌우에서 바른 말로 간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모두들 그저 분부만 따르겠다고 하니 간사한 무리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제 제가 바른 말을 드릴까 합니다만, 허락하시겠는지요?”
 
“바른 말은 약석(藥石)과 같다고 하니 어찌 듣지 않겠는가?”
 
“지금 대왕께선 현명하시어 모든 신하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백성들까지도 그 덕을 칭송하고 있는 터입니다. 그런데 왕제께선 임금의 아우 되시는 몸으로서 간사한 무리를 거느리고 현명한 대왕을 폐하려고 꾀하시니 어찌 부당하다고 아니 하겠습니까?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그러한 생각은 아니할 것입니다. 지금 만약 왕제께서 그 마음을 고치시고 착한 마음으로 돌아가시어 웃어른을 섬기신다면 대왕께서도 왕제의 뜻에 감동되시어 반드시 왕위를 물려주실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신대로 일을 저지르신다면 반드시 화가 미칠 것으로 압니다.”
 
이 말에 수성의 안색은 불쾌한 빛으로 물들었다. 그러자 아참 잘하는 심복들은 그 눈치를 재빠르게 알아차리고 이렇게 고해 바쳤다.
 
“왕제께서는 임금이 연로한 때문에 나라에 해로울 것을 염려하시고 뒷일을 꾀하시는 터인 데 이렇게 우리와 뜻이 다른 자를 그냥 두었다간 우리의 계교가 누설되어 후환이 미칠까 두렵습니다. 마땅히 이 자를 죽여 입을 막아버리는 것이 상책일까 합니다.”
 
수성은 그말을 듣자 그 사람을 즉시 죽여 버렸다.
 
그해 10월, 비로소 우보 고복장(高福章)은 수성이 모반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당황했다. 임금을 뵙고 급히 아뢰었다.
 
“왕제 수성이 지금 모반하려고 무리를 모으고 있습니다. 먼저 그를 주살하시어 화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상책일까 합니다.”
 
그러나 늙은 왕은 힘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이미 늙은 몸, 수성은 아직 힘이 왕성하니 그에게 왕위를 곱게 넘겨줄까 하오.”
 
그 말에 고복장은 펄쩍 뛰었다.
 
“왕제 수성은 사람됨이 어질지 못하고 잔인해서 오늘 왕위를 이어 받으면 장차 대왕의 자손을 해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어질지 못한 아우에게 은혜를 베푸셨다가 그 후환이 죄없는 자손들에게 미쳐도 좋단 말씀입니까? 다시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왕은 역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왕은 수성을 불러 말했다.
 
“내 이미 너무 늙어 모든 일을 게을리 하게 된다. 너는 아직 창창한 몸인데다가 안으로 국정에 참여하고 밖으로 군사를 이끌어 큰 공을 세웠으니 넉넉히 백성들을 복되게 할 것이다. 그런 뜻에서 나는 좋은 후계자를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게다. 앞으로도 부디 백성을 사랑하고 잘 다스리도록 부탁한다.”
 
이렇게 말한 다음 왕위를 물려주고 별궁(別宮)으로 물러갔다.
 
수성은 마침내 그토록 갈망하던 왕위에 올랐다. 그때 그의 나이 76세, 바로 제7대 차대왕(次大王)이다.
 
왕위에 오르자 성품이 잔인한 수성이 맨 먼저 착수한 일은 자기의 뜻을 반대하던 사람의 숙청이었다. 일찍이 모반을 권고하던 심복 미유(彌儒)를 좌보(左輔)로 삼는 한편 그와 적대되는 세력의 거물 고복장을 잡아들여 목을 베려 했다. 그러자 고복장은 땅을 치며 탄식했다.
 
“아, 슬프고 억울하다. 내 선조(先朝)의 은혜를 받은 몸으로 모반을 꾀하는 사람을 어찌 그냥 둘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선군(先君)께 그대를 없애도록 아뢰었지만 듣지 않으신 탓으로 지금 이지경이 되었구나. 그대는 욕심대로 대위를 계승했으니, 마땅히 마음을 고치고 정교(政敎)를 새롭게 해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할 터인데 옳은 말을 한 사람을 죽이려 하니 무도하기 비길 데 없다. 내 이러한 무도한 시대에 사느니보다 속히 죽는 편이 좋으니 어서 죽여 다오.”
 
고복장은 마침내 형을 받아 죽으니 사람들은 모두 격분해 마지않았다. 수성은 신하들만 숙청한 것이 아니었다. 3년 4월에는 태조대왕의 원자 막근(莫勤)을 죽여 버렸다. 태조대왕의 정당한 후계자를 죽임으로써 민심이 흩어지지 않게 하고 자기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막근이 피살된 것을 보자 막근의 아우 막덕(莫德)은 화가 자기에게까지 미칠 것을 두려워하고 고민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기에 대해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편자 김부식은 이렇게 논평했다.
 
<태조왕은 의(義)를 알지 못하고 대위를 경솔하게 어질지 못한 아우에게 주었으므로 화가 한 충신과 두 아들에게 미쳤으니 어찌 탄식하지 않으랴. >
 
그는 그 허물을 태조왕에게 돌렸는데 그 논평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충신과 아들들이 죽을 때 태조왕은 아직 살아 있었지만 이미 실권을 내놓은 그로서는 속수무책(束手無策), 아무 대책도 강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만일 좀더 현명한 눈을 가지고 있어서 정권을 내놓지 않았던지 그것을 물려주더라도 좀 더 사람을 가리어 물려주었다면 이런 참변을 당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수성은 잔인하고 사나운 독재자였는지 모르지만 형에게서 정권을 빼앗을 생각을 한 만큼 난폭하기만한 인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70대에서 90대라는 늙은 몸으로 끄떡없이 정권을 유지한 수완으로 보면 단순한 폭군으로 돌릴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말로(末路)는 좋지 못했다. 20년(西紀 165년) 10월 백성들의 원성이 날로 높아가자 명림답부(明臨答夫) 등에게 왕은 드디어 피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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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궁중비사 (7) - 낙랑궁중의 비연(樂浪宮中의 悲戀) 우리나라 궁중비사

 

 

새 나라의 기틀이 잡혀 외환의 우려가 적어지면 안으로 그 권력을 계승하는 자들 간에 암투가 벌어지는 것은 가장 흔히 보는 불상사이다.

 
고구려의 경우 역시 이 무렵부터 상서롭지 못한 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대무신왕에게는 원비(元妃) 소생의 해우왕자(解憂王子)와 차비(次妃) 소생의 호동왕자(好童王子)가 있었다.
 
원비 소생의 해우왕자는 아직 나이가 어릴 뿐 아니라 성격이 사납고 거칠었다. 그와 반대로 차비 소생의 호동은 용모가 수려하고 기상이 씩씩하고 마음이 착하므로 왕은 항상 호동을 사랑하고 그에게 기대를 걸어왔다.
 
원비는 그것이 못마땅했다. 혹시나 자기 소생의 해우를 제쳐놓고 호동을 태자로 삼을까 불안스러웠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적마다 호동을 학대했다. 원비의 학대를 받으니 호동은 궁중에 있기를 싫어했고 항상 외지로 여행하기를 일삼았다.
 
이때 고구려의 이웃나라 중에서 가장 방해가 된 것은 낙랑(樂浪)이었다. 낙랑은 한사군의 하나로서 이때 호수(戶數)가 61,492호였다고 하니 고구려보다는 비록 국세가 약한 편이었으나 도저히 그것을 정벌할 수가 없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낙랑군이 다른 나라에게 정벌되지 않는 까닭은 적병이 국경에 쳐들어오기만 하면 스스로 울리는 북이 있어 이내 그 정보를 알게 되고 따라서 신속한 임전태세를 갖출 수 있는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 전설을 그대로 믿는다면 오늘날 적기(敵機)의 침입을 알려 주는 레이다 같은 것이 발달되었을 리는 만무하다. 상식적으로 판단한다면 신속한 정보망이 발달되었다고나 할까.
 
어쨌든 그 ‘스스로 우는 북(自鳴鼓)’에 얽히어 호동왕자와 낙랑태수 최리(崔理)의 딸과의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대무신왕 15년 4월, 사방을 유랑하던 왕자 호동은 옥저(沃沮=城南地方)땅에 이르러 마침 그 곳에 사냥을 나온 낙랑태수 최리와 만났다. 최리는 남달리 준수한 호동의 용모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물었다.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사람 같지 않은데 혹시 북국(北國=高句麗) 신왕(神王=大武神王)의 자제가 아니오?”

호동이 그렇다고 대답하니까 최리는 고구려와 화친하는 뜻에서 후히 대접하고 싶으니 낙랑으로 가자고 권했다. 호동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 기회에 낙랑의 비밀무기인 자명고의 정체를 알아낸다면 자기 나라에 크게 이로울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호동의 그런 속셈도 모르는 최리는 낙랑 궁중으로 돌아가자 융숭히 대접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자기 딸과 혼인까지 시켰다.
 
최리의 딸과 혼인을 하고 나자 호동은 일단 혼자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최리와 공주에게는 부왕의 허락 없이 혼인을 했으므로 먼저 돌아가서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핑계를 댔지만 속셈은 자명고의 비밀을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자기 나라에 돌아간 호동은 부왕에게 낙랑에는 자명고가 있다는 것과 그 자명고는 무고(武庫) 깊숙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그렇다면 그 자명고를 없애버릴 방도는 없느냐?”
 
왕은 호동의 보고를 받자 이렇게 되물었다. 그러나 호동으로서는 별다른 묘책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한참만에 왕은 한 가지 계교를 말했다.
 
“네가 최리의 딸과 혼인을 했다니 최리의 딸은 비록 지난날엔 낙랑의 공주였지만 지금은 어엿한 고구려의 왕비이다. 마땅히 고구려를 위해서 충성을 다해야 할 것이니 네 아내에게 사람을 보내어 자명고를 찢어버리도록 일러라.”
 
나라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는 왕으로선 당연한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호동에게는 괴로운 명령이었다.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자기만 기다리고 있는 공주에게 자명고를 없애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결국 죽으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공주가 무슨 방법을 써서든지 자명고를 없애버린다면 그것은 낙랑으로서는 최고의 반역 행위이므로 아무리 공주라도 가혹한 형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호동이 망설이고 있으려니까 호동을 미워해 온 원비는 그것을 미끼 삼아 다시 왕에게 참소했다.

“호동이 아무래도 딴 뜻을 품은 모양이에요. 그러기에 자명고를 없애는데 주저하는 게 아니겠어요?”

이렇게 되자 호동은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마음 속으로 공주에게 사과하며 괴로운 붓을 들었다.
 
<그대가 만약 자명고를 없애버린다면 충실한 아내로 알고 맞아올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남편과 남편의 나라에 대한 정성이 없는 것으로 알고 남이 되겠다.>
 
호동의 편지를 받은 공주는 역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남편의 뜻을 좇자니 부친을 배반하는 것이 되고 부친을 배반하지 않으려면 남편과 영 이별을 해야 한다. 그러나 공주의 애정은 부친보다도 남편에게 더 강했다. 밤이 이슥하기를 기다려서 비수를 품고 무고(武庫) 속에 숨어 들어간 공주는 마침내 자명고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리고 그 사연을 비밀히 고구려땅에 있는 호동에게 전했다.
 
자명고가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대무신왕은 곧 군사를 일으켜 낙랑을 습격했다.
 
고구려군이 노도처럼 낙랑 땅에 쳐들어 갈 때까지 낙랑에서는 자명고가 찢어진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무 대책도 없이 고구려군을 맞아 도성이 포위되자 겨우 이상히 여기어 무고를 조사해 보고 비로소 자명고가 찢어진 것을 알았다.
 
낙랑태수 최리는 그 범인을 추궁해 보니 뜻밖에도 자기 딸이 모든 것을 자백했다.
 
“예끼, 이 어리석은 것아!”
 
최리는 비통하게 부르짖고 한칼에 딸을 죽인 다음 고구려군에게 항복했다.
 
이렇게 되니 호동의 마음은 몹시 괴로웠지만 어쨌든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셈이었다. 왕은 그 공을 크게 칭찬하며 전보다도 한층 더 왕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왕의 총애가 기울면 기울수록 원비는 호동을 두려워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로 호동을 태자로 삼고 자기 소생인 해우는 불우한 처지가 될 것이 확실할 것 같다.
 
원비는 여러 가지로 궁리한 끝에 한 가지 간교를 생각해 냈다.
 
“대왕,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어요?”
 
어느 날 밤, 왕의 거처로 달려가서 눈물을 뿌리며 말했다.
 
“무슨 일인데 그러오?”
 
“호동이 아무리 친자식이 아니라도 저를 어미로 대접하지 않으니 이럴 수가 있겠어요?”
 
“어떤 태도를 취했기에 그러는 거요?”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일이어요. 대왕이 계시지 않을 때면 여러 가지 말로 유인하며 저를 범하려고 하지 않겠어요?”
 
“뭐라구? 설마 호동이…”
 
왕은 비의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비는 호동이 자기 소생이 아니라고 모함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렇게 반문해 보았다. 그러나 비는 거짓 울음을 울면서 말했다.
 
“대왕께서 제 말을 믿지 않으신다면 몸소 그 징조를 살피시어요. 만약 제 말이 거짓이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무슨 죄라도 달게 받겠어요.”
 
이렇게까지 말하니 왕의 마음에도 의혹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비밀히 사람을 놓아 호동이 하는 일을 일일이 감시하게 하였다.
 
이것을 알자 호동은 슬펐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부왕만은 자기를 믿어 주실 줄 알았는데 부왕까지 믿어 주리 않으니 살 맛이 없었다. 그리고 부왕에게 자기의 결백함을 밝히는 방법도 없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되면 국모인 원비의 죄악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부왕에게 근심을 끼치고 형제 사이에 더욱 치열한 암투를 벌이게 될 염려가 있었다.
 
“나 하나만 없어지면 모든 일이 무사히 해결 되리라.”
 
호동은 이렇게 생각하고 스스로 칼을 물고 땅에 엎드려 자결했다. 대무신왕 15년 11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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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궁중비사 (6) - 一頭二身의 怪鳥 우리나라 궁중비사

 

 

 

 
  유리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제3대 왕이 된 무휼태자가 바로 건국 기초를 완성한 대무신왕(大武神王)이다.
 
대무신왕이 즉위했을 때(西紀 18年) 그의 나이 11세였다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는 왕자의 몸으로 부여군을 격파한 일까지 있으니 그것은 그릇 전해진 것이 아니면 왕이 비범한 인물임을 과장한 때문일 것이다.
 
왕은 즉위하자 무엇보다도 숙적 부여를 멸망시켜 화근을 없애버리고자 마음먹었다. 그래서 군비를 확장하고 기회만 기다리고 있는데 3년 10월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파견하여 붉은 까마귀 한 마리를 보냈다. 머리는 하나인데 몸은 둘로 갈라진 괴조(怪鳥)였다.
 
대소가 그 까마귀를 보낸 데에는 계략이 있었다. 어느 날 부여 백성이 그 이상한 까마귀를 잡아서 왕에게 바치자 왕은 좌우 시시들에게 그런 새가 나타난 것이 어떤 징조인가를 하문(下問했)다. 그랬더니 한 시신이 제법 아는 체하면서 아뢴다.
 
“까마귀란 것은 원래 검은 법이온데 저렇게 붉은 빛을 하고 한 머리에 두 몸을 가졌으니 두 나라가 합칠 징조로 압니다.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치시면 고구려는 우리의 것으로 될 줄 압니다.”
 
이 말을 듣자 대소는 대단히 기뻐했다. 대소는 그 신하에게 새가 나타난 징조를 글로 쓰게 했다.
 
<부여왕 대소는 고구려 대무신왕에에 새 한 마리와 이 글을 보낸다. 새란 본래 그 빛이 검은 법인데 이 새는 전신이 피로 물들인 듯 붉다. 곧, 멀지 아니 해서 크게 피를 흘릴 징조다. 또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인 것으로 미루어 둘로 갈라졌던 나라가 하나로 다시 합친다는 뜻이니 곧 멀지 않아 부여는 고구려를 쳐서 합치게 될 것이라는 하늘의 뜻임이 분명하다.>
 
새와 글을 받은 고구려의 대무신왕은 상을 찌푸리고 입맛을 다셨다. 그러자 한 신하가 나서며 말했다.
 
“대왕, 염려 마시오. 결코 흉조가 아닙니다. 원래 까마귀란 검은 것이며, 검은 것은 북쪽을 가리키는 색입니다만, 이제 우리 고구려가 있는 남쪽을 뜻하는 붉은 색으로 변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원래 붉은 새는 상서로운 것으로 일컬어 왔는데 부여의 대소는 그것을 기르지 않고 오히려 우리에게 보내 주었습니다. 이것으로 이루어 두 나라의 흥망은 과히 판단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신하의 말을 들은 임금은 대단히 기뻐했다. 이번에는 그와 같은 뜻을 글로 써서 부여로 보냈다.
 
그 글을 받아 본 부여왕 대소는 자기의 경솔한 처사를 뉘우쳤지만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무신왕은 그 해 봄, 마침내 몸소 대군을 거느리고 부여를 치기로 했다. 길조(吉鳥)를 얻어 백성들의 사기가 한창 높아졌으므로 가장 좋은 기회라 여긴 것이다. 왕이 거느린 군사가 이물림(利勿林)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마침 날이 저물었다. 왕은 그 곳에 진을 치도록 분부했는데 그날 밤 문득 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니, 쇠와 쇠가 맞부딪치는 소리 같았다.
 
‘적군이 쳐들어오는 것이나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왕은 소리 나는 곳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산등성이에 올라가 보니 쇳소리는 한층 요란스러워 왕은 정신을 차리고 사방을 두루 살펴보았다. 그런 즉 동편 골짜기에 푸른 달빛을 받고 무엇인지 반짝거리는 것이 있었다.
 
왕은 달려 내려가 보았다. 그 산골짝 움푹한 동굴 안에 창이며 칼 같은 무기가 잔뜩 쌓여 있는데 그것들이 바람에 부딪혀 그런 소리를 냈던 것이다. 왕은 곧 부하들을 불러 무기를 거두게 했다. 부하들이 무기를 거두는 걸 살피고 있던 왕은 무엇인지 발에 차이는 것이 있기에 집어 보았다.
 
그것은 금으로 만든 임금의 도장이었다. 하늘이 이렇게 무기와 금새(金璽)를 내려 주고 자기를 하늘이 보낸 임금으로 인정하신 모양이고 보니 이번 싸움에 크게 승리를 거두리라 여겨졌다. 왕과 장졸들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다.
 
그 이튿날, 날이 새기를 기다려서 왕의 군대는 다시 진군을 시작했다. 얼마를 갔을 때였다. 저편에서 괴상한 사나이가 다가왔다. 키는 9척이나 될 만큼 어마어마하게 크고, 얼굴은 백옥같이 희고 두 눈에서는 푸른 광채가 돌고 있었다. 왕의 말 앞까지 온 그 괴한은 공손히 절을 하더니 말했다.
 
“반갑습니다. 대왕, 이 사람은 오래전부터 대왕 오시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대는 누구이기에 그토록 나를 기다렸다고 하는가?”
 
“이 사람은 본시 북명(北溟)에 사는 괴유(怪由)라는 인간입니다. 들려오는 소문에 대왕께서 이번에 북부여를 치러 가신다기에 모시고 갈까 하옵니다.”
 
늠름하고 믿음직한 말이었다.
 
“좋아, 그러면 그대를 선봉장으로 삼을 테니 앞장 서 쳐들어 가 부여왕의 목을 베어라!”
 
괴유는 크게 기뻐하고 앞장을 섰다.
 
고구려군은 드디어 부여의 남쪽 국경을 넘어섰다. 그리고는 가만히 지세를 살펴보니 그 자리는 땅이 낮고 수렁이 많아서 진을 치자면 대단히 불리할 것 같았다. 그래서 다소 높은 다리를 택해서 진을 치고 수렁이 있는 쪽은 일부러 비어둔 채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구려군이 국경을 넘어 쳐들어 왔다는 기별을 받자 교만한 부여왕 대소는 크게 웃으며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군의 진을 향해 돌진했다. 고구려군이 진을 친 맞은편 언덕에 당도했을 때였다. 대소는 천천히 고구려군의 진을 살펴보더니 다시 한 번 크게 웃었다.
 
“저 걸 보아라! 과연 소국이란 할 수 없다니까. 진하나 제대로 칠 줄 아는 장수가 없는 모양이군. 저기 저편을 내려다보아라. 아무런 방비도 없이 텅 비어 있지 않은가!”
 
부여군은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그 방비가 부족한 쪽을 향해서 쳐들어갔다. 그러나 잠시 후, 부여군은 큰 곤경에 빠지고 말았다. 수많은 인마는 수렁으로 밀려들어갔고 점점 허리까지 빠져 들어가 흙탕물 속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말들이 우는 소리, 사람들의 비명소리로 싸우기 전부터 이미 수라장이었다. 이 기회를 놓칠 까닭이 없다.
 
“부여왕의 목을 벨 때는 바로 이때다. 누가 가서 속히 공을 세워라!”
 
왕의 말이 떨어지자 괴유가 칼을 빼어 들고 타고 있던 말을 치니 말은 두 발을 들고 한바탕 소리치고 적진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9척 괴한이 장검을 비껴들고 한 번 번득하면 그 앞엔 적의 목이 바람 아래 낙엽처럼 떨어졌다.
 
이것을 보자 부여왕 대소는 크게 노했다. 몸소 나서서 괴유와 마주 싸웠다. 그러나 얼마 싸우지 아니하여 대소의 목은 괴유의 칼날을 받고 떨어져 버렸다.
 
주몽을 비롯해서 고구려 왕실 3대의 숙적 대소는 이제 최후를 맞이했다. 대무신왕의 기쁨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괴유의 공로를 크게 치하하는 한편 왕을 잃은 부여군사쯤은 단번에 섬멸될 줄로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왕을 잃은 부여군은 복수심에 불탔던지 오히려 용기백배(勇氣百倍)하여 고구려군을 포위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하는 동안에 고구려군이 무엇보다도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은 군량의 결핍이었다. 적군의 포위망을 뚫을 길 없으니 군량을 구해올 방법은 없고 미리 준비했던 군량은 이미 다 떨어졌다.
 
또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고 닷새가 지났다. 굶주린 군사들은 전투는 고사하고 목숨을 부지하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제는 적군에게 전멸 당하느냐 아사하고 마느냐 두 가지 중 한 가지 길밖에 남지 않은 듯 여겨졌다.
 
그런데 적에게 포위 된지 7일째 되는 날이었다.  갑자기 안개가 끼기 시작하더니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야 말로 하늘이 돕는 바다.”
 
왕은 장수들을 불러 군사들로 하여금 풀을 베어 수많은 허수아비를 만들게 했다. 그리고 허수아비들에게 갑옷을 입히고 군기(軍器)를 잡히어 군영주위에 벌려 세워 의병(疑兵)을 삼아 적의 눈을 속인 다음 사잇길을 따라 몰래 포위망을 벗어났다.
 
워낙 굶주린데다 적에게 추격을 당하지 않으려고 강행군을 했으므로 군사들 중에는 기운이 다하여 죽어 넘어가는 자가 허다했다.
 
왕에게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국도로 개선하자 왕은 곧 잔치를 베풀어 굶주린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는 한편 전사한 자들을 후히 제사지내고 상하고 병든 자들은 일일이 문병하며 이렇게 사과했다.
 
“내가 부덕(不德)하여 너희들을 이렇게 고생시키니 실로 미안한 일이다.”
 
그런 즉 백성들은 왕의 인자한 덕에 감격하여 상하가 다 심신을 바쳐 나라에 충성할 것을 맹서했다.
 
부여왕 대소가 죽은 후 그 아우가 해두국(海頭國)으로 가서 새로 나라를 세웠으나 대소의 종제는 부여백성 만여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항복해 왔다. 대무신왕 5년 7월이었다.
 
이로써 고구려는 숙망이던 부여를 합방하여 한층 더 강대한 국가가 되었다. 일두이신의 붉은 까마귀의 징조가 그대로 들어맞은 셈이었다.
 
고구려의 국세는 날로 강성해 갔다. 대무신왕 9년 10월에는 왕이 친히 개마국(蓋馬國)을 정벌하여 그 왕을 죽이고 왕모(王母)를 사로잡고 백성을 거두어 그 국토를 고구려의 군현(郡縣)으로 삼았다.
이렇게 되자 그 해 12월에는 구다국왕(句茶國王)이 개마국이 멸망했다는 말을 듣고 미리 겁을 집어먹은 나머지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다.
 
이렇게 고구려의 강토가 넓어지고 국세가 강해지는 것을 보자 불안을 느낀 것은 대륙의 한(漢)나라였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고구려의 힘이 더 커지기전에 눌러버릴 것을 생각하고 요동태수(遼東太守)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공케 했다.
 
이 보고를 받은 대무신왕은 곧 대신들을 모아 놓고 전수(戰守)의 계책을 의논해 보았다. 그랬더니 병마를 총관하는 우보(右補)로 있는 송옥구(松屋句)가 진언(進言)했다.
 
“신이 듣기에 덕을 베푸는 자는 창성하고 힘을 믿는 자는 망한다고 합니다. 지금 중국은 나라가 어지러워 도처에서 도적이 봉기하는데 그것을 진압하지도 않고 멀리 우리나라로 명분 없는 군사를 내어 쳐들어오니 요동태수가 공을 세우고 욕심을 채우려고 일으킨 일로 압니다. 그러하오니 기병을 내어 적군을 쳐서 섬멸하면 중국 조정에서는 더 원병을 내거나 하는 일이 없을 줄 압니다.”
 
그러나 좌보(左輔) 을두지(乙豆智)는 그 의견을 반대했다.
 
“소적(小敵)이 아무리 강해도 대적(大敵)에게는 잡히고 마는 법입니다. 대왕의 군사와 한나라 군사를 비교해 보십시오. 어느 쪽이 많습니까? 그러하오니 계교를 써서 치면 모르오나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을 줄로 아옵니다.”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왕은 을두지를 향해서 물었다.
 
“한병(漢兵)을 치는 계교란 어떤 것이오?”

“우리 힘으로는 한창 사기가 충전한 한병의 예봉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오니 대왕께서는 마땅히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시다가 적의 군사들이 피로함을 기다려 물리치는 것이 상책인 줄로 아옵니다.”

왕은 을두지의 의견을 채택했다. 왕은 곧 위나암성(尉那巖城)으로 들어가서 수십일 동안 농성을 해보았으나 적군은 포위를 풀지 않는다. 오히려 고구려 군사의 사기만 저하할 뿐이었다. 그래서 왕은 다시 을두지에게 대책을 물었다.
 
“과히 염려할 것은 못 될 줄로 압니다. 한인들은 우리가 있는 성이 암석으로 되어 있으므로 물이 나는 샘이 없을 것이라 믿고 저렇게 포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갈증에 못 이겨 항복할 때를 기다리는 것이옵니다. 그러하오니 우리의 식수가 풍족하다는 것을 보여 주면 단념하고 돌아갈 줄로 압니다.”
 
“식수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거늘 어떻게 풍족한 체한단 말인가?”
 
“그것이 바로 계교이옵니다. 마침 채 마르지 않은 연못에는 잉어 몇 마리가 있사오니 그것을 잡아 수초로 싸서 보내고 한편 주류를 곁들여 보내면 우리의 군량과 식수가 풍족한 것으로 믿지 않겠습니까?”
 
왕은 을두지의 의견을 따라 잉어와 술을 보내며 요동태수에게 글발을 띄웠다.
 
<과인이 우매하여 상국에 죄를 져서 장군의 백만 군사로 하여금 이 곳까지 이르러 수고를 끼치게 하였으나 그 후의에 보답할 길이 없으므로 변변치 못한 물건을 보내오니 여러 장졸들에게 먹이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능청스러운 술책이었다. 그 술책에 요동태수는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
 
“성중에 그렇듯 먹을 것이 풍족하다면 아무리 오래 포위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대로 물러간다면 대국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 그래서 고구려왕에게 회답을 하고 군사를 거두어 회군했다.
 
<우리 황제께서 대왕의 뜻을 모르시고 군사를 내어 죄를 묻게 하시므로 이곳에 이르러 수십 일이 지났으나 대왕의 글을 대하니 유순한 말과 공손한 뜻이 조금도 대국을 가벼이 여기는 바가 없으므로 이대로 돌아가서 우리 황제께 고하도록 하겠소이다.>
 
역시 능청스러운 수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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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궁중비사(5) - 無恤王子의 奇計 우리나라 궁중비사

 

풍속도제2 왕자 해명이 죽게 되니 제3 왕자 무휼(無恤)이 왕위 계승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무휼왕자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녹록치 않게 무용이 절륜했지만 슬기로운 그는 그것을 표면에 나타내지 않았다.
 
해명왕자가 죽은 해 8월 부여왕 대소는 사자를 보내어 유리왕을 책망했다.
 
“나의 선왕께서 그대의 선친 동명왕을 극진히 보호했으나 그는 그 은혜를 배신하고 신하들을 꼬여 그 곳으로 도망가서 나라를 세웠는데 그것만으로도 죄송히 여기고 우리를 섬겨야 할 것이거늘 끝내 순종치 않았으니 그 죄 마땅히 징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일은 잠시 덮어두고 오늘의 형편만이라도 생각해 보라. 예로부터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기는 법인데 너희는 작은 나라로서 어찌 큰 나라를 섬기려 들지 않느냐? 지금이라도 그대가 예의를 갖추어 나를 섬기게 된다면 나라를 오래 보전 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는 다면 사직을 보전하기 어려울 줄로 알아라.”
 
실로 참기 어려운 모욕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분쟁을 싫어하는 왕은 그 모욕도 감수하려고 했다.
 
“우리는 나라를 세운지 아직 오래되지 않고 군사도 부여를 당해낼 만큼 못하니 한때 욕을 참고 굴복했다가 뒷날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렇게 말한 다음 부여에서 온 사신을 향해 말했다.
 
“과인이 외진 구석에 살며 예의를 알지 못한 탓으로 허물이 많소만 대왕의 가르치심을 듣고 비로소 취할 바를 깨달았소이다. 대왕의 명을 따라 삼가 섬길 것이니 그와 같이 아뢰도록 하오.”

이렇게 간곡히 말했다. 이 말을 듣자 부여사신은 의기양양해서 위세를 부렸지만 신하들 중에 뜻있는 자들과 특히 왕자 무휼은 지나치게 유약한 왕의 태도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무휼은 총명한 소년이었다. 부왕과 맞서서 미움을 사는 태도를 피하면서도 고구려의 국위를 과시하는 계교를 짜냈다. 그는 부왕이 없는 틈을 타서 사신을 향해 말했다.
 
“우리 선조께서는 그대 나라를 배반했다고 했지만 첫째 그것이 틀린 말이요. 우리 선조께서는 원래 현명하고 다재하셨으므로 그대 임금이 질투한 나머지 부왕께 참소하고 죽이려하기에 하는 수 없이 도망친 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 임금은 자기 허물은 뉘우칠 생각도 없이 군사의 힘만 믿고 우리를 업수히 보니 어찌 그렇듯 무도한 일이 있겠소? 내 사신에게 일러두겠는데 돌아가거든 그대 임금께 이렇게 전하시오.”
 
어린 소년답지 않게 사리를 따져 차근차근 말하는 것을 듣고 부여 사신은 어안이 벙벙했다.
 
“여기 달걀을 쌓아 놓았으니 만약 대왕이 그 알을 헐지 않는다면 우리는 대왕을 섬길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대왕을 섬기지 않겠소.”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사신은 그 말뜻을 새기기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가서 대소 왕에게 보고했다.
 
부여왕 대소는 무휼왕자의 말 뜻을 얼른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래서 여러 시신들에게 물어 보았으나 시신들 역시 그 뜻을 해석하지 못하므로 하는 수 없이 널리 나라 안에서 슬기 있는 자들을 모아들였다. 그랬더니 한 노파가 무휼왕자의 말을 풀이해 아뢰었다.
 
“달걀이란 원래 둥근 것입죠. 그러므로 그것을 쌓아 올리기는 대단히 힘든 일일뿐더러 비록 쌓아 올렸다 하더라도 조금만 건드리면 곧 허물어질게 아닙니까? 이것은 무휼왕자가 우리 부여와 고구려의 사이를 비유한 말로 볼 수 있읍죠. 가만히 내버려 두면 서로 편안할 수 있지만 잘못 건드리면 두 나라가 다 화를 입을 것이라는 뜻입죠.”
 
노파의 설명을 듣자 대소는 입맛을 다셨다.
 
“거 어린놈이 제법 꾀가 많은걸. 그 말대로 잠시 건드리지 말고 기회를 보는 것이 좋을듯하다.”

이렇게 되어서 고구려는 나라 위신을 깎이지 않고 부여를 견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달걀을 쌓아 올린 것 같은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유리왕 32년 11월, 엄동을 무릅쓰고 부여군은 고구려 변경을 침입했다. 달걀로 쌓은 평화를 깨뜨리고 만 것이다.
 
아무리 국력이 약하더라도 쳐들어오는 적은 막지 않으면 아니 된다. 평화주의자 유리왕도 마침내 무휼왕자에게 군사를 주어 적군을 방어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부여군에 비해서 너무나 열세였다. 정면으로 대전한다면 적군에게 여지없이 짓밟힐 것은 환한 일이었다.

무휼왕자는 한 가지 기계(奇計)를 생각해냈다. 복병 전술을 쓰게 한 것이다. 즉 부여군이 통과할 산골 양편 언덕 바위틈에 고구려군을 숨겨 두었다가 부여군이 그 곳까지 진격해 왔을 때 일제히 일어나서 협격하자는 것이었다.
 
고구려군이 잠복한 산골길은 좁고 험한 길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부여의 대군은 그 좁은 산골로 모여들었다. 때는 왔다. 무휼왕자는 높이 손을 들었다. 양편 언덕에 매복하고 있던 고구려군은 일제히 함성을 올리고는 적군을 향해서 활을 쏘아대고 창을 던지고 암석을 굴려 떨어트렸다.
 
뜻하지 않은 기습에 부여군은 당황실색하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지휘관의 명령은 서지 않고 병졸들은 제 목숨만 살려고 날뛰었다. 좁은 계곡에서 수많은 대군이 혼잡을 이루니 말은 사람을 밟아 죽이고 사람들은 서로 자기편끼리 아귀다툼을 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휼은 다시 고구려군에게 명령을 했다. 고구려군은 일제히 계곡으로 달려 내려가서 혼란한 적군을 닥치는 대로 무찔렀다. 이렇게 해서 부여군은 거의 전멸을 당하고 어린왕자 무휼은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싸움을 싫어하는 유리왕이었지만 승리는 역시 기쁜 것이다.
 
33년, 정월 왕자의 공로를 크게 치하하고 태자를 삼는 한편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맡겼다.  이후부터 유리왕도 태자 무휼의 진언을 받아 국세를 확장하기에 힘쓰게 되었다. 즉 그 해 8월에는 선왕 때부터의 공신 오이(烏伊), 마리(摩離)등에게 명하여 군사 二만을 거느리고 서쪽에 있던 양맥(梁 )을 습격하여 국위를 떨치기도 했다.
 
그러다가 37년 10월 왕이 두곡(豆谷)의 이궁에서 승하하자 유리명왕(瑜璃明王)이라 호하고 무휼태자가 그 뒤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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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궁중비사(4) - 解明王子의 悲劇 우리나라 궁중비사

 

풍속도이성에게는 다정다감(多情多感)한 왕이었지만 유리는 새 나라의 기틀을 잡아가는데 있어서는 신중하고 슬기로운 임금이었다.
 
그가 즉위한지 14년 되는 정월이었다.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파견하여 질자(質子)를 교환하자고 청해왔다. 대소는 이에 앞서 그의 소망대로 부여국의 왕위를 계승했던 것이다.
 
유리왕의 처지로 볼 때 대소는 선왕(=朱蒙)을 괴롭힌 숙적이다. 감정적으로는 질자까지 보내어 수교하고 싶지 않았지만 부여는 아직도 고구려보다 훨씬 강대한 나라다. 감정적으로 맞서다가 노여움을 사면 지극히 불리했다. 총명한 왕은 이 점을 잘 판별(判別)할 줄 알았다. 그는 태자 도절(都切)을 불렀다.
 
“네가 질자로서 부여엘 가야겠다.”
 
도절은 겁이 많고 용렬한 인물이었다.
 
“제가 질자로 가요? 그러다가 두 나라 사이가 험악해지면 저는 맨 먼저 죽고 마는 게 아니에요?  싫습니다. 아버님 다른 사람을 보내 주세요.”
 
벌벌 떨며 거절하는 아들을 보고 왕은 탄식했다.
 
“어리석은 아들이 나라를 망치는 구나!”
 
왕의 예견은 들어맞았다. 태자가 질자로 가지 않게 되자 부여왕 대소는 크게 노했다. 그해 11월 대소는 5만 대군으로 고구려 땅을 침공했다. 고구려의 군력으로서는 당해내지 못할 대군이었으나 때마침 큰 눈이 내려 수많은 장졸이 얼어 죽었으므로 부여국은 겨우 회군했다. 뜻하지 않게 고구려는 위기를 모면한 셈이었다.
 
이후부터 왕은 더욱 이웃나라와 분쟁을 회피하고 오직 안으로 국력을 키우기에 부심(腐心)했다. 용렬한 도절이 그 후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자 왕은 그 대신 해명왕자(解明王子)로 태자를 삼았다.
 
해명은 도절과는 반대로 용감한 젊은이였다. 힘도 강하고 무술에도 능했다. 왕은 그것이 대단히 대견했으나 한편 격하기 쉬운 성격이 은근히 염려스러웠다.
 
유리왕 22년, 왕은 국내(國內)에 위나암성(尉那巖成)을 축조(築造)하고 천도했다. 그러나 해명은 천도에 반대하고 고도(古都)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이렇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아들의 태도가 달가울 리는 없었지만 왕은 그 무용을 아끼어 과히 나무라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왕과 태자 사이가 결정적으로 벌어지는 사건이 생기게 되었다.
 
해명태자의 용명은 고구려 나라 안 뿐만 아니라 널리 이웃나라에까지 알려져 있었다. 고구려는 근처에 황룡국(黃龍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 왕도 해명의 용명을 듣고 그 힘을 시험해 볼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황룡국 사람 중에 아무도 당기지 못하는 강한 활을 만들어 사신을 시켜 보내고 태자의 힘이 과연 강하다면 이 활을 듣자 해명은 껄껄 웃었다.

“나에게 어린애 장난감 같은 활을 쏘아 보란 말이요?”
 
그리고는 그 활시위를 한 번 힘껏 당기니 그렇듯 강한 활이 뚝 부러지고 말았다. 황룡국의 사자는 크게 놀랐다.
 
“태자는 과연 천하장사이옵니다.”
 
그러자 해명은 다시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내 힘이 강한 것이 아니요. 활이 너무 약해서 꺾어졌으니 다시 내 힘을 시험할 의향이 있거든 훨씬 더 강한 활을 만들어 보내도록 하라고 왕에게 전하오.”
 
사자가 돌아가서 그대로 전하니 황룡국 왕은 몹시 부끄러워했다.
 
“내가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구나!”
 
그리고는 고구려에 해명태자가 있는 한 마음을 놓을 수 없다 하고 군비를 확장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 사실이 새 서울에 있는 유리왕의 귀에 들어가자 왕은 크게 노했다. 즉시 황룡국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해명은 비록 내 자식이지만 이웃나라에 무례한 짓이 많았으니 죽이도록 하시오.”라고 부탁했다.
 
이것은 해명의 거만한 태도를 미워한 때문도 있었지만 그 보다도 해명이 힘을 과시한 때문에 황룡국에서 군비를 확장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해명을 없애버리면 황룡국에서도 고구려측에 딴 뜻이 없음을 깨닫고 경계를 풀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유리왕의 말은 황룡국 왕에게도 반가운 말이었다. 해명태자만 없앤다면 마음 놓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황룡국 왕은 사람을 보내어 태자와 만날 것을 청했다. 황룡국 왕이 만나자는 의도 어떠한 것인지 해명태자 자신도 그의 측근자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태자의 측근자는 태자가 황룡국으로 가는 것을 극구 막았다.
 
“이웃나라에서 까닭 없이 만나기를 청하니 반드시 음흉한 속셈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가시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믿는바가 있는 태자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염려들 마라. 하늘이 나를 죽이려 하지 않는다면 어찌 황룡왕이 나를 죽일 수 있겠느냐?”

해명은 즉시 황룡국으로 향했다. 황룡국 왕은 해명이 오는 길로 죽일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해명이 당도한 것을 보자 차마 죽일 수가 없었다. 그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할 뿐 아니라 그를 죽이는 날에는 유리왕은 비록 가만히 있을는지 모르지만 해명을 추종하는 부하들도 적지 않고 모두 다 굉장한 용사들이므로 어떠한 분란이 일어날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예를 갖추어 후히 대접하고 그냥 돌려보냈다.
 
황룡국 왕이 해명을 무사히 돌려보냈다는 말을 듣자 유리왕은 더욱 난처했다. 특히 해명의 세력을 두려한 나머지 돌려보냈다는 점이 불쾌했다. 이대로 둔다면 밖으로는 이웃나라들이 모두 경계해서 고구려는 고립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고 안으로는 날로 강성해지는 해명의 세력이 부왕의 위치까지 위협할는지 알 수 없다.
 
유리왕은 마침내 해명에게 사람을 보내어 꾸짖었다.
 
“내 도읍을 옮겨 백성들을 편안케 하고 나라의 기틀을 공고히 하고자 했거늘 너는 내 뜻을 거역하고 그 곳에 그냥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조그만 힘을 믿고 이웃나라와 원한을 맺으니 아비에게는 자식된 도리를 다 하지 못한 셈이고 나라에는 전란을 불러일으키는 죄를진 셈이다. 마땅히 죽어야 하겠다.”
 
사자는 유리왕의 말을 전한 다음 왕이 자결하라고 보냈다는 칼을 내주었다. 칼을 받아들자 해명은 눈물을 뿌리며 탄식했다.
 
“부왕께서는 그렇듯 나를 알아주시지 못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하는 수 없다. 내 이 칼로 죽을 수밖에 없다.”
 
즉시 칼을 뽑아들고 목을 찌르려 하자 곁에 있던 늙은 신하가 칼을 뺏어 들며 간했다.
 
“태자 잠시 참으시오. 대왕의 맏아드님은 이미 돌아가시고 태자께서 마땅히 그 뒤를 이으셔야 할 몸인데 지금 자결하신다면 나라 일이 장차 어찌 되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대왕께서는 직접분부하신 것도 아니고 사자가 전한 말이니 그 말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러나 해명은 쓸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일찍이 황룡국 왕이 강한 활을 나에게 보냈을 때 내가 그것을 꺾어버린 까닭은 그가 우리나라를 가벼이 볼까 염려해서 힘을 과시했던 것이지만 부왕께서는 그 행동이 오히려 분쟁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라고 보시니 부왕과 나 사이엔 메울 수 없는 생각의 틈이 있는 거야. 이대로 가다가는 그 틈이 점점 벌어지고 신하들도 강한 생각을 갖는 파와 유한 생각을 갖는 파로 갈라질는지도 몰라. 국론을 통일하기 위해서도 나는 없어져야 해.”
 
해명은 이렇게 말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홀몸으로 여진 동원(礪津東原)으로 달려가더니 땅에 창을 거꾸로 꽂아 놓았다. 그리고는 말을 달려 그 주위를 돌다가 스스로 몸을 날리어 그 창끝에 꽂혀 죽었다.
 
이 끔직한 자결의 방법만 보아도 그의 성격이 얼마나 강렬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유리왕 27년 3월, 이때 해명의 나이 한창 젊은 21세였다.
출처 : khy500500
글쓴이 : 올드보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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