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중국 땅에는 위(魏)를 비롯하여 오(吳), 촉(蜀)이 정립(鼎立)되어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바로 소설 <삼국지(三國志)>에 묘사된 그 시대였다. 그리고 위는 우리의 강토에 설치된 군현(郡縣)을 지배하고 있던 공손씨(公孫氏)를 멸하고 그 군현을 장악하게 되자 그와 이웃한 고구려 땅을 엿보게 되었다. 그것은 고구려가 동방의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강성하므로 그 힘을 꺾어야만 동방을 지배하기 수월한 때문이기도 했다.
한편 고구려 역시 중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요동(遼東), 현도(玄菟), 낙랑(樂浪) 삼국의 존재가 서쪽과 남쪽으로 뻗는 힘을 가로막는 장해물이었다. 이때 압록강 유역에 있는 여(麗), 위(魏) 두 나라의 경계는 압록강 하류의 한 지류(支流)인 안평하(安平河)방면이었는데 고구려로서는 이 경계를 뚫고 나가야 강토의 확장을 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동천왕 16년, 왕은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한 일이 있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동천왕 20년 8월, 위나라에서는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을 시켜 군사 만명으로 현도를 거쳐 고구려를 침공케 했는데 동천왕은 적군의 배가 되는 2만 대군을 거느리고 마주 싸워 비류수(沸流水)에서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적군 3천여명을 몰살시켰다.
이런 대승리에 동천왕은 지나친 자신을 가진 모양이었다. 여러 장수를 모아놓고 큰소리를 쳤다.
“위의 장졸이 강하다는 말을 들었으나 우리 장졸 앞에는 감히 대적하지를 못하고 적장 관구검은 명장이란 말을 들었지만 그의 목숨이 이제 내 손아귀에 들어 있지 않은가?”
그런 다음 철기(鐵騎) 5천기를 거느리고 관구검을 멸하고자 돌진했다. 그러나 관구검은 철통같은 방어진을 펴는 한편 교묘한 전술로 역습을 감행해서 전세는 역전되고 고구려군은 마침내 1만8천명이나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다.
동천왕은 하는 수 없이 겨우 1천여기를 거느리고 압록원(鴨綠原)으로 도주했는데 그 해 10월, 관구검은 다시 환도성(丸都城)을 공격해서 함락시키고 장군 왕기를 보내어 동천왕을 추격케 했다,
왕은 하는 수 없이 다시 남옥저(南沃沮)를 향해서 도망하다가 죽령(竹嶺)에 이르렀는데 이때 수하 장졸들은 거의 다 흩어지고 곁에는 겨우 동부 사람 밀우(密友)가 따를 뿐이었다.
왕의 신변이 심히 위태롭게 되자 밀우는 왕을 향해서 “지금 적병의 추격이 매우 다급해서 이대로는 빠져나갈 것 같지 않습니다. 신이 결사대를 이끌고 잠시 적군을 막고 있겠사오니 그 동안에 대왕께서는 속히 피신하시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이렇게 말한 다음 곧 결사대를 조직하고 적군을 가로막아 분투했다.
밀우 등이 분투하는 틈을 타서 왕은 겨우 그 곳을 빠져나가 산골로 피신한 다음 여기저기 흩어진 장졸을 모아 겨우 신변을 호위하게 했다. 그러나 위기를 모면하고 나니 염려되는 것은 밀우의 운명이었다. 왕은 좌우에 모인 장졸들을 향해서 물었다.
“그대들 중에 밀우를 구해 오는 사람이 있으면 후한 상을 주겠다. 누구, 나설 용사는 없느냐?”
그랬더니 하부(下部) 사람 유옥구(劉屋句)가 앞으로 나오며 “신이 가겠습니다.” 말하고는 즉시 달려가서 분투하다 쓰러진 밀우를 찾아 업고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밀우는 심한 상처와 피로로 말미암아 정신을 잃고 있었다.
“나를 위해서 그대가 이 지경이 되었구나.”
왕은 밀우의 머리를 친히 자기 무릎에 눕히고 정성껏 간호하니 밀우는 겨우 소생할 수 있었다. 한때 위기를 모면했다고는 하지만 적군의 추격은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왕은 다시 적군의 손아귀를 벗어나기 어려운 곤경에 빠졌다. 그래서 장졸들을 향해 대책을 물으니 동부 사람 유유(紐由)가 한 계책을 진언한다.
“신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사옵니다.”
“어떤 계책인가?”
“신이 음식을 차린 다음 위군 진영을 찾아가서 질탕히 먹이며 기회를 엿보다가 적의 주장(主將)을 찔러 죽이겠사오니 신의 계책이 성공했다는 기별을 받으시거든 대왕께서는 적이 어지러운 틈을 타서 기습하시기 바랍니다.”
유유의 계책은 자기 한몸을 던지고 나라를 구하겠다는 결사적인 계책이었다. 왕은 눈물을 흘리며 그 계책을 허락했다.
위군 진중을 찾아간 유유는 거짓 항복하며 말했다.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짓고 이렇게 바닷가로 도망해 왔습니다만 이제 힘은 다하고 계책은 궁해서 하는 수 없이 장군께 항복하고자 소신에게 먼저 변변치 못한 물건을 보냈사오니 여러 장졸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십시오.”
“그래? 고구려왕이 항복한다면 어찌 더 싸울 필요가 있겠는가?”
위장은 크게 기뻐하고 유유가 차려 가지고 온 음식을 여러 장졸에게 나누어 주며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유유는 적장에게 음식을 권하는 척하며 그릇을 받들고 다가가서 갑자기 그 그릇 속에 감추어 두었던 비수를 뽑아 적장의 가슴을 찌르고 자기도 자결해 버렸다.
적장이 죽고 나니 유유가 예견했던바와 같이 적군은 크게 어지러워졌다. 우왕좌왕 소란을 피우는 틈을 타서 동천왕은 휘하 장졸을 세 길로 나누어 급히 공격했다. 그런즉 위군은 미처 진영을 갖추지 못하고 낙랑 땅을 거쳐 도망해 버렸다.
이 난을 겪고 나서 국권을 회복하자 왕은 밀우와 유유의 공로를 일등으로 삼았는데 밀우에게는 거곡(巨谷), 청목곡(靑木谷)을 식읍(食邑)으로 주고, 유유를 추종하여 구사자(九使者)란 벼슬을 주었으며 유유의 아들 다우(多優)를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국권을 회복하기는 했으나 환도성은 적군에게 짓밟혀 다시 왕도로 삼을 여지가 없었을 뿐 아니라 백성들도 환도성에 돌아가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 이듬해인 21년 2월,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들과 종묘사직(宗廟社稷)을 그리로 옮겼다.
심한 전란으로 말미암아 심신이 소모될 대로 소모되었던지 동천왕은 평양성에 천도한 이듬해인 22년 9월, 세상을 떠났는데 상하가 모두 다 왕의 승하를 슬퍼해 마지않았으며 군신들 중에는 왕의 무덤 앞에서 자살하는 자가 많았다.
그래서 나라 사람들은 나무를 베어 그 시체를 덮어 주었는데 그 때문에 그 곳 이름을 시원(柴原)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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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통촌 여인 소후의 몸에서 난 왕자가 태자로 책봉되자 왕후 우씨는 더욱 슬프고 외롭고 분함을 이길 수 없었다. 아무리 왕후라는 귀한 자리에 있고 왕의 사랑 역시 아직도 극진하긴 하지만 열매 없는 꽃의 슬픔은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것이었다.
우씨는 그런 괴로움을 죄 없는 어린 태자를 들볶는 것으로 풀어보려고 했다. 어린 태자는 당나귀를 타는 것을 즐겨했다. 티 없는 웃음을 띠며 당나귀를 모는 것을 보자 여러 궁녀들은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손뼉을 치며 환성을 올리곤 했다.
그러나 그런 광경이 열매 없는 꽃에게는 무엇보다도 심한 아픔이었다. 어린 태자가 귀엽게 굴면 굴수록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사랑스럽게 보면 볼수록 질투의 불길은 치열해질 뿐이었다. 태자가 한바탕 당나귀를 몰고 나서 잠깐 쉬고 있을 때, 우씨는 은밀히 사람을 시켜 그 당나귀의 갈기를 잘라 버리도록 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그 이유를 태자의 마음을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그 보다도 너무나 행복해 보이는 태자의 놀이를 방해하려는 충동에서 취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태자는 다시 나귀를 타려고 가까이 갔다. 그리고는 갈기가 없어진 것을 보자 이내 울상이 되었다.
“어유, 불쌍해.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하며 나귀의 목덜미를 어루만져 주었다. 이 광경을 보자 구경하던 사람들은 태자의 고운 마음씨에 새삼 감탄했다. 말하자면 우씨의 심술은 태자의 주가(株價)를 올리는 결과만 초래하고 만 것이다.
또 이런 일이 있었다. 태자를 모시는 궁녀가 태자에게 식사를 바칠 때 우씨는 일부러 국물을 태자의 옷에 엎지르도록 시켰다. 국물을 옷에 엎지르면 웬만한 사람은 펄펄 뛰며 노할 것이다. 태자도 역시 노한다면 그것을 빙자해서 태자의 옹졸한 성품을 비웃어 주리라, 그런 의도에서 시킨 일이었다. 그러나 태자의 태도는 예상밖이었다.
“어머! 이 일을 어쩌나?”
국물을 엎지른 궁녀가 일부러 쩔쩔매는 척하면서 수선을 떠니까 어린 태자는 급히 자기 손으로 국물을 닦고 “괜찮아. 사람이란 누구나 다 실수를 할 수 있는데 너무 걱정하지 말어.”하며 달래는 형편이었다.
산상왕(山上王) 31년 5월, 왕이 세상을 떠나자 태자가 그 뒤를 이었으니 바로 제11대 동천왕(東川王)이다.
왕은 일찍이 출생할 때부터 성장하기에 이르기까지 왕후 우씨의 학대를 심하게 받아 왔지만 조금도 우씨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위에 오르자 우씨를 높이어 태후(太后)로 삼고 극진히 받들었다. 그러니 우씨로서는 스스로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동천왕 8년 9월, 태후 우씨는 마침내 복잡한 생애를 마쳤다. 그러나 임종할 때엔 그렇듯 투기와 집념의 화신 같던 우씨의 마음도 딴 사람처럼 누구려져 있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좋은 행실을 못했으니 장차 무슨 낯으로 지하에서 국양(國讓=故國川王)을 뵙겠는가? 내 죄를 생각하면 길거리나 개울 속에 던져 버려도 마땅하겠지만 대왕께서나 여러 신하들께서 그래도 나를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산상왕릉 곁에 묻어 주기 바라오.”
이렇게 유언했다. 많이 누구러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사랑하던 산상왕에 대한 집념만은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디까지나 마음이 어진 동천왕이었다. 그 유언을 따라 우씨의 유해를 산상왕릉 곁에 장사 지냈다. 그러나 산상왕의 마음은 우씨와 같지 않았던지 한 무당이 왕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선왕께서 저에게 강림하시어 ‘우씨가 내 곁으로 온 것을 보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그와 더불어 싸웠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부끄럽기도 하고 지겹기도 한 일이다. 너는 이 일을 조정에 알려서 나와 우씨 사이를 가로막아 주도록 해라’ 이렇게 분부하셨사옵니다.”
이에 소나무 일곱겹을 심어 막았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생전이나 사후나 남이 보는 바와는 딴판으로 우씨는 외로운 여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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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왕에게는 발기(拔奇), 남무(男武), 연우(延優)등 세 아들이 있었는데 왕은 생전부터 장자 발기보다도 그의 아우 남무를 더 사랑했다. 그러므로 신대왕 12년 3월에는 형을 제쳐두고 남무로서 태자를 삼았던 것이다.
선왕의 뜻이 이러했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이 보기에도 왕위 계승자로서 어느 모로 보나 남무가 훨씬 뛰어났다. 웅위한 자표(姿表), 큰 가마솥을 혼자 들을 만치 강한 완력, 어진 사람의 말은 잘 듣고 옳고 그름을 똑바로 판단하며 과감히 싸울 줄 아는 용맹, 남무는 왕으로서 더 바랄 수 없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즉위한 남무가 바로 제9대 고국천왕(故國川王)이다. 왕은 즉위한 이듬해 2월 우씨(于氏)를 세워 왕후를 삼았는데 우씨는 제나부 우소(提那部 于素)의 딸이다.
왕은 왕후 우씨를 극진히 사랑했다. 그러므로 우씨의 연척들은 그것을 믿고 세도를 잡아 나라 일을 심히 어지럽혔다. 특히 좌가려(左可廬) 등 몇몇 친척은 왕후의 권세를 믿고 사치한 생활을 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자녀를 약탈하고 토지와 집을 빼앗으므로 백성들은 격분한 나머지 왕에게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아무리 우씨를 사랑한다지만 그 친척들의 횡포를 그대로 버려둘 왕은 아니었다. 크게 노한 왕은 즉시 좌가려 등을 잡아 처단하려 했다. 이 눈치를 알아 챈 좌가려 등은 이왕 죽을 바에야 한 번 싸워보고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13년 4월 무리를 모아가지고 왕성을 침범했다.
이에 왕은 노하여 기내(畿內)의 병마를 징집해거 좌가려 등을 모조리 토벌해 버렸다. 그리고 그 기회에 왕은 크게 반성을 하게 되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모두 내가 어진 신하를 쓰지 않고 인재에 적합한 관직을 주지 않은 때문이다. 그러므로 널리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등용하겠으니 사부(四部)에서는 마땅한 인물을 천거하도록 하라.”
이렇게 영을 내렸다. 그랬더니 사부에서는 다함께 동부(東部)의 안류(晏留)를 천거했다. 그래서 왕은 안류를 불러 국정을 맡기려 했으나 안류는 굳이 사양하며 이렇게 진언한다.
“보잘 것 없는 신은 성품이 용렬해서 국정을 맡기엔 너무나 적합지 않습니다. 서쪽 압록곡(鴨綠谷) 좌물촌(左物村)에 을파소(乙巴素)란 사람이 있사옵는데 그 사람이야 말로 이 나라를 바로 잡기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을파소란 어떠한 인물이기에 그렇듯 칭찬하는 거요?”
“을파소는 유리왕 때의 대신 을소(乙素)의 후손이온데 성품이 강직하고 지려(智慮)가 심원하건만 세상에서 알아주지 못하고 쓰지 않으므로 시골에 파묻혀 농사에 힘쓰고 있사오니 대왕께서 등용하심이 가한 줄로 압니다.”
왕은 곧 사람을 보내어 예를 두텁게 하고 을파소를 궁중으로 맞아들였다. 그리고는 중외대부(中畏大夫)에 우대(于台)를 가작(加爵)하는 극진한 대우를 한 다음 말했다.
“내가 외람되어 선업(先業)을 계승해서 왕위에 올랐으나 덕이 박하고 재주가 부족해서 국정을 보살피는데 부족함이 많소. 그러므로 어진 인물을 심히 갈구해 왔는데 공이 이렇듯 기꺼이 와 주니 내 기쁨일 뿐 아니라 나라와 백성들의 복이라고 할 수 있소. 공의 가르침이라면 어떠한 일이든지 기쁘게 받겠으니 정성을 다해 주기 바라오.”
왕은 간곡히 부탁했다. 을파소도 이와 같은 왕의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정을 과감히 쇄신하려면 그가 받는 벼슬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솔직히 말할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슬쩍 이런 말로 자기 뜻을 비쳐보았다.
“신은 원래 불민하므로 그와 같이 큰일을 감당할 수 없사오니 달리 어진 사람을 뽑아 높은 벼슬을 주고 대업을 이룩하시는 것이 좋을 줄로 압니다.”
현명한 왕은 을파소의 뜻을 당장 알아차렸다. 즉시 그에게 최고관직인 국상(國相)을 제수하고 나라 일을 맡아보도록 했다. 이렇게 되니 역대 조신들과 왕족들은 불만이 대단했다. 시골에 파묻혀 있던 촌부가 하루 아침에 자기네들보다 윗자리에 앉게 된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왕에게 참소하여 을파소를 몰아내려고 했지만 왕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구신(舊臣)들에게 강경한 태도로 나왔다.
“제 아무리 관직이 높은 자라도 국상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 당자를 즉시 처단 할 뿐 아니라 일가 친척까지 모조리 멸해 버리겠다.”
이 말로 미루어 왕이 을파소의 인물을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왕이 이와 같이 강경한 태도를 보인 후부터는 을파소는 자기 능력껏 정치를 할 수 있데 되었다.
정교(政敎)를 밝히고 상벌을 삼가고 백성들을 배부르고 편안케 하는 데만 힘을 기울였다. 이렇게 되니 나라 안이 태평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 소문이 외국에까지 퍼지어 그때 마침 전란으로 시달리던 한인(漢人)들까지도 뒤를 이어 피란올 정도였다고 한다.
19년 5월, 현신 을파소의 보필을 받아 각 방면으로 치적을 남긴 왕이 뜻밖에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왕이 세상을 떠난 것은 한밤중, 왕후 우씨와 동침하던 중이었다. 그러므로 왕이 죽었다는 사실은 우씨 이외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왕이 죽은 것을 보자 우씨는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급히 단장을 하더니 시체는 그냥 두고 몰래 침전을 빠져 나갔다.
우씨가 간 곳은 왕의 형 발기(發岐)의 집이었다. 발기는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밤중에 왕후가 찾아온 것을 보고 그저 놀라며 책망하듯 말했다.
“어쩐 일이시오? 이런 이슥한 밤중에 갑자기 찾아 주시니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나요?”
왕후는 한참 동안 발기의 얼굴을 건너다보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대왕의 뒤를 이을 사람에 대해서 의논하려 왔소.”
“대왕의 뒤를 이을 사람이라니요?”
“아시다시피 대왕께서는 후사(後嗣)가 없소. 내 생각으로는 그대가 대왕의 뒤를 잇는 것이 마땅할까 하오.”
한밤중에 찾아와서 이런 말을 하니 웬만한 사람이면 왕의 신변에 이변이 생겼음을 짐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듣자 우둔한 발기는 오히려 훈계하듯 말했다.
“하늘의 역수(曆數)는 스스로 그 이치를 따라 돌아가는 법이외다. 어찌 가벼이 의논할 일이겠소? 오늘밤 왕후의 처사는 실로 아름답지 못하오. 여인된 몸으로 한밤중에 남자를 찾아다니며, 그런 일을 의논하다니 예의에 어긋나는 일로 아오.”
왕후가 임금의 죽음을 숨기고 한밤중에 찾아와서 왕위의 계승을 의논한 것은 새 임금이 될 자에게 그만한 성의를 베풂으로써 서로 정을 두텁게 하고 훗날 이(利)를 보려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니 이렇게 정면으로 따지자면 떳떳한 일이 못되었다. 그런 만큼 발기의 책망을 받자 왕후는 부끄러웠다.
왕후는 그길로 발기의 아우 연우(延優)의 집을 찾아갔다. 연우의 성격은 고지식한 발기의 성격과는 딴판이었다. 사람들을 대하는데도 지극히 부드러워 많은 사람이 따랐다. 왕후가 문을 두드리자 그는 급히 의관을 갖추고 문까지 뛰어 나와 맞아 주었다.
“귀하신 몸으로 이런 누추한 델 찾아주시니… 자 어서 들어오십시오.”
연우는 왕후를 안으로 모셔 들이고, 한밤중인데도 있는 음식을 다 차려내어 후대했다. 발기의 푸대접을 받다가 연우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니 고맙고 흐뭇한 마음에 왕후는 모든 일을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대왕께서 세상을 떠나시다니요?”
연우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서 발기 왕제를 찾아가지 않았겠소? 그랬더니 마치 내가 딴 마음이라도 품고 있는 듯이 말하고 그 대하는 폼이 무례하기 짝이 없구료. 그런 옹졸한 사람과 어떻게 왕위 계승의 큰일을 의논하겠소.”
“그래서 저를 찾아주신 거군요. 황송합니다.”
연우는 기뻤다. 왕후의 말투로 보아 왕위를 자기가 계승할 수 있도록 힘써 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리따운 왕후 우씨와의 거리가 가까워진 게 기뻤다. 나라의 왕후이며 형수인 까닭으로 먼 발치에서 우러러 보기만 하던 꽃송이, 이제 그 꽃송이가 자기 손에 꺾이려 한다.
그는 상을 차리는데도 하인을 시키지 않고 손수 차렸는데 고기 한 덩이를 들고 오더니 손수 칼을 들어 저몄다. 서투른 솜씨지만 그 모양을 왕후는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너무 신이 나서 그랬던지 손을 베었다. 연우의 손가락에서는 붉은 피가 번져 나왔다. 왕후는 밥술을 던지고 연우에게로 다가와서 피나는 손가락을 잡았다. 그리고는 자기 옷자락을 찢어 동여매어 주었다.
“황송 합니다.”
연우가 정중히 사례하는데 첫닭이 울었다. 왕후는 황급히 일어서며 말했다.
“궁으로 돌아가야겠는데, 도중에 무슨 일이 생길는지 알 수 없으니 바래다주오.”
“그저 분부를 따를 뿐입니다.”
연우는 기꺼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두 사람은 손을 마주잡은 채 궁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왕후는 임금의 죽음을 밝혔다. 그리고 선왕의 유언이니 연우에게 왕위를 계승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왕의 유언이라고 하니 반대할 자가 있을 수 없다. 마침내 연우는 그 자리에서 왕위에 오르니 이가 10대 산상왕(山上王)이다.
연우가 왕위를 계승했다는 말을 듣자 발기는 노발대발했다. 곧 군사를 모앙 궁성을 포위했다. 그리고는 성 안을 향해 소리 소리 질렀다.
“연우놈아. 듣거라. 세상을 떠난 왕에게 아들이 없으면 다음 아우나 형이 마땅히 왕위를 계승해야 할 것인데 네놈은 무례하게 차례를 건너 왕위를 빼앗으니 그 죄가 이루 비길 데 없이 크다. 당장 왕위를 내놓고 나오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네 목숨은 없을 줄로 알아라.”
그러나 연우는 성문을 굳게 닫고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발기의 발악은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다.
신하들과 백성들은 모두 연우를 지지하고 수하 장졸들도 하나, 둘 도망쳐 새 임금에게 투항했다. 발기는 하는 수 없이 처자를 거느리고 요동(遼東)으로 도망가 태수 공손탁(公孫度)을 만나 애걸했다.
“고구려왕 남무(男武)가 세상을 떠났소만 뒤를 이을 아들이 없음을 기화로 아우 연우가 형수 우씨와 더불어 모반하여 나를 제쳐놓고 왕위를 빼앗았소. 이는 곧 천륜에 어긋나는 짓으로서 나는 그에 분격하여 상국(上國)에 달려온 것이외다. 태수께서 군사 3만만 빌려주시면 그 자를 쳐서 평정할까 하오.”
공손탁은 그전부터 고구려를 칠 야망이 있었다. 그래서 발기의 청을 들어 주는 체하고 군사를 냈다. 발기가 요동태수와 합세해서 쳐들어온다는 보고를 받자 연우는 곧 아우 계수( 須)에게 군사를 주어 맞아 싸우도록 했다.
계수는 날래고 슬기로운 장수였다. 몸소 선봉이 되어 한병(漢兵)을 공격하니 적의 3만 대군은 여지없이 대패했다. 이때 한병과 함께 도망치던 발기는 그만 고구려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아우 계수 앞에 끌려오자 발기는 애걸복걸했다.
“이제 늙은 형이 싸우다 이롭지 못해 이렇게 사로잡혔지만 우리는 같은 핏줄을 타고난 동기가 아니냐. 그래도 너는 감히 나를 죽이려 드느냐?”
그 말을 듣자 계수는 가슴이 메어지는 듯 아팠다. 군률로서는 마땅히 죽여야 하겠지만 형제의 의리로서는 차마 해칠 수가 없었다.
“작은 형님이 차례를 어기고 즉위한 것은 비록 의리가 아니라 하더라도 큰 형님은 한때의 분을 못참고 외세(外勢)를 빌어 고국을 멸망시키려 하셨으니 이 무슨 처사시오? 이토록 나라를 배반하는 처사를 하였으니 죽은 후에 무슨 면목으로 선인(先人)을 뵙겠소?”
이렇게 책망하니 발기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군률로서는 엄히 다스려야 하겠소만 동기의 정으로 차마 해칠 수는 없소. 형님 좋을 대로 아무데나 가시오.”
계수가 말 한 필을 내어 주니 발기는 말에 올라 정신 없이 달렸다. 어느덧 배천(裵川)에 당도했다. 말도 지치고 임자도 지쳤다. 발기는 떨어지듯 말에서 내려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한 때 아우에게 포로가 되었을 때에는 구차한 목숨이라도 살아보려고 애걸도 했지만 막상 이렇게 몸둘 곳도 없이 되고 보니 생에 대한 애착도 남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스스로 칼을 뽑아 목을 찌르고 자결하였다. 발기가 자결했다는 기별을 받자 계수는 그리고 급히 달려갔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형을 보자 한참 통곡을 한 다음 시체를 거두어 묻고 왕성(王城)으로 돌아갔다.
계수의 개선(凱旋)을 맞아들인 연우는 처음에는 크게 잔치도 베풀고 후대했지만 그 심중은 결코 편치 않았다.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자 연우는 책망하는 듯한 말을 꺼냈다.
“나라를 배반하고 다른 나라에 군사를 청한 발기의 죄는 지극히 크다. 그대는 비록 그를 쳐서 이겼지만 죽이지 않고 목숨을 살려 준 것만도 과한데 그가 자살한 것을 슬퍼하고 그 시체를 묻어 주기까지 했으니 그 말을 들은 백성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골육지정(骨肉之情)도 모르는 잔인한 인간으로 알 것이 아니냐?”
그러자 계수는 그 자리에 꿇어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신은 이제 한마디만 아뢰고 죽기를 바랍니다.”
“무슨 말이냐?”
왕은 물었다.
“왕후께서 비록 선왕의 유명(遺命)으로 대왕을 세웠다고는 합니다만 그 때 대왕께서 마땅히 예로써 사양하시었어야 옳은 줄로 압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곧 형제 간에 우애가 없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겝니다. 신이 시체를 거둔 것은 오직 대왕을 위하는 뜻에서였는데 이렇게 노여움을 살줄이야 미처 몰랐습니다.”
“나를 위해서 그런 처사를 했다구?”
“그렇습니다. 신은 대왕의 아우이며 신은 분부를 받들어 발기를 치러 간 장수입니다. 신이 형의 시체를 거두고 묻어 주는 것을 볼 때 그 누가 계수 한 사람의 소행으로 보겠습니까? 곧 대왕의 분부로 알 것이니 신의 소행에서 우애를 느낀다면 대왕에게도 우애를 느낄 게 아닙니까?”
말을 마치자 계수는 다시 엎드려 절한다. “이제 아뢰고 싶은 말 다 아뢰었습니다. 비록 죽더라도 속이 후련합니다.”
그제야 왕의 노기는 가시었다. 왕은 다가 앉이 아우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내 어리석어 공연히 너를 의심했구나. 지금 네 말을 들으니 진실로 내 허물을 알겠다.”
그리고는 왕과 신하로서가 아니라 다정한 형제로서의 하루를 지냈다. 자기 허물을 뉘우친 왕은 그해 9월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발기의 영구를 영봉하고 왕례(王禮)로써 배령(裵嶺)에 장사지냈다.
연우에게는 원래 처자가 있었지만 발기가 반군을 일으켰을 때 희생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마땅히 새로 왕후를 세워야 했다. 왕족과 중신들은 많은 여인을 후보자로 천거했다.
그러나 왕은 어느 여인에게도 마음이 가지 않았다. 오직 마음이 기우는 것은 우씨뿐이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사모해 온 여인이었다. 오늘의 영광 된 자리를 마련해 준 여인이기도 하다. 그는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우씨를 왕후로 삼았다.
왕이 즉위하고 우씨를 비로 맞은 지도 7년이나 지났다. 그러나 우씨에게는 소생이 없었다. 그래서 그 해 3월, 왕은 참다못해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산천(山川)에 기도했다. 그랬더니 이달 보름날 왕은 한 꿈을 꾸었다.
문득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말하기를 “내 너의 소후(小后)로 하여금 생남(生男)하게 할 것이니 과히 염려하지 말아라.”하는 것이었다. 꿈에서 들은 하늘의 말을 왕은 혼자 새기기 어려워 국상 을파소(乙巴素)에게 의논해 보았다.
“소후로 하여금 생남토록 한다고 하지만 내게는 소후가 없으니 어찌 그것을 바라겠소…”
“하늘의 뜻은 인간으로서 헤아릴 수 없사오니 그저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기다려 보십시요.”
이렇게 말했다. 그 해 8월, 국상 을파소는 병을 얻어 상하가 슬퍼하는 속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후 그의 예견은 적중되었다. 산상왕 12년 11월, 들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려고 묶어 놓았던 멧돼지 한 마리가 줄을 끊고 도망쳤다. 그 일을 맡아보던 사람은 대단히 당황해서 그 뒤를 쫓아갔더니 멧돼지는 주통촌(酒桶村)이라는 마을로 도망쳐 들어갔으나 이리저리 피하며 도저히 잡히지 않았다.
이 때 마침 20세 가량 되는 한 처녀가 지나가다가 방긋이 웃으며 손을 들어 막았다. 그랬더니 그때까지 그렇게 도망치던 멧돼지가 어쩐 까닭인지 잘 길이 든 개처럼 처녀의 발 아래 넙죽이 엎드려 버렸다. 그래서 그 멧돼지를 쫓던 사람은 다시 그것을 묶고 돌아가서 이 일을 왕에게 보고했다.
“네가 잡지 못하던 멧돼지를 그 처녀가 잡았다?”
왕은 그 처녀가 보통처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야릇한 호기심을 느끼고 어느날 기회를 보아 그 처녀의 집을 찾아갔다. 처녀와 가족들은 뜻하지 않게 찾아온 왕을 맞이하자 크게 놀랐다. 그러나 그 사람들보다 더 놀란 것은 왕이었다.
그저 신기한 처녀거니 생각하고 찾아갔는데 그 처녀의 용모가 너무나 아름답고 그 언동이 너무나 매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왕후 우씨 이외의 다른 여자는 거의 모르던 왕도 그 처녀를 보자 몹시 마음이 동했다.
‘저런 처녀에게서 아기를 낳는다면 얼마나 영특한 왕자가 될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왕은 시신을 시켜 그 처녀를 가까이 하겠다는 뜻을 그 부모에게 넌지시 전했다. 처녀의 부모들은 대단히 기뻐했다. 일찍이 처녀의 모친이 처녀를 낳았을 때 한 무당이 “얘는 반드시 왕후가 될 거요.”라고 말하므로 이름을 후녀(后女)라 지었는데 그 예언이 이제 들어맞은 셈이었다.
부모들은 즉시 왕과 처녀가 동침할 자리를 베풀었다. 그러나 후녀는 부모들처럼 덮어놓고 왕의 명을 따르지는 않았다.
“이 나라 누구를 가릴 것 없이 죽이고자 하시면 죽일 수 있고 살리고자 하시면 살릴 수 있으신 대왕의 분부이니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마는 한 가지 간청할 말씀이 있습니다.”
“어떠한 청이냐? 네 청이라면 못들어 줄 것이 어디 있겠느냐?”
이미 후녀에게 마음을 다 빼앗긴 왕이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이렇게 말하자 후녀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만약 아기가 생기는 날에는 저를 버리지 말아 주십사 하는 것이 단 한 가지 청이옵니다.”
“아기가 생기면 버리지 말라? 아기는 바로 내가 무엇보다도 바라는 바인데 어찌 아기의 어미를 버리겠느냐?” 왕이 단단히 약속하자 후녀는 비로소 몸을 허락했다. 그러나 왕은 그 집에서 밤을 새우지는 못했다. 우씨가 두려웠던 것이다.
왕은 날이 밝기도 기다리지 않고 밤중에 그 집을 떠나 왕궁으로 돌아갔다. 총총히 돌아가는 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후녀는 어쩐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저렇듯 왕후의 눈초리를 살피는 왕의 사랑을 받는다고 과연 자기의 앞날이 평탄할까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후녀의 예감은 들어맞았다. 그 이듬해 3월 왕후 우씨는 왕이 주통촌 후녀와 관계한 것을 알게 되었다. 남달리 성격이 강한 우씨가 그냥 있을 리 없었다. 질투에 불탄 나머지 몰래 군사를 내어 후녀를 죽이려 했다. 이 소식이 후녀의 귀에 들어갔다. 후녀는 급히 남장(男裝)을 하고 자기 집에서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군사들의 추격을 받아 잡히고 말았다.
“그년을 잡거든 불문곡직하고 죽여 버려라.”
군사들은 왕후로부터 이런 명령을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후녀를 잡자 당장 칼을 뽑아 목을 치려했다. 그러나 영리한 후녀는 호락호락하게 그 칼을 받지는 않았다.
“너희들이 누구의 명령으로 나를 죽이려 하느냐?”
후녀는 매서운 눈초리로 군사들을 쏘아보며 소리쳤다.
“대왕의 명령이냐? 왕후의 명령이냐?”
군사들은 잠깐 그 기세에 눌렸으나 왕후가 골라 보낸 심복들이었다. 언제까지나 망설이고만 있지는 않았다.
“누구의 명령이면 어떠냐? 우리는 웃어른의 명령을 받고 너를 죽이러 온 것이니 아무소리 말고 이 칼을 받아라.”
“그럴 수는 없다. 나는 죽어도 좋지만 내 뱃속에 들은 아이까지 죽일 수는 없다. 이 아기는 바로 대왕의 아기다. 장차 왕위를 계승할 왕자마저 너희들은 죽이겠단 말이냐?”
이 말을 듣자 군사들은 그 이상 더 칼질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되돌아가 왕후에게 그대로 보고했더니 왕후는 더욱 노하며 후녀를 죽이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주통촌 후녀가 아기를 잉태했다는 말을 듣고 왕이 급히 손을 쓴 것이다. 왕은 사람을 보내 후녀의 신변을 보호하는 한편 기회를 타서 친히 그 집을 찾아갔다.
“네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하는데 그것은 누구의 아이냐?”
왕은 물었다.
“대왕, 어쩌면 그런 것을 다 물으시오.”
후녀는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왕을 쏘아 보았다.
“저는 평소엔 남자 형제와도 한 자리에 않고 몸을 지켜왔어요. 그런데 어찌 다른 남자와 가까이 하겠어요. 하늘에 맹서하겠습니다만 지금 밴 아이는 바로 대왕의 아기입니다.”
후녀의 말을 듣자 왕은 대단히 기뻐했다. 좋은 말로 위로한 다음 후한 선물을 주고 왕궁으로 돌아갔다. 아무리 우왕후를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왕이었지만 10여년 동안이나 기다리던 아기를 낳게 된 이상 그 아기만은 고이 낳아 키워야 했다. 왕은 왕후에게 그 사실을 솔직히 말한 이렇게 못을 박았다.
“만일 생남하면 내 뒤를 이을 왕자이니 왕후도 특히 애호하도록 하오.”
그러니 아무리 사나운 우씨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해 9월, 후녀는 마침내 옥동자를 낳았다. 바라고 바라던 후사를 얻은 왕의 기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늘이 무심치 않아 나에게 후사를 베풀어 주셨으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느냐?”
그리고는 곧 왕자의 생모 후녀를 소후(小后)로 삼았고, 그 후 왕자가 나이 다섯 살이 되자 즉시 왕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그 경사를 계기로 민심을 일신하는 뜻에서 왕도(王都)를 환도(丸都)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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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대왕에게는 추안(鄒安)이란 태자가 있었다. 차대왕이 죽었으니 왕위를 계승할 자는 바로 태자 추안이었지만 그는 부왕이 죽은 이상 자기의 신변이 안전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깊이 산중으로 도망해 버렸다. 그리고 태조왕과 차대왕의 아우 백고(百固)도 일찍이 차대왕의 절제 없는 생활을 충고 했다가 오히려 미움을 사게 되었으므로 산중에 숨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차대왕이 피살되자 백고의 거처만은 자연히 여러 사람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혁명의 주동이 된 명림답부는 좌보 어지류를 비롯한 여러 대신들과 의논한 끝에 백고를 새임금으로 삼을 것을 결정하고 사람을 보내어 그를 궁중으로 맞아들였다. 백고가 궁중에 돌아오자 어지류는 여러 대신을 대표해서 국새를 바치며 간곡히 말했다.
“선군께서 나라를 버리고 또 비록 왕자가 있으나 종적을 감추어 나라 일을 맡아볼 수 없게 됐습니다. 무릇 인심은 어진 분에게 돌아가는 것이므로 삼가 절하며 청하는 것이오니 대위를 계승하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백고는 엎드려 세 번 사양한 다음 대답했다.
“내 왕족으로 태어났으나 아우로서 원래 덕이 없고 형이 두 분이나 왕위에 있었으나 아우로서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일신의 화를 두려워하고 멀리 숨어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대위를 계승하기에는 부족한 자이외다. 그러나 백성들이 나를 추대하고 공들이 굳이 권하니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 스스로 마음을 고치고 힘을 다하도록 하겠소.”
이렇게 말한 다음 마침내 즉위하였으니 그가 바로 제8대 신대왕(新大王)이며 그때 그의 나이가 77세였다. 역시 연로한 임금이었다.
신대왕은 즉위하는 즉시로 국내에 대사령을 내렸다. 그런즉 백성들은 크게 기뻐하며 새임금의 덕을 칭송했을 뿐만 아니라 산중으로 도망했던 차대왕의 태자 추안까지도 스스로 궁중에 나타났다.
“전에 나라에 재화가 있었을 때(차대왕이 피살되었을 때) 두려운 나머지 산속 깊이 숨어있었습니다만 대왕께서 어진 정사를 베푸신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대왕께서 인자하신 덕으로 목숨만 살려 주시고 멀리 놓아 주신다면 더 바랄 나위 없이 고마운 일이겠습니다만 어찌 감히 그것을 바라겠습니까?”
말하자면 대사령을 듣고 자수했으니 목숨만은 살려 달라는 것이었다. 신대왕은 곧 그를 양국군(讓國君)으로 봉하여 여생을 편안하게 했다.
왕은 누구보다도 명림답부에게 크게 보답했다. 즉 그를 국상(國相)으로 삼았으니 좌우보(左右輔)를 고쳐 국상으로 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다시 가작(加爵)하여 패자(沛者)로 삼고 내외병마(內外兵馬)를 맡아보게 하는 한편 양맥부락(梁貊部落)을 겸영(兼領)하게 했다. 명림답부는 혁명의 공신일 뿐 아니라 능력 있는 현신이기도 했다.
신대왕 8년(西紀 172년) 11월, 한(漢)의 현도군 태수(玄 君太守) 경림(耿臨)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침공하리라는 정보가 들어 왔다. 그래서 왕은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국경으로 마주 나가서 싸울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농성을 하고 수비할 것이냐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다른 신하들의 의견은 공격쪽이었다.
“한나라의 군사는 그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거볍게 여기고 있습니다. 만약 나가서 마주 싸우지 않는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용기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자주 쳐들어와 시끄럽게 굴 것입니다. 비록 나가서 싸운다 하더라도 우리의 지세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으므로 적은 군사로 대군을 맞아 싸우기에 적합하다니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명림답부만은 홀로 수 비(守備)를 주장했다.
“적군은 그 수가 많은 데다 지금 사기충천한 기세이므로 마주 싸운다면 그 예봉을 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자기편이 우세하면 나아가 싸우고 열세하면 물러서서 지키는 것이 병가의 상사입니다.”
“그렇지만 농성을 한다고 언제까지나 하겠소? 적군이 끝내 우리를 에워싸고 물러나지 않으면 나중에는 우리가 항복할 수밖에 없지 않소?”
한 신하가 이렇게 반문하자 명림답부는 거기에 대한 견해를 거침없이 밝혔다.
“그 점도 과히 염려할 것은 없을 줄로 아오. 지금 한병은 천릿길에 군량을 운반해야 되므로 오래도록 버티고 지키기만 하면 마침내 군량이 떨어져서 회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우리가 버틸 수 있는 방책은?” “높은 보루를 쌓고 깊은 구렁을 판 다음 양식과 백성들을 모두 다 보루 속으로 들여 놓는 거요. 그렇게 되면 적군은 곡식 한 알 구할 길 없으니 어떻게 오래 우리를 포위하겠소?”
명림답부의 전략은 가장 사리에 맞고 현실적인 것이었다. 왕은 그 전략을 채택하고 농성을 단행했더니 적군은 명림답부가 예언한대로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서 마침내 회군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보자 명림답부는 날쌘 군사 수천을 거느리고 적의 퇴로를 맹렬히 공격하니 적군은 당황실색해 모조리 섬멸되고 필마도 돌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신대왕 50년(西紀 179년) 국상 명림답부가 세상을 떠났다. 왕에게는 오른 팔을 잃은 것이나 다름 없는 슬픔이었다. 왕은 스스로 그 영구를 얼싸안고 통곡했는데 그 슬픔이 원인이 되었던지 90이 넘은 고령 때문이었던지 그 해 겨울 12월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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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 호동이 자결하자 대무신왕은 그 다음 달인 12월에 해우를 태자로 삼았다. 원비의 강청을 물리치기 어려운 때문이었을 것이다. 해우가 태자가 된지 12년만인 대무신왕 29년에 왕이 승하했다. 그러니 응당 해우태자가 왕위를 계승해야 마땅할 것이지만 대신들은 그를 제쳐놓고 대무신왕의 아우인 해색주(解色朱)를 추대하여 왕위에 올려 앉혔다. 그가 곧 제4대 민중왕(閔中王)이다.
해우가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데 대해서 사기(史記)에는 나이가 어린 때문이라고 되어 있지만 태자가 된 후 12년만이니 적어도 거의 다 성장한 젊은이였을 것이다. 사실은 해우의 사람됨이 사납고 어질지 못한 때문에 그를 멀리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민중왕은 즉위한지 겨우 5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마침내 해우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니(西紀 48년) 제5대 모본왕(慕本王)이다.
5년 전에는 왕위 계승에 실패했던 해우가 거기 성공한데에는 여러 가지 기반을 닦아 두기도 했을 것이며 또 왕위 계승의 경쟁자가 별로 없었던 때문이었을는지도 모른다.
모본왕은 왕위에 오르자 그 사납고 잔인한 성격을 여실히 드러냈다. 앉을 때는 비록 대신이라도 그 등을 깔고 앉았으며 누울 때는 허리를 베고 누웠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아래 깔린 사람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용서 없이 목을 베어 죽였고 신하들 중에 그 포악한 행동을 간하는 자가 있으면 당장에 활을 당겨 쏘아 죽였다고 한다.
이렇게 되니 백성들은 모두 왕을 원망하고 군신들은 언제 왕의 손에 죽을는지 알 수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두로(杜魯)라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겁을 먹고 있었다. 두로는 항상 왕의 걸상 노릇을 하는 처지이므로 언제 몸을 움직였다가 화를 당할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두로가 두려워하는 것을 보자 그의 친구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그래도 자네는 사내대장부라고 자처하나?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를 사랑하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라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지금 왕은 함부로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니 곧 백성의 원수라. 자네가 아무래도 죽을 몸이라면 백성을 위해서 옳은 일을 하고 죽는 것이 좋지 않은가?”
그 말을 듣고 두로는 분연히 결심했다. 그 이튿날, 두로는 품에 칼을 품고 입궐했다. 그러나 왕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소리쳤다.
“이놈아! 어서 거기 엎드려.”
두로는 왕의 앞에 엎드렸다. 임금은 그의 등에 걸터앉았다. 그 순간 두로는 칼을 뽑아 밑으로부터 왕을 찔러 죽였다. 모본왕이 즉위한지 6년째 되던 해 11월이었다.
모본왕에게는 익(翊)이라는 왕자가 있었으며 즉위하던 해 10월에 태자를 삼았다. 그러므로 모본왕이 세상을 떠나자 응당 익이 왕위를 계승할 처지였지만 부왕을 닮아서 성품이 용렬하고 사납기만 하므로 대신들은 다른 왕족을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유리왕의 손자 즉 재사(再思)의 아들인 궁(宮)이라는 어린이를 맞아 태조왕(太祖王)을 삼았다. 궁은 아직 나이 7세밖에 안되는 어린아이였지만 세상에 태어나는 즉시 눈을 떠서 만물을 바라보았다고 전해지는 만큼 영리한 아이였으므로 잘 성장하면 누구보다도 훌륭한 왕이 되리라 생각되었던 것이다.
왕은 과연 어진 임금이었다. 많은 치적을 남겨 백성들의 칭송을 샀으므로 사상 유래가 드물게 오래도록 왕위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영주(英主)라도 너무 오래 집권하면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왕에게는 수성(遂成)이라는 아우가 있었다. 성품이 용감하고 위엄이 있어서 여러 번 크게 전공을 세웠으며 그를 따르는 심복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심복들은 연로한 왕을 몰아내고 수성을 세울 모의를 하고 있었다. 왕이 즉위한지 80년 되던 해 7월, 수성이 왜산(倭山)에서 사냥을 하고 사람들과 술자리를 벌였을 때 심복 미유(彌儒)가 어지류(於支留), 양신(陽神) 등 왕의 친구들을 보며 이런 말을 꺼냈다.
“전에 모본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태자가 불초하므로 여러 대신들이 왕자 재사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재사는 연로한 것을 빙자하고 그 아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지 않았습니까? 이와 같이 부형이 늙으면 자제에게 양위하는 것이 도리인데 지금 왕은 너무 연로했으면서도 양위할 의사가 없으니 왕제께선 마땅히 일을 도모하시는 게 좋을 줄로 아오.”
이 말은 수성에겐 무엇보다도 반가운 말이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의 눈치를 살펴보니 몇몇 심복들을 제외하고는 그 말을 옳지 않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말하자면 때가 아직 성숙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능청스러운 수성은 이렇게 말하고 심복들의 입을 막아버렸다.
“왕위 계승은 반드시 적자로 하는 것이 천하의 상도요. 지금 왕은 비록 늙었다 하더라도 적자 막근(莫勤)이 있으니 내가 어찌 감히 왕위를 엿보겠소.”
그러나 수성의 마음은 초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의 나이 벌써 60이 넘었으니 이러다가는 권력을 잡아보지도 못하고 늙어 죽을 판이다. 그 초조함을 달래기 위해서 수성의 생활은 날로 거칠어져 갔다. 항상 궁궐을 비우고 사냥이나 하러 돌아다녔으며 한 번 사냥을 나가면 닷새고 이레고 돌아오지 않았다. 왕제의 몸으로서는 마땅히 비난을 받아야 할 방종한 생활이었다.
수성에게는 백고(伯固)라는 아우가 있었다. 수성과는 딴판으로 총명하고 인자한 인물이었다. 그는 야망을 누를 길 없어 거친 생활을 하는 형 수성이 몹시 민망하게 보였다.
“형님, 복과 환난은 따로 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사람이 부르는 것인데 형님은 왕제(王弟)된 몸으로 지위가 백관의 으뜸이니 마땅히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서 마음을 써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지금 형님이 누리시는 부귀가 몸을 떠나지 않을 것이지 한 때 환락에 빠지면 어찌 화를 스스로 부르는 태도라 아니하겠습니까?”
그러자 수성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네가 나를 훈계하는 거냐? 그러나 백고야 듣거라. 사람치고 부귀와 환락을 바라지 않는 자가 어디 있겠느냐? 다만 그것을 누릴 복을 타고난 자가 만에 하나도 없을 따름이다. 그러나 나는 다행히도 부귀와 환락을 누릴 처지에 놓여 있으니 그것을 마음대로 누리지 않고 늙어 죽는다면 오히려 억울할 뿐이 아니겠느냐?”
두 사람의 인생관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러므로 말이 통할 까닭이 없었다. 그리고 후에 제7대 차대왕(次大王)이 된 수성과 제8대 신대왕(新大王)이 된 백고의 운명도 역시 판이했다.
90년 9월 어느 날 밤, 왕은 꿈을 꾸었다. 한 표범이 호랑이의 꼬리를 물어뜯는 꿈이었다.
이상히 여긴 왕이 좌우에게 그 길흉을 물었다.
“호랑이는 백수(百獸)의 장(長)이며 표범은 그 동류이지만 호랑이보다는 작고 약한 자입니다. 그런데 그 표범이 호랑이를 물었다면, 왕족 중에서 대왕의 뒤를 끊으려고 도모하는 자가 있는 징조로 압니다.”
왕제 수성이 딴 뜻을 품고 있다는 것을 은근히 고한 것이다. 그러나 너그러운 왕은 아우를 의심하는 걸 즐기지 않았다. 그래서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에게 다시 해몽을 명해 보았다. 고복장은 원래 강직하면서도 원만한 중신이었다. 그러므로 해몽 역시 상식적이고 온건한 것이었다.
“옳지 못한 일을 하면 길한 것도 흉한 것으로 변하는 법이오며 옳은 일을 하면 재앙도 복이 되는 법입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나라를 내 집같이 염려하시고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하시는데 비록 이상한 징조가 있기로 어찌 염려하겠습니까?”
그러나 왕의 꿈은 결국 불길한 일의 징조였다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수성의 마음 속에서는 왕을 물리치고 정권을 잡을 야망이 나날이 자라가고 그의 심복들도 그 일을 위해서 은밀히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 그리하여 왕이 흉몽을 꾼지 4년이 지난 94년 7월, 수성은 왜산(矮山) 밑에서 다시 사냥을 했는데 이때 숲 속으로 심복들을 불러 놓고 자기 야망을 털어놓았다.
“지금 임금은 백 살이나 나이를 먹고 90여년 동안이나 임금 자리에 있으면서 죽지도 않고 왕위를 물려 줄 생각도 없는 모양이다. 이제 내 나이 70이 넘었으니 이 이상 기다릴 수는 없다. 그대들은 나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일을 꾸며 주겠는가?”
수성의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심복들은 입을 모아 외쳤다. “삼가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단 하나 꼬장꼬장한 사람이 있었다.
“지금 왕제께서는 옳지 못한 말씀을 하셨는데 그럴 때엔 좌우에서 바른 말로 간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모두들 그저 분부만 따르겠다고 하니 간사한 무리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제 제가 바른 말을 드릴까 합니다만, 허락하시겠는지요?”
“바른 말은 약석(藥石)과 같다고 하니 어찌 듣지 않겠는가?”
“지금 대왕께선 현명하시어 모든 신하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백성들까지도 그 덕을 칭송하고 있는 터입니다. 그런데 왕제께선 임금의 아우 되시는 몸으로서 간사한 무리를 거느리고 현명한 대왕을 폐하려고 꾀하시니 어찌 부당하다고 아니 하겠습니까?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그러한 생각은 아니할 것입니다. 지금 만약 왕제께서 그 마음을 고치시고 착한 마음으로 돌아가시어 웃어른을 섬기신다면 대왕께서도 왕제의 뜻에 감동되시어 반드시 왕위를 물려주실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신대로 일을 저지르신다면 반드시 화가 미칠 것으로 압니다.”
이 말에 수성의 안색은 불쾌한 빛으로 물들었다. 그러자 아참 잘하는 심복들은 그 눈치를 재빠르게 알아차리고 이렇게 고해 바쳤다.
“왕제께서는 임금이 연로한 때문에 나라에 해로울 것을 염려하시고 뒷일을 꾀하시는 터인 데 이렇게 우리와 뜻이 다른 자를 그냥 두었다간 우리의 계교가 누설되어 후환이 미칠까 두렵습니다. 마땅히 이 자를 죽여 입을 막아버리는 것이 상책일까 합니다.”
수성은 그말을 듣자 그 사람을 즉시 죽여 버렸다.
그해 10월, 비로소 우보 고복장(高福章)은 수성이 모반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당황했다. 임금을 뵙고 급히 아뢰었다.
“왕제 수성이 지금 모반하려고 무리를 모으고 있습니다. 먼저 그를 주살하시어 화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상책일까 합니다.”
그러나 늙은 왕은 힘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이미 늙은 몸, 수성은 아직 힘이 왕성하니 그에게 왕위를 곱게 넘겨줄까 하오.”
그 말에 고복장은 펄쩍 뛰었다.
“왕제 수성은 사람됨이 어질지 못하고 잔인해서 오늘 왕위를 이어 받으면 장차 대왕의 자손을 해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어질지 못한 아우에게 은혜를 베푸셨다가 그 후환이 죄없는 자손들에게 미쳐도 좋단 말씀입니까? 다시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왕은 역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왕은 수성을 불러 말했다.
“내 이미 너무 늙어 모든 일을 게을리 하게 된다. 너는 아직 창창한 몸인데다가 안으로 국정에 참여하고 밖으로 군사를 이끌어 큰 공을 세웠으니 넉넉히 백성들을 복되게 할 것이다. 그런 뜻에서 나는 좋은 후계자를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게다. 앞으로도 부디 백성을 사랑하고 잘 다스리도록 부탁한다.”
이렇게 말한 다음 왕위를 물려주고 별궁(別宮)으로 물러갔다.
수성은 마침내 그토록 갈망하던 왕위에 올랐다. 그때 그의 나이 76세, 바로 제7대 차대왕(次大王)이다.
왕위에 오르자 성품이 잔인한 수성이 맨 먼저 착수한 일은 자기의 뜻을 반대하던 사람의 숙청이었다. 일찍이 모반을 권고하던 심복 미유(彌儒)를 좌보(左輔)로 삼는 한편 그와 적대되는 세력의 거물 고복장을 잡아들여 목을 베려 했다. 그러자 고복장은 땅을 치며 탄식했다.
“아, 슬프고 억울하다. 내 선조(先朝)의 은혜를 받은 몸으로 모반을 꾀하는 사람을 어찌 그냥 둘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선군(先君)께 그대를 없애도록 아뢰었지만 듣지 않으신 탓으로 지금 이지경이 되었구나. 그대는 욕심대로 대위를 계승했으니, 마땅히 마음을 고치고 정교(政敎)를 새롭게 해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할 터인데 옳은 말을 한 사람을 죽이려 하니 무도하기 비길 데 없다. 내 이러한 무도한 시대에 사느니보다 속히 죽는 편이 좋으니 어서 죽여 다오.”
고복장은 마침내 형을 받아 죽으니 사람들은 모두 격분해 마지않았다. 수성은 신하들만 숙청한 것이 아니었다. 3년 4월에는 태조대왕의 원자 막근(莫勤)을 죽여 버렸다. 태조대왕의 정당한 후계자를 죽임으로써 민심이 흩어지지 않게 하고 자기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막근이 피살된 것을 보자 막근의 아우 막덕(莫德)은 화가 자기에게까지 미칠 것을 두려워하고 고민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기에 대해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편자 김부식은 이렇게 논평했다.
<태조왕은 의(義)를 알지 못하고 대위를 경솔하게 어질지 못한 아우에게 주었으므로 화가 한 충신과 두 아들에게 미쳤으니 어찌 탄식하지 않으랴. >
그는 그 허물을 태조왕에게 돌렸는데 그 논평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충신과 아들들이 죽을 때 태조왕은 아직 살아 있었지만 이미 실권을 내놓은 그로서는 속수무책(束手無策), 아무 대책도 강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만일 좀더 현명한 눈을 가지고 있어서 정권을 내놓지 않았던지 그것을 물려주더라도 좀 더 사람을 가리어 물려주었다면 이런 참변을 당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수성은 잔인하고 사나운 독재자였는지 모르지만 형에게서 정권을 빼앗을 생각을 한 만큼 난폭하기만한 인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70대에서 90대라는 늙은 몸으로 끄떡없이 정권을 유지한 수완으로 보면 단순한 폭군으로 돌릴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말로(末路)는 좋지 못했다. 20년(西紀 165년) 10월 백성들의 원성이 날로 높아가자 명림답부(明臨答夫) 등에게 왕은 드디어 피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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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나라의 기틀이 잡혀 외환의 우려가 적어지면 안으로 그 권력을 계승하는 자들 간에 암투가 벌어지는 것은 가장 흔히 보는 불상사이다. 고구려의 경우 역시 이 무렵부터 상서롭지 못한 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대무신왕에게는 원비(元妃) 소생의 해우왕자(解憂王子)와 차비(次妃) 소생의 호동왕자(好童王子)가 있었다.
원비 소생의 해우왕자는 아직 나이가 어릴 뿐 아니라 성격이 사납고 거칠었다. 그와 반대로 차비 소생의 호동은 용모가 수려하고 기상이 씩씩하고 마음이 착하므로 왕은 항상 호동을 사랑하고 그에게 기대를 걸어왔다.
원비는 그것이 못마땅했다. 혹시나 자기 소생의 해우를 제쳐놓고 호동을 태자로 삼을까 불안스러웠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적마다 호동을 학대했다. 원비의 학대를 받으니 호동은 궁중에 있기를 싫어했고 항상 외지로 여행하기를 일삼았다.
이때 고구려의 이웃나라 중에서 가장 방해가 된 것은 낙랑(樂浪)이었다. 낙랑은 한사군의 하나로서 이때 호수(戶數)가 61,492호였다고 하니 고구려보다는 비록 국세가 약한 편이었으나 도저히 그것을 정벌할 수가 없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낙랑군이 다른 나라에게 정벌되지 않는 까닭은 적병이 국경에 쳐들어오기만 하면 스스로 울리는 북이 있어 이내 그 정보를 알게 되고 따라서 신속한 임전태세를 갖출 수 있는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 전설을 그대로 믿는다면 오늘날 적기(敵機)의 침입을 알려 주는 레이다 같은 것이 발달되었을 리는 만무하다. 상식적으로 판단한다면 신속한 정보망이 발달되었다고나 할까.
어쨌든 그 ‘스스로 우는 북(自鳴鼓)’에 얽히어 호동왕자와 낙랑태수 최리(崔理)의 딸과의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대무신왕 15년 4월, 사방을 유랑하던 왕자 호동은 옥저(沃沮=城南地方)땅에 이르러 마침 그 곳에 사냥을 나온 낙랑태수 최리와 만났다. 최리는 남달리 준수한 호동의 용모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물었다.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사람 같지 않은데 혹시 북국(北國=高句麗) 신왕(神王=大武神王)의 자제가 아니오?”
호동이 그렇다고 대답하니까 최리는 고구려와 화친하는 뜻에서 후히 대접하고 싶으니 낙랑으로 가자고 권했다. 호동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 기회에 낙랑의 비밀무기인 자명고의 정체를 알아낸다면 자기 나라에 크게 이로울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호동의 그런 속셈도 모르는 최리는 낙랑 궁중으로 돌아가자 융숭히 대접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자기 딸과 혼인까지 시켰다.
최리의 딸과 혼인을 하고 나자 호동은 일단 혼자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최리와 공주에게는 부왕의 허락 없이 혼인을 했으므로 먼저 돌아가서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핑계를 댔지만 속셈은 자명고의 비밀을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자기 나라에 돌아간 호동은 부왕에게 낙랑에는 자명고가 있다는 것과 그 자명고는 무고(武庫) 깊숙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그렇다면 그 자명고를 없애버릴 방도는 없느냐?”
왕은 호동의 보고를 받자 이렇게 되물었다. 그러나 호동으로서는 별다른 묘책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한참만에 왕은 한 가지 계교를 말했다.
“네가 최리의 딸과 혼인을 했다니 최리의 딸은 비록 지난날엔 낙랑의 공주였지만 지금은 어엿한 고구려의 왕비이다. 마땅히 고구려를 위해서 충성을 다해야 할 것이니 네 아내에게 사람을 보내어 자명고를 찢어버리도록 일러라.”
나라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는 왕으로선 당연한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호동에게는 괴로운 명령이었다.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자기만 기다리고 있는 공주에게 자명고를 없애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결국 죽으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공주가 무슨 방법을 써서든지 자명고를 없애버린다면 그것은 낙랑으로서는 최고의 반역 행위이므로 아무리 공주라도 가혹한 형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호동이 망설이고 있으려니까 호동을 미워해 온 원비는 그것을 미끼 삼아 다시 왕에게 참소했다.
“호동이 아무래도 딴 뜻을 품은 모양이에요. 그러기에 자명고를 없애는데 주저하는 게 아니겠어요?” 이렇게 되자 호동은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마음 속으로 공주에게 사과하며 괴로운 붓을 들었다. <그대가 만약 자명고를 없애버린다면 충실한 아내로 알고 맞아올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남편과 남편의 나라에 대한 정성이 없는 것으로 알고 남이 되겠다.>
호동의 편지를 받은 공주는 역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남편의 뜻을 좇자니 부친을 배반하는 것이 되고 부친을 배반하지 않으려면 남편과 영 이별을 해야 한다. 그러나 공주의 애정은 부친보다도 남편에게 더 강했다. 밤이 이슥하기를 기다려서 비수를 품고 무고(武庫) 속에 숨어 들어간 공주는 마침내 자명고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리고 그 사연을 비밀히 고구려땅에 있는 호동에게 전했다.
자명고가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대무신왕은 곧 군사를 일으켜 낙랑을 습격했다.
고구려군이 노도처럼 낙랑 땅에 쳐들어 갈 때까지 낙랑에서는 자명고가 찢어진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무 대책도 없이 고구려군을 맞아 도성이 포위되자 겨우 이상히 여기어 무고를 조사해 보고 비로소 자명고가 찢어진 것을 알았다.
낙랑태수 최리는 그 범인을 추궁해 보니 뜻밖에도 자기 딸이 모든 것을 자백했다.
“예끼, 이 어리석은 것아!”
최리는 비통하게 부르짖고 한칼에 딸을 죽인 다음 고구려군에게 항복했다.
이렇게 되니 호동의 마음은 몹시 괴로웠지만 어쨌든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셈이었다. 왕은 그 공을 크게 칭찬하며 전보다도 한층 더 왕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왕의 총애가 기울면 기울수록 원비는 호동을 두려워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로 호동을 태자로 삼고 자기 소생인 해우는 불우한 처지가 될 것이 확실할 것 같다.
원비는 여러 가지로 궁리한 끝에 한 가지 간교를 생각해 냈다.
“대왕,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어요?”
어느 날 밤, 왕의 거처로 달려가서 눈물을 뿌리며 말했다.
“무슨 일인데 그러오?”
“호동이 아무리 친자식이 아니라도 저를 어미로 대접하지 않으니 이럴 수가 있겠어요?”
“어떤 태도를 취했기에 그러는 거요?”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일이어요. 대왕이 계시지 않을 때면 여러 가지 말로 유인하며 저를 범하려고 하지 않겠어요?”
“뭐라구? 설마 호동이…”
왕은 비의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비는 호동이 자기 소생이 아니라고 모함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렇게 반문해 보았다. 그러나 비는 거짓 울음을 울면서 말했다.
“대왕께서 제 말을 믿지 않으신다면 몸소 그 징조를 살피시어요. 만약 제 말이 거짓이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무슨 죄라도 달게 받겠어요.”
이렇게까지 말하니 왕의 마음에도 의혹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비밀히 사람을 놓아 호동이 하는 일을 일일이 감시하게 하였다.
이것을 알자 호동은 슬펐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부왕만은 자기를 믿어 주실 줄 알았는데 부왕까지 믿어 주리 않으니 살 맛이 없었다. 그리고 부왕에게 자기의 결백함을 밝히는 방법도 없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되면 국모인 원비의 죄악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부왕에게 근심을 끼치고 형제 사이에 더욱 치열한 암투를 벌이게 될 염려가 있었다.
“나 하나만 없어지면 모든 일이 무사히 해결 되리라.”
호동은 이렇게 생각하고 스스로 칼을 물고 땅에 엎드려 자결했다. 대무신왕 15년 11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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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khy500500
글쓴이 : 올드보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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