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산성과 고려궁지 요도-
(조선.컴 발췌 보완)
- 고려궁지(高麗宮址) -
이곳은 고려시대 궁궐이 있던 곳이다.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여 1232년(고려 고종19년)
수도를 개성에서 강화로 옮긴 후 이곳에 궁궐을 건립하고 39년간 사용하였으나 몽골과 화친하여
환도할 때(1270) 몽골의 요구로 궁궐과 성곽 등을 모두 파괴하였다.
그 후 조선시대에는 왕이 행차시 머무는 행궁을 건립하였고 유수부 동헌과 이방청, 외규장각,
장녕전, 만녕전 등도 건립하였으나 이 또한 병자호란과 병인양요 때 대부분 소실되었다.
1964년 이곳은 사적 133호 '고려궁지'로 지정되었고 1977년 강화 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보수정비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유수부 동헌과 이방청, 외규장각(2003년 복원) 강화동종 만 남아있다.
-고려궁지 정문 승평문(昇平門)-
- 강화 유수부 동헌(江華 留守府 東軒)-
** 조선시대 행정 책임자인 유수가 업무를 보던 중심건물이다.
- 명위헌(明威軒)-
** 명위헌(明威軒)이란 현판은 영조 때 명필 윤순(尹淳)이 쓴것이다.
- 외규장각(外奎章閣)-
** 외규장각은 조선 정조 때 왕실관련 서적을 보관 할 목적으로 설치된 곳으로 특히 왕이 친히 열람하는
어람용 의궤를 보관하던 곳이다. 어람용 의궤의 표지는 특별히 비단을 사용하고
종이는 고급 초주지(草注紙) 를 사용하였으며 해서체로 정성들여 글씨를 쓴 다음 붉은 선을 둘러
왕실의 위엄을 더 하였다.
병인양요 때에 외규장각에 보관 중이던 은괴 19상자와 함께 프랑스군의 눈을 자극한 것도
채색 비단 표지에 선명한 그림으로 장식된 어람용 의궤들이었다.
* 복원된 외규장각 뒷편에는 발굴작업이 진행 중이다.
- 강화유수부 이방청(江華留守府 吏房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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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유수부의 행정 실무자들이 업무를 보던 곳이다. 'ㄷ'자형 단층 기와집으로 방이 8칸, 마루가 12칸,
부엌이 1칸으로 모두 21칸 규모이다.
- 강화 동종 -
** 강화 유수 윤지완이 주조한 것을 그 후 1711년 유수 민진원이 정족산성에서 현재와 같은 형태로
다시 주조한 것이다. 높이 198 cm, 입지름 138 cm로 조선 후기 동종으로는 꽤 큰 규모이다.
몸통 중앙에는 굵은 선이 둘러져 있고 그 아래에는 만든 시기를 알 수 있는 글이 새겨져 있다.
성문을 열고 닫는 시간을 알리는데 사용되었다. 1999년 10월에 종에 균열이 생겨 더 이상 타종을
할 수 없게 되어 강화동종을 복제 설치하고 원래의 종은 강화역사관에 옮겨 전시 보관하고 있다.
- 용흥궁 공원 -
** 고려궁지 입구에는 넓은 주차장과 붉은 보도 블럭으로 정비된 용흥궁공원이 있다.
광장 동쪽 언덕에 한옥식 건물의 성공회 강화성당이 보인다.
성공회성당 서쪽 사면은 궁궐의 후원처럼 꾸며져 있다.
- 성공회 강화성당 -
** 성공회 강화성당은 고요한(Charles Jone Corfe)초대주교가 1900년에 축성하였고 궁궐 도편수가
건축공사를 주도하였으며 본래의 모습을 간직하고있다. 궁궐양식이지만 당연히 어처구니는 없다.
- 김상용(金尙容) 순절비 -
** 인조 때 우의정을 지낸 김상용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묘를 모시고 강화로 피란했으나
청나라 오랑캐가 이곳까지 함락하자 남문루에서 분신자결한 충절을 기려 세운비각이다.
- 용흥궁(龍興宮) -
-용흥궁 배치도-
**스켓치로 만든 조그만 안내판 촬영 보완
- 정 문 -
**조선조의 철종(哲宗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 거처하였던 잠저(潛邸)로 강화유수 강기세가
철종4년(1853)에 지금과 같은 건물을 짓고 용흥궁이라 이름지었다. 좁은 골목 안에 대문을 세우고
행랑채를 두고 있어 창덕궁 낙선재와 같은 소박한 분위기를 풍긴다. 궁 안에는 철종 잠저임을 기록한
비석과 비각이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내전 1동, 외전 1동, 별전 1동 등이다. -안내문-
용흥궁은 고려궁지 입구에서 좁은 골목을 100m 쯤 들어가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지나치기 쉽다.
- 내 전(안 채) -
- 외 전(사랑채)-
- 철종조잠저구지 비각 -
- 비 석 -
** 삐딱하게 서 있는 비석에 "哲宗朝潛邸舊址" 라고 기록되어있다.
- 용흥궁 뒷편 공터에서 보이는 궁 전경 -
** 궁 주변은 아직 정리가 완전히 되어 있지는 않다.
- 강화 산성 -
고려가 대몽항쟁을 위해 고종 19년(1232)에 도읍을 강화로 옮기고 궁궐을 지을 때 도성도 함께
쌓았는데 개성의 성곽과 비슷하게 내성, 중성, 외성으로 이루어졌으며 1232년부터 13년간에 걸쳐
쌓았다. 이 중 내성에 해당하는것이 현재의 강화산성이다. 원래는 흙으로 쌓았으나 숙종 3년(1677)에
현재와 같은 석성을 이루었다. 성의 주위 길이는 7,122 m 이며 4개의 대문, 4개소의 암문(暗門),
2개소의 수문(水門), 2개소의 성문장청(城門將廳)이 있었다. 남문은 안파루, 북문은 진송루,
동문은 망한루, 서문은 첨화루 이다. (사적 제 132호)
- 강도남문(江都南門) -
** 남문 루각의 현판에는 안파루(晏波樓)로 쓰여있는데 안내판 해설에는 "안해루"로 되어있고
옆에 달려있는 영어 번역문에는 Anpa-ru 로 되어있다.
- 남문루각 안파루(晏波樓) -
- 남문 성벽 -
** 여장이 복원 되어 있는 성벽은 4대문 양쪽 수십m 뿐이고 기타지역의 잔존 성벽에
훼손된 여장이 남아 있는 곳은 없다.
- 복원을 위해 성벽 주변을 벌채하였다.-
-남산 정상으로 오르는 성벽-
- 정상에서 보이는 강화읍, 한강하구 와 북한 땅-
- 남산 정상 -
**정상에는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 서문 쪽 암문 -
-남산 정상에서 서문 쪽으로 내려오는 성벽-
- 강화 석수문(石水門) -
** 서문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숙종 37년(1711)에 축조되었다.
- 서문 첨화루(瞻華樓)-
- 향 교 -
** 서문과 북문사이 성벽 하록에 강화여자종고가 있고 이 교정에 향교가 있다.
- 북문 진송루(鎭松樓) -
- 북문 주변 성곽 -
- 북문에서 동쪽 북산 정상으로 오르는 성벽 -
- 강도동문[江都東門 :망한루(望漢樓)]-
-Epilogue-
훼손된 성곽 주변의 수목과 잡목 벌채는 대부분 이루어져 복원공사가 시작된것 같으나
완전 복원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될것 같다. 더욱이 민가가 가까운 곳에는 의례 성돌을 빼다가
다른 용도로 사용하여 고지대 보다 훼손이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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