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8년 조작된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소위 121대 일왕 고오메이(孝明)의 독살로 시작된 메이지 쿠데타는 철학의 깊이가 없는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비롯한 하류 사무라이들의 난(亂)이었다. 이는 300여 년 간 지속되어 오던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의 ‘평화의 시대’를 거부하고 ‘살(殺)의 시대’를 선택한 것이다. 메이지 쿠데타는 일본에 있어 근대화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세계 역사상 가장 잔혹한 작태가 집중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했으며 세계는 불행의 시작이기도 했다. 또 오늘날 일본의 보통 국민들이 역사치매에 걸려 이웃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우리식으로 살면 그만이다는 식의 안하무인으로 변하게 만든 출발점이었다.
수천 년간 일본의 스승인 한반도와 중국 諸 아시아 국가들을 ‘터럭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악우(惡友)’라고 비하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은 무지몽매한 이들에게 더욱 살인에 광분하도록 상승작용을 하였다. 또한 이들 3류 사무라이들은 그들의 무지몽매함을 숨기고 일본 국민들을 전쟁과 살인의 광풍으로 몰기 위하여 300년 전 임진왜란을 일으킨 살인의 화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전쟁의 신’으로 승격시키기 위하여 도요쿠니신사 중건 작업도 병행하였다. 이러한 이들은 대외적으로 1895년 청일전쟁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피를 부르기 시작했다.
피에 물든 일제는 1932년 중국 상해를 침범하여 이른바 상해사변(上海事變)을 일으킨다. 상해를 침범한 일제는 일본군들의 사기 진작책으로 1932년 1월 28일 상해 홍구(虹口)에 일본군이 직접 운영하는 최초의 위안소 '다이사룽(大一沙龍)'를 설치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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