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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서 맨발로 황톳길을 걷는다면…. 생각만 해도 상큼하다. 여름이면 온몸이 날아갈 것같이 시원한 느낌이 들겠다. 실제로 대전에서 그런 길을 만들어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다. 바로 계족산 황톳길이다.
대한민국에서 맨발로 숲속 황톳길을 걸을 수 있는 유일한 곳, 지구촌 유일의 맨발축제가 열리는 명소, 한국관광공사에 뽑은 ‘꼭 가봐야 할 곳’, 여행전문기자들이 뽑은 ‘다시 찾고 싶은 여행지 33선’ 등에 해당하는 길이다.
이 길은 봄부터 가을까지 맨발로 걷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이른바 ‘에코힐링(eco-healing)’을 즐기려는 사람들이다. 에코힐링은 ecology(자연과 생태)와 healing(치유)의 합성어로, ‘자연을 통해 몸을 치유한다’는 의미다. 맨발로 흙을 밟으면 발바닥에 느껴지는 시원한 촉감과 숲속에서 나무들이 내뿜는 피톤치드를 흠뻑 들이마실 때 느껴지는 상쾌한 기분은 우리 몸을 더욱 가볍게 만들어준다. 이것이 자연을 통한 치유, 즉 에코힐링인 것이다.
계족산 황톳길은 2006년부터 조성이 시작됐다. 만들어진 계기부터 재미있다. 대전의 선양주조 조웅래 회장은 평소 계족산을 즐겨 찾았다. 어느 날 습관처럼 지인들과 같이 우연히 계족산에 갔다. 함께 간 사람들 중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온 여자 2명이 있었다. 그녀들을 위해 조 회장과 다른 남자 한 명이 운동화를 벗어주고 맨발로 걸었다. 이 ‘맨발사건’이 계족산 황톳길의 출발이다. 전혀 계획에 없던 맨발걷기를 경험한 조 회장은 그 순간 필이 꽂혔다. 발바닥은 화끈거렸지만 느낌이 너무 좋았고, 그날 밤에는 전에 없이 편안한 숙면을 경험했다. ‘아니 이렇게 좋을 수가…’ 조 회장은 작심했다. 모든 사람이 편안하게 맨발로 계족산을 걸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조 회장이 직접 사비를 들여 모든 사람들이 편안하게 맨발로 걸을 수 있도록 황토를 깔기 시작했다. 처음엔 대전 시민들도 “무모한 짓”이라고 비아냥거렸다. 한 번 깐 황토는 비가 오면 금방 씻겨 내려갔다. 잔돌멩이 투성이로 울퉁불퉁했던 계족산 임도도 매년 황토로 수차례 복토하자 마침내 반들반들하고 깨끗한 황톳길로 거듭났다. 지난해까지 들인 비용만 20억 원이었다. 장마가 퍼부어도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조성됐다.
이 길을 대전문화연대 박은숙 문화유산위원과 함께 걸었다. 박 위원은 황톳길을 걸으며 대전의 속살을 조금 더 들여다볼 수 있도록 비래골~옥류각~절고개(황톳길 갈림길)~계족산성~황톳길~장동산림욕장으로 가는 길을 권유했다. 그녀가 권하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경부고속도로가 머리 위로 지나가는 비래골에서 출발했다. 비래동은 고성 이씨 집성촌이다. 마을 입구에 수백 년은 족히 된 듯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밑동이 어른 대여섯 명이 양팔을 맞잡아도 연결되지 않을 만큼 두껍다. 대전에서 가장 두꺼운 나무이며, 비래마을의 당산나무라고 했다. 수령은 500년 이상 됐다고 한다. 느티나무에서 10m쯤 떨어진 근처에 청동기시대 유물인 고인돌 2기가 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하면서 발굴한 것들이다. 금강유역 주변에서는 처음으로 이 고인돌에서 비파형동금이 나왔다. BC 7~6경으로 추정되는 고인돌로 봐서는 군락을 이루고 있었을 텐데, 아쉽지만 지금 남아 있는 것은 2기뿐이다.
- ▲ 1 계족산 황톳길에도 눈이 내려 황토를 완전히 뒤덮어 버렸다. 안내판만 황톳길을 표시하고 있다. 2 눈이 내리지 않았을 때의 황톳길. 진한 황토색이 그대로 난다. 3 황톳길에서 맨발걷기를 할 때의 모습. 박은숙씨 제공 4 총 둘레 1,037m나 되는 계족산성 성벽 위로도 하얗게 눈이 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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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부터 매년 계족산 임도 황토로 복토
느티나무와 고인돌을 뒤로하고 계족산으로 향했다. 박 위원은 “계족산 절고개로 향하는 이 길이 과거 선비들이 한양으로 가기 위해 신탄진 나루터로 가던 길”이라고 설명했다. 그 옛날 과거시험 보러 갈 때는 흙길이었겠지만 지금은 거친 콘크리트가 깔려 있다.
길 옆에 ‘超然物外’(초연물외: 물질에서 벗어나 초연하거나 세속에 얽매이지 마라는 의미)라고 새긴 암각이 눈에 들어왔다. 동국 18현 중의 한 사람인 동춘당 송준길의 글씨라고 한다. 벼슬을 마다하고 귀향해서 자연과 더불어 초연하게 산 그의 삶이 엿보인다.
초연물외 암각에서 계족산 방향으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의 계곡 위에 정자가 하나 있다. 옥류각(玉 閣)이다. 옥 같이 맑은 물이 처마 밑으로 흐른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동춘당 송준길·우암 송시열 등이 자연과 더불어 시를 읊으며 놀던 정자다. 계곡을 훼손하지 않고 지은 정자라고 박 위원은 감탄해 마지않았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우리 선비들의 지혜를 높이 사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위원은 또 옥류각 안에 있는 동춘당이 남긴 글 중에 ‘여기에 오는 젊은이들은 벽에 낙서하지 마라’는 글도 있다고 소개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 사람들의 낙서습성은 여전한가보다.
누각의 위쪽에 비래암이 있다. 과거엔 암자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비래사로 바뀌었다. 삼층석탑도 있고, 대웅전도 지어 제법 절 수준의 크기를 갖췄다. 비래사를 지나면서부터 길은 산길과 흙길로 바뀐다. 본격 계족산으로 접어든 것이다.
계족산(420m)은 일명 닭발산으로 불린다. 예로부터 계족산에는 지네가 많아 닭을 풀어 지네를 잡아먹게 했다고 해서 그 이름이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또 원래 이름은 봉황산이었으나 일제가 한국의 산 이름을 깔아뭉개기 위해 봉황을 닭으로 바꿨다는 얘기도 전한다. 정상 봉황정이 그 증거라고 말한다. 어느 게 정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러 설이 있다.
대전이 지금과 같이 커지기 전에는 계족산이 대전의 진산이었다. 양반과 선비들이 주로 계족산을 중심으로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동춘당과 옥류각, 고택 등이 주변에 있는 것도 회덕이 대전의 옛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계족산 능선 올라가는 길은 참나무와 소나무가 듬성듬성 혼재해 있다. 산림은 별로 우거진 편은 아니지만 남녀노소 누구나 이용할 만한 높이라 많은 대전시민들이 즐겨 찾는다.
절고개로 올라서자 사람들이 많이 찾는 이유를 알 만했다. 높지는 않지만 절고개만 올라도 사방이 확 트여 전체 조망이 가능했다. 또 절고개의 넓은 평지엔 다양한 운동시설을 구비해둬,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동쪽으로는 대청호, 서쪽으로는 대전도심과 금강으로 흘러가는 갑천, 남으로는 계족산 자락인 매봉과 경부고속도로, 북으로는 신탄진 등이 한눈에 들어왔다.
절고개는 또 여러 갈래의 갈림길이기도 했다. 북쪽은 계족산성으로 올라가는 길이고, 서쪽과 동북쪽은 황톳길이 이어진다. 황톳길은 계족산성 북쪽 끝에서 다시 연결된다. 애초 계획대로 계족산성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