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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돈의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줄줄이 탄생한 명클라이머들

호젓한오솔길 2012. 5. 28. 22:54

 

 

[한국 히말라야 50년사 특집 | 명등반가들]

 

고상돈의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줄줄이 탄생한 명클라이머들

  • 글·한필석 부장

 

 

6,000m급 알파인 거벽 등반 스타도 여럿 배출

무릇 인간사가 그러하듯 한국 히말라야 등반도 소수의 산악인들에 의해 부각되고, 또한 맥을 이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록 상 첫 한국 히말라야 등반은 1962년 경희대산악부의 다울라기리2봉(7,751m) 정찰등반이지만 히말라야 등반이 일반 등산인들과 국민들에게 알려진 것은 김정섭 형제의 마나슬루 도전이다. 김정섭 대장이 이끄는 원정대는 1971년(1명 추락사), 1972년(15명 눈사태 사고) 두 차례 원정에서 친동생 2명을 포함해 대원 7명(일본인 1명 포함)과 셰르파 10명 등 무려 16명이라는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어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이렇게 국민 모두에게 큰 충격을 준 히말라야 원정은 1977년 대한산악연맹 원정대(대장 김영도)의 세계 최고봉 등정의 쾌거로서 큰 기쁨을 주기도 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선 직후 무전을 통해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는 소감을 밝힌 인물이 ‘정상의 사나이’ 고상돈(1948년생)이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정치적으로 암울하던 당시, 고상돈의 에베레스트 등정은 국민 모두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준 메시지였다.


 
▲ 고상돈

 

한국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자 고상돈

에베레스트 한국 초등정으로 우리 사회에 등산 붐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히말라야 등반의 활성화에 기폭제 역할을 해 낸 고상돈은 1965년 충북산악회 회원으로 산에 입문했다. 충북 일원의 바위에서 전문등반을 배우며 기량을 닦아온 고상돈이 에베레스트 훈련대에 합류한 것은 1975년 2차 훈련 때였다.

고상돈은 체력과 체격이 탁월할 뿐만 아니라 자기 일에 충실한 데다 겸손함까지 갖추고 있어 훈련 때부터 김영도 대장에게 인정을 받아왔고, 1975년 1차 정찰등반 때부터 7명의 대원 가운데 항상 앞장서 오르는 등 고소 적응 면에서도 두각을 보였다. 1977년 본 원정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김영도 대장은 “단지 ‘시골 출신’이란 핸디캡 때문에 다른 대원들과 융화가 잘 되지 않는 게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었다”고 회고한다.

1977년 에베레스트 원정 당시 1차 공격 대원은 박상열 부대장이었다. 1971년 로체샤르(8,400m) 등반 당시 해발 6,700m까지 오른 경험이 있고, 정상인의 1.5배에 해당하는 폐활량(6,000cc)을 자랑하는 박상열 부대장은 함께 등반한 셰르파들에게서도 최고의 대원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박 부대장은 앙 푸르바 셰르파와 둘이서 나선 정상공격에서 남봉(8,750m)을 넘어 힐러리스텝을 눈앞에 두었을 때 산소통 안의 산소가 떨어지는 바람에 정상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지점에서 되돌아선 다음 해발 8,700m 높이 고도에서 영하 40℃의 혹한 속에서 셰르파와 부둥켜안은 채 비박 후 생환해야 했고, 그로 인해 한국 초등의 기회는 고상돈에게 돌아갔다.

당시 고상돈은 선배인 한정수 대원과 함께 2차 공격조로 내정돼 있었으나, 2차 공격 이후 사용할 예비산소가 없는 상황에서 등정 확률을 높이려는 김영도 대장과 장문삼 등반대장의 의지에 따라 펨바 노르부 셰르파와 둘이서 등정길에 나서 1977년 9월 15일 한국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의 영예를 차지한다.

‘정상의 사나이’ 고상돈은 에베레스트 등정으로 ‘시골 산꾼’에서 산악 영웅으로 변신했으나, 이태 뒤인 1979년 북미 최고봉 매킨리 원정에 나섰다가 5월 29일 등정 후 하산 길에 동료 대원 두 명과 함께 약 1,800m 아래 설원으로 떨어지면서 이일교 대원과 함께 사망했다.

제주도는 2010년 2월 고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고상돈의 기념동상이 서 있는 한라산 1100도로 일부 구간을 ‘고상돈로’로 명명했고, 그에 앞서 제주 산악인들은 고상돈기념사업회(회장 박훈규)를 통해 고인의 산악 정신을 기리고 있다. 고인의 아내인 이희수 여사는 에베레스트 초등을 기념해 정해진 산악인의 날(매년 9월 15일) 행사 때 고상돈특별상을 수여하고 있다.


▲ 허영호(우측)·허재석

 

에베레스트 동계 등정과 횡단 등반 해낸 허영호

1977년 에베레스트 원정 이후 6,000~7,000m급 봉에서 이루어지던 한국 히말라야 원정은 1982년 한국산악회 학술원정대의 마칼루(8,463m·제6위 고봉) 등정으로 다시 한 번 도약한다. 그 원정의 주인공이 제천 산악인 허영호(58·드림앤어드벤처 대표)였다.

허영호는 마칼루 원정에 참가하기 전까지만 해도 ‘제천 촌놈’이라 불릴 만큼 산악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내로라하는 클라이머들로 구성된 대원들 가운데 공격조로 선발되어 마칼루 등정에 성공하고, 이듬해에는 마나슬루 단독등정에 성공한 다음 1985년 3월 투쿠체(6,920m), 1986년 1월 타우체(6,501m)에 이어 그해 여름 알스프 아이거 북벽 등반을 통해 등반력을 보여준다.

허영호는 1987년 12월 22일 에베레스트 동계 등정에 성공, 한국을 대표하는 산악인으로 자리를 굳히는 듯했으나 1989년 가을 가족과 함께 나선 원정에서 성공했다고 공표한 로체(8,516m) 단독 등정이 의혹에 휩싸이면서 산악계를 멀리하게 된다. 허영호의 로체 등반은 일반적인 고산등반과 달리 등·하산이 모두 밤에 이루어졌다는 점, 정상 사진이 없다는 점 등의 이유로 지금까지 등정 의혹이 남아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그는 남극과 북극점 도보탐험에 성공하는가 하면 1993년 에베레스트 횡단 등반과 2007년 에베레스트 남동릉 루트 등정, 그리고 2010년에는 제천 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장으로서 아들 재석군과 정상에 올라 국내 최다 에베레스트 등정 기록을 세우는가 하면 여주~제주 성산읍 단독 왕복비행, 독도 단독 왕복비행 등 초경량비행기를 이용한 탐험활동을 펼치고 있다.


▲ 장봉완

 

대장 카리스마 넘치는 장봉완

고상돈이나 허영호처럼 대중에게 국내 최고의 히말라야니스트라고 각인돼 있지는 않더라도 전문산악인들 사이에서 1980년대를 대표하는 고산등반가로 인정받는 산악인이 장봉완과 김창선이다.

장봉완(60·한국등산학교 교장)은 죽음의 지대에서 30차례 가까이 살아난 산악인이다. 그는  1983년 12월 국내 최초의 알파인스타일 등반으로 꼽히는 틸리초피크(7,134m) 등반에서 등정 후 하산길에 추락해 발목 골절상을 입고 고통 속에서 베이스캠프로 돌아와야 했고, 알프스 마터호른(4,478m) 북벽과 에베레스트(8,848m) 서릉 원정 때에는 극심한 위경련으로 고통을 겪었다. 그때마다 특유의 기질을 발휘하며 위기에서 벗어난 그는 1986년 당대 최고의 클라이머로 꼽힌 김창선(52·성균관대 OB), 장병호(51·대구등산학교 교장)와 함께 K2(8,611m) 정상을 밟고, 1988년에는 대산련 원정대 등반대장으로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선다.

장봉완은 어려웠던 시절 히말라야 고산을 등반하기 위해 선후배들과 함께 알파인프로가이드협회를 창립해 국내 최초 프로 등반가 길을 걸었다. 1983년 틸리초피크 등반은 상업등반으로 이루어진 등반이었다. 그는 탁월한 대장이기도 했다. 1989년 안나푸르나, 1991년 시샤팡마-초오유, 1992년 낭가파르바트, 1995년 가셔브룸1봉, 1996년 옥주봉, 충모강리 등 그가 대장으로서 이끈 원정대는 20여 개 팀에 이른다. 장봉완은 무엇보다 카리스마가 강하고 판단력이 뛰어난 대장으로 꼽힌다. 그는 산과 등반대를 냉정하게 파악한 다음 승산이 없다 판단되면 가차 없이 등반을 접어버린다. 이 때문에 실패한 원정도 더러 있지만 단 한 건의 인명 사고 없이 원정을 이끌어 왔다.

 

꾼들 사이에서 1980년대 최고의 등반가로 꼽힌 김창선

장봉완과 함께 K2 정상을 밟고, 1992년 남서벽 신 루트로 시샤팡마 정상에 올라선 김창선은 지금까지도 ‘국내 최고의 고산등반가’라는 평을 받는 산악인이다. 그는 1979년 성균관대학 산악부 입회 이태 뒤인 1981년 스무 살 나이에 히말라야 원정에 나섰다. 안나푸르나 남봉(7,219m) 등반이었다. 거기서 그는 고소증을 전혀 느끼지 않고 정상에 올라 함께 등반한 선배들을 놀라게 한다.

그의 고산 적응력은 1986년 여름 K2(8,611m)로 이어지고 그 등반에서도 당대 최고 고산 등반가인 장봉완, 장병호와 함께 세계 제2위 고봉을 올라선다. 마지막 캠프 출발 이후 다른 대원들이 분당 4리터의 인공산소를 마셔야 했으나 그는 그 반 정도의 양으로도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고 정상에 올라섰다.

그는 1988년 대한산악연맹 원정대에 참가해 에베레스트 정상마저 밟지만 이후 1989년 성균관대 가셔브룸2봉(8,035m) 원정과 1990년 대한산악연맹 낭가파르바트(8,125m) 루팔벽 원정에서는 연거푸 고배를 마신다.

그의 등반력은 1991년 다시 돋보인다. 여름시즌 대학산악부 선후배들과 함께 재도전한 가셔브룸2봉 정상에 올라서는가 하면, 그해 가을 당대 최고의 등반가들로 구성된 대한산악연맹 원정대 대원으로서 시샤팡마(8,046m) 한국 초등을 이룩한다. 당시 남서벽 등반은 두 차례의 비박 후 정상을 올려친 알파인스타일 등반이었다. 이 등반은 김창선에게 그간 해온 등로주의 방식을 벗어나 좀더 진보적인 히말라야 등반을 알리는 신호나 다름없었다.

이후 김창선은 소규모 등반대로서 난도 높은 등반을 추구하겠다고 마음먹고 이듬해 1992년 여름 ‘플라잉 키위’ 원정대 등반대장으로서 낭가파르바트 루팔벽에 도전한다. 오랜 세월 꿈꿔온 알파인스타일의 등로주의 등반을 실현한다는 꿈이었다. 그러나 그 등반은 악천후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끝나고, 이후 김창선은 결혼과 가족부양이라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위해 히말라야 등반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 (왼)김창선 / (오)엄홍길

 

‘8,000m 14좌 + 위성봉 2개봉’ 세계 첫 등정한 엄홍길

김창선의 등반이 도드라지던 시절, 엄홍길(52·밀레 고문)은 조연인 경우가 많았다. 특히 시샤팡마 원정 때는 루트 개척과 짐 수송을 앞장서 했음에도 정작 정상 공격조에 끼지 못해 서운함이 컸다. 알파인스타일 속공 등반 능력이 김창선이나 김재수보다 못하다는 대장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때 흘린 피눈물은 뒤에 쓴약이 돼 주었다. 엄홍길이 이를 악물고 산만 보고 달릴 수 있도록 ‘힘을 보태준 보약’이었다.

엄홍길은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지만 세 살 때부터 결혼 전까지 도봉산 망월사계곡에서 생활했기에 도봉산은 그에게 고향이나 다름없는 산이다. 그는 양주고 시절 바위꾼을 만나며 본격적인 산꾼이 되어갔고, 1979년 고교 졸업 후에는 설악산 희운각대피소에서 2년간 지내며 30~40kg 무게의 물품을 지어 날라주기도 하고 설악산 골짜기를 누비는 꿈같은 생활을 했다. 그러다 특수부대인 해군 수중폭파대(UDT)에 입대해 매일 혹독한 훈련이 연속되는 수중폭파대원 생활 3년을 거치며 강철처럼 단단하게 만들어 나갔다.

그에게 히말라야 등반은 1985년 세계 최고봉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엔 에베레스트 하나가 목표였다. 그러다 1988년 에베레스트 정상을 올라서고 이후 고봉을 하나씩 오르는 사이 세계적인 산악인이나 가능하리라 여겼던 8,000m 14좌도 해볼 만하다 싶어졌다. 그리고 2000년 K2 등정으로 목표가 달성되자(해외 히말라야 관련 웹사이트에는 2001년 가을 시샤팡마 등정으로 14좌 완등 인정) 그 꿈을 얄룽캉(8,505m)과 로체샤르(8,400m)를 더하는 ‘8,000m 14좌 + 2개 위성봉 등정’으로 키워 나갔다.

2007년 봄 로체샤르 등정으로 꿈을 달성한 이듬해인 2008년 5월 설립된 엄홍길휴먼재단(www.uhf.or.kr)을 통해 네팔 히말라야에 학교 세우기 사업을 펼치고 있는 엄홍길은 지난 2월 말 안나푸르나 트레킹 기점인 비레탄티마을에 네 번째 학교 기공식을 가졌다. 엄홍길은 “꼭 살아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산에 다녔지만 나를 살려둔 건 분명 세상에서 뭔가 좋은 일을 하라는 산의 메시지일 것”이라며 “이제는 도전의 산에서 내려와 내 인생의 산에 도전해 보고 싶다”고 말한다.


 

산악그랜드슬램 + 에베레스트 남서벽 신 루트 등반 성공한 박영석

지난해 가을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 중 신동민, 강기석 대원과 함께 사고를 당한 박영석(1963년생·동국대 OB)은 14좌 완등, 7대륙 최고봉 완등, 3극점 도보탐험을 일컫는 산악그랜드슬램을 2005년 봄 해낸 데에 이어 2009년 봄에는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신 루트를 뚫은 산악인이었다. 히말라야 관련 웹사이트에서는 박영석을 아시아 최초의 14좌 완등자로 기록하고 있다.

엄홍길이 앞장서 길을 뚫는 스타일의 저돌적인 클라이머라면 박영석은 팀 운영을 통해 등정을 이끌어내는 전략가 스타일이었다. 1989년 동국대산악부 팀을 이끌고 랑탕리(7,025m) 동계 세계 초등으로 히말라야에 화려하게 데뷔한 박영석은 1993년 남서벽을 통해 에베레스트를 오르려던 계획이 남동릉 노멀루트로 바뀌었으나 대신 ‘무산소 등정’이라는, 아직도 국내에 없는 기록을 세우면서 세계 최고봉 정상에 올라선다.

박영석은 1997년 다울라기리(8,167m), 가셔브룸1봉(8,068m)·2봉, 초오유(8,201m) 등 한 해 4개 봉 등정에 성공하고, 이듬해 1998년에도 시샤팡마 중앙봉(8,012m), 낭가파르바트, 마칼루, 마나슬루(8,163·동계) 등정에 성공하면서 한 발 앞서 14좌 완등을 향해 등반을 펼치던 엄홍길과 경쟁 구도를 형성하고, 그로 인해 여러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된다. 1999년 봄시즌에는 캉첸중가(8,586m) 등정에 성공하면서 박영석이 엄홍길을 추월하리라는 예상도 됐다.

그러나 1999년 여름 브로드피크(8,047m)는 함께 등반했던 타 대학 팀 대원 1명이 실족사하고, 가을시즌을 맞아 세 번째 도전한 시샤팡마는 첫 번째, 두 번째와 마찬가지로 중앙봉에 머무는가 하면 두 번째 도전인 마칼루(8,463m) 역시 셰르파가 낙석에 맞아 사망하는 사고를 당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박영석은 2000년 들어 피치를 올린다. 봄시즌 마칼루, 여름시즌 브로드피크 등정에 성공하고, 가을시즌에는 네 번째 도전에서 남서벽을 통해 시샤팡마 주봉에 올라선다. 그리고 2001년 봄 1998년 정상 직전 동상으로 인해 포기한 로체(8,516m)를 오르고, 이어 여름에 K2를 오름으로써 14좌 완등에 성공한다.

박영석은 이후 2004년 남극점 도보탐험과 2005년 북극점 도보탐험 성공으로 산악그랜드슬램을 이룩한 세계 최초의 인물이 되지만 그에 만족하지 않고 젊은 날 꿈꿔 왔던 에베레스트 남서벽 신 루트에 도전한다. 2007년 봄 첫 도전에서 친동생 같은 후배 오희준·이현조를 잃고, 2008년 가을 두 번째 도전에서 또다시 실패했으나 박영석은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도전해 2008년 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새 길을 뚫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14개 고봉에 새로운 길을 내겠다는 목표 하에 안나푸르나 남벽 신 루트 등반에 나섰으나 2011년 가을 재도전에서 후배인 신동석, 강기석 대원과 함께 눈사태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 (왼)박영석 / (오)한왕용

 

14좌 완등 후 청소 등반가로 변신한 한왕용

국내에서 세 번째로 14좌 완등에 성공한 한왕용(46·신발끈여행사 이사)은 호남을 대표하는 고산 등반가다. 전주 우석대 산악부 출신인 한왕용은 박영석 사단의 멤버로 히말라야 등반을 시작했다. 1994년 초오유와 시샤팡마 중앙봉, 1995년 에베레스트, 1997년 로체, 가셔브룸1봉은 모두 박영석과 함께 일궈낸 등정이었다. 이후 그는 독자적인 등반대를 꾸리면서도 1998년 안나푸르나와 2000년 K2는 엄홍길 등반대 대원으로서 등정에 성공한다.

한왕용은 2001년 박영석이 K2 등정으로 14좌 완등을 마무리 지은 뒤 잠시 회의에 빠졌다. 대한민국은 1등만이 존재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2년 캉첸중가 등정을 마치고 2003년 마지막 남은 가셔브룸2봉과 브로드피크 원정에 나설 때에는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번이 마지막’이라 마음먹었다.

그 마지막 원정에서 히말라야는 그를 제물 삼으려는지 순간순간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가셔브룸2봉 등정에 성공하고 베이스캠프로 내려설 때에는 크레바스에 빠져 30분간 헤매다 동료 대원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빠져나오고, 브로드피크 또한 등정에는 성공했으나 제3캠프(7,400m)에서 내려서던 중 아이젠이 바지를 걸려 넘어지는 순간 1,000m 아래 빙하로 추락할 뻔한 위기의 상황도 맞는다. 무의식중에 휘두른 피켈이 눈에 박히면서 추락이 멈추고 허겁지겁 안전지대로 벗어났으나 이번에는 갑자기 몰려온 안개에 사방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방법은 다시 C3로 올라서는 것이었고, 그의 판단이 맞아떨어져 결국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14좌 완등 후 다시 14좌를 찾았다. 이번에는 청소등반이었다. 각 고산의 베이스캠프뿐 아니라 에베레스트 사우스콜과 K2 제3캠프에서도 이루어진 그의 청소등반은 해외 산악계에서도 선행으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 박정헌

 

난이도 추구하다 촐라체 사고 이후 창공의 조인으로 변신한 박정헌

촐라체 북벽 등반 후 조난을 당한 다음 극적인 구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생환기 <끈>으로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박정헌(41·노스페이스)은 첫 히말라야 원정부터 난이도를 추구하는 등반을 펼쳤다.

고교시절 전국암벽등반대회 고등부에서 4위에 입상했을 만큼 암벽등반 기량이 뛰어나고, 인수봉 연장등반에 토왕성빙폭을 선등해 냈을 만큼 두각을 나타낸 박정헌이 18세 어린 나이에 삼천포산악회 원정대 대원으로서 도전한 봉이 히말라야 고봉에서도 난이도가 높고 험하다는 초오유 남동벽이었다.

원정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능력은 높이 사졌고 그로 인해 1994년 제대 직후 경남연맹 원정대 대원으로서 히말라야 3대 난벽(難壁) 중 하나인 안나푸르나 남벽에 참가한 그는 그 등반에서 대원 중 홀로 정상에 올라선다. 하지만 전적으로 셰르파들에 의존한 등반이었다며 박정헌은 오히려 부끄러워했다.

더 나은 등반을 위해 몸부림친 박정헌은 결국 이듬해 한국 산악인들이 여러 차례 도전했으나 모두 실패한 에베레스트 남서벽 보닝턴 루트 등반에 성공한다. 그리고 그는 이듬해 1996년 초오유와 시샤팡마 중앙봉을 등정하고 1997년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오른 뒤 잠시 주춤하는가 싶더니 2000년 K2 남남동릉 무산소 등정을 기록하고, 2002년에는 시샤팡마 남서벽에서 오랫동안 꿈꿔오던 8,000m급 고봉 신 루트 등반에 성공한다.

그는 등로주의를 추구했다. 때문에 8,000m급 고봉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2004년 가셔브룸2봉 등반을 마친 이듬해 1월 후배 최강식과 둘이서 촐라체(6,440m) 북벽에 도전한다. 수직고 1,500m 높이의 촐라체 북벽 등반 사상 최초의 동계 알파인스타일 등반에서 뜻을 이룬 뒤 그는 하산길에 후배가 크레바스에 빠지면서 상황이 어려워졌다. 어렵사리 두 사람 모두 죽음의 위기에서 빠져나왔지만 후배는 손가락과 발가락을, 박정헌은 손가락 8개를 잘라내는 아픔을 겪었다.

이렇게 엄청난 사고를 당했음에도 그는 모험의 세계를 떠나지 않았다. ‘수직의 세계’를 추구하는 등반가에서 MTB 라이더로 변신해 사고 이듬해인 2006년 유라시아 실크로드 자전거 투어를 해내고, 그 뒤를 이어 ‘창공의 조인’으로 탈바꿈해 오랜 세월 꿈꿔온 히말라야 하늘을 날았다. 초오유 6,500m 높이에서, 가셔브룸2봉 7,400m 높이에서의 활공을 경험 삼고, 3,4년 동안 히말라야 활공을 통해 축적한 노하우를 밑바탕 삼아 지난해 여름부터 올해 초에 이르기까지 6개월 동안 히말라야 2,400km 패러 횡단을 해냈다.

 

한국 최초의 14좌 무산소 등정 기대주 김창호

김창호(43·몽벨 자문역·월간山 기획위원)는 파키스탄 히말라야에 관한 한 독보적인 탐험가로 통한다. 그는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무려 1,700여 일 동안 파키스탄 히말라야를 탐사했다. 크레바스에 빠지거나 눈사태가 덮치는 순간 그의 존재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수 있는 위험한 곳이었다. 순간순간 찾아오는 험난함에, 고독과 공포에 떨기도 했다. 귓가에 총알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그런데도 새로운 봉우리와 빙하를 보고픈 욕구를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에게 삶은 미지에 대한 도전의 연속이었다.

서울시립대 산악부 출신인 김창호의 히말라야 등반은 대학시절 파키스탄의 대암탑 트랑고타워(6,283m)에서 시작되었다. 어렵사리 정상에 올라섰을 때 그를 감동케 한 것은 등정의 기쁨이 아니라 발아래 펼쳐진 길고 긴 빙하였다. 때문에 그 빙하의 끝을 찾아 오랜 세월 탐험을 했던 것이다.

탐험 도중 그는 수많은 미등봉을 관심 깊게 바라보고 엉성한 지형도에 꼼꼼히 집어넣었다. 그리곤 2001년 멀티4원정대에 참가해 카체블랑사(5,600m) 세계 초등에 이어 혼보로(5,500m)와 시카리(5,928m)에 새로운 길을 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김창호의 등반력은 2003년 딜리상샤르 등 6,000m급 4개봉 세계 초등정을 기록하고 2004년 로체 남벽 등반에 참가한 이후 나타난다. 2005년 낭가파르바트 루팔벽 중앙 직등루트를 1975년 매스너의 초등 이후 두 번째로 오르고 반대편 디아미르벽으로 하산하는 횡단등반에 성공하고, 2006년에는 가셔브룸2봉과 1봉 연속 등정을 해낸다.

이후 다이내믹 부산 희망원정대에 합류한 김창호는 2007년 K2, 브로드피크 연속등정, 2008년 마칼루 등정에 이어 로체 최단시간 등정을 이룩한 데 이어 서울시립대 원정대원으로서 당시 가장 높은 미등정봉인 바투라2봉(7,762m) 등정에 성공한다. 그리고 다시 부산 희망원정대의 주력대원으로서 파트너인 서성호 대원과 함께 2009년 마나슬루와 다울라기리, 2010년 캉첸중가·낭가파르바트·시샤팡마 등정에 성공하고, 2011년 봄 2009년 가을 실패한 안나푸르나 정상에 올라서는가 하면 여름시즌 가셔브룸1·2봉을 다시 오르고 가을 시즌 초오유를 등정함으로써 다이내믹 부산 희망원정대의 14좌 완등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김창호는 올 한 해 등반 휴지기를 가진 다음 내년 봄 시즌 에베레스트 원정에 나서 8,000m급 14좌 무산소 완등을 마무리 지을 계획이다.


▲ (왼)김창호 / (오)김재수

 

고미영의 매니저로서 14좌 완등한 김재수

경남 김해 태생인 김재수(51·대한산악연맹 이사)는 1991년 시샤팡마 남서벽 등반 당시 엄홍길을 비롯해 막강한 클라이머들을 물리치고 김창선과 함께 남서벽 등정조로 뽑혔다. 1996년에는 엄홍길과 함께 남미 최고봉 아콩카구아(6,959m) 최단시간 등하산을 해낸 국내에서 손꼽히는 고산 속도 등반가였다. 그러나 그가 14좌 완등을 마무리하는 데에는 1990년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21년 이란 오랜 세월이 걸렸다.

어린 시절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시작한 신문배달을 통해 하체를 강하게 다진 그는 암벽등반 강습회나 다른 사람의 등반을 곁눈질해 가면서 등반을 익히고, 부산 금정산에서 사귄 클라이머들과 함께 기량을 키워 나갔다.

1987년 말, 제대 직후 다니기 시작한 회사를 그만두고 신발 안창 회사인 백산실업을 차린 그는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자 곧바로 히말라야로 달려간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가 어떻게 생겼는지 직접 보고픈 마음 때문이었다. 그리곤 이듬해 한-일 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원으로 등반에 나서 세계 최고봉 등정에 성공한다.

에베레스트 원정을 앞두고 아침저녁 20km씩 달렸을 정도로 강한 훈련을 견뎌낸 김재수는 1991년 대한산악연맹 원정에서 김창선과 함께 남서벽 알파인스타일 등반에 나서 시샤팡마 정상에 올라 등반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1992년 로부제 동벽, 1993년 캉텐그리, 초오유 단독등정, 1994년 포베다 단독등정, 1995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로체 서벽 등반, 1996년 아콩카구아 최단시간 등하산, 1997·1998년 엘부르즈 등반, 1999년 가셔브룸4봉 등반으로 이어지는 열정적으로 펼친다.

그러나 이후 그는 너무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우면서 회사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자 장기간의 원정을 자제하고 매킨리나 십튼스파이어 등 한 달 남짓한 원정에 한해 활동한다. 그런 와중에 2002년 일본산악인들의 청소등반에 참가했다가 로체 등정에 성공한 그는 2007년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준다는 마음으로 에베레스트 원정을 꾸린다.

거기서 그는 고미영과 인연을 맺는다. 이미 에베레스트 등정을 한 번 실패한 바 있는 고미영은 북릉~북동릉 루트로 정상까지 올라가는 사이 김재수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해 여름 브로드피크 원정에 동행해 달라는 부탁을 한다. 김재수는 딱 한 번만이란 전제로 등반에 참가했으나 브로드피크로 향하는 사이 고미영의 14좌 완등에 대한 꿈을 듣고 매니저 역할을 맡기로 약속한다.

김재수는 고미영과 함께 브로드피크와 시샤팡마를 등정하고, 이듬해 2008년 로체, K2, 마나슬루 3개봉 등정에 이어 2009년에는 봄시즌 마칼루, 캉첸중가, 다울라기리 3개 고봉을 오르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그해 여름 고미영은 낭가파르바트 정상 등정에 성공한 뒤 하산길에 실족사한다.

김재수에게는 K2 원정 때 경남 지역 후배 산악인 3명이 정상에서 내려오다 보틀넥 일원에서 세락 붕괴사고로 목숨을 잃는 비극도 견디기 힘든 사고였지만 2년 반 동안 10개 고봉을 함께 등정하며 히말라야에 대한 꿈을 나누고 키운 고미영의 죽음은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무리한 등반을 자제시키지 못했다는 책임까지 그에게 얹어져 한동안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재수는 고미영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산악인으로서의 의리를 지키는 일이라 생각하고 나머지 고미영이 오르지 못한 나머지 3개 고봉 등정 길에 나선다. 그리 하여 2010년 여름 가셔브룸1, 2봉 등정에 이어 2011년 봄 안나푸르나 등정에 성공하고, 같은 해 가을 1993년 불법월경 등반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초오유 정상에 올라 8,000m급 14개 고봉 등정 레이스의 종지부를 찍는다.


▲ 지현옥

 

설산에서 맹위 떨친 여성산악인 지현옥

남자 산악인들에 비해 수적으로는 비교할 수 없지만 몇몇 여성산악인의 활동은 남자 산악인들을 능가했다. 그중 지현옥(1961년생)은 히말라야 등반에 관한 한 대모(大母)로 꼽힐 만한 여성산악인이다.

1999년 4월 29일 안나푸르나를 등정하고 하산 중 실종한 지현옥은 한국 여성산악인으로서 히말라야 고산등반에 관한 한 독보적인 존재였다. 지현옥이 실종되기 이전까지 국내 여성산악인 가운데 한 번 또는 두 번 정도 고산 등반을 해본 사람은 있지만, 그녀처럼 지속적으로 고산 등반을 추구해 온 여성산악인은 없었다.

서원대 산악부 시절부터 독종으로 꼽혀온 지현옥은 원정을 앞두곤 하루종일 훈련에 몰두할 만큼 준비에 철저했다. 1988년 매킨리(6,194m)를 시작으로 1989년 안나푸르나, 1990년 캉첸중가 원정에 참가한 바 있는 지현옥은 남자 후배들로 구성된 서원대 산악부를 이끌고 중국 고봉 무즈타그아타 등정에 성공하면서 대장의 자질을 인정받고, 그로 인해 1993년 여성 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장을 맡는다. 대산련 집행진과의 갈등으로 무산될 위기도 있었으나 지현옥은 꿋꿋하게 견뎌내고 후배 두 명과 함께 세계 최고봉 정상에 올라선다.

그러나 귀국 후 대산련 집행진과의 갈등뿐 아니라 원정 중 있었던 대원들 간의 불화가 불거져 나오면서 지현옥은 산악계에 회의를 느끼고 한동안 산과 멀리 떨어져 지낸다. 그러나 산을 향한 지현옥의 열정을 사그라지지 않고 다시 활활 타올랐다. 대신 여러 명의 원정을 홀로 준비하고 현지인들을 고용해 등반을 펼쳤다. 그렇게 해서 1997년 가셔브룸1봉에 이어 1998년 가셔브룸2봉을 등정하고, 이듬해 1999년 선배인 엄홍길씨의 제의로 안나푸르나 원정에 동참했으나 안타깝게도 등정 후 하산길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 고미영

 

스포츠클라이머에서 고산 등반가로 변신한 고미영

2009년 11번째 8,000m 거봉인 낭가파르바트(8,125m) 등정 후 하산길에 사고를 당한 고미영(1967년생)은 후배 산악인들에게 의지의 표상이었다. 그녀에게 산은 끊임없는 도전의 대상이자 자기 계발을 위한 장이었다. 고미영은 특히 스포츠클라이머들에게는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그녀는 무엇보다 변신과 도전을 거듭하면서도 단 한 번도 꺾이지 않고 나아가는 후배들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스포츠클라이머로서 산악계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1994년부터 2003년까지 전국등반경기대회 9연패를 달성하고, 아시아 스포츠클라이밍 대회에서도 1997년부터 2003년까지 단 한 번을 제외하곤 여섯 차례나 우승을 차지했다. 아시아대륙은 그녀에게 좁았다. 세계 제패를 위해 달렸다. 그로 인해 2000년 월드컵 랭킹 6위에 이어 2001년에는 5위에 입상했다. 스포츠클라이밍에만 안주하지 않았다. 1999년 빙벽등반을 배운 지 3년 만인 2002년 세계 선수권대회 4위에 오르고, 이듬해 2003년 월드컵 랭킹 5위에 올랐다.

이렇게 스포츠클라이머로서 명성을 쌓아올린 고미영의 꿈이 하얀 산으로 이어지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첫 번째 대상은 파키스탄의 드리피카(6,447m)였다. 거기서 그녀는 등정 길에서 60m나 추락하는 위기를 맞았지만 이를 극복하고 목표를 달성했다. 그 꿈은 이듬해 세계 최고봉 도전에서 꺾이는 듯했으나 이를 쓴약으로 삼고 와신상담, 이듬해 2007년 봄 에베레스트 재도전에 성공했다. 이후 불과 2년 2개월 만에 8,000m급 11개 거봉 등정에 성공했다. 그러나 고미영의 멈추지 않을 듯했던 고봉 등정 행렬은 11번째 거봉인 낭가파르바트 등정 소식이 TV를 통해 전해진 지 하루 뒤인 7월 11일 오후 7시경 추락 사고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 오은선

 

14좌 완등 공표했으나 캉첸중가 등정 의혹에 시달린 오은선

오은선(46·블랙야크)은 2010년 4월 27일 KBS의 위성중계를 통해 전 국민에게 안나푸르나 등정 과정이 방영되면서 14좌 등정을 감동적으로 마무리한 여성산악인이다.

수원대 산악부 출신인 오은선은 1993년 여성 에베레스트 원정대 멤버로 히말라야 등반에 데뷔한다. 그 등반에서 눈에 띌 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으나 고산 등반에 대한 꿈을 저버리지 않고 1997년 대학산악연맹 원정대에 합류해 가셔브룸2봉 등정에 성공한다. 오은선은 이후 박영석 원정대 대원으로서 활동, 1999년 브로드피크와 마칼루, 2001년에는 K2 원정에 동행했으나, 등반마다 한 명씩 목숨을 잃는 사고만 겪고 등정은 하지 못한다.

오은선의 두 번째 고봉 등정은 2004년 에베레스트에서 이루어진다. 14좌에 도전하는 것은 너무도 멀고 힘든 일이라 판단하고 7대륙 최고봉 완등의 일환으로 나선 원정이었다. 오은선은 그 등반에서 세계 최고봉 등정의 목표를 달성했으나 전날 정상에 올랐다 하산길에서 설맹에 의한 탈진사고를 당한 동갑내기 산꾼 박무택의 주검을 목격하고도 그냥 정상에 올랐다는 점 때문에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005년 스키를 타다가 정강이가 복합골절되는 부상으로 한 해 동안 등반을 중단했던 오은선은 2006년 시샤팡마 등정에 성공하고, 이듬해 봄 초오유 등정을 해낸 데에 이어 여름시즌 K2 재도전에서 한국 여성 최초로 K2 등정에 성공한다.

이후 오은선의 꿈은 14좌 완등으로 커졌다. 이어 2008년 마칼루, 로체, 브로드피크, 마나슬루, 2009년 캉첸중가, 다울라기리, 낭가파르바트, 그리고 가셔브룸1봉 등 2년 연속 한 해 4개 고봉 등정에 성공한다. 이렇듯 오은선이 한 해 4개씩 원정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엄홍길과 박영석이 그랬듯이 바싹 좇아오는 고미영의 추격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낭가파르바트 등정 이틀 뒤 고미영이 사고를 당했을 때는 고산 등반에 대한 회의를 느끼기도 했다.

이렇듯 우여곡절 끝에 오은선은 2010년 4월 27일 위성생중계를 통해 정상에 올라서는 과정이 전 국민에게 생중계되는 감격 속에서 14좌 등정 페이스를 마무리 지었으나, 그 한 해 전 올랐다고 발표한 캉첸중가 등정 사진이 불확실하고 등반 과정에 대해 정확한 설명이 뒷받침되지 않아 아직도 한국 산악들 사이에서 14좌 완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중급 고봉에서 난도 알파인 등반 추구하는 유학재

한국 히말라야 등반을 대표하는 산악인은 8,000m급 고봉에서만 탄생한 것은 아니다. 6,000~7,000m대 고봉에서 신 루트나 알파인스타일 등반을 멋지게 구사한 클라이머들도 여럿이다.

그중 유학재(51·필라스포츠 고문)는 대표적인 알파인 거벽 등반가다. 1988년 한국 최대 빙폭인 토왕성빙폭을 1시간38분 만에 오르는 기록을 세우기도 한 유학재는 러시아의 코뮤니즘(7,445m) 등정을 시작으로 1992년 알래스카의 키차트나스파이어 동벽 신 루트 등반에 이어 1994년 미국 요세미티의 거벽 등반을 해낸 다음인 1995년 히말라야 고봉에 첫 진출한다. 대상은 카라코룸 히말라야를 대표하는 거벽인 ‘빛나는 벽’ 가셔브룸4봉(7,925m) 서벽이었다.

한국산악회 원정대의 선봉장으로 나섰던 가셔브룸4봉 서벽 첫 도전은 해발 7,800m 지점에서 끝을 맺었으나 이태 뒤인 1997년 두 번째 도전에서 그는 중앙립 신 루트 개척 등반에 성공한다. 이후 잠잠하게 지내던 유학재는 높이를 더욱 낮춘다. 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의 기간 안에 해낼 수 있는 산을 대상으로 하되 대신 난도 높은 암빙설 혼합벽을 택했다.

그는 이후 2001년 콩데리(6,093m) 북동릉 동계등정에 이어 2005년 콩데샤르 동계등정에 성공하고, 2008년에는 한국산악회 후배들과 함께 파키스탄 히말라야의 오지에 솟아 있는 CAC샤르(5,942m)와 코리안샤르(6,000m) 초등에 성공한다. 그리고 2010년 1월 파릴랍체 신 루트 등반에 성공했으나 안타깝게도 황기용 대원이 하산길에서 심한 복통 끝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하지만 유학재의 알파인 등반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 (위)유학재 / (아래)김형일(왼쪽), 장지명

 

동생 형진과 같은 난도 높은 길 좇다 유명 달리한 김형일

지난해 가을 촐라체에서 후배 장지명과 함께 목숨을 잃은 김형일은 알파인스타일 거벽 등반을 추구하는 등반가였다. 김형일은 동생 형진씨가 1998년 탈레이사가르 북벽에서 추락사한 이후 전문등반에 몰입하기 시작한 클라이머다.

김형일은 1999년 캐나다 부가부 등반으로 혼합 거벽등반을 처음 경험하고 2001년 로체 등반을 통해 해발 7,500m대 고도를 경험해 본 이후 인도 탈레이사가르(6,904m) 북벽 등반(2004년)과, 파키스탄 네임리스타워(6,239m) 신 루트 등정(2005년)을 해낸 데에 이어 카라코룸 히말라야의 아딜피크(5,300m) 신 루트 등정(2008년)에 성공하고 2009년 파키스탄 스팬틱(7,027m) 신 루트 등정으로 절정에 이룬다.

이러한 등반업적으로 2006년 대한민국산악상 개척상을 수상한 데 이어 2009년 한국산악회 황금피켈상을 받기도 했던 김형일은 2008년 K2 클라이밍 팀장을 맡으면서 더욱 열정인 등반을 펼쳤다. 지난해 가을 촐라체 등반에서 함께 사고를 당한 고 장지명과 등반한 가셔브룸5봉(7,321m) 북서벽(2010년)과 자누(7,719m) 동벽(2011년) 같은 등반은 국내 산악인으로서는 첫 시도였다.

김형일은 거벽등반과 알파인 등반 기술 보급에도 힘썼다. 김형진이 1998년 사고 전 문을 연 익스트림라이더등산학교 강사로서 거벽등반 기술 전파에 힘쓰는가 하면 2011년 1월에는 설악산에서 개최한 동계산악인 모임에 일본의 세계적인 알파인 등반가들을 초청해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더욱 많은 클라이머 탄생하기를 기대

앞서 거론한 산악인 외에도 한국 히말라야 등반사를 장식한 산악인들은 무수히 많다. 1998년 탈레이사가르 북벽 등반에 성공하고 정상 설원에서 추락사한 신상만·최승철·김형진 세 악우는 히말라야 혼합 거벽 등반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등정보다는 난도 높은 벽을 도전의 대상으로 삼은 이들이었다.

2007년 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 추락사한 오희준과 이현조는 8,000m 고봉을 단지 등정하는 것보다는 새로운, 자기만의 길로 올라가려는 알피니스트 정신을 추구했던 클라이머들이다. 게다가 2011년 가을 안나푸르나 남벽 기점에서 박영석 대장과 함께 눈사태 사고를 당한 신동민·강기석, 또한 그에 앞서 2009년 가을 히말출리(6,441m) 북벽에서 실종한 민준영과 박종성 역시 머메리즘에 입각해 높이보다 난이도를 추구했던 클라이머들이다.

이들 모두 히말라야 고산 등반에 경험이 많고, 앞으로 더욱 진보적인 첨단등반을 통해 한국 히말라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이들이었기에 많은 산악인들이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물론 앞으로 한국 히말라야 등반사를 장식할 만한 클라이머들로서 현재 히말라야 등반이 진행중인 클라이머도 적지 않다. 13개 고봉 무산소를 기록하고 있는 김창호와 함께 다이내믹 부산 희망원정대의 14좌 완등을 향해 레이스를 펼쳐온 서성호는 이제 K2와 브로드피크 2개 고봉만 남겨놓은 상황이다. 양손가락 장애에도 불구하고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꿈꾸는 김홍빈(광주 송원대 OB), 역시 14좌 완등을 향해 레이스 중인 김미곤(버그하우스), 요세미티의 거벽에서 기량을 닦은 뒤 히말라야 고봉 거벽에서 멋진 등반을 펼쳐왔고 올 여름 라톡1봉(7,145m) 북벽에 도전하는 거벽등반가 김세준(익스트림라이더등산학교 강사)과 탈레이사가르 북벽 한국 초등 외에도 8,000m급 3개 봉 등정자인 구은수(서울시재난구조대)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명 클라이머들이다.

올 여름 한국 히말라야 등반사 50주년을 맞는 8월 15일까지 수많은 히말라야니스트들이 탄생해 왔듯이 앞으로 50년이 지나 한국 히말라야 등반 100주년을 맞는 2062년에는 한 권의 책에 다 적어넣을 수 없을 만큼 많은 클라이머들이 나오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