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 선 화 *
쌍떡잎식물 이판화군 무환자나무목 봉선화과의 한해살이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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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아라고도 한다. 인도 ·동남아시아 원산이다. 햇볕이 드는 곳에서 잘 자라며 나쁜 환경에서도 비교적 잘 자란다. 습지에서도 잘 자라므로 습윤한 찰흙에 심고 여름에는 건조하지 않게 한다. 높이 60cm 이상 되는 고성종(高性種)과 25~40cm로 낮은 왜성종(矮性種)이 있는데, 곧게 자라고 육질(肉質)이며 밑부분의 마디가 특히 두드러진다.
잎은 어긋나고 잎자루가 있으며 바소꼴로 양 끝이 좁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4~5월에 씨를 뿌리면 6월 이후부터 꽃이 피기 시작한다. 꽃은 2~3개씩 잎겨드랑이에 달리고 꽃대가 있어 밑으로 처지며 좌우로 넓은 꽃잎이 퍼져 있고 뒤에서 통상으로 된 꿀주머니가 밑으로 굽는다. 꽃빛깔은 분홍색 ·빨간색 ·주홍색 ·보라색 ·흰색 등이 있고, 꽃 모양도 홑꽃 ·겹꽃이 있다. 수술은 5개이고 꽃밥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씨방에 털이 있다.
열매는 삭과로 타원형이고 털이 있으며 익으면 탄력적으로 터지면서 씨가 튀어나온다. 공해에 강한 식물로 도시의 화단에 적합하다. 옛날부터 부녀자들이 손톱을 물들이는 데 많이 사용했으며 우리 민족과는 친숙한 꽃이다. 줄기와 가지 사이에서 꽃이 피며 우뚝하게 일어서 봉(鳳)의 형상을 하므로 봉선화라는 이름이 생겼다.
봉선화의 꽃말과 전설
꽃말 : 속단된 해결,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무덥고 긴 여름날 청초한 자태를 보이며 함초롬히 피어있는 봉선화에는 슬픈 이야기가 하나 전한다. 옛날 올림프스 궁전에서 연회를 열고 있을때 손님으로 참석한 신들에게 대접할 황금 사과가 한개 없어지고 말았다.
어느 심술 궂은 신의 장난이었는데 그날 손님들에게 음식을 나르던 한 여인이 의심을 받아 쫓겨나고 말았다. 그녀는 누명을 벗고자 필사적으로 호소하나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지 못하고 마음 고생만 하다가 끝내 슬픈 최후를 맞아 봉선화가 되었다.
지금도 봉선화는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결백을 증명하려는 듯 씨주머니를 터트려 자신의 속을 뒤집어 보인다. 꽃말 역시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속단된 해결'이다. 꾹 참고 기다리는 것도 해결을 위한 한가지 방법이다. 너무 성급한 것은 금물!!!
홍난파의 <봉선화>
이 노래가 처음 세상에 나오기는 3.1운동의 다음해인 1920년이다. 도쿄 우에노 음악학교에 다니던 홍난파는 이 해 일단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경성 악우회'라는 음악 단체를 조직, 음악 보급운동을 폈다.그는 소설 창작에도 손을 대어 그 해 4월 <처녀혼>이라는 단편집을 냈는데, 이 때 그 단편집 서장에 <애수>라는 제명의 곡보를 실었다. 뒤에 김형준(피아니스트 김원복씨의 선친)이 가사를 붙여 민족의 주제가가 된 <봉선화>가 탄생했다.
이 노래를 먼저 부르고 또 널리 퍼지게 한 공로자 소프라노 김천애는 "페부를 찌르는 비원의 시구가 아니었더라면 <봉선화>의 가락은 영원히 사장되었을지도 모르지요..."라면서 김형준가 <봉선화>의 가사를 짓게 된 시대적 배경을 설명했다."김형준씨가 살던 집 울 안에 봉선화 꽃이 가득했고, 또 김형준씨는 생전의 홍난파와 이웃해 살면서 교분이 두터웠었죠. 또 김형준씨는 봉선화를 보면 곧잘 '우리 신세가 저 봉선화꽃 같다'는 얘기도 했대요."
그러나 이 노래가 정작 널리 퍼져 모든 사람의 가슴을 울리게 되기는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40년대의 일이다. 김천애가 <봉선화>를 제일 처음 무대에서 부른 것은 1942년 봄 일본 동경 무사시노 음악학교를 졸업한 직후 그곳 히바야 공회당에서 열렸던 신인음악회서의 일이다.
김천애는 "한복 차림으로 무대에 섰지요. 청중들의 앵콜로 <봉선화>를 불렀는데 청중들의 박수 갈채가 떠나갈 듯 했죠. 공연이 끝나자 청중 중의 교포들이 무대 뒤로 찾아와 나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요." 당시의 감회를 회상하듯 김천애는 눈물을 글썽인다.
김천애는 그 해 가을 귀국해서도 서울 부민관, 하세가와 공회당, 평양 키네마 등 여러 곳에서 독창회를 가지면서 그때마다 소복 차림으로 <봉선화>를 불러 청중들의 눈물을 글썽이게 했다.<봉선화>는 빅터와 콜롬비아 두 레코드회사에 취입되면서 더욱 크게 히트, 붐을 일으켰다. 일본 경찰 당국은 드디어 나라를 잃은 슬픔을 봉선화에 비유한 이 노래의 가사를 문제 삼아 이 노래를 못 부르도록 했다.
그러나 김천애는 그 후에도 무대에 설 때 마다 이 노래를 불러 여러 차례나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그러기에 <봉선화>하면 누구든 김천애를 연상하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봉선화>의 제 1절이 아름답게 꽃피우던 성하에의 애절함이라면, 제 2절은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낙화에의 조사이다.일제의 모진 침략으로 쓰라림을 당한 조국의 비운을 여름에 피었다가 가을에 지는 봉선화에 비하여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노래가 이 2절에서 멈추었다면 <봉선화>도 한낱 <아리랑>류의 만가에 그쳐 버렸을 것이라는 게 김천애의 얘기다.
"1절과 2절은 마지막 3절을 도입하기 위한 서사에 지나지 않아요. 비록 모질고 찬바람에 형골마저 사라져 버렸을지언정 혼백은 길이 남아 찾아온 새봄에 다시 살아나기를 바란다는 그 애절한 민족의 염원이 <봉선화>를 단순한 애수 어린 가곡에서 민족의 노래로 승화시키는 모티브가 되는 거지요."라고 김천애는 3절 가사의 뜻을 강조했다.
3절 가사는 <북풍 한설 찬 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 바람에 회생키를 바라노라>
홍난파는 1897년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에서 태어났다.16살 때 조선 정악전습소에 입학, 2년 후에 졸업하여 음악교사를 하다가 일본으로 가서 도쿄 우에노 음악학교에서 본격적인 수업을 했다. 그는 다시 미국으로 가서 셀우드 음악학교를 나왔다.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가곡이 된 <봉선화>외에 그는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 <고향 생각>등 많은 뛰어난 가곡을 남겼고, 바이올린 곡으로 <로맨스>, <애수의 조건>등을 작곡했다.그는 1941년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 노랑물봉선화 *
쌍떡잎식물 무환자나무목 봉선화과의 한해살이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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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기슭의 습지에서 자란다. 높이는 60cm 정도이다. 전체에 털이 없고 연하다. 줄기는 물기가 많고 곧게 서며 가지를 치고 특히 마디가 두드러진다. 잎은 어긋나고 잎자루가 있으며 타원형으로 길이 4∼8cm, 나비 2.5∼4cm이며 가장자리에 둔한 톱니가 있다. 잎 뒷면은 백색이 돌며 약간 뽀얗고 막질(膜質:얇은 종이처럼 반투명한 것)이다. 8∼9월에 연한 황색 꽃이 피는데, 꽃의 안쪽에 적갈색 반점이 있고 총상꽃차례[總狀花序]를 이루며 가지 끝에 2∼4송이씩 붙는다.
꽃대는 가늘고 아래로 늘어진다. 포(苞)는 선형이고 꿀주머니는 밑으로 굽는다. 수술은 5개로 꽃밥이 붙고 암술은 1개이다. 열매는 삭과(殼果)로 좁고 길며 양 끝이 뾰족하고, 익은 후에는 과피가 벌어져 종자가 튀어나오게 된다. 경상남도·경상북도·경기도·평안북도·함경남도·함경북도·동아시아·시베리아·북미·유럽 등지에 널리 분포한다. 꽃색이 연한 것을 미색물봉선(for.pallida)이라고 한다
옛날 어릴적에 시골에서 여자 애들이 손톱에 이쁘게 붉은 물을 들이던 꽃으로..우리 주변에서 가장 흔하고 친근했던 봉선화.. 씨앗이 여물 때 쯤이면 손으로 살짝 건들면 톡톡 터지는 재미에 덜익은 씨앗을 억지로 비벼서 터뜨리기도 했지요.. 그시절을 잠시 회상하며 산행길과 시골집을 오가며 담아 온 봉선화 사진들을 한번 올려 봅니다...
2007.08.07 호젓한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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