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솔길 사랑방 ♥/그때 그시절

이제는 사라진, 그림속의 나룻배

호젓한오솔길 2010. 4. 2. 18:56

 

 

 


 

나루는 언제 생겼는가


 

한양이 조선의 수도가 되기 전에도 사람이 살았을 터이니, 당연히 강을 건너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또 나루터도 있었을 것이지만, 정작 그에 관한 기록을 찾기는 어렵다. 「태종실록」 9월 2일조에서야 비로소 나루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날의 실록 기사는 광진廣津과 노도露渡에 처음으로 별감을 두었음을 알리고 있다. 이 기사는 또 임진·낙하洛河·한강은 별감을 두고 행인을 조사하지만, 금천·노도·광주·광진·용진龍津은 별감이 없어 범죄자들이 마냥 들락거린다고 전하고 있다. 이 중 금천은 서울의 금천구와 시흥시 일대, 광주는 경기도 광주시 일대인데, 이곳 어디에 나루터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머지 임진과 낙하는 각각 모두 임진강에 있던 나루터이고, 노도·광진·용진은 지금 한강의 노량진·광나루·용산으로 역시 나루가 있었던 곳이다.


 

 

중요한 나루들


 

나루터는 문헌에 따라 조금씩 달리 나타난다. 세종 14년에 한강·임진·노량路梁, 露渡 또는 鷺梁·삼전三田·양화楊花에 나루터를 관리하는 벼슬인 도승渡丞, 종9품을 두었고(모두 경기도에 속한 벼슬이다), 성종 때 이루어진 「경국대전」에는 벽란碧瀾과 낙하 두 곳을 추가하고 있다(별감을 도승으로 바꾼 것이다). 벽란·삼전·양화는 앞의 「태종실록」에 보이지 않던 곳이다. 벽란은 예성강에 있던 나루고, 삼전은 지금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 양화는 마포구 합정동에 있던 나루다. 도승을 두어 관리하는 이 일곱 곳은 국가에서 특별히 관리하는 중요한 나루였던 것이다. 하지만 중요도는 바뀌기도 하였다.


 

「선조실록」 26년 10월 3일조를 보면, 한강 나루 중 남쪽 길과 통하는 광진·한강·노량·양화 나루 외의 삼전도·청담·동작은 폐기해도 상관없는 소소한 나루터라고 하고 있다. 시대에 따라 나루터의 지위도 바뀌었던 것이다.


 

한강에 나루가 많이 생긴 것은, 한양이 조선의 수도가 되면서부터이다. 수도로 몰리는 사람과 물자는 대개 한강을 건너야 했기 때문이다.


 

남한강과 북한강은 충청도와 강원도를 경유하기에 두 지방의 세금을 받아 옮기는 길이었다.


 

한강은 또 전라도 일대의 세금과 물자를 바닷길로 옮겨서 서울로 운송하는 길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편 한강은 길을 끊는 장애물이었다. 자연히 강을 건너기에 편리한 곳, 또는 꼭 건너야 할 곳에 자연스럽게 나루가 생겼던 것이다. 「경국대전」에 실린 일곱 나루가 바로 그런 곳이었다.


 

 

나라의 나룻배, 개인의 나룻배


 

나라에서 관리하는 나루에는 일정한 토지를 주었다. 뱃사공은 나루터를 관리하고 행인을 건네주는 노동을 제공하고, 대신 그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생활했다. 이렇게 나라가 지정한 사공이 움직이는 나룻배를 관선官船이라 하였다. 하지만 모든 나루터를 나라에서 직접 관리했던 것은 아니었다. 사공이 개인적으로 돈을 받고 강을 건네주는 배를 사선私船이라 하는데, 그 유래도 오래고 수도 많았다. 「세종실록」 25년 10월 11일조를 보면, 노도·삼전도·양화도의 관선은 무거워서 사람과 말이 쉽게 건널 수 없고, 사선은 가볍고 빨라 쉽게 건너지만 삯이 비싸 백성들이 이용하기 꺼린다는 것이다. 사선은 관선에 비해 서비스가 좋았지만, 값이 비싼 것이 흠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보면 관선이 있는 곳에도 사선이 있었던 것이다.


 

뱃사공의 딱한 삶


 

나루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당연히 뱃사공이다. 사공은 날 때부터 나루를 지키도록 정해져 있는 천민이었기에 평생 나루를 떠날 수 없었다. 한밤중에라도 강을 건너는 양반이 있으면 배를 내어야 한다. 현종 때는 종반宗班, 곧 종실 몇이 궁노宮奴를 데리고 한강 건너편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오다가 동작 나루에 와서 나룻배를 빨리 대령하지 않았다고 사공을 마구 구타했다고 하니(「현종실록」 5년 9월 9일), 사공의 괴로움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또 국가에서 사공들의 생계를 위해 지급한 토지도 양반들이 빼앗기 일쑤였다. 효종 6년의 「실록」 기사에 의하면, 원래 한강의 동작, 노량, 광진, 삼전도, 양화도, 공암 등 나루터에는 병자년 이전에는 모두 위전位田을 지급하고 나룻배를 책임지고 갖추도록 했는데, 병자호란 뒤 위전을 한강 가에 사는 사대부들이 강제로 점유한 탓에 뱃사공들이 살아갈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니 결과는 뻔하다. 배를 만들지도 않고 수리도 않아, 여행객들이 강을 건널 수가 없다. 효종은 다시 위전을 찾아서 주고 경기감사에게 나루터의 관리에 신경을 쓰라고 명령한다(「효종실록」 6년 10월 7일). 하지만 문헌을 보면 이후에도 양반들이 뱃사공을 털어먹는 일이 계속되었다.


 

 

나룻배와 나루터 풍경


 

나룻배와 나루터를 그린 그림이 몇 폭 전한다. 먼저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의 그림 「강 건너는 나룻배」 사진 4를 보자. 두 척의 나룻배는 바닥이 넓은 평저선이다. 원래 조선의 배는 바닥이 넓은 평저선이다. 위쪽 나룻배에는 사람 열둘과 소 두 마리가 타고 있다. 소까지 태웠으니, 꽤나 큰 배다. 인물의 면면을 살펴보자. 고물 쪽의 두 사람은 사공인데, 큰 배라 힘이 드는지 둘이 같이 노를 젓는다. 바로 그 앞에 더벅머리 총각 하나와 맨상투의 상한이 앉았는데, 마주 앉아 곰방대를 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행이 분명하다. 두 사내 앞에 아이를 동반한 아낙네 한 사람이 있다. 머리에 올린 것은 옷이다. 이런 식으로 머리에 옷을 올리는 장면은 신윤복의 그림에도 나오니, 이 당시 풍습이었던 것이다. 아낙네 앞에 삿갓을 쓴 사내가 있는데, 아마도 상한일 것이다. 그 뒤에 갓을 쓴 양반이 있다. 양반은 뒤에 길쭉하게 포장한 것을 지고 있는데,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리고 그 옆에 소 두 마리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서 있다. 등에 잔뜩 진 것은 땔나무다. 서울의 저자에 팔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소 사이에 더벅머리 총각이 곰방대를 물고 있고, 왼쪽 소의 왼쪽에 다시 삿갓을 쓴 사람이 있다. 아마도 삿갓을 쓴 두 사내와 총각은 땔나무를 팔러가는 일행일 것이다. 그리고 다시 오른쪽에는 갓을 쓴 선비가 앉아 있고, 또 그 왼쪽에는 갓을 쓴 양반이 장죽을 물고 있다.


 

 

아래의 배도 마찬가지다. 역시 오른쪽 끝에는 사공이 등을 돌리고 노를 젓고 있고, 그 왼쪽에는 망건 바람의 사내가, 그 오른 쪽에는 갓을 쓴 선비가 있다. 삿갓을 쓴 사내도 셋이 있고, 아이를 업은 아낙도 있다. 맨 왼쪽에는 학자풍의 양반이 점잖게 앉아 강을 보고 있다. 배의 왼편에는 빈 길마를 얹은 소가 한 마리, 말이 한 마리다. 그리고 왼쪽 소의 옆에 검은 물체가 보이는데, 역시 말로 보인다. 어린 총각이 말을 돌보고 있다. 김홍도가 그린 두 척의 나룻배에는, 조선시대의 남자, 여자, 어린애, 양반, 상놈이 한데 모여 있는 것이다. 사진 5는 이형록(李亨祿,  ?-1808)의 「나루터」다. 강에 사공이 삿대로 배를 저어 강가로 오고 있고, 양반 하나가 어린 말구종을 앞세우고 막 나루터로 들어서고 있다. 사진 6 역시 이형록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나룻배」다. 배가 두 척인데, 위쪽의 배는 햇볕을 가리는 포장이 쳐져 있고, 배에 탄 사람은 모두 갓을 쓴 양반들이다. 아래쪽의 배에 탄 사람과 구분이 되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토록 다양한 신분의 많은 사람, 그리고 장사꾼과 소와 말까지 태워 동시에 두 척의 배가 강을 건너는 곳이라면 한강의 어느 나루에서 출발한 나룻배일 것이다.


 

그리운 나루터


 

이제 나루와 나룻배는 사라지고 없다. 서울 시내에 팔 물화를 잔뜩 실은 배, 과거를 보기 위해 시골 선비를 잔뜩 실었던 나룻배는 없어진 지 오래다.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던 주막과 분 냄새 풍기며 손님을 끌던 술집 여인들도 모두 사라졌다. 나룻배가 닿던 곳곳의 나루에는 쇠로 만든 거대한 다리가 놓여 있다. 편리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나룻배를 타고 바람을 맞으며 문득 멍하게 강을 바라다보던 풍경도 같이 사라졌다. 김홍도의 그림 속 나룻배를 탔던 사람들이 어울리던 모습이 혹 그립지는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