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기서 폭포처럼 물이…' 이화여대 기숙사 요절복통 변천사
- ▲ 이화여대 기숙사 별관 황화사
"인제 큰일 났어요. 변소에 갔더니 모르고 뒤의 줄을 잡아당겼더니 물이 폭포처럼 쏟아지는데 인제 얼마 안 있으면 기숙사가 물에 잠기고 말 거예요!"
시계를 거꾸려 돌려 1920년대 경성(현 서울) 도심에 위치한 한 여자대학 기숙사 화장실을 가보자. 수세식 변기를 처음 사용한 한 여학생이 변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에 겁이 덜컥 나 화장실 밖으로 도망쳤다. 함께 간 친구는 물에 빠졌는지 당최 감감무소식이다. 당황한 여학생은 끝내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요즘 시각에서는 '전설' 같은 해프닝이지만 1920년대 이화여자전문학교 기숙사 내에서 실제 벌어진 일이다.
최근 발간된 이화여대 총동창회 소식지에는 이처럼 까마득한 기숙사 시절을 회고하는 글들이 다채로운 사진과 함께 담겨있다. ◇"이화학당 가면 양녀들이 눈을 뺀다"
1886년 이화학당이 세워질 당시 첫 지원생들의 입학한 것은 대부분 가난한 가정 형편때문이었다. 여성 교육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학교측은 수업료 면제를 '당근'으로 제시했다.
1888년 이화학당에 입학했던 김룻세씨는 '이화 70년사'에서 "(학당에 보내달라고 하자)아버지 말씀이 대뜸 '거기 가면 양녀들이 눈을 뺀다'는 것이었다"고 떠올렸다. 개화기 무렵 서양 풍습에 대한 조선사람들의 반감이 반영된 것이다.
그렇다면 실명(?)을 각오하고 들어간 김씨의 기숙사생활은 어땠을까.
김씨는 "학생들이 집엘 다니러 나갔다. 돌아오지 않을까 봐서 (학당에서)통 내보내지를 않아서 십년씩 그 안에서 못 나가 보는 사람도 많았다"고 회고했다.
답답한 기숙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결혼과 유학 둘 뿐이었다고.
김씨는 "공부와 졸업은 별 것이 없고 아홉 살에 들어왔던 아이들이 커서 열여덟이나 열아홉이 되면 시집을 보내든가 또는 여기서 더 배울 것이 없어 외국으로 공부를 하러 떠나가는 경우라야 학교를 나가게 되는 것이었다"고 전했다.
여성은 바깥출입을 삼가했던 시대였다. 이때문에 이화학당은 특별한 전공학습보다 비누를 사용해 몸을 청결케 한다거나, 옷을 깨끗이 입는 법 등을 가르쳐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데 중점을 뒀다고 한다.
◇"씹을 때 소리가 나는 깍두기를 달라"
1945년 해방과 곧 이은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까지 한국 사회는 피폐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 기형적으로 형성된 산업은 그나마 전쟁으로 초토화됐고 정치적 혼란 속에서 재건 작업은 더디게 진행됐다.
1973년 졸업생 조경희씨는 '이화 기숙사 110년 이야기'에서 기숙사 식당의 진풍경을 설명했다.
그는 "식판을 들고 기다랗다 줄을 선 사생들은 '설마 오늘은 아니겠지' 바랐다가 어김없는 삶은 깍두기 때문에 비명을 질렀다. 사생들의 입에서 '제발 씹을 때 소리 나는 김치 좀 주세요'가 가장 큰 외침이었다"면서 학생들이 항의를 한 끝에야 본래 깍두기를 먹게 됐다고 털어놨다.
'삶은 깍두기 소동은'은 당시 여름철이면 만연하던 콜레라 예방을 위해 학교 측이 모든 음식을 익혀서 급식해 벌어진 해프닝. 서울 도심 대학 기숙사라고 해도 전염병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시기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점호 후 2층 식당에 모두 모이자"
1970년대 들어 기숙사생 수는 점차 감소했다. 민주화 투쟁이 전개되면서 학생들이 규율을 지켜야 공동체 생활보다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생활을 선호하기 시작한 것이다.
1980년대 한국사회는 단시일에 산업화를 달성했다. 중산층이 형성됐고 끼니를 걱정하는 극단적 가난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1980년 졸업생 윤명자씨는 "하루는 '점호 후 2층 식당에 모두 모이자'는 쪽지가 방에서 방으로 전달되더니 기숙사 식사에 대한 데모가 터지고 말았다"면서 "꽤 많은 사생들이 모여 사생회 회장의 조사 보고를 듣고는 여기저기서 그동안의 불평불만을 한꺼번에 털어놓았다"고 회고했다.
윤씨는 "한 언니가 발언권을 얻더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기숙사 쌀은 군량미를 들여온 것이라는 둥, 식당 테이블을 주먹으로 치며 다분히 선동적으로 분위기를 몰아갔다"고 덧붙였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한 때 앞선 시설을 자랑하던 기숙사가 외부에 뒤쳐지기 시작했고 과거 같으면 조용히 넘어갔을 불만도 제기됐다. 당시 민주화의 한 축을 맡았던 대학생들의 활발한 참여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5번 전화 받으세요"
1980년대 초까지도 전화는 기숙사 사무실에 1대만 있었다. 외부에서 학생을 찾는 전화가 오면 직원이 각 방에 설치된 스피커로 해당 학생을 호출했다. 3~4층의 학생들의 경우 전화를 받으러 사무실에 달려와 보면 전화는 끊어져 있기 일쑤였단다.
1997년 졸업생 김소희씨는 "1학년 때까지만 해도 600명이나 되는 사생이 단 여섯 대의 전화기를 이용해야 했다"며 "방으로 '김소희 5번 전화 받으세요'란 방송이 나오면 20초 안팎으로 대기되는 전화가 끊기기 전 받기 위해 재빨리 달려야 했다. 방마다 DID(직접 호출방식) 전화기가 놓였을 때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고 떠올렸다.
1990년대 경제성장이 어느 정도 결실을 맺고 이어 찾아온 통신혁명은 전화를 받기 위해 복도를 뛰어다니던 풍경을 사라지게 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고투를 벌여 마침내 '근대녀'로 거듭난 이대생들의 기숙사생활들이 새삼 웃음짓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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