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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알을 뽑아 사진기 렌즈로?

호젓한오솔길 2010. 11. 25. 01:04

 

 

  눈알을 뽑아 사진기 렌즈로?

 

 

 


 

서양 물품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

사진·사진기도 국내에 반입되어 대중화 과정을 거치면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여러 유언비어 때문이기도 했고, 서양문물에 대한 저항에서 일어난 사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서양문물보다 사진·사진기가 유언비어나 물신 사상의 대상으로 쉽게 등장했던 것은 빛을 이용하면서도 빛을 방지해야 하는 사진기의 특성이 한몫을 했다. 사람의 눈을 뽑아 사진기렌즈로 사용한다는 소문으로 시작된 이 사건은, 사진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880년대의 무더운 여름날 서울에서 있었던 일이다. “외국인들이 어린아이들을 잡아다가 눈알을 빼어 사진 약으로도 쓰고 사진기의 렌즈로도 사용한다.”는 것이 소문의 내용이었다.


 

 

 


 

이것은 삽시간에 서울과 지방으로 전파되었고, 결국 외세에 대한 반감은 애매하게도 사진과 사진기에 집중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사진기의 신통력에 있는 듯 했지만, 사실 외국인들에 대한 거부감과 당시 원인을 알 수 없는 어린이 실종사건이 사진과 사진기로 향했던 반감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사진기가 유입되고 그해 4월부터 우연인지 필연인지 어린아이들이 자주 실종됐다. 실종 어린이 사건이 해결되지 않은 채 영구미제 사건이 되면서, 뒤숭숭한 마음으로 가슴앓이를 하던 민중들은 이상하고 요상한 물건인 사진기를 떠올리게 되었고 사건의 방향은 외국인 배척으로 점점 흘러가게 되었다.


 

소문은 소문의 꼬리를 물고 “외국인들이 조선아이를 잡아다가 삶아먹고 쪄 먹으며 눈알을 빼서는 사진기의 렌즈로 사용한다.”고 와전이 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건의 중심에는 서양인이 있었고 천주교와 함께 일본인의 소행이 거론되었다. 사진·사진기를 앞세운 방편은 다른 어느 문물보다 효과가 빨랐다. 당장 폭력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이 모여 살던 서울 중구 정동의 외국인촌에는 몽둥이를 들고가 출입을 통제했으며, 일본인 촌인 진고개 일대에는 “어린이를 데리고 절대 이 길을 출입하지 말라.”는 방을 내붙였다. 진고개의 일본인 가옥에는 밤마다 날아드는 돌팔매질 때문에 집단 피난을 하기도 했다. 조선의 아이들은 근 한 해 동안 바깥출입도 하지 못했다. 어린아이들을 유괴하여 삶아 사진 약을 만든다든가 카메라의 렌즈로 사용한다는 유언비어는 국왕인 고종까지 해결에 나서게 만들었다. 당시의 『조선중앙일보』지에는 이러한 유언비어 때문에 여성교육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내용의 기사도 있다. 어린아이를 잡아다가 살을 베어 지져먹고, 눈알을 뽑아서 사진기계를 만드는 불칙한 놈들에게 글을 배울 수는 없다는 서민들의 입장이 그것이었다.


 

 

 


 

사진과 사진기의 수난시대


 

 

개화 초부터 1880년대 무렵은 사진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을 비롯한 일본인들의 정탐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인들의 사진 활동은 도처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한국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필요로 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미지의 한국을 사진으로 찍어 일본에 가져가면 활용하는 출판사가 줄을 이었다. 그만큼 일본인이 사진을 찍는 풍경은 흔한 일이었다. 청일전쟁 때의 일이다. 우리나라 북쪽지방에서 청나라 군사가 후퇴할 때의 일이었다. 일본인이 사용하던 사진기가 대포로 오인되면서 수수밭이 황지荒地가 된 사건이다. 차청오의 「내가 치른 난리 이야기」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한 가지 우스운 일은 춘천읍 공지천孔之川 부근에서 별안간 대군이 중지를 하더니, 그 중에 대장인 듯한 사람 4, 5명이 말을 타고 경춘가도로 한참동안 달려왔다 가서는 다시 수천 명을 지휘하여 돌아와, 노변에 있는 남의 수수밭에다 대고 총을 수백 발을 놓고 나중에 다시 칼과 창으로 그 수수밭을 막무가내로 찔러서 황지荒地를 만들어놓고 지나가던 그것이다.” 우리는 무슨 큰 전쟁이 났나하고 놀랐는데 나중에 들으니 그날 춘천읍에 어떤 일본인 사진사가 왔다가 청병이 온단 말을 듣고 피하여 경성으로 도망가는 길에 그 수수밭에다 사진기를 던지고 갔다. 민간에 소문이 돌기로는 일본 사람이 대포(아마 사진틀을 대포로 안 듯)함을 가지고 와서 그 수수밭에 매복을 하였다고 해서 청병이 그 말을 듣고 그리한 것이었다.
 


사진과 사진기로 표출된 샤머니즘 현상


 

서양 과학 기술 문명이 일상생활에 가시적 현상으로 표출됨에 따라,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고 이용하려는 노력보다 오히려 기술 그 자체가 귀신들의 재앙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우려와 공포를 느끼게 되었다. 사진기나 사진도 샤머니즘이 정신적 신앙이었던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마술 상자였으며 귀신의 물건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타의에 의해서 사진기로 비쳐지기만 해도 신의 노여움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사진을 찍으면 피가 마른다. 사진을 한 번 찍으면 몸이 마르고 두 번 찍으면 명이 짧아진다. 어릴 때 사진을 찍으면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게 된다. 세 사람이 같이 사진을 찍으면 가운데 사람은 죽는다. 사진기에 자신의 그림자라도 비치게 되는 경우에는 일 년 이내에 죽고 집에 비추기만 해도 가문이 몰락하고 가족은 일 년 이내에 죽는다. 부부가 함께 촬영하면 생이별을 하게 된다는 등 불안한 속설은 끊임이 없었다.


 

 

 


 

우리의 옛 조상들은 생활에 작용하는 불가사의한 힘을 믿어 왔었다. 울창한 덤불, 낮이라도 어두운 동굴, 오래된 우물, 허물어진 옛날 집과 같은 폐허 등 음기가 가득 차 있는 곳에는 귀신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고 해서 가까이 가기를 꺼려했다. 초목과 기물 등에서 나타나는 귀신은 그 자체가 신화神化되는 것이 아니라 떠도는 정령이 여기에 머물러 재앙을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서민들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불가사의한 힘을 발휘하는 귀신 아닌 것이 없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가재도구나 완구까지도 귀신이 붙어 다니는 것으로 생각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진과 사진기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은 이렇듯 샤머니즘에 기인한 민속신앙이 저변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사진의 특성상 암실에서 작업을 해야 하고 감광 재료를 다루어야 하는 감춰진 작업을 해야 했기 때문에 개화기 초 서민들은 사진과 사진기를 하나의 불가사의한 비법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글·사진 | 최인진 사진역사연구소장  
사진제공 한국콘텐츠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