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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욱의 여행 풍경] 경북 경주

호젓한오솔길 2011. 2. 6. 21:23

 

[Why] [오영욱의 여행 풍경] 경북 경주

  • 글·사진·일러스트=오영욱 건축가·여행작가

 

 

리모델링 판치는 세상에 30년 묵은 호텔아, 반갑다

 

문득 경주에서 며칠을 보내기로 했다. 외국과는 달리 말도 잘 통하고 숙소도 많을 테니 예약 없이 비수기에 찾아가기엔 더없이 좋을 장소였다. 하지만 조금만 인터넷 발품을 팔면 좋은 호텔도 여관 값에 묵을 수 있는 것이 비수기의 장점. 그래서 호텔 예약 사이트에 들어가 경주의 호텔들 중 하나를 선택했다.

 

호텔의 역사가 마음에 들었다. 1977년 호텔 법인 설립, 1979년 호텔 전관 개관. 1976년생인 나로서는 나이가 엇비슷한 동년배를 만난 느낌이기도 했다. 구석구석 낡아 있을 것이 당연했지만 깨끗이 잘 관리된 낡은 것들은 그 자체로 매력일 수 있을 터였다.

당시 이곳은 일본의 투자를 받아 보문관광단지 개발과 더불어 지어졌다고 한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주로 보이는 전형적인 Y자 평면의 건물에 위층으로 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형태의 사진이 마음에 들었다. 노동집약적 건축의 시대에 기술보다는 인간 육체의 힘으로 지어진 건물임이 분명했다.

결론적으로 나흘 동안 묵었던 호텔은 마음에 쏙 들었다. 관광단지 주변의 새 호텔들이나 외국계 체인 호텔, 깔끔한 콘도들도 나름의 매력이 있겠지만, '곱게 낡아 있음'을 경험하고자 했기에 그 자체로 좋았다.

단종된 지 20년 이상 되었을 '현대 그라나다'나 '대우 로얄 살롱' 같은 차와 더 어울릴 것 같은 주차장, 식당 메뉴판에 구닥다리 명조체로 적힌 '미국식 조식'이나 '대륙식 조식' 같은 메뉴들(대륙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빵과 커피 등으로 이루어진 아주 간단한 아침 메뉴), 방 안 가구에 내장된 선국버튼 네 개짜리 FM/AM 라디오 등 과거 힘 있고 부자인 사람들만이 그 장소를 영유할 수 있었던 시절의 흔적들이 나름 좋았다.

무엇보다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호텔 콩코드. 이제는 자취를 감춘 콩코드 여객기가 한창 초음속으로 날아다니던 시절에 같은 이름의 호텔이 생뚱맞게 천 년 고도 경주에 들어선 것이다. 그 이질적인 것들이 조합되어 있는 방식이 딴에는 역사를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아서 재미있었다.

경주에는 오랜 세월 묵어서 아름다운 공간이 많다. 혼자 여행을 떠나도 외롭지 않고 운치 있다. 사진 위부터 호텔 콩코드, 불국사, 진평왕릉.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독 새것을 좋아해서 30년 된 것쯤에 가치를 잘 두지 않는다. 아파트라면 철거해서 새로 지어버리고, 일반 건물이라면 역시 다시 짓거나 아예 다른 모습으로 개조해버린다. 수십 년이 지난 건물이라도 파괴하거나 버리는 데 아주 익숙하고, 사실 말끔한 새것이 아니라면 호텔 같은 경우는 좋다는 평을 잘 듣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에는 적당히 오래된 것이 잘 존재하지 않는다. 수백 년 이상 되어 문화재라고 불리는 것들과 십수 년 이하의 것들만 있다. 물론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개발 위주의 산업화 등 사회·문화적으로 격변기였던 이유가 가장 컸을 것이다. 힘겨웠던 역사였기에 옛 중앙청 건물 등 사회적으로 불신임을 받아 사라져버리는 건물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조금 낡은 것'에 대한 인내심 부족의 문제가 작진 않을 것 같다.

긴 세월을 버텨온 공간은 보통 감동적이다. 많은 사람이 불국사·석굴암을 비롯해서 많은 문화재를 기꺼이 보러 가는 이유가 그것이 단지 역사적 유물로서 의미가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천 년이 되었든 수백 년이 되었든 여러 세대의 삶을 관통하며 한자리에 있어 온 것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고 아름답다. 그것들에는 역사가 어려 있고 선배들의 삶이 담겨 있으며 지금 우리가 그것들을 지키고 가꿔나가야 할 이유가 새겨져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수백 년 된 공간 역시 삼십 년쯤 되던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처음 지어질 때와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던 과정을 겪었을 수도 있다. 그런 시간들을 우직하게 겪어왔기에 지금의 시대에 와서 '옛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일 테다.

2011년의 대한민국에서 과연 2111년의 대한민국에게 물려줄 것이 얼마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물론 지금까지 존재하는 조선시대나 고려 이전 시대의 것들은 곱게 잘 관리해서 앞으로 천 년이 지나도 잘 보존되어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것들 중 앞으로 100년이나 갈 것들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천 년 고도 경주에 나흘 머물며 한 일이라고는 감은사지에 한 번 다녀왔던 것과 불국사에 두 번 다녀왔던 것, 그리고 진평왕릉과 안압지에 갔던 것이 전부였다. 물론 거의 모든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경주는 이전에도 몇 번 갔었다. 보지 못했던 것을 봐야 한다는 의무감은 없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의 불리한 점은 맛있는 것을 먹을 기회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기억에 남는 건 감은사지에 다녀오며 감포 바닷가에서 물회를 먹었던 일이다. 몇몇 물회 식당들이 국도변에 자리해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혼자 온 것을 의아해하는 친절한 주인아주머니께서 제일 경치가 좋은 자리로 안내해줬다. 조금 외로웠지만 나름대로 모든 것이 완벽한 상태였는데 막상 나온 물회 국수에는 솔직히 인공조미료와 설탕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었다. 너무 달짝지근해서 그 맛이 여전히 잊히지 않는다. 담백함을 점점 찾기 어려워지는 오늘날 우리의 사는 모습과 일상의 음식들이 닮았음을 느꼈다.

대부분의 시간은 호텔 방에 앉아(반쯤은 누워) 책을 읽었다. 물론 해가 짧은 계절에 혼자 하는 여행이라 춥기도 했고 할 일도 없어 태양빛이 느슨해지는 무렵이 되면 냉큼 호텔로 돌아와 버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2000년의 역사를 향해 나아가는 도시에서 30년이 된 호텔 방에 박혀 있는 것만으로도 경주 여행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느꼈다. 낮은 탄성을 내뱉게 했던 감은사지와 불국사처럼, 열심히 낡아가고 있는 오래된 호텔이 나는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