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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이끌었던 사내가 입산한다. 서울의 진산 북한산에 든다. 히말라야 8,000m 자이언트 14개 봉을 오른 사내도 입산한다. 알피니스트의 진산 북한산에 든다. 의외다.
전 서울 시장은 알피니스트 같고, 히말라야 고봉을 오른 산악인은 오랜 공무원 같다. 등산복을 차려입은 오세훈 전 시장, 훤칠한 키와 준수한 외모가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다. 고산등반에서 은퇴한 사내와 시장 자리에서 내려온 사내가 평일이라 한적한 산에 든다.
- ▲ 북한산 정릉계곡을 오르는 오세훈 전 서울 시장과 엄홍길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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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이끈 거인이라고 불러도 좋을 두 사람이 산에 들어도, 북한산은 미동 없이 담담하다. 무뚝뚝한 방식으로 바위랑 흙길을 번갈아 내주며 몸부터 풀라 한다. 산에서는 시장이건 시장이었건, 대장이건 대장이었건 상관없이 누구나 같은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산은 공평하고, 이들은 정직하게 산을 오를 준비가 되어 있다.
단풍이 여느 해보다 늦다. 10월 스무날을 지나는데도 정릉계곡은 녹색이다. 그러나 이들의 목적은 경치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다. 다들 한 두 마디 오가는 말의 뼈에 귀를 곤두세우고 있다. 발길이 목적이 아니라 마음이 오가는 것, <월간山> 독자들에게 야인이 된 오세훈이 전하려는 말에 다들 신경이 곤두서 있다. 알고 있지만 아무도 티 내지 않는다. 산행이란 함께 땀 흘리고 서로 끌어주고 도와가며 완성해야 하는 것임을 때문이다.
오세훈 전 시장의 표정은 밝다. 불편한 질문에도 인상 쓰지 않고 웃으며 농담으로 받아치는 큰 그릇을 보여준다. 아프지만 웃는 사내의 속마음을 안다는 듯 북한산은 오를수록 아리따운 풍경으로 답한다. 그의 목소리엔 지독히 고집스런 울림이 있다. 엄홍길과 <월간山>이 오세훈의 울림에 귀 기울인다.
“좀 쉬어야죠. 요새 백수되고 나서 부부금실이 좋아졌어요. 매일 같이 못 있다가 아내 데리러 가기도 하고 산책도 같이 하고요.”
“시장님, 등산복이 잘 어울리네요. 아주 전문 프로 산꾼 같아요. 자세가 나오네요. 제가 동네 뒷산 가는 아저씨 같고요.”
시장으로서 해온 사업엔 자부심
- ▲ 칼바위능선의 험로구간을 오르는 엄 대장과 오 전 시장. 평소 테니스로 몸 관리를 한 오 전 시장은 어렵지 않게 바위를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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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주로 하는 것은 테니스다. 늘 운동을 즐기며 자기관리에 철저한 그는 쉰의 나이에도 탄탄한 체력을 자랑한다. 철인삼종경기 올림픽 코스를 완주한 경험이 있고 테니스 외에도 헬스, 자전거, 걷기를 즐긴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테니스를 칠 정도니 테니스 광이라 불러도 좋겠다. 테니스는 친구들과 친다.
“테니스는 잘 모르는 사람하고 치면 재미없어요. 공 살살 주고 그러니까. 친구들하고 쳐야 이기려고 있는 힘껏 하니까 재밌죠. 친구들끼리 경쟁이 붙어서 아주 재밌어요. 짧은 시간에 운동량도 많고요.”
시장이 아니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해온 사업에 애정이 많다. 한강변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산책을 자주 하는데 한강 르네상스 사업으로 만든 걷기 코스와 자전거길을 둘러보고 부족한 건 없는지 확인한다. 그래서 “체력관리 겸 현장 확인 겸 해서 간다”고 말한다.
엄홍길 대장과는 막역한 사이다. 2005년 KBS 라디오의 기획으로 아프리카 킬리만자로를 함께 다녀왔다. 희망원정대란 이름으로, 장애인과 도우미를 자처한 멘토들이 도와서 함께 오르는 과정이었다. 당시 엄홍길 대장을 비롯 오세훈 시장과 소설가 박범신, 가수 안치환 등이 함께 원정길에 올랐다.
“혜화동 관사에서 나오면서 이삿짐을 싸는데 킬리만자로 길만포인트에서 엄 대장이 사인해 준 배낭이 툭 튀어나오더라고요. 그때 엄 대장과 처음 만났죠. 참 재밌게 다녀왔어요.”
당시 보름 정도의 긴 일정이었는데 오 전 시장은 아쉽게도 정상에 서지 못했다. 정상에서 30여 분 거리인 길만포인트(5,600m)까지 올랐다.
“거기에는 엄 대장님도 모르는 스토리가 있어요. 좀 쑥스러운 얘긴데 화장실이 급해서 정상을 못 갔어요. 이야! 환장하겠데요. 일행은 전부 가는데, 급해 죽겠으니. 산이 숲이 없고 툭 트여 있어요. 으슥한 데 찾다가 일행들을 놓쳐버린 거죠. 그때는 새벽에 소식 오는 습관이 정말 원망스럽더라고요. 정상이 얼마 안 남았는데…. 마침 길만포인트에 장애우들이 몇 사람 쉬고 있어서 그들하고 같이 남았죠.”
- ▲ 1. 바위구간에 들어서기 전 오세훈씨가 스카프를 동여 맨다. 2. 마당바위에서 한 숨 돌리는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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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름 진단컨대 고소체질인 것 같다고 한다.
“나이 많은 박범신 선생은 괜찮은데 젊고 운동 많이 한 친구들은 금방 나가떨어지는 것 보고, ‘아, 이건 운동 많이 했다고 되는 게 아니구나’ 생각했죠.”
“맞습니다. 더 높은 데로 가면 체력이나 기술이 뒷받침돼야 하지만, 킬리만자로 같은 산은 적응만 하면 되니까 체질이나 오르는 요령에 따라 다릅니다. 술을 잘 마시면 고소에서 적응을 잘한다는 산악계의 얘기도 있어요. 대체로 보면 술 좀 마시는 친구들이 고소에서 적응을 잘해요.”
오 전 시장은 술을 잘 못한다. 술을 분해하는 소화 효소가 부족해 한 잔만 마셔도 금방 얼굴이 빨갛게 변한다.
“그때 귀국할 때 홍콩의 식당을 들렀는데 다들 너무 기분이 좋아서 술을 많이 마셨어요. 그때 저도 마셨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필름이 끊겼어요. 식당에서 나와서 야경도 보러가고 했다는데 다음날 일어나서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 거예요.”
술을 못 하는 건 집안 내력이다.
“술 마시면 다음날 일에 굉장히 지장이 생기죠. 시장직 맡았을 때는 딱 1~2잔 반주까지만 했어요. 2차 안 간 지 5년이 됐고요.”
“나라 위하는 일이 꼭 정치만 있는 건 아니죠”
계곡을 버리고 칼바위능선으로 든다. 산다운 경사가 본격적으로 거친 인사를 건넨다. 고도를 높일수록 단풍은 아름답다. 서울 하늘은 투명하게 맑아 산에 온 이들은 복 받은 풍경이다.
북한산이 제대로 돌고 내려가라고 초대장을 바위의 뭉툭한 촉감에 묻혀 보낸다. 적당히 사진만 찍고 내려가려 했던 대장과 시장은 “우리 올라갈까요”하는 작은 말 한마디에 공감하며 거침없이 산을 즐긴다. 의외로 바위를 잘 탄다.
오 전 시장은 아웃도어 브랜드 네파의 김형섭 사장과 친구 사이다. 3~4년 전쯤 김 사장의 제의로 인수봉 슬랩을 오른 적이 있었다.
“그게 45도도 안 될 텐데 80~90도로 느껴지는 거예요. 아주 혼났죠. 깎아지른 절벽 같은 느낌이라 다리가 오그라드는 거예요. 그렇게 힘들게 올라가서 뿌듯해하면서 경치를 보는데 옆에 할머니 한 팀이 올라와서 밥 먹고 있는 거예요.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정상까지는 못 가고 중간까지만 갔죠. 백두대간도 가고 싶은데 평일에 같이 갈 사람이 있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