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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석 대장 실종… '산악계의 인정이 兄' 이인정 대한산악연맹회장

호젓한오솔길 2011. 10. 31. 07:50

 

 

[최보식이 만난 사람] 박영석 대장 실종… '산악계의 인정이 兄' 이인정 대한산악연맹회장

 

 

"그날 영석이를 보자 울음부터 나왔어… 죽고 사는 게 모두 어려워"
등반에서 만난 LG家의 딸과 결혼 미군 등산장비 구하러
월남전 자원 설악산 '죽음의 계곡'서 눈사태
고미영 손을 놓친 산악인 윤치원 그 기억의 상처로
마나슬루 등반 탈진한 후배 데려오다 끝내 실종

 

"가슴이 두근두근거려서…, 늘 이걸 달고 살아요."

이인정(66) 대한산악연맹회장은 우황청심환부터 털어넣었다.

"내가 영석이를 똑바로 못 쳐다봤어요. 또 사고가 나면 어떡하나 해서. 이 녀석이 에베레스트봉 남서벽을 등정(2009년 5월 20일)한 직후 축하해주러 갔잖아요. 네팔 카트만두 공항에 마중나왔더라고. 택시를 타고 함께 숙소로 가는데 울음부터 나와요."

―그때는 등반에 성공했을 땐데, 왜 울었다는 겁니까?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이 녀석을 보니까 막 울음부터 나왔어요. '영석아, 너 이제 그만해야지' 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얼마 안 남았어요' 대답해요. 이번에 사고가 난 안나푸르나 남서벽 등반 전에도
네팔에서 만났다고. 술 한 병을 주고 돌아왔는데. 그 뒤 얼마 안 돼 베이스캠프에서 라마제(祭)를 지내고 전화가 왔어요. 목소리가 안 좋더라고. '괜찮으냐' 물으니, '피곤해서 사흘간 쉬고서 시작하겠습니다' 했어요. 그게 끝이지…."

―산악인에게 위험하니 산에 그만 가라고 말릴 수 있을까요?

"부모도 자식도 못 말렸어요. TV에서 보니 영석이는 정상(頂上)에 서면 아들 이름을 부르더라고. 그렇게 아들을 사랑하고 가족을 생각했으면 그만 갔어야지. 이런 말 하면 내가 욕먹을지 모르나…. 아마 사고가 없이 올라갔다 오면 또 다른 산을 준비할 게 아니오."

―그렇게 말하는 이 회장 본인은 어땠습니까?

"나는 인왕산 밑에서 자랐어요. 산 타는 게 현실 도피라, 절에 가서 밥 얻어먹고 무당들과 어울리고. 그러니 동국대에서 나를 스카우트했지. 장학금을 준다고 했지. 산악부에 들어가니 어려운 코스에서 톱(클라이밍에서 제일 앞서 올라가는 것)을 세워. 인수봉 뒷벽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치기도 하고 이빨도 날리고. (입을 벌려 보이며) 이게 다 의치(義齒)요."

이인정 회장은“내가‘장례위원장’을 몇 번이나 했나, 이런 슬픔이 어디 있나”하고 말했다. /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월남전에도 참전했다고 들었는데, 좀 황당한 목적을 갖고서.

"월남에 간 친구들로부터 '미군 창고에 카라비너(등반용 고리)와 자일(로프)이 가득하다'는 전화를 받았어요. 그걸 듣고는 잠을 못 잤어요. 월남 파병(백마부대)에 지원했어. 월남에 들어가자마자 내가 미쳤지 후회했지만. 전투한 얘기는 여기서 하고 싶진 않고. 다른 전우들은 돌아올 때 전축·카메라·TV를 사갖고 왔지만, 나는 카라비너와 자일을 갖고 들어와 대학산악부에 나눠줬으니까. 이런 내가 영석이에게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미친 게 똑같은데, 나도 그렇게 살았는데."

이 회장은 머리가 허옇게 셌는데도,
박영석은 물론이고 새파란 산악인들조차 그를 "인정이 형"이라고 부를 때가 많다. 하지만 면전에서 꼼짝 못 한다. 직설적이고 자칫 뒤통수를 쥐어박힌다. 그럼에도 그 주위에 산악인들이 몰리는 것은 뭔가 있기 때문이다. 투박한 정(情)일 수도 있고, 후배들을 잘 챙겨서 그럴 수도 있다.

누구보다도 박영석의 실종에 그의 충격이 컸을 것이다. 대한산악연맹회장이라는 자리 때문이 아니라 박영석과는 각별한 인연이 있다. 동국대 산악부 선후배 사이에다, 박영석이 그 대학에 진학한 것은 1980년 동국대 산악부의 마나슬루봉 등정 카퍼레이드를 본 게 계기가 됐다. 당시 마나슬루 등반대장이 지금의 이 회장이었다.

"영석이가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 10개쯤 올라간 뒤로 날마다 술 마시고 다니더라고. 내가 이 녀석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듣게 되지. 여기 사무실로 불러서는 직원들은 다 나가 있으라고 했어요. 문을 잠근 뒤 정신 차리라고 빠따를 쳤어요. 그 뒤 이 녀석이 술 취하면 후배들에게 '나는 마흔 넘어서도 빠따를 다 맞았다'고 그러더래요. 녀석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선배는 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결과가 이래 됐는데."

―오희준(2007년), 이현조(2007년),
고미영(2009년) 등 최근 몇 년간 유능한 산악인들을 너무 많이 잃었습니다.

"후배들이 원정을 떠났다가 '잘 다녀왔습니다'라고 전화를 걸어오면, 그게 천상의 목소리야. (사무실 벽에 붙어 있는 여성산악인 고미영 사진을 가리키며) 참 안 좋은 게, 아까 말한 네팔에서 박영석 에베레스트 등정 환영행사 때 고미영이도 왔다고. 그리고 두 달도 안 돼 고미영이가 사고났잖아. 내 참…, 고미영 사고 때 디테일한 것은 모르시죠?"

고미영오은선과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09년 7월 11일 자신의 11번째 도전이었던 낭가파르밧봉을 등정한 뒤 하산하다가 실족해 추락했다.

―바깥에 안 알려진 스토리가 있나요?

"고미영이가 떨어지는 순간 한 산악인의 손을 잡은 거요. 윤치원(경남 진해 출신)이라고. 그런데 손을 놓쳐요. 결국 떨어져요. 이 녀석이 굉장히 괴로워했어요. 그 뒤 고미영 시신을 찾을 때 앞장섰어요. 그 시신을 업고서 가장 먼 길을 내려왔어요. 정말 소설 같은 얘기인데…, 그러다가 작년에 마나슬루봉을 등반하다가 후배가 조난당하자, 그가 남아서 후배를 데려오겠다고 했어요. 고미영 때의 기억이 아픔으로 있었을 겁니다. 결국 내려오다가 실종됐어요. 아마 탈진한 후배를 안고 죽었을 겁니다. 그의 시신(당시 40세)을 못 찾고 장례를 치렀어요."

등반중인 박영석 대장.

―고미영과 경쟁한 오은선은 '여성산악인 세계 최초 14좌 완등'을 한 뒤 등정 시비가 벌어졌지요.

"여성 최초 14좌 완등이라고 해서 오은선과 청와대에 들어갔어요. 며칠 뒤 훈장을 상신하라고 연락이 왔어요. 등정 진위(眞僞)를 놓고 시끄러울 때였어요. 그래서 문제가 된 칸첸중가봉에 올라가 본 국내 산악인들을 다 소집했어요. 오은선의 등반 경로 설명과 정상 사진을 놓고 등정 여부를 OX로 표시하라고 했어요. 다 X였어. 그걸 언론에 발표했던 거요."

―산악인들 간에 과도한 성과 위주 경쟁으로 등반의 순수성이 훼손됐다는 비판이 있었지요.

"산악계에서는 다들 알지만 말 못한 사연이 있지. 스폰서가 아웃도어 업체라. 스폰서에 대한 의무가 있으니까. 스폰서를 해준 분들도 죄인 같은 기분일 거요. 박영석은 스폰서를 안 해주면 집 팔고 빚내서라도 갈 녀석이야. 그는 누구와 경쟁한 것도 아니지. 혼자서 남들 못 했던 새로운 루트를 만들겠다고 한 거지. 어쩌면 이게 더 엄청난 경쟁이지요. 세계등반사에 기록을 남기겠다는 욕망이니. 브레이크 없는 욕망이지요."

―그렇게 도전이 계속된다면, 산악인의 운명이란 실종과 죽음으로 종결될 가능성이 크겠지요.

"내가 등산학교 교장을 할 때 '등반은 집에서 시작해서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늘 말했어요. 2006년 '중동고 100주년 기념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내가 단장으로 갔어요. 정상공격조로 올려보낸 한 대원이 마지막 캠프에서 탈진한 한 여성산악인을 발견했어요. '어떻게 할까요?' 무전연락이 왔어요. '당연히 데리고 내려와야지.' 그렇게 해서 동사(凍死) 직전에 살려왔어요. 손가락 몇 개는 잘랐지만. 이 여성산악인 때문에 후배는 정상을 못 밟은 셈이지요. 그는 이 원정을 위해 2년간 훈련했어요. 그때는 화가 나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한 사람을 살렸다는 것에 굉장히 행복하게 생각해요. 인명은 재천(在天)이라고 하지만, 사람은 죽는 것도 어렵고 사는 것도 어려워요."

―정상을 밟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내려와야 할 시점을 잘 판단하는 게 훌륭한 등반가이지요.

"우리 삶도 마찬가지요. 안 되면 멈출 줄 알아야 하지요. 박영석이는 중단하고 내려오려다가 순식간에 눈사태를 맞은 거요."

―이 회장도 젊은 날 설악산에서 동계훈련 중(1969년 2월) 눈사태를 맞았지요. 10명이 숨진 최악의 산악사고였는데.

"그때만 해도 히말라야 원정대를 꾸리는 것이 거국적인 일이었지요. 히말라야 현지 적응을 위해 최초로 수분을 거의 뺀 빵과 베이컨·버터 등을 먹으며, 18명이 조(組)를 나눠 훈련했지요. 우리 조가 전날 정상에 올라갔다가 다음날 내려와 보니, 계곡이 스키장으로 변해있었어. 텐트가 안 보였어요. 새벽에 눈사태가 친 거요. 시신 발굴을 해보니 갈비뼈가 다 부러졌어요."

―하필 왜 설악산의 그 지점에서 훈련했습니까?

"눈이 많고 빙벽 코스도 있는 곳을 찾았던 거요. 히말라야 현지 적응 훈련이니. 사고난 뒤에 알았는데 그 계곡 이름이 '죽음의 계곡'(희운각 산장에서 대청봉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왼쪽 계곡)이었어요."

―사고가 나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 아니고.

"아니야. 그걸 알고 섬뜩했어요. 그 뒤로 슬럼프에 빠졌어요. 동국대 산악부를 이끌고 마나슬루 원정을 다녀온 것은 그 사고가 난 지 10년쯤 지나서였어요. 그렇게 다녀온 뒤 모든 걸 청산하고 새롭게 살 요량으로 미국 갈 생각이었어. 가을쯤 출국 날짜가 잡히자 친구들이 만장봉(도봉산) 암벽등반을 한 뒤 밑에서 송별회를 해줬어. 그때 벌겋게 불타는 석양(夕陽)을 보고 있으니 미국에 가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어요. 여권을 찢어버렸어요. 그 뒤로 친구 회사에 들어가 일을 배웠고, 룸펜 같은 내가 사업한다니까 주변에서 많이 도와줬어요. 영석이가 유명해지기 전 우리 회사 직원으로 올려 용돈도 주고 의료보험카드도 만들어줬어요."

그는 반도체 부품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LG가(家)인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의 사위다. 이화여대 산악부였던 부인과는 등반을 통해 만났다.

―이 회장의 결혼은 모든 산악인들이 부러워했지요.

"걔들이 우리 여편네를 데리고 살아본 적이 없잖아. 우리 처가가 얼마나 엄격한지 압니까. 처남이 넷인데, 결혼 전 아내와 산을 가면 꼭 처남이 한 명씩 나와. 일종의 감시단을 보낸 거요."

―그런 감시 속에서도 용케 해냈군요.

"내가 이렇게 틀에 박혀 살 수 없다, 나는 자유인이다, 방랑자다, 그런 생각을 하고 떠나려 했는데 둘째 처남이 나를 좋아했어. 지금은 그쪽 그룹 계열사에 회장을 하는 처남이 중간에서 성사를 시켰어. 내가 젊어서 그렇게 살아왔으니, 자식들 교육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못하겠어. 자식들이 알아서 잘 커 줬던 것 같아."

그는 젊은 날 스턴트맨으로 '상해 탈출' '3인의 여검객' 등 몇 편의 영화에 나오기도 했다. 주로 산에서 바위를 타거나 떨어지는 대역이었다. 또 친화력을 바탕으로 생전의 손기정옹을 양아버지로 모셨고, 황영조는 양아들, 이은경(바르셀로나 올림픽 양궁 금메달)과 장미란은 양딸로 삼았다고 한다. 주로 정치인들이 맡아오던 대한산악연맹 회장에 산악인 출신이 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아시아산악연맹 회장직도 맡고 있다.

―이 회장은 직접 정상을 밟거나 기록적인 등반을 한 적은 없었지요?

"바위는 잘 탔어요. 그때는 히말라야 원정이라는 게 없었고. 바위 잘 타는 놈 치고 고산등반은 젬병이라. 어쨌든 내 등반 실력으로는 서까래쯤 될 뿐이지 기둥이나 지붕 노릇은 못해요. …이 나이에 장례위원장을 몇 번째 했는지 모릅니다. 내가 죄가 많나… 이런 슬픔이 어디 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