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 가치를 본받는 글씨
서예작품에서의 예술적 가치는 글자의 꼴인 형태적 가치와 그 속에 담긴 정신적 가치,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지만, 옛 사람들은 그 중에서도 정신적인 가치에 더 비중을 두어 왔다. 그래서 서예는 독서와 수양을 강조한다.
중국의 북송 때 서예가이며 학자인 소동파는 “다 쓴 붓이 산만큼 되어도 부족하고, 독서를 만 권쯤 해야 비로소 신과 통하게 된다[退筆如山未足珍,讀書萬卷始通神].”고 하였다. 서예는 쓰는 양과 독서의 양에 따라 달라진다는 얘기다. 우리나라 추사 김정희 선생도 “문자의 향기와 책의 기운[文字香書卷氣]”을 강조했다. 선생은 평생을 글씨와 금석학 연구에 몰두했는데,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 1856년 병중에 쓴 봉은사 판전板殿의 글씨는 일반인들이 언뜻 보면 수려하지 않게 볼 수도 있지만, 오랫동안 보면 안으로 품고 있는 힘이 마치 기골이 장대한 장사가 쓴 것과 같으며, 거기서 풍겨 나오는 맛은 ‘문자의 향기와 독서의 기운’이 그대로 노출되어 나타나 천하의 명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서예는 또 심신의 수양도 병행할 것을 강조한다. 서예는 쓰는 사람의 인품과 사상이 작품평가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아무리 멋진 글씨를 썼다고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썼느냐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원元나라의 유명한 서예가였던 조맹부는 우리나라 조선사회의 서예도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그의 글씨가 대접받지는 못했다. 그는 원래 송나라 황족인데, 조국인 송나라를 멸망시킨 원나라에서 고위 관직을 지냈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그의 글씨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공부 하지 않았다. 글씨는 참고하되 정신은 무시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었다. 예를 들면 친일파이면서 을사오적에 속하는 이완용의 글씨도 서체는 잘 다듬어졌으나, 정신은 본받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이와 반대로 안중근 의사는 1909년 연해주에서 의병활동을 하면서 손가락을 끊어 단지회斷指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일본침략의 원흉인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하였다. 이후 체포되어 뤼순감옥에서 쓴 글씨는 의로운 정신을 담아낸 글씨로서 그 가치가 더욱 더 빛나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이처럼 글씨에는 그 사람의 인문학적 수양은 물론 정신적 가치가 모두 포함된다.
획에 담긴 생명성
다음은 형태적 가치에 관해서 생각해보자. 형태는 글씨 그 자체의 조형인 ‘서체’를 말한다. 글씨에서 다양한 서체가 나타난 과정은 이렇다. 형태적인 면에서 사물의 형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상형문자는 오랜 시간동안 사람들이 문자생활을 하면서 일이 바쁘고, 써야 될 양이 많아지게 되자 점차 구부러진 획은 펴고 많은 것은 덜어 내어 감정에 따른 다양한 표정을 가진 서체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즉, 민간인들이 급한 편지를 쓸 때는 점과 획을 모두 갖추어 쓸 수가 없고 붓을 종이에서 뗄 시간조차 없어서 글자의 획이 생략되거나 변형이 생기면서 또 다른 서체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빨리 쓰고자 하는 욕구와 바르게 써야 한다는 두 방향의 충돌과 충족의 노력은 결국 아름다운 동양의 글씨에 여러 가지 서체를 탄생시킨 원천이 되었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 체에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여러 가지 서체가 나타난 것도 이 같은 문화현상이며, 이는 한자문화권은 물론 인류의 모든 문자에서 서체가 탄생되는 공통점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서체의 꼴이 어떻든지 간에 옛날 사람들은 글씨를 하나의 생명처럼 다루어 형태에서 나타나는 골骨, 육肉, 혈血, 기氣의 구성적인 기법이나 글씨 쓸 때의 느리고 빠름, 호흡 등의 조절을 최적화하면서 우주정신과 사상을 담아냈다. 이것은 곧 자연계에서 나타나는 구름이나 비, 눈, 바람, 시내, 강, 바다, 산, 바위, 새와 나무, 물, 고기 등을 비롯하여 모든 우주 생명 정신인 조화와 화해의 정신을 본질적 서예정신으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우주 생명정신인 조화와 화해의 정신은 동양인들에게는 군자의 정신이요, 선비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좋은 글씨를 쓰기 위해서는 자연을 본받을 것을 강조하고 가슴 속에 자연이 있어야 한다는 ‘흉중구학胸中丘壑’이라는 말이 있게 되었으며, 최상의 형태는 글자의 밖에서 나온다는 ‘자외구사字外求師’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좋은 글씨는 살아 있는 우주 만물의 생명체와 같이 튼튼한 뼈骨와 탄력 있는 근육筋이 있으며, 맑은 피血가 흐르고, 충만한 기개氣가 있어야 하고 거기에 자신의 수양으로 담아낸 정체성을 담고 있는 개성이 드러나야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문제되고 있는 광화문의 현판글씨를 누가 썼느냐 글씨가 어떤 것이냐를 따져보는 것도 위에서 언급했던 여러 가지 글씨의 가치가 그 정체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 될 것이다.
글·이주형 경기대학교 미술디자인대학원 교수 사진·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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