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골짜기에 안개 걷히면 그녀는 돌무덤에 예를 올린다
[신비한 땅 산청과 王을 찾는 여자 김은주]
王山 골짜기 끝엔 가야 최후 구형왕릉이 역사 기록 부족해 정식 인정 못 받아
산청 시집온 김은주, 5년 동안 발품 연구 "훗날 사람들이 진실 인정할 것"
약초 많은 산자락 한방체험 공간도… 옛사람 흔적들 곳곳에 관광객들 발길
경상남도 산청은 촌이었다. 서울에서 여섯 시간 걸리는 불편한 교통에다 특산물이라곤 지리산에서 나오는 산나물 정도? 땅은 600㎢인 서울보다 근 200㎢가 넓은 794㎢요, 인구는 지금도 3만5000명 정도다. 보이는 풍경이라곤 사방을 에워싼 고산준령뿐이라 군 이름도 뫼 산에 맑을 청 산청(山淸)이었다. 2005년 12월 대전-진주고속도로 개통으로 천지가 개벽했다. 촌동네 산청은 서울에서 3시간이면 닿는 청정 자연으로 말머리가 바뀌었다. 산나물은 청정 약초로 신분이 급상승했다. 1박 2일은 예사였던 지리산 천왕봉 등정이 산청에서는 당일 등반으로 바뀌었다. 그러고 보니 보였다. 산나물 뜯어 먹던 촌구석, 그 고단한 표정 뒤에 숨어 있던 장구한 역사가. 옆 마을 거창에서 산청으로 시집온 이 여자는 "몰랐던 내 뿌리를 산청에서 찾았으니 뼈는 산청에 묻겠다"고 했다. 여자 이름은 김은주다.
▶▶왕산 골짜기 수수께끼의 돌무덤
산청 금서면 화계리에 있는 923m짜리 산 이름은 왕산(王山)이다. 계곡이 아름다워 연중 사람이 몰린다. 등산로 초입에 돌무지가 있다. 크고 작은 잡석으로 일곱 층을 쌓은 높이 7.15m짜리 거대한 돌무더기다. 주변에는 높이 1m 정도로 돌담이 둘러쳐 있다. 4층 정면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데, 벽으로 막혀 있어 그 속이 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작은 하늘만 남기고 온통 숲에 에워싸인 돌무더기는, 새벽부터 밤까지 신비롭다. 사적 제214호다.
그 앞에 서 있는 비석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駕洛國讓王陵(가락국양왕릉)'.
- 경남 산청 깊은 골짜기에는 돌무덤이 하나 있다. 사람들은 가야국 마지막 왕 구형왕이 잠들어 있다고 했다. 김은주는 매일 아침 왕릉을 찾아 경배를 한다. 역사와 무관하게 살던 그녀는 지금 김해 김씨 덕양전 가락국역사관 관장이다. /박종인 기자
가락국은 삼국시대 신라에 복속된 가야를 이르고, 양왕은 '나라를 바친 왕'이니 신라에 항복한 가락국 마지막 왕의 무덤이라는 뜻이다. 삼국사기 법흥왕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법흥왕 19년(서기 532년) 금관국의 왕 김구해가 왕비와 세 아들인 맏아들 노종, 둘째 아들 무덕, 막내아들 무력과 더불어 자기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임금이 예를 갖추어 대접하고 상등(上等)의 직위를 주었으며, 금관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김구해, 즉 구형왕은 김유신의 증조부다. 전하기로, 구형왕은 "적에게 나라를 바친 왕이니 돌무더기에 묻으라"고 유언하고 죽었다.
그런데 돌무덤의 공식 명칭은 구형왕릉이 아니라 '전(傳) 구형왕릉'이다. '전하기로 구형왕릉이라고 카-더-라'는 뜻이다. 왕릉으로 인정할 기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했다는 기록뿐, 어디에 묻혔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래서 1971년 돌무덤이 사적으로 지정될 때 이름 앞에 전(傳) 자가 붙었다. 하지만 산청 사람들은, 그리고 가락국 수로왕의 후손인 김해 김씨 사람들은 산청 왕산 기슭에 있는 이 돌무덤이 구형왕의 왕릉이라고 믿는다.
김은주도 그러하다. 학생 때 회화를 전공하고 시집가서는 대중목욕탕을 운영하던, 역사와 전혀 무관한 쉰다섯 살 먹은 김해 김씨 삼현파 24세손 김은주는 지금 왕릉 앞 가락국역사관 관장이다.
▶▶구형왕릉과 김은주
- 가락국역사관 관장 김은주.
대구 영남대와 효성여대에서 공예와 회화를 배웠다. 역사를 공부하고 싶었는데 "그러면 시집 못 간다"고 어머니가 반대해서 예술을 배웠다. 과연 무탈하게 멋진 남자를 만나서 시집갔다. 산청군 생초면에 들어와 살면서 목욕탕을 운영하며 살았다. 살다가 보니 옆 마을 이름은 왕이 궁터를 정했다는 왕대마을이었고 왕대마을 가는 고개는 왕딧재였다. 건넛마을 금서면 평촌리에는 하도 험해서 왕이 지나다가 허기를 느꼈다는 허기재가 있었다. 천지 사방 마실 가는 곳마다 왕(王) 이야기 없는 곳이 없는데, 돌무덤에 놀러 가니 어릴 적 아버지 손잡고 갔던 그 왕릉이 아닌가. 깜짝 놀랐다. 그런데 '전(傳)'이라고? 산청으로 시집온 것이 운명 같았다. 자기 말로, "왕이 불렀다"고밖에 할 수 없는 집착이 시작됐다.
산청은 물론 인근 함양과 거창 일대를 돌아다니며 노인들한테서 설화를 채집했다. 새벽에 홀린 듯 산 오르는 여자를 보고 등산객도 혼비백산했고, 여자도 무서워서 숨이 넘어갔다. 산청 견인차센터 사장에게 전화를 하면 사장은 "또 이 여자가"하고 가서는 도저히 차가 오를 수 없는 곳으로 가서 차를 빼내곤 했다. 사장 전화기에는 '단골'이라고 등록됐다. 2009년부터 사륜구동차 석 대를 말아먹었고, 목욕탕도 문을 닫았다.
그렇게 설화를 모아 보니 구형왕릉 반경 40㎞ 산과 마을에 왕과 관련된 지명이 50개가 넘었다. 2013년 김은주는 산청문화원을 통해 '가락국 10대 구형왕 유적지 사료집'을 펴냈다. 김은주가 말한다.
"세종지리지(1454)를 비롯해 조선시대 문헌에는 '산중에 돌로 쌓은 구릉이 있는데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고 적혀 있다. 정조 때 발견된 왕릉 옆 절의 연대기인 왕산사기에는 '왕산사는 무덤을 지키는 절이고, 무덤은 가락국 구형왕이 묻힌 왕릉'이라고 적혀 있다. 지명과 설화는 살아 있는 기록이다. 사방 100리 마을 조상이 집단으로 모의하지 않는 한, 왕릉과 관련된 지명이 이렇게 전승될 수가 없다. 여기가 왕릉이 아니라면 이제까지 우리 김해 김씨 문중은 헛제사를 한 거다."
- 남사예담촌 이씨 고택 입구에 있는 부부 회화나무. X자로 겹친 채 300년을 살아왔다.
김은주는 이후 왕릉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교수들을 일일이 찾아가 '도장 깨기(무술 도장끼리 1대1로 맞붙는 대결)'를 하며 논박을 이어갔다. "내가 할 말 다하고, 그들이 할 말 다하면 후대에서 판단하겠지"라고 했다. 2014년 여름 왕릉을 모시는 덕양전에 가락국역사관이 생기고 전직 목욕탕 주인 김은주는 역사관장에 취임했다.
이른 아침 구형왕릉 가는 길은 상쾌하고 신비롭다. 낙엽 무리가 발에 채고 안개 걷힌 돌무덤을 바라보면, 거기 하루도 빠짐없이 향을 피우고 예를 올리는 그녀를 만날 수 있다.
▶▶유이태, 김종권, 동의보감촌
구형왕릉에서 10분 거리에 동의보감촌이 있다. 연전에 소설과 드라마 '허준'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소설에서 허준의 스승 유의태의 고향이 산청임을 근거로 만든 거대한 한방 테마공원이다. 지리산에서 나는 질 좋은 산청 약초 명성도 한몫했다. 박물관, 약선식당, 산책로, 공원, 휴양림, 체험관 등 여행지로 손색없는 공간이다.
그런데 기록이든 설화든 지명이든 어디에도 유의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허준보다 백 년 늦게 생초면에 박애주의 의사 유이태가 살았다. 동의보감촌 홈페이지에도 유의태 대신 유이태가 소개돼 있다.
- 동의보감촌 한의원 원장 김종권. 출가를 꿈꾸는 사내다.
지난달 이 비역사적인 공간에 김종권이 들어왔다. 김종권은 이곳 한의원인 동의본가를 책임지는 한의사다. 김종권은 어릴 적부터 출가(出家)를 꿈꿨다. 집안에서 당연히 반대했지만 한의대에 들어가서도 꿈은 깨지 않았다. 그러다 군대에서 고관절을 심하게 다쳤는데 조계종 규정을 보니 '결가부좌를 하지 못하는 사람은 출가 불허'라 돼 있는 게 아닌가. 서울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며 한때 '외국인 환자 유치 1위'를 기록하며 잘나갔지만, 이 첩첩산중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가 말했다. "지금 여기가 중요하지, 유의태든 유이태든 중요하지 않다. 이 산중에서 사람들에게 한방을 알리고 심신을 치유해줄 수 있다면." 이 너른 산중에 자고 깨고 일하며 24시간 '공덕'을 쌓으며 산다고 했다. 그래서 "언젠가 바랑 메고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기를 바랄 뿐"이라고 했다.
목화씨를 가져온 문익점이 난 곳도 산청이요, 근대 선승의 표본인 성철 스님 탄생지도 산청이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유학자 남명 조식이 은거하며 제자를 기른 곳도 산청이다. 무형문화재 목조각장 108호 목아 박찬수도 산청 사람이다. 이들이 남긴 흔적은 모두 외지인들이 즐겨 찾는 목적지로 변했다. 사람을 보니 산청이 보인다. 수수께끼의 인물 구형왕에서 왕을 찾는 여자 김은주, 그리고 산중으로 들어온 의사 김종권까지 모두 산청(山淸)이다.
[산청 여행수첩]
가볼 곳(내비게이션 검색어도 동일) 1.구형왕릉: 역사적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가볼 가치가 있는 곳이다. 주차 공간 넓다. 큰길가에 있는 덕양전에서 구형왕릉에 얽힌 설명을 들을 수 있다. 2.목아 박찬수 전수관: 생초면. 중요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 박찬수의 전수관. 작되 웅장한 건물과 알찬 목각상 전시는 꼭 볼 것. 3.남사예담촌: 담쟁이덩굴 가득한 돌담이 볼거리. 주차장 왼쪽 길섶에 있는 이씨 고가 필수. 거대한 X자형 회화나무 한 쌍이 볼만하다.
동의보감촌 한방 테마공원. 한의학박물관을 비롯한 전시관, 체험관, 숙박시설, 의료시설과 음식점이 모여 있다. 동의본가 한의원과 숙박시설인 한방자연휴양림, 한방기체험장과 약초로 만든 한식 코스 음식점인 동의약선관 등. 배꼽 쑥뜸과 훈욕을 체험하고 한옥스테이도 할 수 있다. 약 처방도 가능. 한옥스테이 6만원~, 훈욕 3만원, 약초 스파 5만원 등. donguibogam-village.sancheong.go.kr, (055)970-7216
맛집 1.동의보감촌 내 음식점들: 육식부터 산채식까지 4개 식당 운영. 2.생초면 어탕: 경호천에서 잡은 피리로 튀김, 국수, 칼국수 등을 낸다. 제일식당 추천. 어탕국수 6000원. 피리 튀김 2만5000원. (055)972-1995, 생초면 어서리 245-1
산청 문화관광 정보 tour.sancheong.go.kr, (055)970-6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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