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룡산에 노닐다가
솔길 남현태
오늘은 아침부터 뭔가 자꾸 꼬이는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있는데 인터폰이 울린다. 마눌이 받더니 지하 주차장에 세워둔 내 차에 실내등이 켜져 있다고 경비 아저씨에게서 연락이 왔다며 서둘러 밥 먹는 동안 마눌이 내려갔어 꺼놓고 왔지만, 출고 이후 한 번도 교체하지 않은 베터리가 금년 겨울을 넘길까 하고 늘 염려하고 있던 터라 내심 불안하다.
배낭을 챙겨 들고 내려가 시동을 걸어보니 끼릭끼릭 거리며 시동이 걸리지 않는 것이 정말로 김이 새는 순간이다. 몇 번을 다시 시동을 걸어 보지만 허사다. 집으로 전화하여 마눌 보고 좀 태워 달라고 했더니 올 때는 어떻게 하느냐고 하며 보험회사 긴급 출동 서비스를 불러준다. 한참을 기다려 긴급 출동 서비스에서 와서 점프시켜 시동을 걸어준다. 참 좋은 세상이다. 기다리는 동안 보험 회사에서 수시로 연락이 와서 서비스가 이루어졌는지 확인까지 해주며 마지막엔 긴급 서비스를 이용해줘서 고맙다는 인사까지 한다.
만약에 산에 가서 시동이 안 걸리면 큰일이다. 쪽 바로 현대차 서비스 공장으로 달려가 잠시 기다려서 거금 십만 천 원을 주고 베터리를 교체해버린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오전 10시가 넘어 버렸다. 오늘은 뭔가 아침부터 패가 꼬이는 것 같다. 하여 산행지를 가까운 기룡산의 짧은 코스를 간단히 다녀오리라 마음먹고 죽장 쪽으로 차를 몰아가다가 죽장 휴게소를 지나 내리막길에서 좌회전하여 영천 자양 댐 상류를 거처 묘각사 계곡 입구로 들어가니 산불감시 초소에는 입산금지 표지판이 있다.
운곡지 제방 아래서 잠시 차를 멈추고 망설인다. 여기에 차를 두고 좌측 능선을 오를까 하다가 시계를 보니 시간이 벌써 11시 20분이나 되었다. 낯선 곳에서 산불 감시원의 눈초리도 겁이 난다. 하여 묘각사 아래 주차장까지 그대로 깊숙이 차를 몰고 들어가 텅 빈 주차장에 홀로 주차를 하고 가볍고 한적한 산행길에 오른다.
주차장에 세워둔 팻말에 적힌 부처님의 가르침을 시작으로 오늘의 산행을 시작한다.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묘각사 쪽으로 올라가는 길은 너무나 한적하다. 오늘이 일 년 중 제일 춥다고 하는 대한인데 하늘은 맑고 날씨 또한 다사롭다.
뒤돌아 본 능선의 아름다움도 잠시 묘각사에 다다르니 전기톱의 굉음이 산천을 울린다. 아마도 오늘은 부처님도 귀를 막고, 눈도 감고 계시는 듯하다. 아니면 주위에서 벌어지는 허무한 꼴이 보기 싫어 멀리 출타 중이신지도 모른다. 묘각사 주위에는 아름드리 참나무들이 마구 잘려나가고 있다. 아마도 사찰을 확장하려는지는 몰라도 부처님도 이렇게 하여 새집을 지어 주시는 것은 원치 않으시리라는 생각을 해보며, 넘어진 참나무들로 막힌 등산로를 찾아가면서 무거운 발길을 옮긴다.
돌아보는 묘각사 골짜기는 아름답기만 한데 사면 골짜기 길을 따라서 능선에 오르니 낙엽 또한 곱기만 한데, 군데군데 능선길은 잔설이 남아있다. 깊은 사랑을 나누는 낙락장송 너머로 보현산 쪽 조망 어느덧 날씨는 점점 흐려지고 멀리 면봉산과 베틀봉도 보인다.
기룡산 정상 모습이 보이고 멀리 꼬깔봉과 능선길, 깊숙한 묘각사 골짜기, 오밀조밀 한 봉우리 위에 짙은 구름이 몰려오고 놀닐면서 가는 길에 기룡산이 눈앞에 가까워질 즈음 싸락눈이 폴폴 날린다. 바위에 달라붙은 소나무는 한껏 푸름을 더하고 멀리서 밀려오는 눈구름이 점점 더 가까워진다. 보현산 위에도, 꼬깔봉 위에도 하늘은 점점 짙은 구름이 덮인다. 바위에 걸터않아 점심 도시락 해결하고 커피 한잔하면서 함박눈이 내리기를 기다려 본다.
그러나 하늘은 흐렸다가 개였다 하며 흰 눈을 기다리는 산꾼의 속만 태운다. 기룡산 정상으로 다시 돌아가 올라온 능선길로 내려선다. 암릉길에서 혹시나 눈이 많이 내려 주기를 기다리며 꾸물거려 본다. 멀리서 눈보라가 밀려오는 듯하다. 예쁜 가지에는 눈꽃이 피엄즉도 하지만 보이는 건 하늘에 짙은 구름꽃 뿐이다.
아름다운 옛 추억의 그 자리에도 백설 가루라도 뿌려 줬으면 얼마나 좋을까? 새싹을 잉태한 가지 끝은 새봄을 기다린다. 살았을까 죽었을까? 바위에 부처손들은 쪼그리고 봄을 기다는 심중에는 새 생명이 움트고 있겠지, 서서히 밀려오는 싸라기눈을 맞으며, 걸음을 멈추고 기다리니 한기를 느낀다. 지루함을 달래려고 오늘도 자작으로 증명사진을 몇 장 찍어본다. 이제 싸락눈이 제법 내린다.
커다란 바위의 위용 앞에 달라붙은 노송의 한 많은 생애를 바라보다가 금방이라도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공포를 느낀다. 낙엽 융단 위에서 그냥 뒹굴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 바위에 달라붙은 끈질긴 생명 위에도 싸락눈이 내리더니, 앞이 안 보일 정도로 거센 눈보라가 몰아친다. 눈보라 속의 시루봉 삼거리에서 방향 감각이 없어진다.
여기 삼거리에서 눈보라가 치는 가운데 알바를 하고 올라오는 산꾼을 만났는데, 돌아 올라오던 길을 가리키며 이리 가면 용화리 길이 맞느냐고 묻는다. 내려가다 이상하여 30분간 알바를 하고 올라왔다고 하며, 내민 지도를 보니 국제신문 근교 산에서 카피해온 개략도인데 상세하지가 못했다 시루봉 쪽 길은 아예 나오지 않고, 지도에 나온 길과 그 사람이 올라온 길과 지형이 하도 비슷하여 맞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포항에서 왔다고 하기에 시간이 오래 걸리면 묘각사 아래 내 차가 있으니 함께 내려가자고 했더니 망설이는 듯하다가 처음 계획대로 가겠다며 올라오던 길로 다시 내려갔다. 그러나 헤어져 조금 내려오니 용화리 갈림길이 따로 있었다. 아뿔싸! 아까 그 사람은 시루봉 가는 길로 들어간 것이다.
그 길도 결국은 용화리로 이어지는 길과 연결되어 있지만, 시간이 엄청 더 걸린다. 눈이 개여 시야가 확 트이면서 확연한 능선이 나타난다. 건너다보고 야호 야호 하며 고함을 쳐 보았지만, 기척이 없다. 그렇다고 따라갈 수 있는 거리도 아니고 달리 연락할 방법도 없고 하여 걱정만 하면서 하산해야 했다. 자동차에 돌아오니 오후 3시가 조금 지났다.
조금전에 만나 길을 잘못 들어간 포항의 산꾼을 생각하니 또 걱정이 된다. 아마도 시루봉으로 두르는 길은 시간이 많이 지연되어 잘못하면 날이 저물 수도 있는 거리이다. 나를 얼마나 원망하고 있을까. 눈보라 속에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허술한 지도만 드려다 보고 맞장구친 것이 무척 후회스러울 뿐이다. 오늘은 뭔가 되는 것이 없다. 무거운 마음으로 포항을 향하는 길에서 늘 그 생각뿐이다. (2007.01.20 호젓한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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