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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호젓한오솔길 2010. 11. 26. 22:00

 

 

 

  

경주 단석산(827m)

 

경주국립공원 구역에 속하는 단석산은 백제의 침입으로부터 신라의 수도 경주를 지키는 자연산성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쪽의 토함산(745m),서쪽의 선도산(381m), 남쪽의 금오산(494.4m), 북쪽의 소금강산(142.6m)과 함께 경주 오악 중 하나로 꼽혀온 단석산은 경주 일원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수도장으로서 화랑의 호연지기가 흐르는 곳이기도 하다. "돌을 갈랐다"는 의미의 산 이름도 화랑의 수련과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즉, 김유신이 칼로 베어냈다는 고단석(古斷石)을 비롯하여 산 곳곳에서 칼로 베어낸 듯한 바위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는 점을 보더라도 단석산이란 지명이 잘 어울리는 산이다. 단석산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석굴사원이기도 한 화랑의 수련장이 있다. 1969 년 신라 삼산(三山) 학술조사단이 단석산 우중골에서 미륵삼존불이 새겨진 자연석굴사원인 상인암을 발견한 것이다.

 

단석산은 삼국통일의 주도 역할을 담당한 김유신이 수련한 산으로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 나와있다. 김유신은 화랑이 된 지 2년째인 17세 때 외침이 잦자 뜻을 세우고 단석산의 석굴에 들어가 수양을 쌓고 있던 중 한 노인이 나타나 비법을 전수해 주고, 또 하늘에서 내린 영험한 빛이 그의 칼에 내리치면서 바위를 잘라낼 수 있는 보검이 되었다는 것이다. 김유신은 그러한 하늘의 힘을 얻어 백제와 고구려를 누르고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고단석, 김유신이 물을 떠 마셨다는 장군수(將軍水), 김유신이 말에게 물을 먹였다는 음마지(吟馬池)등이 김유신의 설화와 연관된 것들이다.

 

 

 

 

신선사 []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단석산()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법화종에 소속된 사찰이다. 7세기에 활동하던 자장()의 제자 잠주()가 창건했으며, 김유신(:595∼673)이 이 절에서 삼국통일을 위해 기도했다고 한다. 절이 들어선 단석산의 산 이름은 김유신 설화에서 유래한다. 김유신이 한 노인으로부터 신검()을 얻어 이 산의 바위굴에서 검술을 닦았는데, 시험 삼아 칼로 바위를 내리치니 바위가 갈라졌다. 이에 산 이름을 단석산이라 했고 뒤에 갈라진 틈에 절을 세워 단석사라 불렀다는 것이다.

1969년 한국일보사가 주관한 신라오악() 조사단이 바위에 새겨진 명문을 분석하여 석굴의 본래 이름이 신선사였음을 밝혀냈다. 석굴 바위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옛날 절 아래에 살던 한 젊은이가 이곳에 올라와 보니 노인들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이들이 두는 바둑을 구경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는 이미 백발의 노파가 되어 있었다. 50년이 지난 것이다. 그 뒤부터 이 바위를 신선이 바둑을 둔 곳으로 불렀고, 절 이름도 신선사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석굴은 작은 암자처럼 쓰이고, 50m쯤 아래에 본절이 들어서 있다. 본절의 건물로는
관음전산령각·요사채 등이 있다. 한편 석굴은 동남북 3면이 갈라진 바위로 둘러싸여 있으며, 옛날에는 지붕을 얹어 사용했다고 한다. 안쪽 벽에 조각된 불상과 보살상은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이라는 명칭으로 국보 제199호로 지정되었다. 불상 조성 양식으로 보아 6세기 유물로 추정된다. 불상·보살상이 8구, 인물상이 2구 있으며, 주민들은 탱바위라고 부른다. 

 

 

 

 

 

신선사 마애석불(국보 199호) 

출처:단석산 아랫마을 이야기  

 

단석산에는 신선사(神仙寺)라고 하는 절이 있는데 석굴사원지(石窟寺院址)가 있다. 이 바위에는 미륵불이 그려진 석화(石畵)가 있고 명문(銘文)이 있는데 이 석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산이 단석산이라고 명명되기는 김유신 장군의 수도장이라고 한데 부터 알려지고 불려진 것이다. 장군이 화랑시절, 이 산에 들어가 수도를 하던 중 난승(難勝)이라고 하는 노도사 한분으로부터 신술(神術)을 익히고, 전수받게 되었다. 장군은 체득한 신술로서 큰 바위인 돌을 단칼에 잘라 두부 자르듯 양쪽으로 쫙 갈라 놓았다. 단석산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부터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단석산의 정상 조금 못간 자리에 서쪽이 트이고, 동남북쪽이 막힌 ㄷ자 모양의 자연석실이 있는데 그 아래 근세에 들어와서 세운 암자가 하나 있다. 이 절을 신선사라고 한다. 이 자연적으로 갈라져 있는 석실은 신선사의 법당으로 사용되었다고 보며 구멍난 석실 위에 기와로 지붕을 덮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가 있다. 이지방 사람들은 옛날부터 이 산을 영산(靈山)으로 모시고 믿어 왔다. 그래서 그런지 6,25사변이 터지자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몰려 내려오면서 이 서면 건천 경계라 할 영천북안(永川北安)일대까지 밀고 남하해 내려왔었으나 영산인 단석산이 있는 서면과 건천에는 한발짝도 들어오지 못했다. 아군과 연합군의 공격 작전에 수없이 많은 인민군이 죽고 그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그 때 인민군들이 후퇴를 시작한 곳이 바로 여기서 부터였다.

서면(西面) 경주 경계로부터 들어서면 이 단석산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노인들은 경주 서면에 적들이 들어서지 못한 것은 단석산(斷石山)의 정기가 그렇게 막은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이 영산 단석산은 바로 신라를 통일시킨 신라인의 영기이자, 건천 서면 사람들의 영기이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설화에 얽힌 유래

 

 

화랑과 용화정신, 월생산(月生山)하면 생소하지만, 단석산 하면 우리 지방 사람치고 모를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건천읍과 서면의 유일한 표적이기 때문이다. 읍에서 보면 서남에 위치한 이 산은 방내리와 모량리의 뒷산이 된다. 해발 827m의 높은 산으로 경주에서는 중악(中岳)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산은 신라의 명장으로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 위치는 당시의 왕성에서는 서쪽으로 23리쯤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유신장군이 소년시절 신검(神劍)을 얻어 왕성에서 가까운 월생산에 들어 왔다고 한다. 유신은 이 산속에 있는 석굴에 들어가 가장 용맹한 검술을 익혔다고 하였다. 이 산 정상 가까이에 있는 큰 바위돌을 상대로 정신적 기(氣)를 써서 단칼에 베는 위력을 발휘하였다. 이 산에 군데군데 베어진 돌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것이 지금도 흩어져 있다.

여기에 절을 지어 단석사라 불렀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삼국사기에 기록된 중악의 석굴이 이 단석산의 상인암(上人巖)의 석굴과 일치하는지는 다소 의문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대를 1969년 신라오악조사단(新羅五岳調査團)이 조사한 결과 일치한다고 하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상인암은 원래 이름이 신선사였고, 주변 바위면에 새겨진 조각상은 미륵삼존(彌勒三尊)이라고 하는 사실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 미륵삼존상이란 보살상은 삼국사기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신선사에는 자연으로 된 석굴에 미륵삼존을 비롯하여 보살상과 인물상이 조각되어 있고, 남쪽 바위에는 이를 설명해 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이 해설에는 주존불(主尊佛)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창건 연대등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어서 확실히 알지 못한다. 다만 그림의 양식으로 보아 삼국시대 말기 작품이라고 추정될 뿐이다.

이 신선사의 주존불이 바로 미륵불이라고 하는 사실은 신라 화랑 연구에 있어서 획기적 사실이라고 할수가 있다. 이것은 당시의 김유신 낭도는 스스로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즉 당시의 화랑들은 용화라고 하는 이름을 즐겨 붙였다.
이 용화는 불교용화 바로 그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세계는 미륵이 환생을 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을 하고, 설법 교화한다고 하는 미륵불의 법회를 의미한다. 그 당시 향도(香徒)라고 하는것은 곧 신앙결사(信仰結社)의 의미를 뜻한다.
이 미륵이 출현하는 세계는 바로 모든 고난이 사라지고, 이상세계가 펼쳐진다고 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때 화랑들은 바로 이상세계의 도래(到來)를 정신적 염원으로 삼아 강건한 무예를 닦았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신앙적 바탕은 바로 젊은 낭도들에게 정신적 기강이 되어 곧 삼국통일을 이룩했다고 할 수가 있다. 여기 상인암에는 미륵삼존불 말고도 마애조상군(磨崖彫像群 - 국보199호)이 그려져 있다. 이 석굴은 동남북의 삼면이 병풍처럼 되어 있어서 암바위 석실을 이루고 있어서 이 석굴은 하나의 천연수도처가 되어 었다. 이 암벽에는 크고 작은 10여구의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어 이것이 바로 고대석굴사원의 경영형태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해서 귀중한 자료로 손꼽고 있다. 아마도 암벽 위의 천정은 목조의 골격과 기와로 덮었던 것이 아니었나 추정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인공과 자연이 조화된 석굴사원이 대두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 여러 개의 마애불상 속에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반가사유(半跏思惟)의 보살상이다.

 

이와 같은 반가사유의 금석상은 삼국시대에 유행한 양식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신라 전역에서 현재 남아 있는 마애존상으로는 유일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또 이 좌상 밑에는 인물상 두 구가 동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으로 있다. 이 두 상은 향로와 나무가지 모양을 붙들고 있고, 의관은 고대 신라의 복식에 관한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어서 매우 중시하고 있다. 추정으로는 이들 두 사람은 이 석굴사원 조성을 맡고 있던 실제 인물일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 것은 주전(主殿)의 존상에 공양상을 조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무엇보다 요행한 것은 씌어진 명문 중에 판독이 가능한 구절이 있으니 참으로 다행이라 아니 할 수가 없다. 이름이 신선사임이 분명하고, 동시 주존 삼존이 미륵불과 보살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단석산의 마애조상이 있는 월생산은 6.25때 전쟁에도 확연히 그 의미가 나타났다고 할 수가 있다. 신라명장 김유신의 용화도 혼과 단석산의 마애조상 염원으로 인민군은 영천 외곽 임포(林浦)일대까지 포진하여 경주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문화재 -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 (斷石山神仙寺磨崖佛像群)

 

 

거대한 암벽이 ㄷ자로 높이 솟아 하나의 석실(石室)을 이루었는데 원래는 여기서 인공적으로 지붕을 덮어 이른바 석굴법당(石窟法堂)을 만들었었다. 신라(新羅) 최초의 석굴사원(石窟寺院)인 셈이다. 이 석굴의 바위면에 모두 10구의 불보살상(佛菩薩像)을 새기고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서쪽으로 틔어진 곳이 입구였는데 이곳으로 들어서서 왼쪽이 되는 북쪽 바위에 삼존불상(三尊佛像)이 왼손으로 동쪽을 가리키고 있어 본존불(本尊佛 )로 인도하는 독특한 자세를 보여준다.

이 안쪽에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 얕은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는데 삼국시대(三國時代) 반가사유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 밑쪽에 버선같은 모자를 쓰고 공양(供養) 올리는 공양상2구(供養像二軀)와 스님 한 분이 역시 얕은 돋을새김으로 새겨졌는데 이 역시 신라인(新羅人)의 모습을 아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여기서 바위가 단절되어 쪽문처럼 틔었고 다시 바위가 솟아 있는데 이 바위면에 거대한 불상이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비록 딱딱하고 서툰 듯한 솜씨로 조성된 면도 있지만 중후한 체구와 둥글고 동안(童顔)적인 얼굴, U자 모양을 이루는 법의(法衣) 안에 내의를 묶은 띠매듭 등 전선방사(傳禪房寺) 삼존불(三尊佛, 보물 제63호)의 양식적 특징과 친연성(親緣性)이 강하다. 명문(銘文)에 의하면 장륙(丈六)의 미륵불상(彌勒佛像)이 확실하므로 당시의 신앙 경향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불상이라 하겠다.

동쪽과 남쪽의 바위면에는 마멸로 희미해진 선각(線刻)의 마애보살상(磨崖菩薩像)이 1구씩 새겨져 본존불과 함께 삼존불로 배치된 것 같으며 남쪽 바위 보살상 안쪽으로 명문이 새겨져 있다. 어쨌든 이 석굴의 유래를 알 수 있는 신라 최초의 석굴사원이자 7세기 전반기 불상양식을 보여주는 이 석불상군은 고신라(古新羅) 불교미술(佛敎美術)이나 신앙연구(信仰硏究)에 귀중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마애불상군 상세설명

 

여래입상A(如來立像A) : 이 석굴의 주불(主佛)으로서 거대한 장방형(長方形) 1석(石) 전면에 두껍게 조각되어 있다. 상호는 둥글고 고식의 미소를 보이며 머리의 정상에는 2단의 육계 형이 특이하다. 삼도는 없고 내액의(內腋衣)가 엿보이는 통견의(通肩衣)로서 좌 우대칭의 조각기법을 따랐으며 법의(法衣)는 길게 아래로 늘어뜨려 발좌우 아래 까지 이르고 있다. 좌우 양수(兩手)는 다섯손가락을 펴서 여원인(與願印)과 시무 외인(施無畏印)의 통인(通印)을 하고 있다. 전체높이 약 7m로서 삼국기 마애불 의 최고(最古) . 최대(最大)의 작품이다.

반가사유보살상(半跏思惟菩薩像) : 정면상으로 연화대좌와 원형두광을 구비하고 있다. 삼면관을 쓰고 동안을 보이며 경부에 삼도는 없고 상반은 나신(裸身)이다. 오른손을 꺽어 오른쪽 뺨에 대어서 사유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왼손은 아래로 내린 왼쪽 발의 무릎위 에 얹어서 통형(通形)의 반가형식(半跏形式)을 나타내고 있다. 전체의 형식에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국보 반가사유상과 유사하다. 원위치를 지키고 광배와 대좌 등을 구비한 고신라 유일의 마애석상이다. 전체높이 109cm이며 얇게 조각 되어 있으나 각선은 분명하다.

여래입상B(如來立像B) : 보주형 두광이 있으나 밑의 연화좌는 분명하지 못하다. 두정에는 육계가 있고 법의는 우견편단이며 그 아래로 치마(裳衣) 주름이 보인다. 오른손은 가슴 위로 들었으며 왼손은 신측으로 나가서 굴내를 가리킨다. 정면상이며 전체 높이는 116cm이다.

보살입상(菩薩立像) : 정면상으로서 머리에는 삼각보관(三角寶冠)을 얹었으며 삼도(三道)는 없다. 천의(天衣)는 양어깨로 걸쳤으며 배 아래에서 U자형을 이루고 다시 두 팔에 걸 쳐서 몸측으로 길게 아래로 드리워져 있다. 오른손은 복부에, 왼손은 왼쪽 몸의 측면 밖으로 나가서 굴내를 기리킨다. 둥근 두광과 연화좌를 지니고 있는데 몸 체의 높이는 102cm이다.

여래입상C(如來立像C) : 이 곳의 세 입상중 조각이 가장 선명하다. 보주형(寶珠形) 두광(頭光)과 단판 복련좌를 지니고 있는데 연화문에는 자엽(子葉)이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둥글 고 큰 상호에 비해서 육계가 매우 적은 것도 특이하다. 두 눈은 부어 오른 초기 석불상의 특색을 지녔으며 두귀 또한 길고 삼도는 없다. 법의는 우견편단이며 왼손에 걸쳐서 아래로 내려 뜨렸으며 신체 하단에는 치마(裳衣) 주름이 보인다. 오른손은 가슴위에 올려서 다섯손가락을 폈으며 왼손은 몸 밖으로 들어서 다 섯 손가락을 펴고 있다. 이와 같은 왼손형식은 다른 두상과 동일하여서 마치 이들이 동쪽 끝에 있는 반가사유상과 나아가서는 굴내의 주존인 미륵여래 입상을 지칭하고 인도하는 듯하다. 이 상은 이곳의 4상중 반가사유상과 더불어 주목 할만하다. 몸의 높이는 105cm이다.

인물상A : [인물상A] 동쪽 굴내부를 향하여 공양하는 입상으로서 두 손으로 병향로(柄香爐)를 잡고 있다. 머리에는 독특한 관모를 썼으며 상하의제(上下衣制)의 구별이 주목된다. 얇게 조각되어 있으나 상호의 두 눈은 뚜렷이 표시되어 있어 위장부(偉丈夫)임 을 느끼게 한다. 몸의 높이는 122cm이며 아마 이 석굴 조성의 발원인으로 추정이 된다.
[인물상B] 인물상(A)에 비해 약간은 작으나 동쪽으로 향하고 있는 점과 자세와 의복이 동 일하다. 다만 두 손으로 수지형(樹枝形)을 잡고 있는 것이 앞의 상과 다를 뿐이 다. 역시 공양상으로 추정된다.

여래입상-D(如來立像D) : 최하단에 자리 잡은 가장작은 입상으로서 우견편단이다. 몸의 높이는 57cm이며 조각연대는 다른 상에 비하여 늦은 감이 있다.

 

 

 

 

 

 

 

 

 

 

 

 

 

 

 

 

 

 

 

 

 

 

 

 

 

 

 

 

 

 

 

 

2010. 호젓한오솔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