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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기적처럼 암 고친 사람들 '잘 먹고 잘 싸는 게 최고!'

호젓한오솔길 2010. 11. 29. 09:22

 

 

산에서 기적처럼 암 고친 사람들 '잘 먹고 잘 싸는 게 최고!'

 

 

 

산림치유는 여러 자연치유 요법 중에서도 가장 안전하고 효과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SBS 스페셜’에 방영된 <산에서 암을 이긴 사람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그만큼 뜨거웠다. 병원에서도 손을 놓은 말기 암 환자들이 산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치료보다 삶을 정리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그런데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던 이들이 산에서 암을 이기고 ‘진짜 행복’도 찾았다고 말한다. 더러는 암에 걸린 것이 인생 최대의 행운이었다고 고백했다. 산이 그들에게 준 것은 무엇이며, 산에서 어떤 치유의 힘을 얻은 것일까? 그들의 뜨거운 산 사랑을 들여다봤다.

 

대장암 극복한 심광명·김춘현 부부

“어린아이같이 순수한 마음이 암을 이깁니다”

충청북도 옥천군 안내면 동대리. 이곳은 22년 전 대장암 진단을 받았던 심광명(64) 씨가 터를 잡은 곳이다. 생을 조용히 마감하기 위해 찾은 산에서 새 생명을 얻었다는 심 씨. 산을 오르내리기 시작한 지도 벌써 20년이 지났다는 그는 “맑은 물과 공기보다 더 좋은 명약은 없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독주를 즐기던 뱃사람, 암에 걸리다

암은 평범한 일상을 순식간에 뒤흔든다. 소리 없이 다가와 충격이 더한 것일지도 모른다. 심광명 씨 역시 그랬다. 외항선을 탄 까닭에 바다에 한번 나가면 1년 반. 뭍에 내려도 한 달 정도밖에 지낼 수 없다. 그래서 결혼 15년 동안 아내와 함께한 시간은 고작 1년 남짓. 바다생활을 정리하고 가족과 함께 지내야겠다고 마음먹은 시점에 암 진단을 받아 충격이 더 컸다.

“배에서 생활할 때 술 참 많이 먹었지. 드라이진 한 병 마시고, 입가심으로 맥주 한 박스씩 마셔댔으니까. 한번은 여수항에서 면세로 소주 500박스를 실었는데, 공짜라고 저녁마다 한 사람당 한 박스씩 없애곤 했어.”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어느 호텔에서는 술을 가장 많이 마신 사람으로 기록되기도 했단다. 다시 1년 반 만에 돌아온 집, 가족들을 위해 계곡으로 여름휴가를 떠난다. 모처럼 물놀이를 즐기고 술도 마시며 한 달 가까이 지냈다. 그런데 오른쪽 배가 불룩하게 올라왔다. 뭔가 손에 잡히기도 했다. 청주에 살던 때라 가까운 병원에 갔지만, 모두 고개를 저으며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병원을 4번 옮기고 나서야 대장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이미 소장까지 전이된 상태였다. 대장을 들어내는 대수술을 받았지만, 의료진은 소장까지 미처 손을 대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에게 잘해야 3개월 정도 살 수 있겠다고 선고했다. 심광명 씨는 그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올랐다. 기껏 병원에서 한다는 소리가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이라니 그 사실이 견딜 수가 없었다. 아내 김춘현 씨는 남편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

“여보, 교통사고로 하루아침에 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우리에게는 3개월이라는 시간이 있잖아요. 감사한 마음으로 앞으로 남은 3개월을 30년처럼 지내요.”

아내의 말을 듣고 있자니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퇴원 후 한 달 정도를 집에서 지내며 항암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는 독한 화학요법을 받으며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병원에서도 권하지 않는 항암 치료를 받으며 아등바등하는 것이 우스운 짓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시간 낭비를 하는 것보다 조용히 삶을 정리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아는 사람이 산에 집을 지었는데 그곳에서 바람이나 쐬라며 요양을 권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시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보다는 조용한 곳에서 깨끗하게 생을 마감하자는 생각이었다. 아내 역시 산과 집을 오가며 암환자에게 좋다는 것들을 구해오곤 했지만, 조금이라도 편히 지내기를 바라는 것 외에 큰 욕심이 없었다. 그렇게 죽을 날을 받아놓고 기다리는데 몸이 나빠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의사가 선고한 3개월이 지나고, 다시 6개월…. 죽기는커녕 몸이 좋아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을 보냈는데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때 내가 그랬다니까. 이상하다, 왜 안 죽지?”

암을 대할 때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수술 후 줄기만 하던 몸무게가 산에서 지내고 1kg 가까이 늘면서 심 씨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살 곳을 찾아 지금의 거처를 마련했다. 그런데 산에 터를 닦기까지 상상 이상의 노동력이 필요했다. 마당에 있는 나무와 텃밭, 연못의 돌멩이 하나까지도 모두 그의 손을 거쳐갔다. 그는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해냈다. 산 생활은 노동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곳을 한적한 전원생활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오래 버틸 수가 없다.

“산 생활을 결심한 사람들이 다들 물어. ‘근데 밥은 어떻게 하나요?’ 한국 남자들이 자립이 안 되는 사람들이잖아. 엄마가 다 해주고, 결혼하면 마누라가 다 해주고…. 그게 가장 큰 문제야. 그래서 오지로 들어가면서도 마누라는 꼭 데리고 가잖아. 그래도 나는 선박생활을 오래해서 혼자 먹고 사는 건 큰 문제가 안 됐어.”

심광명 씨는 ‘암=죽음’이라는 공식에서도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암에 걸린 사람은 암으로 죽기도 하지만 자신은 곧 죽게 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죽는 경우도 허다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산에서 생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산에서 나오는 나물과 약초들로 최대한 자연식을 하면서 몸과 마음을 비우고 ‘몸속의 나쁜 세포는 모두 없어지고, 건강한 세포가 생기고 있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해야 해. 어린아이처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렇게 믿는 게 암을 이겨내는 방법이야.”

점심시간이 되자 아내 김춘현 씨가 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잡곡밥과 맑게 끓인 미역국, 제철을 맞은 전어와 표고버섯 볶음, 된장과 간장으로 무쳐낸 참나물과 취나물, 신선한 생채소 등이 상 위에 올랐다. 김 씨는 최소한의 양념을 사용해 재료 자체의 맛을 살린다. 음식을 만들 때도 되도록 간단하고 효과적으로 조리할 수 있게 한다.

“마음먹고 한번 먹는 것보다 꾸준하게 먹는 것이 좋아요. 먹는 사람도 그렇지만 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조리법이 편하고 간단해야 지속적으로 유지해나갈 수 있거든요.”

기교를 부리지 않은 음식이었지만, 기본에 충실해 범상치 않은 내공이 엿보였다. 단순해도 직접 담은 장 덕분에 맛의 깊이가 있었다. 그녀가 사용하는 양념은 모두 직접 담은 것으로 3년 이상 숙성된 된장과 재래종으로 담은 매실, 5년 이상 두어 간수 빠진 소금 등이었다. 소금에 간수가 빠지지 않으면 독소도 있지만 쓴맛이 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상을 내려다보던 남편은 “진시황제가 부럽지 않은 밥상”이라고 말했다. 남편이 자리에 앉자 아내는 방금 내린 녹즙을 건넸다. 8년 전부터 해오던 방식이다. 하루 세 번, 식전 공복에 마시는 녹즙에는 신선초, 케일, 민들레, 미나리, 돌나물 등이 들어가는데 계절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김 씨는 녹색을 생명을 불어넣는 색이라고 칭하며 자생력이 강한 식물이 몸에도 좋다고 귀띔했다. 도시에 살면 일부러 구해야 하지만 산에는 지천에 널린 것들이다.

“사실 나 혼자 있을 때는 텃밭에 있는 채소 뜯어다가 밥에 넣고, 달걀프라이 두 개 부쳐서 된장 넣고 쓱쓱 비벼서 간단하게 먹어. 암환자들 보면 되게 까다롭게 구는데, 그럴 거 없어. 까다롭게 굴지 말고, 주는 대로 잘 먹고 잘 싸는 게 최고야!”

 

가족, 사랑과 인내의 또 다른 말

지금이야 산사람이 다 되었지만, 입산 초기에는 그 역시 많이 힘들고 외로웠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통증과 외로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시시때때로 그를 조여왔다. 그럴 때마다 악착같이 산에 오르고 키보드를 연주했다. 산 생활 10년 만에 독학으로 마스터한 키보드 연주는 이제 수준급이다. 처음에는 어느 건반이 ‘도’인지도 몰랐지만, 이제 악보만 있으면 어떤 곡도 연주할 수 있다. 음악은 마음을 위로해주는 유일한 친구였다. 어떤 때는 밤을 새워가며 키보드를 연주하기도 했다. 젊었을 때 귀를 다쳐 청력이 어두운 탓에 아내가 붙여준 그의 별명은 ‘베토벤’.

“한번 몰두하면 다른 소리는 안 들리나 봐요. 한번은 밖에 있는데 남편한테 전화가 왔어요. ‘여보, 놀라지 마. 집 안으로 물이 떨어지고 있어!’”

무슨 소린가 싶어 달려가 보니 태풍이 불어서 함석지붕이 마당에 나뒹굴고, 집 안으로 비가 들이치고 있었다. 남편은 지붕 날아가는 소리를 천둥소리로 착각했다며 멋쩍게 웃었다. 키보드 위로 빗물이 떨어지고 나서야 사태 파악을 한 것이다. 아내는 그 후로 식사 때마다 “베토벤 씨, 식사하세요”라고 놀린다. 심광명 씨는 앞으로 작곡과 작사에도 도전해 레코드를 내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그런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는 아내의 눈은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길과 닮아 있었다.

“아직도 아이처럼 천진해요. 어떤 때는 세상물정을 너무 몰라서 답답하다가도 저러니까 살았지 싶기도 해요.”

늘 장례식을 준비하는 기분으로 살았다는 심광명·김춘현 씨 부부. 이제는 새롭게 찾은 인생을 어린아이처럼 항상 감사하며 즐겁게 살고 싶다고 말한다. 최근에 심 씨의 디스크 수술 때문에 병원을 찾기도 했지만 암 때문에 방문해본 적은 없단다. 의학적으로 완치 판정을 받지는 않았어도 22년 동안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래서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산다. 낼모레 죽을 거라던 사람이 이렇게 오래 살아서, 또 너무 열심히 일을 해서 디스크에 걸렸다면 그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싶다.

미동도 없이 버티고 앉은 산은 초록의 향연만으로도 사람을 달라지게 만들었다. 성질 급한 뱃사람 심광명 씨조차 바람에게도 얘기하고, 나무에게도 말을 거는 시인으로 변했으니 말이다. 암으로 주저앉은 그의 뒤에는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넉넉한 산과 산보다 더 따뜻하게 그를 품어주는 가족이 있었다. 이 둘의 시너지는 어떤 암 치료보다도 강력한 항암효과를 발휘하는 것이 분명해보였다.

 

 

SBS 스페셜 <산에서 암을 이긴 사람들> 3인의 인터뷰


불편한 생활도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 안희상(62) 산 생활 13년째

안희상 씨는 결핵성 늑막염이라고 해서 6개월간 치료를 받다가 차도가 없어 큰 병원을 찾았다. 결과는 폐암 3기. 모든 암이 그렇지만 폐암은 진행속도가 빨라 조기 발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오진으로 6개월이라는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결국 갈비뼈를 세 개 절단하고 왼쪽 폐를 통째로 들어내는 큰 수술을 받아야 했다. 종교에 의지하며 마음을 정리해가던 시기에 친구 하나가 화전민들이 살던 산골을 소개해줬다.

그곳의 생활은 새로운 경험의 연속이었다. 난방이나 취사를 할 연료도 마땅치 않았고, 겨울에는 추위가, 여름에는 온갖 벌레들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스스로 청해서 들어간 곳이니 모두 감수하고 견뎌야만 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안희상 씨는 청교도적인 생활 방식을 몸에 익히고 있어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라고 여기며 적응해갔다.

산등성이의 버려진 땅을 일궈 1천여 평 되는 밭을 만들고, 여기에 감자, 옥수수를 비롯해 콩과 당근, 시금치, 무, 배추, 매실까지 50여 종의 작물을 키웠다. 농약과 비료 없이 길러낸 채소로 수프를 끓여먹는데 암 수술 이후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부엌 한쪽에는 온갖 약재로 만든 효소와 나물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산은 이렇게 모든 것을 내어주었다.

산에 오르면서 건강에 자신이 붙자 5년 전에는 아내와 함께 히말라야에도 올랐다. ‘트레킹 수준의 가벼운 등반’이라고 말했지만, 한쪽 폐로 해발 4천 미터까지 올랐으니 보통 의지와 체력으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수술 직후에 40퍼센트밖에 되지 않던 호흡률이 산에서 사는 동안 두 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산과 숲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몸은 머슴처럼 음식은 환자처럼 | 이삼구 (61) 산 생활 5년째

이삼구 씨는 암 진단을 받았을 때 그저 죽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수술을 하고 이듬해 암이 재발했을 때 오히려 ‘이게 죽을병은 아니구나’ 싶었단다. 그러면서 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산을 오르내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운동이 될 테고, 맑은 공기와 물을 마시다 보면 아무래도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1천7백 평의 비닐하우스와 2천2백 평의 밭을 관리하는 지금은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먹을 채소를 직접 기른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것이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여기에 1년 동안 쓸 장작을 마련하려면 도끼질만 20일을 계속해야 한다. 산 생활은 거의 운동이고 노동이지만, 그의 작업량은 신체 건강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도 벅찰 정도다.

“저 양반이 처음에는 밭에서 30분을 못 버텼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침 먹고 나가면 어두워서 앞이 안 보일 때까지 밭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한답니다.” 아내는 남편의 변화가 아직도 믿기지 않는 표정이다.

그는 자신의 건강을 위해 몇 가지 생활수칙을 정해 두었는데 ‘마음은 정상인처럼 생각하고, 몸은 머슴처럼 부리고, 음식은 환자처럼 먹는다’는 것이다. 암환자라는 사실을 잊고 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되 음식만큼은 철저히 가려 먹겠다는 생각이다. 암은 자연을 떠난 데서 생긴 병이니 그 해법 역시 자연과 가까운 곳에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래서 조미료와 설탕을 멀리한다. 그 대신 약초나 열매로 담근 효소들을 이용하는데 음식 맛도 깔끔하고 탈이 나는 일도 없다. 산에는 도처에 널려 있어 부지런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이삼구 씨는 산에 들어와서 삶에 대한 열정과 자신감을 완전히 되찾았다.

인생의 가장 큰 고비를 이겨냈고, 즐겁게 살고 있으니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거뜬하다는 신념도 생겼다. 그러니 암에 걸린 게 오히려 고맙게 여겨진단다.

마음을 비워야 산이 받아들인다 | 정점호 (52) 산 생활 6개월째

정점호 씨는 산으로 들어온다고 해도 마음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면 암을 이길 수 없다고 강조한다. 사람들은 외롭지 않느냐고 묻지만, 외로운 것도 불편한 것도 다 여유가 있을 때의 이야기다. 목숨이 오가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너무 호사스러운 고민이다.

그는 입산 6개월 만에 벌써 산사람이 다 되었다. 처음 암 진단을 받고 오진이라고 생각하며 믿지 않았단다. 선친이 대장암으로 돌아가셨기에 술도 자제하고 규칙적으로 생활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암은 주변 림프절까지 전이되어 있었고, 대장을 통째로 들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7시간에 걸친 대수술 끝에 대장 전체를 적출해냈다. 남은 것은 자가치료라는데 혼자서 살아보라는 말처럼 들려 막막하기만 했다.

익숙한 것들 속에서 생활습관과 음식을 바꿔 새로운 삶을 만드는 것은 초인적인 의지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산이었다. 처음에는 적적하고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병세가 나빠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여기라면 암을 이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요즘은 단순히 산만 오르는 것이 아니고 약초를 찾아 돌아다니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도라지와 더덕도 구별 못하던 그가 산나물 박사에, 약초 박사가 다 된 것이다. 그렇게 산에 오르내리는 사이 병으로 인한 마음의 고통이나 도시에 대한 아쉬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자연스럽게 잦아들었다. 자신이 환자라는 것도, 요양하러 산에 들어왔다는 것도 다 잊어버리고 산과 산속 생활에만 집중한다.

“수술 자국을 볼 때 외에는 스스로 환자라는 생각을 못하고 살아요. 저는 산이 체질에 맞나봐요. 산에 오르다 잠깐 앉아서 주변 풍광을 바라보면 거의 무아지경이에요. 거기다 솔잎 향 나는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주면 더 바랄 게 없죠.” 


/ 여성조선
  취재 강보라 | 사진 강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