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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끝나자마자 망둥이 낚시하러 그냥 달려가는 거예요. 학교에 낚싯대를 들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갯벌 부근 풀숲에 따로 숨겨두는 곳을 마련해 뒀지요.”
인천이 고향인 정상욱 선배(한국외국어대산악부 OB/영원무역 상무)는 소래포구가 보이기 시작하자 아련한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페달을 밟으며 계속 이야기한다.
“낚시로 잡은 망둥이를 나뭇가지에 꿰어서 시장으로 가져가서 항상 거래하는 아줌마한테 팔았어요. 그렇게 돈이 생기면 또 달려가는 곳이 있죠. 바로 만화가게. 책장에 침을 발라가면서 엄청 열심히 읽었어요.”
망둥이를 팔아 만화책을 읽었다는 대목에서 허영만 화백이 한마디 한다.
“야, 만화책을 열심히 봤다니 정상무가 모범생이었구나.”
- ▲ 목섬을 향해 달리고 있는 자전거 식객들의 모습이 한폭의 그림이다. 목섬과 선재도 사이에는 썰물때마다 모래톱이 드러나 건너갈 수 있다.
- 인천 송도 신도시를 뒤로하고 소래포구 가는 길,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달리는 허영만 화백과 정상욱 선배의 등에 따사로운 가을햇살이 내려쪼인다.
정상욱 선배는 어린 시절에 비해 많이 변한 소래포구의 모습을 못내 아쉬워했다. 선배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소래포구는 ‘들쭉날쭉 해안선이 온전하게 살아 있었던 아담한 포구’였다. 그러나 이제는 주변에 아파트를 비롯해 현대식 건물들이 해안 쪽으로 바짝 붙어 들어서고 관광지가 되면서 옛 정취를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 텅비어 적막한 도시를 통과하는 기묘한 기분
허영만 화백이 이끄는 자전거 전국일주팀은 9월 1차투어에서 강화도를 일주한 뒤 초지대교에서 10월 2차 투어를 시작했다. 서해안을 따라 남진하는 코스다. 초고층 빌딩이 들어서 있고 전철역까지 있는 송도신도시는 아직 입주 전이어서 텅 비어 있다.
사람들이 없으니 차량 통행도 거의 없어 널찍한 도로는 온전히 우리들의 차지다. 자전거로 달리기에는 매우 좋았으나 텅 빈 도시를 통과하는 것은 너무 적막해 기분이 묘했다.
송도에서 소래포구를 돌고 오이도를 통과해 시화방조제로 들어섰다. 안산과 대부도를 잇는 시화방조제의 길이는 약 12km. 우리 팀의 평균 시속이 약 14km이므로 한 시간 이내에 건널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것은 맞바람을 계산하지 않은 오산이었다.
자를 대고 그은 듯 직선으로 뻗은 방조제 길에서 초속 4m의 역풍을 맞자 좀처럼 속도가 붙질 않는다. 바람 때문에 시속 10km를 유지하기도 힘들어 가도 가도 끝이 없다.
- ▲ 1 소래포구로 가는 자전거 전용도로 옆에서 코스모스가 한들거린다. 날씨운이 좋았는지 10월의 2차투어도 전형적인 가을날씨 속에서 이뤄졌다. 2 선재도에서 독도 실패로 한참을 혼자 엉뚱한 방향으로 달리다 뒤늦게 일행을 전력 질주로 따라잡느라 지친 김경민이 일행과 합류하자마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쓰러졌다. 40일간 하루평균 120km를 달려 전국을 일시종주한 그지만 자전거는 여전히 힘들다. 3 해안도로를 달리다 잠시 휴식 중 포도를 먹으며 기운을 차리고 있는 대원들. 이 포도는 요트 집단가출호 크루였던 김상덕 대원이 자신이 경작하고 있는 대부도 포도농원에서 직접 딴 것이다. 왼쪽부터 안진수, 허영만 화백, 송철웅, 정상욱.
- 이렇게 바람이 세게 불 때는 이른바 ‘피빨이’를 하게 된다. 앞서가는 자전거의 뒤에 바싹 붙어 달려가면 공기 저항을 덜 받게 되어 훨씬 힘이 적게 드는데 이게 바로 자전거 동호인 세계의 속어로 피빨이다. 뒷사람이 앞사람에게 찰싹 달라붙은 모습이 마치 거머리가 피를 빠는 것 같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피빨이를 처음 시작한 사람은 김경민. 한참을 달리다 뭔가 수상한 인기척을 느껴 뒤돌아보니 김경민이 내 자전거의 뒷바퀴에 자신의 앞바퀴를 거의 붙인 채 피를 빨고 있다.
‘아니, 이 녀석… 언제부터 내 뒤에 붙어 있었지?’
눈치를 줬더니 슬그머니 웃으며 나를 추월해 앞장을 선다. 이번엔 나더러 자신의 피를 빨란 뜻이다.
넓적한 김경민의 등 뒤에 숨어 보니 앞서 달릴 때와 비교해 확연히 힘이 덜 든다. 피빨이의 효과를 알게 된 우리들은 자전거를 일렬로 달리며 마치 신설이 내린 산에서 러셀을 하듯 교대로 자리를 바꾸어 서로 피를 빨고 빨렸고 그러는 사이 어느새 지겹게 긴 시화방조제의 남쪽 끝에 도달할 수 있었다.
대부도에는 김상덕 선배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시화공단에서 고분자 소재 부품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집단가출호 전국일주항해 때 3,057km의 바닷길에서 동고동락했던 사이. 이 지역 사정에 훤한 김상덕 선배는 우리를 대부도의 북서쪽에 있는 구봉도 야영장으로 안내했다.
인적이 드문 곳을 원하던 우리들의 생각과는 달리 김선배가 안내한 구봉도 야영장은 상업적으로 운영되는 오토캠핑장. 주말을 맞아 꽤 많은 캠핑객들로 북적이고 있어 고즈넉한 밤을 보내기는 어렵겠다는 예감은 맞아 떨어졌다. 날이 저물자 난데없이 음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이건 좀 심하다 싶어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봤더니 놀랄 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오토캠핑용 텐트를 치고 그 안에 드럼세트와 기타, 키보드, 게다가 고성능 앰프까지 가져다놓고 연주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공장소인 오토캠핑장에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풍경.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소음 피해를 당하고 있는 나머지 캠핑객들 중 아무도 이들의 극심한 소란을 제지하려 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우리 쪽에서 수를 내야 했다. 해병대 출신인 김상덕 선배와 유도대 출신인 김은광이 평정에 나섰다. 김상덕 선배는 해병대 출신이라도 이제 50줄에 접어들어 중후하고 인상이 좋지만 김은광은 다르다. 깍두기 헤어스타일에 덩치가 산(山)만 한 것이다.
왕년의 돌주먹 홍수환 선수의 조카이기도 한 김은광을 대동한 김상덕 선배가 소란의 현장을 방문해 몇 마디를 나누자 다행히 별다른 불상사 없이 음악소리는 곧 멈췄다.
- ▲ 새우를 사기 위해 대부도의 새우양식장을 찾았다. 양식장 관리인이 바지선을 타고 잡아줬다. 양식장에서 직접 새우를 사면 식당보다 30% 가까이 저렴하다.
- 하지만 야영장의 수난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저녁식사 후 잠자리에 누운 지 10여 분 만에 난데없이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금방 그치리라고 예상했던 비는 우리의 바람과 달리 점점 굵어졌고, 설상가상 강풍에 천둥번개까지 가세했다.
매트리스 위에 침낭만 덮은 상태였던 우리들은 차가운 가을비에 젖어가며 허둥지둥 텐트를 쳤으나 텐트를 다 치고 나자 이미 온몸이 젖어버렸다. 자전거를 지키기 위해 4명만 텐트에 남고 모두 인근 민박집으로 철수해야 했다. - 한 양재기가 넘는 꽃게 무침을 게눈 감추듯 비운 다음…
이튿날 아침. 밤새 내리던 비가 그치고 하늘은 다시금 말갛게 개었다. 민박집에서 따뜻하게 잠을 잔 그룹은 말짱했으나 필자를 비롯해 김은광, 이진원, 김경민 등 비내리는 늦가을 밤 젖은 침낭을 덮고 텐트에서 잔 축은 온몸을 몽둥이로 얻어맞은 듯 삭신이 쑤셔 한참 동안 몸풀기 체조를 한 뒤에도 좀처럼 사지에 온기가 돌지 않아 애를 먹어야 했다. 우리는 자전거로 선재도까지 30여 분을 전력질주 한 뒤에야 겨우 땀이 배어나며 몸이 풀렸다.
선재도에서는 게스트로 참가한 안진수씨의 자전거가 말썽을 일으켰다. 언덕을 올라갈 때 무리한 변속을 한 탓에 체인이 뒤틀리며 끊어져버린 것이다. 이 경우 자칫 끊어진 체인이 휠에 말려 들어가면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아찔한 사고. 체인툴을 이용해 즉석에서 다시 체인을 연결할 수 있었으나 시간을 상당히 빼앗기고 말았다.
- ▲ 1 느닷없고 뜬금없는 나그네들의 부탁을 선선히 들어준 안주인. 남편과 함께 꽃게잡이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아주머니는 영흥도에서 선재도로 시집온 뒤 지금까지 같은 곳에 살고 있다고 한다. 2 점심을 신세지게 된 선재도 꽃게잡이 부부의 부엌에서 된장찌개가 끓고 있다. 식당밥에 실망한 식객들에게 집에서 담근 된장으로 끓인 된장국은 감동이었다. 3 간재미찜이다. 말린 간재미를 떡 찌듯 증기로 쪄낸다. 맛은 홍어와 같은 꼬롬한 향취와 함께 깊다. 육질의 결이 느껴져 식감이 뛰어난 남서해안의 별미다. 4 직접 제작한 낙지사냥용 종다래. 삽처럼 생겼으나 점도 높은 진흙뻘을 파내야 하므로 날이 작은 것이 특징이다. 5 야영장의 아침. 간밤에 갑자기 내린 비 때문에 젖은 침낭을 덮고 텐트에서 잔 대원들에게는 아침이 반가웠다. 비를 피해 민박집에서 따뜻하게 잔 허영만 화백(왼쪽)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야영 대원들을 바라보고 있다.
- “앞으로도 필요할 텐데 자전거 고장에 대비한 기초적 응급 처치를 배우는 게 어떠냐?”는 허영만 화백의 제의. 하기야 앞으로 남은 4,500km 여정에 이런 돌발 사건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었다.
자전거 정비 강의를 할 곳은 선재도의 남쪽에 있는 경치 좋은 목섬으로 정해졌다. 목섬은 선재도와 가느다란 모래톱으로 연결되어 있어 물이 빠지면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이동할 수 있다.
이미 자전거 전국일주 경력이 있는 데다 수십 대의 자전거를 조립해 본 경험이 있는 이진원과 김경민의 주도로 자전거 현장 정비 강의가 이뤄졌다. 타이어 펑크를 때우는 법, 끊어진 체인을 연결하는 법, 앞뒤 변속기를 세팅하는 법 등 자전거 여행자라면 꼭 알아둬야 할 알토란같은 내용의 강의가 두 시간 가까이 계속됐고 수강생들은 눈을 반짝이며 집중했다. 특히 허영만 화백은 펑크 때우는 방법을 직접 따라해 보는 열성을 보였다.
강의가 끝나자 어느덧 점심시간. 영흥도로 가기 위해 선재도 해안길로 접어들자 작고 아담한 마을이 나타났다. 어촌답게 집집마다 간짓대나 처마 밑에 마른 생선들이 걸려 있다. 소금에 절여 꾸둑꾸둑하게 마른 생선의 짭조름하고 비릿한 내음은 끼니때를 맞은 나그네들의 군침을 돌게 만들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식당은 보이지 않는다. 마침 경운기를 몰고 나타난 노부부에게 달려갔다.
“저… 실례지만 혹시 시간이 되시면 밥 좀 먹을 수 있을까요? 물론 밥값은 치르겠습니다.”
- ▲ 6 소래습지공원 안에 있는 염전 위를 통과 중인 일행들. 이 염전은 이제 더 이상 소금을 생산하지 못한다. 그저 관광객들의 구경거리일 뿐이다. 7 선재도 가는 길이 어디더라? 대부도를 떠나 선재도, 영흥도 방향으로 가기 위해 지도를 살펴보는 대원들. 자동차 도로보다는 한적하고 안전한 비포장도로를 찾는 게 중요하다. 8 야영장 앞의 해변에 물이 멀리까지 빠졌다. 다시 길을 떠나기 전 아침 운동을 겸해 페달링을 하고 있는 대원들.
- 전국일주 자전거투어를 시작한 이래 식당 음식에 적잖이 실망해 온 우리들로서는 민촌의 가정집에서 밥을 먹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민가에 가서 밥을 해달라는 것은 누가 봐도 무리한 부탁. 그러나 아주머니는 우리들의 행색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흔쾌히 그러마고 하신다.
“시골이라서 뭐 먹잘 것은 없습니다. 우리도 마침 먹으려던 참이니까 된장국에 밥이라도 좋다면 그렇게 하세요.”
잠시 뒤 밥상이 차려졌고 우리는 실례를 무릅쓰고 아주머니댁의 안방을 차지하고 앉았다.
된장국에 밥뿐이라던 아주머니의 얘기와는 달리 앉은뱅이 밥상에는 진수성찬이 차려 있었다. 꽃게무침에 간재미찜이 있고, 말린 바지락 볶음이 겉절이 김치와 함께 나왔다.
노부부의 직업은 꽃게잡이. 대부도 인근에서 조업을 하는데 오늘 무친 꽃게는 어제 잡아온 것이고 바지락은 아주머니께서 초가을에 직접 캐서 말려둔 것을 간장에 볶았다는 것이다.
선재도 꽃게잡이 노부부의 꾸밈없는 식탁은 성의 없고 조미료 투성이인 식당밥에 질린 우리들의 미각을 일깨웠다. 무엇보다도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간척지 쌀로 지은 밥맛이 감동이었다. 한 양재기가 넘는 꽃게 무침을 게눈 감추듯 비운 우리들은 고추장을 청해 남은 밥을 비벼 먹었다. 이날 선재도에서의 점심식사는 <자전거를 탄 식객>을 표방한 우리들이 9월에 투어를 시작한 이래 최고의 성찬이었다.
/ 글 송철웅 아웃도어 칼럼니스트 사진 이정식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