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솔길 사랑방 ♥/역사 이야기

50만명 고려인들의 근원지 - 신한촌

호젓한오솔길 2011. 1. 4. 11:36

 

1999年 8월 한국 한민족연구소는 3.1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러시아 연해주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기리고 재 러시아 고려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 옛 한인촌 자리에 신한촌 기념비를 세웠다.

 

"신한촌은 세계 각지에서 살고 있는 조선인들로 볼 때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재 러시아 고려인들에게서는 잊지 못할 이름으로 남아있다"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고려인 이 베체슬라브(고려인)(블라디보스톡고려인문화자치주 회장겸 연해주 고려인문화재단 단장)가 설명하면서 "신한촌에 이 기념비를 세웠을 때에 현지의 '스킨헤드족'들이 기념탑에 자주 아주 나쁜 글을 쓰고 또 자주 훼손하는 바람에 이렇게 작은 울타리를 만들고 지키고있다"고 했다.

 

현재 이 기념비 주위에는 울타리가 잘 만들어져 있고 밤에는 반드시 정문을 잠그고 지키고 있다고한다.

 

1863년 13가구의 조선인들이 연해주 남부지역 각지에 조선(한)인촌락들을 형성했다. 스이푼강이 흐르는 스이푼 일대에 련이어 도강해온 조선(한)인들에 의해 조선(한)인촌락이 개척되였다. 또 1871년도에 구소련당국의 인도를 받은 한인들이 한인촌락을 형성했으며 연해주 동남부지역인 블라디보스톡에도 1874년도에 한인촌 개척리가 형성되였다. 조선(한)인들은 바로 이 초기 한인촌을 1911년에 형성된 신한촌과 구별하여 구개척리라고 불렀고 신한촌을 신개척리라고 했다.

 

서북간도 및 연해주 조선(한)인사회를 배경으로 건설된 신한촌은 항일민족지사들의 집결지였고 나아가서는 국외독립운동의 중추기지로 발전해 조선(한)민족의 의기가 충천하게 되였다

 

그러나 1937년 극동 조선(한)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로 신한촌이 페쇄될 때까지 신한촌에서의 조선(한)인활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였다. 신한촌이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는 조선반도 3.1반일운동 이후 상해 림시정부가 수립되기 이전 조선독립운동을 주동해 온 곳이라 할수 있다. 한일 합방이 림박하자 조선(한)인 지도자들이 여기에 모여 조선반도 13도를 대표하는 13도의군을 조직했고 한일합방이 전해지자 신한촌에서는 조선(한)인 대표들이 성명회를 조직했고 1914년 5월에는 권업회를 조직했으며 1914년에는 조선(한)인 시베리아 이주 50주년과 러일전쟁 10주년을 맞아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기도 했다.

 

특히 신한촌과 반일투쟁의 전적지였던 룡정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연변대학 박창욱 력사교수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한 연해주는 조선반도와 국경이 린접하고 훈춘시를 통해 쉽게 드나들수 있기에 신한촌과 용정의 명동촌은 민족독립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당시 신한촌에서는 무기구입이 가능했기에  이곳은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무기와 탄약을 구할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했다.

 

안중근의사가 할빈역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사용한 권총도 바로 신한촌에서 구했으며 동료들과 새끼손가락을 끊어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굳은 결심을 했다.

 

또 룡정 3.13반일운동이후에 벌어진 '15만탈취사건'도 신한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19년 12월 30일, 조선은행 회령지행에서 일제가 길회선부설자금 15만원을 회령에서 룡정간도일본총령사관으로 보낸다는 비밀정보를 독립군들은 입수했다. 이 소식을 받은 '철혈광복단'성원들중 힘이 세고 날랜 윤준희, 최봉설,임국정, 한상호, 김훈( 김성일),박응세 등 6명을 선발해 '결사대'를 구성한후 돈을 빼앗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가서 총을 사 무장하기로 했다. 이들은 1920년 1월 3일, 룡정부근의 신명촌과 수동(지금의 승지)사이에 있는 동량어구 재바위골 평탄한 길에서 돌연습격해 전신 무장한 왜놈 여섯을 격사하고 두대의 마피리와 세마대나 되는 조선은행권 15만원을 탈취한후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신한촌에서 그들은 군자금으로 무기를 구입하고 사관학교를 건립하며 신한촌의 개인집을 사 출판소를 세우기로 계획했으나 일본밀정이며 반역자인 엄인섭의 밀고로 1월 31일 일본경찰의 포위습격을 받아  한사람만 탈출하고 기타 독립가들은 체포되고 금액 12만 8000여원은 몰수당했다.

 

현재 신한촌의 자취는 찾을래야 찾을수 없지만 신한촌의 파란만장한 력사는 후세에 반드시 전해져야 한다고 력사학자들은 지적하고있다.

/흑룡강신문 윤운걸 길림성 특파원 1394439137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