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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부의 소설로 읽는 중국조선족 이민사 .

호젓한오솔길 2011. 1. 4. 11:39

 

한 부의 소설로 읽는 중국조선족 이민사 . 

 
조모의 傳說 (1)

 


김 혁
             

 

 

... 그때 그 우물에서 룡이 나왔다고 나의 할머니는 이야기하셨다.
백세를 바라보는 세기의 로인임에도 우리는 그이를 <<쌍가매(가마)>> 할머니라 불러 버릇 했다.
할머니의 이마전에서 오른쪽으로 치우쳐 가마가 자리를 틀고 있었다했다.
년세가 든후에는 머리가 많이 빠져 이제 더는 가마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찾아볼수없는 쌍가마의 정체와 마찬가지로 우물에서 룡이 나왔다는 전설도 우리에게 있어서는 민화나 전설으로 지나 칠 한 대목 이였다.


하지만 할머니는 우물에서 룡이 나왔다고 확신의 어조로 말 하군 했다. 어거지에 가까운 어조였다.
유치원 다니는 증손녀와도 아니고 누구를 보나 그렇게 말 하군 했다.
우리는 그저 로후의 로인의 망녕든 소리쯤으로 치부하고 지나치군 했다.
할머니는 이제는 틀이 끼기조차 힘들어져 체념하고 푹 패인 합죽이로 부대처럼 훌쭉한 볼을 풀럭이면서도 어눌거리는 말씨로 우물에 관한 이야기를 하군 하셨다.
모시빛저고리에 검정 몸베를 받쳐입고 어깨가 시려나는지 무명실수건을 마냥 어깨에 걸치고 한쪽 무릎은 세운채 오두마니 앉아서 할머니는 형형한 눈빛으로 이야기를 하셨다.

할머니가 즐겨 말하는 그 우물은 현성의 남쪽 가장자리에 있었다.
그곳은 고색 창연했던 이 현성에서 하나의 풍경구가 되여있다.
현성에 들리는 사람 치고 그 우물을 찾아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우물주변에는 철책(鐵柵)을 두르었고 우물 아구리는 철판을 대여 커다란 자물쇠를 잠근 데서 사시장철 쌉스름한 물이 자작하게 괴여 있었다는 우물물을 볼수 없었다. 우물아구리에 놓인 용드레틀도 평소에는 보이지않았고 명절이나 유람객들이 운집하는 관광 호황기에만 그 무슨 무대세트처럼 얹었다가는 다시 떼여 내군 했다. 여하튼 그 우물에서 룡이 나왔으며 우리고장의 이름도 그 우물 그 룡을 따서 달았다는데 대해선 누구나 알고 있었다.

할머니의 전설은 그 우물로부터 시작 되군 했다.
사람끼리 잡아먹었다는 기사년 대기(大飢)의 고개를 넘어 백년전 쌍가매할머니의 아버지는 이곳에 이르렀다.

 


 

 


 

 

 

* 이주민들이 건넌 눈물 젖은 두만강

 
  봇짐을 풀던 첫날 칠척의 장한은 대동해 왔던 가족들 앞에서 땅을 치며 목울음을 울었다고 했다. 풍문에 이곳은 물고기가 논 코에 욱실거리고 꿩이 가마에 절로 날아들고 뜰에서 몽둥이로 노루를 때려잡는 살기 좋은 고장이라 했다. 허나 그들을 맞아준것은 천만년 묵은 진펄에 갈대 숲이 우거지고 야수가 출몰하는 인적기라고는 없는 고장 이였다. 천재(天災)를 입은 고향의 풍토가 거칠다고는 하지만 이곳 만주 땅에 비할 바가 아니였다.

삼을 굽는 구덩이를 파놓고 길쌈을 잘했으므로 고향에서는 그네들을 삼굽집이라 불렀다. 그들의 고향에는 3년째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있었다. 떡갈나무에 개피를 뿌리며 강우제를 지냈지만 무심한 하늘은 비한방울 내리기에 린색했다. 그리고 집에는 라병환자 아들을 두고 있었다. 굶는 서러움에 <<문둥이집>>이라 사람들로부터 오는 소박에 등허리를 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리향할 생각을 뼈물러 머금었던 것이다. 떠나면서도 삼을 구워야한다며 쌍가매의 어머니가 삼씨 반 사발을 보짐에 품고 왔다.
그들 일가처럼 수효를 셀수 없는 사람들이 처자를 거느리고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망건에 헌 삿갓, 퇴색된 휘양을 쓰고 무명두루마기를 걸치고 미투리를 신은 사람들...
너나가 다를 바없는 따라지 목숨들 이였다.


 

 


 

 


 

* 장사진을 이룬 이주민 행렬


 


함경북도 부령군에서 왔고
갑산군에서 왔고
정성군에서 왔다.
김액 김씨, 전주 이씨, 미량 박씨들이 왔다.
삼굽는 사람도 왔고
총을 든 포수도 왔고
곡하는 사당패출신도 왔고
안경 건 훈장도 왔다.
대짝같은 보퉁이를 지고 남부녀대하고 밤도와 강을 건너 왔다. 둥지 털린 멧새처럼 민들레 홀씨처럼 여기저기서 날아와 이러구러 동네를 이루었다.

향수에 볼을 적시는 눈물을 뻑 문지르고는 이튿날부터 황무지개간에 나섰다.
버들과 갈을 베고 불을 달았다. 그때 실향민들이 놓은 불은 옹근 하루밤 하루낮을 타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개간의 첫 모지락괭이를 박았다.
사력을 다한 그네들의 힘으로 비탈에 밭이 일구어지고 갈대숲 무성하던 사득판에 논이 풀리였다.


 

 


 


 
* 춘경에 나선 간도 이주민의 모습

그런데 고생중의 고생은 마실 물이 없는것이였다.
리씨성을 가진 훈장 하나가 풍수를 볼줄 아는지라 물 자리를 찾아 나섰다.
풍수를 본즉 이곳은 원체 왕후지지 (王侯之地)도 못비길 명당자리라고 했다. 땅 밑에 룡이 틀고 누워있다는 것이다.
우물자리를 잡고 동네에서는 간소하나만 주과포(酒果脯)를 차려 천지신명에게 제를 지냈다. 그리고나서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모래와 자갈을 들어 내고 돌을 까 내니 샘줄기가 터졌다.
쌍가매의 아버지가 우물맛을 보니 쌉스름하고 이발이 쩡쩡 시려나고 배속을 시원히 찌르는 것이 틀림없는 룡수였다. 물을 마셔본 사람마다가 물맛이 좋다고 절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우물 아구리를 정성스레 쌓고 물을 긷기 좋도록 용드레를 앉혔다. 우물가에 수양버들도 한그루 옮겨다 심었다.

좁장한 마을 안자락에 숨은 듯 주저앉아 있는우물가는 한컷의 흑백수묵화를 방불케했다.
곱게 쌓은 돌가퀴우에
룡드레 틀 하나 얹혀져 있고
우물벽체를 이룬 돌틈사이엔 물이끼가 꽃처럼 피여나고...


 


 


우물자리에서 룡수가 터지던날 쌍가매 어머니의 양수도 터져올랐다. 쌍가매는 그날 타향에서 탯줄을 끊었다. 어머니는 탯줄을 노전밑에 가만히 감추었다. 언제든 고향에 돌아가면 그곳에 묻어 주려는 것이였다. 그리고 우물물에 쌍가매를 씻겨 내렸다.


 

찬물의 세례에 쌍가매는 영악스레 울어댔다.

<<썅놈의 종간나(계집애)가 악바리질하고 울어대네.>>

덧불어난 입을 두고 아버지는 귀찮게 뱉었고 문둥이오빠는 가까이에는 오지 못하고 문 짬으로 갓난 애를 들여다보며 못나게 웃었다.

어른들의 타향살이의 애수가 쌍가매에게 옮았던지 아가는 울보가 되여 종일 울음이 그칠새 없었다. 그때마다 칭얼이는 애를 안고 어머니는 어릴적 배웠다는 노래를 흥얼이군 했다.

월편에 나붓기는 갈잎대가지는
애타는 내 가슴을 불러야 보건만
이 몸이 건느면 월강죄란다...

썩후에야 쌍가매는 한 곡조 밖에 흥얼일줄 모르는 어머니의 그노래가 <<월강곡>>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청정부는 월강하여 언감 자기들의 봉금지(封禁地)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을 잡았고 월강죄로 목을 쳤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죽음을 무릅쓰고 강을 건넌 사람들이 날로 불어만 났고 그네들의 한을 담아 싣고 이 노래는 널리 불리워지고 있었다. 쌍가매의 어머니가 다른 노래는 부를줄 모르고 하여 실향민들의 한이 서렸던 <<월강곡>>은 쌍가매에게서 자장가로 불려 졌다.


 

 
* 청태조 누르하치,
청정부는 선조가 태여난 장백산 지역을 신성시하여 봉금령을 내렸으며
월강하여 봉금지(封禁地)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을 잡았고 월강죄로 목을 쳤다

                            
                      
   

* 우리의 선조들이 월강하여 맨 처음 이른곳 사이섬
간도라는 이름도 이 섬에서 연유되었다.


어느 달이 휘영청 밝은 밤, 고향생각에 잠머리가 뒤숭숭해져 잠에서 깬 쌍가매의 아버지는 문을 나섰다가 그만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글쎄 우물에서 서기가 뿜겨 나오는 것이 아닌가! 사위는 일광단을 펼친 듯 백주처럼 환한데 뒤미처 무지개가 우물우에 비끼고 하늘땅을 뒤흔드는 소리가 나더니 무엇인가 우물속으로 부터 언뜰하고 솟아올랐다. 꿈틀거리며 날아오르는 그것은 틀림없는 룡이아닌가?!

<<룡이다!!! 우물에서 룡이 났소! 우물에서 룡이 났소!>>

아버지가 소리소리질렀고 잠에서 깬 포수네 집에서 사당패네 집에서 훈장네 집에서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사람들은 다투어 우물을 들여다 보았다.
우물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이 삼굽집 서방의 꿈이 아니면 환각 이였다고 후에 사람들은 말했다.

허나 우물에서 룡이 승천하면 후세에 장수가 나고 이 고장에 행운이 트일 것이라고 동네사람들은 쌍가매아버지의 말을 믿고 룡제를 지냈다. 남에 비해 살림이 조금은 윤택했던 사당패 김씨네가 먼저 자금을 선대하여 이웃 중국동네에 가서 석공을 청해 석비(石碑)를 세웠다. 리훈장이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시에 우물가에서 룡을 보았다고 비문에 써넣었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증조할머니가 어릴 적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였다.
허나 시간이 흐르면서 할머니의 이야기는 우물에서 나온 룡을 자기가 직접 본 것으로 바뀌어져 갔다.
할머니의 확고함에 가까운 어거지 같은것에 의해 룡의 전설은 우리 가문의 전설처럼 만들고 있는것 이였다.


 


조모의 傳說 (2)

 

김 혁

 
 

우물가는 애들의 둘도 없는 놀이터였다.

<<머리칼 떨구지 마라. 침 흘려넣지 마라. 부정탈라.>>

어른네들이 백당부했지만
우물가에는

야청옷을 입고
쥐꼬리만한 머리태를 기른
쌍가매네 또래들이 모여 놀군 했다.

그때 집집마다에 서는 바퀴성화가 극성이였다.
어른들은 롱조로 바퀴장례를 치러주면 바퀴가 없어진다고 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바퀴장례를 치렀다.
파지로 고깔상모를 만들었고 나무가지로 걸채?만들었다.
걸채의 앞과 뒤를 포수네 아들과 훈장네 아들이 들고 사당패집 아들은 앞에서 어른들의 본을 내여 아이고데고 호곡소리를 내였다.
그뒤를 쌍가매가 졸졸 묻어 다녔다.
피는 속일수 없는 법, 사당패의 혼줄을 타고 태여났던지 녀석은 어른들의 목돌림을 심통히 받아서 곡조를 제법 잘 넘겼다.

북망산천 어디메뇨
저기 저산 북망일세
내 집이 어디메뇨
무덤이 내집이로구나

그래도 바퀴는 없어지지 않았다.
밤이 되면 집 뒤의 수풀속에서는 귀신불이 날아 다녔다.

<귀신불이 아이다. 가둑낭기(나무)나 도토리낭기 썩으면서 그 썩박이 뿌리가 밤이 되면 파란 빛을 뿜는게다.>

얼굴바닥이 계집애들처럼 하얀 훈장네 아들애가 열심히 해석해 주었지만 그 귀신불이 못내 무섭기만 한 쌍가매는 밤중이면 오줌누려도 못나갈 지경이였다.
사당패집 애가 돌배 세 개를 들고나와 누가 귀신불 떠올수 있겠냐고 내기를 걸었다. 얼굴이 구운 밤돌처럼 반질반질한 박포수네 애가 나섰다. 썩박나무가지를 들고와 애들앞에 놓았다. 썩박나무에서 푸른 불들이 눈부시게 끓어 번졌다. 쌍가매는 우악 혼절할듯한 소릴 지르며 집으로 뛰여들어가 버렸다.

겨울이 오면 연놀이를 했다.
사당패집 아들이 한족마을에 가서 백지를 사 가지고 온다.
훈장네 아들이 연을 만든다. 수수대목을 갈라 다듬고 종이를 접어 자르고 어머니의 반짇고리에서 몰래 가져온 무명실로 단단히 걸어 매여 연을 만든다.
포수네 아들은 사금파리 조각들을 주어와서는 김치독 누르는 단단한 몽돌로 사금파리들을 산산이 부순다. 사금파리들은 몽돌에 맞아 사방으로 흩어지며 눈부신 빛을 발한다.
연체에 종이를 바르고 양 옆과 가운데에 꼬리를 단다. 연줄이 견디도록 사금파리 가루를 풀에 섞어 발라서 날을 세운다.
드디여
장방형에 십자살을 붙힌 왕연이 형체를 드러낸다.
가슴이 철렁하도록 맑은 얼음장같은 하늘.
문풍지 소리를 내며 얼레에서 풀리는 은빛 연줄을 타고 연이 오른다.
연은 자유롭게 간도벌의 대공(大空)을 누볐다.


 



머슴애들은 연싸움에 해가는줄을 몰랐다. 쌍가매가 곁에서 지켜보면 애들은 더구나 신나 한다.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넌들넌들한 코물을 흡흡 들이마시며 머슴애들은 얼레를 한껏 풀고 활개를 크게 벌려 힘차게 잡아 당긴다.
쌍가매는 해빛에 눈이 부셔 찡긋거리면서도 오래도록 젖힌 목고개가 아파 목을 쩔레 쩔레 흔들면서도 계속 하늘을 쳐다본다. 맞바람을 탄 연은 쌍가매의 머리위 높은곳으로부터 위용을 떨치면서 서서히 다가온다. 머리우를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기도 한다. 얼레가 감겼다 풀렸다하는 소리속에 연은 곧장 하늘로 날아 올랐다가는 대지를 향하여 독수리처럼 나래를 꺼수수 펴고 내려오다가 땅에 닿기전에 연줄을 풀어주면 다시 연머리는 하늘로 향한다.
연줄과 연줄이 부딪히는 소리가 우물가에 가득하다.
사금파리를 잔뜩 먹인 연줄의 얽힘속에 누군가의 줄 끊긴 연이 팔랑거리다 몸체를 흔들며 떨어져 나간다.
박포수아들의 연이다.
훈장의 아들의 연은 하늘로 우뚝 솟구쳤다가는 백학처럼 멀리 사라져 간다.
사당패집아들의 연은 날고 날아 우물가에 심은 버드나무에 가 걸렸다.
애들이 버드나무를 향해 우르르 몰려 갔다. 연이 갖고 싶은 쌍가매는 맨 앞에서 뛰여 갔다. 박포수네 애가 잽싸게 나무에 올라 연을 내리워 주었다. 가까이 까지 달려온 쌍가매에게 연을 넘겨주다 포수의 아들이 불현듯 쌍가매의 머리결을 함부로 만졌다.

<<쌍가매는 스나(남자)가 둘이래>>

내숭기 많은 훈장네 아들이나 행위가 애매한 사당패집 아들에 비해 박포수의 아들은 그 성미가 숭글숭글했다.
쌍가매는 부끄러운 나머지 연을 받아들고 정신없이 집으로 뛰여들어 갔다. 그 서슬에 문 짬에 끼여 연이 찢어져 있었다. 쌍가매는 그저 그 연이 아까울 뿐이였다. 동네 녀자애들중에서 발군(拔群)의 미모를 가진 처녀애로 자라고 있는 그였지만 자신의 농익어가는 몸의 싱그러움과 그 몸이 바라는 꿈과 갈구를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 쌍가매였다.


현성에 사숙이 섰다.
공부할수 없는 동포들을 계몽시키기위하여 사숙의 교원들은 마을을 돌며 야학을 열었다.
야학에서는 신문화를 적극 전수했고 어려운 살림들에 도움을 주고저 양잠, 양봉업도 곁들어 배워 주었다.
구학공부 5년에 <<대학>>, <<론어>>를 읽었다는 리훈장이 이곳의 교원직을 맡게 되였다. 물푸레 회초리를 들고 리훈장은 엄하게 아이들을 대했다. 그런 훈장에게 마을사람들은 아이를 시름놓고 맡겼고 가을이면 <<교원쌀>>을 내주군 했다.
작으나마 공터가 있는 우물가가 교실이였다.
리훈장의 열성적인 동원에 마을사람들은 한사람 두사람 야학에 모여 들었다.
옹색한 김서방도 자기집에서 애지중지하던 남포등을 가져와 우물가의 버드나무에 내걸었다.
나중에는 우직한 박포수마저 야학에 나왔고 그 청동방울 흔들어대는것 같은 소리로 훈장에게서 식자본을 따라읽었다.



가을볕과 쓰르라미의 울음소리속에 들판의 곡물들이 빛나게 익어갔고 마을사람들은 사당패집에서 울려나오는 흥겨운 노래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어얼싸 좋구나 농사한철 해보세
어얼싸 좋은데 무슨 농사 해볼가
어얼싸 좋으니 조농사나 해보세
옥토금토 량전에 어떤것을 뿌릴가

만알박이 왕옥조 느실느실 방치조
천리타향 강남콩 오동총백 비단콩
황금보화 황참외 개똥전에 떡참외
어서빨리 박으세 어서빨리 놓으세...


이렇게 아슴한 현기증같은 풍수의 희열에 젖었는 그들앞에 느닷없이 누군가가 나타났다.
중국사람 하나가 살쾡이 처럼 나타났다.
진화가 덜된 원숭이 같은 상판을 가진 그 사람은 발목을 덮는 남색 호복을 입고 있었다.
그 사람의 곁에 화승총을 거꾸로 멘 사람들이 묻어 서있었고 발치에서 갓난 송아지만큼 트대 큰 개가 혀를 빼물고 있었다.
황둥개는 황모꼬리를 흔들며 흰옷 입은 마을사람들을 보고 사납게 짖어 댔다.
어흠 어흠 헛목을 다듬고 나서 그 호복차림의 사람은 마을사람들이 도무지 알아 못들을 말마디들을 사금파리 긋는듯한 거북살스런 소리에 담아 질렀다.
그 귀신 씨나락 까먹는듯한 사금파리 긋는 소리를 훈장이 간신히 알아듣고 해석한 결과 동네사람들이 부쳐 먹고있는 땅은 이 왕씨성을 가진 사람의 땅이라는 것이였다.
마을사람들은 금세 덫을 맞은 듯 벙벙해졌다. 

 

 

 

* 당시 청나라 사람들의 모습

 


<<바위돌은 뉘기 들구 가재는 뉘기 먹는담둥?>>
<<곁방살이 큰방 차지 할려문 주인집양반 옴치고 있겠수? 남의 땅 함부로 뚜져놨으니 별쉬 없지비. 후유- >>

바람이 들이닥친 도적떼처럼 마을을 한바퀴 저었다,
한결 결이 세진 가을바람에 마을 사람들은 몸을 으스스 떨었다.

만만치 않은 서슬로 왕씨가 돌아간뒤 몇 해간 마을사람들이 손톱눈 다슳게 사득판을 번져 만든 옥답은 일조일석에 왕씨네 땅으로 되고 말았다.
마을들은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왕씨와 같은 중국사람들이 주변에 많았다. 그들은 산마루나 골짜기와 시냇물을 경계로 토지점유세를 납주하면서 이민들을 받아들였다. 동네사람들은 이런 땅주인들을 <<지팡이(地方)>>이라고 했고 중국사람들은 월강해 온 사람들을 개간민 이라하여 <<컨민(墾民)>>이라고 불렀다.

그날 감때사납게 마을사람들에게 으름장을 놓고 나서 왕씨는 목이 갈하다며 우물물을 맛보았다. <<호우(好)!>>하고 엄지를 뽑아들며 감탄을 련발했다.

<<기럼 이 우물꺼정두 지팡이네 우물이 된담둥?>>

물을 긷던 쌍가매 어머니의 얼굴에 수심이 비껴들었다.

강 건너 웃마을, 자두나무가 빽빽히 섰는 산더기 앞에 고래등같은 왕지팡네 기와집이 있었다. 왕지팡네 땅은 어찌나 넓은지 그가 하루동안 말을 타고 돌아다녀도 남의 땅은 밟지 않는다고 했다. 린근에서 내놓고 건가래를 뗄 넉넉한 재물과 세도가 있었던 왕지팡은 집에 사병(私兵)까지 네댓명 기르고 있었다.
그 위세에 눌려 <<컨민>>들은 가을에 가서 벼수확의 6할을 왕지팡네 집에 바쳐야 했다. 수확을 초곡채로 밭에서 왕지팡네 집 마당에 실어다 부리고 타작하여 알곡을 뒤주에 까지 넣어주었다. 그러고 나면 한해 식량이 태부족 이였다. 벼농사를 짓고도 입쌀밥을 먹지 못하고 왕지팡네 집에서 조며 옥수수며를 빌어먹었다.

자기 땅을 소작 지으려면 이곳에 입적을 해야 했다. 청나라에 입적한 <<귀화인>>들은 토지소유권을 가질수 있었다. 허나 그러자면 반드시 상투를 자르고 만인(滿人)들이 입는 호복을 입어야 했다.
<<치발역복(雉髮易服)>>을 해야 했다.


 

 
* 청나라에 입적한 <<귀화인>>들은
상투를 자르고  그들이 입는 호복을 입어야  했다.
즉  <<치발역복(雉髮易服)>>을 해야 했다



<<무시게? 상튀를 베라구? 아이 된다! 모가지를 베두 상튀는 못 베!>>

그것이 싫어져 박포수가 동네가 떠나갈 듯 소리질렀다. 성미가 불같은 포수였다. 금강산 산발을 타며 나는 짐승을 쏘아 잡고 뛰는 짐승을 때려 잡았다는 그다. <<뛰는 범의 꽁댕이를 잡았다>>고는 하지만 이곳에 온 뒤로 그가 짐승을 쏘는 것을 누구도 보지 못했다. 그의 집 바람벽에 걸려 있는 여직껏 한번도 쏘아못본 화승총이 박포수의 무용담을 어렴풋이 나마 증언해주는 듯 했다.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지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을에서 입적하는 귀화인들이 슬그머니 불어갔다.
동네에서는 사당패집에서 맨 먼저 머리채를 잘랐다.
어려서 사당패 꽹가리수가 되여 조선팔도를 메주밟듯하면서 산전수전 겪었다는 김씨는 매사에서 남보다 빠른 순발력을 보이고 있었다.
은전 4잎을 바치고 사당패집에서는 뜻대로 귀화증을 타 가질수 있었다. 그리고 한복 우에 앞가슴 한쪽 옆으로 옷깃을 여미는 남색 호복을 걸쳤다. 그후로 박포수는 사당패 김씨를 보는척도 않았다. 그때는 사내애들도 머리채를 길렀는데 머리를 깍은 뒤 사당패집 아이는 동네 아이들 보기 부끄러워 밖에 나오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왕지팡네 마소짚을 썰어 주고 륜번으로 우물물을 길어다 주어야 했다. 하필이면 꼭 멀리의 우물물을 길어먹으면서 생색을 내는 왕지팡이였다. 어른들은 해질녁까지 밭에 매여 있기에 그 물을 집의 아이들이 길어다주군 했다. 왕지팡네 아구리가 유난히도 넓은 중국식 독에 물을 길어 채우자면 대여섯 축에 반날 푼은 걸려야 했다.

쌍가매네는 라병환자인 오빠를 두었는지라 물을 쌍가매가 길어 야 했다. 쌍가매는 물을 긷기가 싫어났다. 솜털이 곤두서도록 지겨웠다. 웬지 흰옷 입은 사람만 보면 감때사납게 짖는 그 집 개가 무서웠다. 작식법이 판 다른 야릇한 음식냄새도 싫었다. 지어 길상을 빌어 문전에 단 붉은 등롱에도 어떤 괴기가 서려있는 듯 음산하게 보였다. 웃마을로 가려면 피나무를 결어 강을 가로지른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했다. 물초롱을 이고 살얼음우를 걷듯 다리를 넘나들려니 정수리가 빠개지는 듯 했고 몇 초롱 긷고 나면 다시 두레박을 던져 넣을 힘도 없이 사맥이 나른하였다. 그보다도 높은 중국식온돌에 앉아 볶은 땅콩에 쏘주를 마시며 물긷는 자기에게 은근한 눈촉을 꽂는 왕지팡네 아들이 보기 싫었다. 눈섭가운데 먹사마귀가 있어 눈이 세 개로 보이는 녀석이였다.
어느날인가 피나무다리를 위태롭게 건느다 물초롱을 강물에 처박고 말았고 그 자리에 퍼질러 앉아 섧게 우는 쌍가매의 모습이 박포수의 아들의 눈에 띄였다. 그날부터 박포수의 아들이 쌍가매대신 물을 길어주었다. 포수의 아들은 왕지팡네 집으로 길어가는 물에 침을 뱉고 손가락으로 휘휘젓어 놓군 했다.

<<똥춤이나 먹어라. 지팡이 되눔새끼들>>

그 유아같은 발상의 롱기에 쌍가매는 나직이 웃었다. 물초롱을 량손에 들고 지축자축 활개치며 걸어가는 포수아들의 씨름선수같이 덩치 큰 뒤모습을 감격의 눈매로 쫓군 했다.
훈장네 아들 사당패집 아들 포수네 아들 셋은 해종일 함께 뒹구는 둘도 없는 불알친구들이 였다. 그러던 셋이 어느날인가는 어쩌구려 살멱을 휘여잡고 싸움이 벌어졌다.

<<누기 쌍가매 신랑재 할래? 재껴서 이기는 사람이 쌍가매 신랑이다.>>

쌍가매에게로 몰부어지는 동네 총각들의 은근한 눈길과 마음들을 기수채고 성미가 우직한 포수의 아들이 내기를 걸었던것이다.
훈장의 아들은 <<이런 도깨비짓 안한다. 다른 내기 하자. 산수 풀든 연 날리든>>하면서 반대표를 들었고 사당패집 아들이 주춤이다 나섰다.
하여 우물가 공터에서 씨름내기가 벌어졌는데 누가 쌍가매의 <<신랑>>하나 승부를 가르기전에 음습한 웃음소리가 그들의 발목에 딴죽을 걸어 왔다.

<<놀고 있네. 꼬리방즈(高麗邦子) 새끼들>>

량미간에 먹사마귀가 난 왕지팡의 아들이였다. 역시 체대좋은 <<먹사마귀>>는 그들의 내기를 무질러 버리고 자기가 박포수의 아들과 씨름내기를 걸었다.

걸때좋은 포수의 아들은 씨름에 능했다. 배지기 자반뒤집기 왼가랭이 들어 엎기... 명수였다.
<<으잇샤!>>하는 포수아들의 먹임소리에 지팡이네 도련님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가 떨어졌다. 입에 흙을 가득 문 <<먹사마귀>>가 꿈질이며 일어섰다. 실떡거리며 다시 한번 달려 들었다. 이번에는 웬지 박포수의 아들이 모재비로 나가 넘어졌다. 사타구니를 손으로 움켜 잡고 신음을 흘리며 뒹굴었다. 지팡이네 도련님이 박포수 아들의 불알망태기를 어 넘겨 뜨렸던것이다.

<<부정이다! 엉터리다! 다시 해라! 다시 >>

상대가 자기네들의 명줄을 잡아쥐고 있는 지팡이네 집 도련님이라는것도 잊은채 그들은 격노에 몸을 떨며 다시 씨름을 붙혔다. 허나 곁에서 황둥개가 날쳐대고 무지막지한 사병들도 합세를 한지라 포수의 아들은 짐짓 져주어야 했고 몸피 무거운 지팡의 아들에게 깔려 끝내는 쇄골 하나를 분질러 먹고 말았다.

쌍가매는 골절된데 좋다는 약초인 당골을 찾으러 산발을 헤맸다. 야생초의 독향이 서린 몸으로 날이 어둑해서야 돌아 왔다.
당골을 들고 찾아 온 그 나무뿌리에 갈퀸 손을 포수의 아들이 와락 부여잡았다. 명주고름끈같이 말끈거리는 손이 쥐여지자 포수의 아들은 목덜미를 벌겋게 붉히며 외려 자기가 손을 놓았다.
포수의 아들에게서 쌍가매는 늘 화덕처럼 뜨거운 열기를 느낄수 있었다. 싫지않은 그손을 뿌리치고 나오며 쌍가매는 할랑이는 가슴을 억누르지 못해 했다.
태동하는 심기를 감추련듯 물초롱을 찾아들고 우물가에 나섰다.
우물가 주위에 민들레꽃이 놀란듯 활짝 피여 있었다.
우물에 비낀 쌍가매의 얼굴이 홍시처럼 익어있었다.



그런데 봄물 오른 풀잎사귀처럼 피여 오르는 마음을 안추리기도 전에 쌍가매의 아버지가 엉뚱한 쪽으로 고부라졌다.
쌍가매를 왕지팡네 아들에게 주려 작심한것이였다.

<<삼굽집 나그네 눈에 콩까풀 씌웠담둥? 딸자슥 겨우 자래워 놓고 하필이문 왕지팡네 집이요?? >>

동네에서는 그가 실성한거라고 의논이 자자 했다. 사실은 쌍가매네 집 장손이였던 오빠의 라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쌍가매의 아버지가 왕지팡에게서 리자돈을 꾸었던것이다. 쌍가매네 집에서 부득이 고향을 버린것도 모두 라병환자인 오빠를 위해서 였다. 안가겠다고 함지울음을 터뜨리는 쌍가매를 보고 안색이 엎어지며 아버지가 물바가지를 쥐여 뿌렸다.

<<쿨룩 쿨룩... 쥑일 종간나새끼! 울긴 어째 울고 그래냐? 다같이 죽을순 없재이냐? 쿨룩... 니 같은 종간나
들 두어봤대야 문디(문둥이) 아들만 하겠냐. 쿨룩 쿨룩>>

해소기침을 토하면서 아버지는 자르듯 말했고 아버지의 고집을 누구도 말려 내지 못했다.

왕지팡네 집에서 혼수감으로 쌀도 보내왔고 면포도 보내왔다. 그날 저녁 쌍가매는 잠들지 못하고 만감으로 속을 끓였다. 잠들지 못하고있는 아버지의 강그라지는것 같은 기침소리가 주는 신산스러운 분위기를 못이겨 쌍가매는 울면서 집을 나섰다. 그치지못한 울음의 여운이 목구멍으로 딸국질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쌍가매는 곧추 우물가로 다가갔다.
청렬한 물내움이 풍겨 올라왔다.
우물물에는 송편같은 열엿새 만월이 비껴 야울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 쌍가매의 얼굴이 부옇게 비껴있었다. 주체할길없는 눈물이 뚤렁뚤렁 우물에 떨어져 내렸다. 우물속의 달그림자가 순간에 망가져 버렸다.
우물가에서 우물속의 달을 들여다 보며 쌍가매는 날이 새도록 울었다.
검정 통치마처럼 질긴 밤은 걷히기 시작했고 달은 우물속에서 찰랑이다가 첫닭이 배고픈 울음을 울때 품속에 갈무리해버린 거울처럼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리고 그와 함께 쌍가매는 치마폭을 뒤집어 쓰고 우물에 뛰여들었다.

쌍가매를 구해준 사람은 훈장네 집 아들이였다.
평소에 계집애처럼 양순하기만 하던 그가 서슴않고 우물에 뛰여들어 쌍가매를 구해 냈다고 했다.

<<어째 날 살려놨소. 지팡이눔께 시집가는 꼴 기에 보자구 그랬소>>

개복한 쌍가매는 억장이 무너지게 울었다. 그곁에서 화근내나는 한숨을 짓는 훈장아들의 안경알 넘어로 이슬같은것이 반짝이고 있었다.
쌍가매의 아버지는 아무말도 못했고 터진 그녀의 이마빡에 장을 떼여 붙여 주며 쌍가매 어머니의 목소리가 걷잡을수 없이 높아졌다.

<<이 숭악한 종간나야. 오래비 살린다고 크게 생각해 봐라. 문디라도 울집 장손이 아이등가.>>

쌍가매는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어머니의 짐짐하게 짓무른 눈꼬리로 눈물이 배여 나오고 있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어머니는 물초롱을 들고 집을 나섰다. 우물물을 길어서는 삼구덩이를 덮은 불에 달구어진 돌에 물을 뿌렸다.
돌에서는 허연김이 씨익- 뿜겨 올랐다.
한초롱
두초롱
세초롱,
어머니의 마음처럼 돌우에서는 허연 단김이 뿜겨져 오르고 있었다.
삼이 익자 어머니는 다시 우물가로 나갔다. 삽짝문을 여미고 돌아선 순간 부터 어머니는 두손을 가슴앞에 여며 쥐였다.
우물물을 길어 대접에 붓고
대접을 우물가장자리에 얹어 놓았다.
누구에게 빌어야 하는지 어떻게 빌어야 하는지 생각나지 않았지만 누군가 그랬던 기억만으로 마른 손 서벅이며 비손질을 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삼신님 비나이다...
딸애가 진땅을 디디지 않고 마른 땅만 디디기를 빌고 빌었다. 기원을 마치고 물을 길어 딸의 몸을 깨끗이 씻겨주었다.
등을 밀다말고 어머니가 드디여 참지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판소리같은 소리로 락루를 하셨다.

<<하이고...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짓고 났길래 이럭케 제 자슥에게 못할짓을 하능가>>

그날의 그 아픔이 나의 할머니의 쌍가매가 틀고앉은 이마 아래에 지울수없는 흉터로 남아 있다.

풀죽은 잠자리가 날개 무거워 힘없이 날으던 어느 가을날, 쌍가매는 종내는 왕지팡네 집으로 시집가고 말았다.
쌍가매는 처음으로 이마의 잔털을 밀고 화장을 하고 새옷을 입었다. 단장을 시켜주는 어미에게 몸을 맡기고 있는 그의 얼굴은 무표정하였다. 체온없는 가면구같아 보였다.
붉은색비단옷을 입고 붉은 비단신을 신고 머리에는 붉은 비단보를 뒤집어 썼다.


신부를 맞으러 사인교에 악대까지 동원되였다. 쇄납이라는 중국악기가 귀청을 따갑게 울렸다.
무서리가 깔린 가슴을 안고 쌍가매는 사인교에 올랐다. 사인교가 휘청거렸다. 사인교의 량켠에 작은 뙤창문이 뚫려 있었다. 머리에 쓴 비단보를 들추고 뙤창의 문발귀를 들추고 떠나면서 쌍가매는 동네를 다시금 돌아보았다. 우물가에 막막하고 허술한 표정으로 섰는 동네사람들이 보였다. 부질없이 안경테를 자꾸만 추어올리는 훈장네 아들이 보였고 호복의 팔소매에 두손을 집어넣고 피짚먹은 망아지처럼 눈만 끔벅이고 있는 염쟁이네 아들이 보였다.

<<누이야, 누이야아!->>

집쪽에서 허파를 긁는듯한 갈린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물러빠진 손가락으로 창턱을 부여잡고 봉창으로 얼굴을 내민채 오빠가 거위처럼 한스런 소리를 꺽꺽 내고 있었다.
쇄납의 귀청을 빼는듯한 소리속에 밀물에 밀리는 나루배처럼 사인교는 표표히 우물이 있는 마을을 떠났다.
쌍가매는 체념한듯 그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외나무다리가 걸터있는 내가에 이르렀을때 홀연 쇄납소리가 뚝 멎었고 사인교가 멈춰섰다. 다급한 발자욱 소리에 이어 가마가 그네뛰듯 세차게 흔들거렸고 혼잡한 소요속에 누군가 가마에 난 뙤창으로 머리를 불쑥 들이 밀었다. 쌍가매의 머리에 씌여진 붉은 보자기를 잡아채 내렸다. 포수의 아들이였다. 잔뜩 힘이 들어간 손으로 포수의 아들은 가마채를 부여 잡고 있었다. 독을 마시기라도 한듯 마냥 둥글고 순하던 눈속에는 붉은 피물이 번지고 있었다.

<<엑! 나쁜 문디 종간나야 허구한 동리 남자들 다 제쳐놓코 하필이문 지팡이 되눔과 붙어 뿌렸냐?>>

쌍가매는 얼음채찍에라도 맞은듯 전신을 떨었다. 동네사람들은 혹간 자기집과 다투는 일이 있어도 그 아픔을 헤아려 문둥이라는 말만은 삼가했다. 허나 이 순간 포수의 아들의 입에서 그말이 거침없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질박하기만 하던 포수의 아들은 가장 험악한 말로 그녀를 저주하고 있는것이였다. 지팡이네 사람들이 우루루 달려들어 포수의 아들을 가마전에서 떼냈고 땅에 태를 치고 짓밟았다.
이윽고 빼악거리며 쇄납소리가 다시 울렸고 흔들거리며 가마가 다시 떠갔다. 내가에서 포수의 아들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주먹으로 벌창해지는 눈확을 삑 문지르고서 외나무다리에 올라선 사인교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필사의 힘을 다해 목청 깨져라 소리를 질렀다.

<<문디 종간나야!_ >>
<<문디 종간나야!_ >>...

우직한 성미의 박포수의 아들이 끝내는 재국을 치고 말았다.
왕지팡네 황둥개가 잔치집에 음식버럭을 맡아 해주러 찾아간 동네 사람을 물었다. 개는 일전에도 사숙에 공부하러가는 애를 문적이 있었다. 토끼털 귀싸개로 귀를 싸고 문앞에서 할일없이 이죽거리던 <<먹사마귀>>가 개를 추겨붙혔던것이다. 사숙을 가려면 왕지팡네 자두나무 빽빽한 집을 지나쳐야 했고 그렇잖아도 그 개가 무서워 멀리 에돌아 가는 애들을 개가 따라가며 감때사납게 짖어대군 했었다. 왕지팡네 채소밭을 솎아주던 마을 아낙도 개에게 물린적 있었다.
개에게 물리면 그 개의 허벅지쪽 털을 잘라 태워 가루를 참기름에 개여 먹이면 상처자리가 낫는다고 했다. 개의 털을 달라고 찾아간 그 학도의 엄마를 <<길한 날 두수없이 논다며>> 왕지팡네 아들이 개를 추겨 쫓았고 그의 역성을 들어 찾아간 박포수를 개가 또 한번 물었다.
이에 박포수 아들이 비맞은 장닭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더는 참지못하고 벽에 여태 걸어두었던 화승총을 벗겨들고 왕지팡네 집으로 달려갔다. 지랄 용천하며 덮쳐드는 개를 향해 불 탄을 쏘았다. 개는 한자높이 치솟다가 떨어졌고 낑낑거리다 시뻘건 주련을 써 붙힌 지팡이네 대문앞에서 널부러 지고 말았다.
이는 중국사람들의 속담과 같이 <<언감 룡의 수염을 건드린>> 대역무도한 일이였다. 총을 꼬나든 사병들이 득달같이 달려 나왔다. 도망가는 박포수의 아들을 향해 란사(亂射)를 해 댔다.피나무다리를 건너다 포수의 아들이 몸에 총탄을 맞았다. 피를 흘리며 마을 까지 달려오다 더는 지탱하지 못하고 우물가에서 쓰러졌다. 우물가에서 아낙들이 물초롱을 떨어뜨리며 깨지는 소리를 질렀다. 피를 많이 흘렸던 박포수의 아들은 목이 마르다고 했다. 물 좀 떠 달라고 했다. 물 한 드레박을 다 마시고 포수의 아들은 우물곁에서 죽고 말았다.

쌍가매는 지팡이네 집 뒤켠의 우물이 있는 자기네 마을이 동두렷이 내려다보이는 자두나무숲속에서 쪼그리고 앉아 속울음을 울었다.

<<이제 오빤 죽어 구신(귀신)이 되여서두 날 용서하지 않을거다. 용서하지 않을거다>>

마음의 응어리를 굴리며 울고 울었다. 이 순간 지팡이네와 한 지붕을 이고 있는 자신의 처신이 부끄러웠고 억울하게 죽은 포수의 아들이 불쌍했다. 소박하고 단순하고 선량한, 어찌보면 무지렁이 친오빠보다 더 의뢰가 갔던 포수의 아들이였다.
쌍가매는 지팡이네 집에 다시 들어가기가 싫었다. 도깨비들이 란무하는 곳처럼 괴기가 서린듯한 그 기와집이 쌍가매에게는 옥사(獄舍)처럼 생각되였다. 갇힌 짐승처럼 권태롭고 애절한 그의 눈동자속에 보이는 사방의 모든것들이 다 춥고 암담했다.
어디선가 과부의 청승맞은 노래가락과도 같은 부엉이울음이 음울하게 울려오고 있었다.

생떼같던 아들의 죽음을 두고 박포수는 경찰서를 찾았다. 허나 사사로이 총을 휴대했고 민가를 저격했다고 죄는 오히려 박포수네 쪽으로 들씌워 졌다. 일본놈들이나 지팡이들이 한 바지를 입고 춤추던 시국, 부딪쳐봐야 자기 머리만 깨질일이였다. 풀어진 알상투도 좇지 못한채 경황없이 경찰서를 찾아다니며 원한을 호소하던 박포수는 끓어오르는 울화를 삭이지 못해 뇌익혈로 경찰서문전에서 죽고 말았다.
드레박을 부등켜 안은채 죽고 경찰서문전에서 죽은 박포수네 부자간의 모습은 마을사람들에게 화인처럼 남아 두고두고 잊지못해 했다.

포수네 부자간의 생떼같은 죽음에 마을을 뒤숭숭하게 하는 불안속에도 사당패집 김씨의 신경은 다른곳에 잔뜩 쏠려져 있었다. 김씨는 강이 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이 얼면
소금밀수를 할수 있었다.


* 당시 생활고에 못이겨 소금과 아편밀수에 나선 사람들이 많았다.
중국아편관에서 대마를 피우고있는 청나라 사람



간도땅에는 소금이 귀했다. 당지 소금은 중국내지에서 오는 <<암염(岩鹽>>이였는데 교통이 불편하여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고 값도 곱절 비쌌다. 조선에서 소금 한소두(7.5키로)에 50전이 못되였으나 <<암염>>은 1원도 더 갔다.
이에 사당패 집에서는 담대하게도 소금밀수를 시작했다. 조선 삼봉에서 소금을 가져와서는 한소두에 중국소금보다 조금 값을 낮추어 팔아도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 조선소금의 수입을 통제하기 위해 두만강북안지역에 <<사염집사대(私鹽輯士隊)>>까지 나왔다. 검은 정장을 하고 붉은 세모방망이를 휘두르며 집사대는 여간만 감때사납게 굴지 않았다. 발각되면 소금을 몰수당하고 벌금 수십원을 해야 했다. 엄중한자는 영창에 집어 넣고 지어 사형에 처하기까지 했다.
허나 생활고를 못이겨 밀수군으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밀수군들은 끊임없이 집사대의 눈을 피해 소금마대를 지고 산발을 탔다.

<<짭짤이(소금) 장사가 돈닢이 되긴 합구만은 이러다 언제 큰 코 다치재일지 모르겠습꾸마. 아이구, 벌둥지
에 코빼기 들이밀 짓을랑 인젠 그만 하깁소>>

하면서도 사당패집 녀편네는 떠나는 남편을 위해 속에 소금을 집어 넣은 주먹밥을 뭉쳤다.
밤이면 우물로 나가 험지를 떠나는 남편을 위해 우물물을 길어 대접에 부어 놓고 남편이 졸사없이 돌아오기를 두손을 부비며 빌었다. 그렇게 마을사람들은 우물가에서 마른 손 서벅이는 소리를 자주 들을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한번 소금밀수를 갔다오던 사당패집이 풍설을 만났다. 몸이 꽁꽁 얼어들어 산더기를 넘지 못하고 눈길에 쓰러졌다. 이튿날에야 발견하고 마을사람들이 얼어든 그의 몸을 발가벗겨 소구유에 눕히고 우물물을 부어 찬기를 뽑으며 역사를 했으나 종시 살려내지 못하고 말았다.

김씨가 죽은 뒤 사당패집 아들은 마을을 떠났다.
자기는 아버지처럼 평생 광대나 <<짭잘이 장사>>로 살수 없다고 했다. 집의 5쌍지기 수전문서를 장사 밑천을 융통하는 담보로 금융부에 처분하고 장사에 나섰다. 더 큰 장사를 해서 떼돈 벌어 오겠다며 떠났다.
그후로 오래동안 염쟁이 아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누군가 본데 의하면 그가 대구어를 콩과 바꾸며 장사를 하고 있더라고 했다. 회령에 다니며 면포밀수를 하고 있더라고 했다. 또 누군가는 그가 따옌(大煙) 장사를 한다고도 했다.

쌍가매가 지팡이네 집에 시집가는 대가를 내면서도 살리려했던 장손 오빠는 그해 겨울에 죽었고 그 말도 안통하고 지지리 싫은 왕지팡네 집에서 쌍가매는 한해 겨울을 채 못지냈다. 왕지팡의 아들 <<먹사마귀>>가 토비들을 끌어들여 현성의 <<동래순(東來順)은행>>을 턴 일이 사출되였던 것이다. 왕지팡의 아들은 경찰서에 잡혔고 그해 겨울 사형으로 구형받았다.
왕지팡네는 아들의 후사를 굉장히 치렀다. 발인날, 집으로부터 묘지까지 가는길에 장례식에 불태울 목마와 조기(弔旗)를 든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고 지전(紙錢)이 온 하늘에 날리였다. 장례식 행렬에 끼여 헛울음을 울면서 쌍가매는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이 악몽같은 례식이 어서빨리 끝나기만 바랬다.

이 무렵 사당패집 아들이 돌아왔다. 행세깨나 하는 지방유지처럼 인력거타고 마을에 나타났다. 황새걸음으로 돌아온 사당패집 아들은 기름독에서 빠져나온 신사처럼 태깔을 훤히 벗은 모습이였다. 떼돈을 벌었다고 했다. 머리는 뽀마도를 발라 올백으로 넘기고 양행의 직원들처럼 세비로를 받쳐 입었는데 발에는 돈피가죽신이 눈이 시게 빛나고 있었다. 양담배를 입귀에 물고 일본제품인 <<사슴표>>성냥을 드윽 그어 불을 붙혀 물고는 종일 우물가에서 돌아치군 했다.
그러는 사당패집 아들을 두고 어떤이는 아비를 닮아 난 사람이라고 했고 어떤이들은 돈많은 티를 내며 흥감질이라고 뒤에서 삿대질을 했다.

그렇게 뒤소리 많은 사당패집 아들이 괴춤을 크게 털어 쌍가매를 지팡이네 집에서 빼내왔다. 삼굼집에서 진 빚에 리자까지 해서 150원의 거액을 대신 갚고 빼여 내 왔다. 장례식이 끝난후 왕지팡네는 재산을 팔아가지고 고향인 싼둥(山東)으로 돌아가버렸고 쌍가매는 사당패집 아들의 덕으로 우물이 있는 집 마을로 돌아오게 되었다. 털어버릴것도 더 할것도 없는 몸으로 입속이 칼칼해지는 황토바람을 맞으며 쌍가매는 집으로 돌아왔다.
언덕길에는 서슬이 멀건 억새풀들이 머리를 내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우지끈! 앞내서 얼음이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 허비해진 몸을 가누며 눅눅한 바람이 부는 내가에서 쌍가매는 지팡이네 집에서 패물로 받았던 반지를 뽑았다. 헐겁게 돌아가던 반지는 부기에 퉁퉁 부어 오른 손마디때문에 잘 빠지지 않았다. 한동안 싱갱이질 해서야 반지가 손가락을 빠져 나왔다. 반지를 아무런 미련도 없이 앞내에 던져 버렸다. 반지를 끼고 있던 손이 얼얼해났고 그 자리에 허옇게 반지의 흔적이 남았다. 쌍가매의 마음도 그렇게 허옇게 바래져 있었다.

마을어구 우물가에 사람들이 모여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사람들의 틈바구니속에 훈장네 아들이 보였다.
훈장네 아들은 종이장을 쳐들고 읽고 있었다. 감개에 넘쳐 격문을 읽고 있엇다.

<<...오인(吾人)은 천민속의 한사람이요 약자속의 한사람이라 오늘 천명에 순종하고 인심에 응하여 천만민중이 한결같이 자유찬가를 부르며 쌍수를 부르쥐고 평등의 태도로 전진하는 바이로다. 저 동양문명의 수뇌, 동양평화의 보루라 자처하는 일제의 침략으로 하여 현정세에 변천을 가져왔도다... 민중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단합하야 침략자들이 간도땅을 밟지못하게 할지어다. 모든 사람은 다 신성한 책임이 있거늘 우리간도의 80만 조선족민중은 황천의 명소에 갈지언정 인류의 평등을 위하여 있는 힘을 다 바칠바이어라... >>


                                                                      

* 그날은 조선의 <3.1>운동의 충격파를 물고

반일열조의 불씨가 간도에서 타 번진 날이였다.

 


 

*  1919년 3월13일 용정만세시위 당시 시위군중을 향해

    일경의 압력에 못 이긴 중국 관원이 발포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시위현장인 오층대 건물의 옛 모습.


빠르게 말을 쏟아내는 훈장네 아들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안경속의 늘 맑고 담백한 기운이 있어보이던 눈에는 붉은 기운이 몰려 있었다. 엄격하게 양육되여 왔던 훈장집 자식의 이런 분방한 모습을 쌍가매는 처음 보았다. 그동안 다병했던 훈장의 손에 들렸던 물푸레 회초리가 아들에게 넘겨졌다. 어리지만 진중했던 그도 차츰 마을에서 훈장이라는 호칭을 듣기 시작하고 있었다.
우물가에는 훈장네 집에서 공부하던 젊은이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공명심에 들끓고 굴레를 싫어하는 젊음의 나이인 그들의 손에는 너나없이 기발이 들려 있었다. 기에는 <<정의인도>>, <<조선독립만세!>>라고 씌여있었다. 기에 씌여진 내용과 격문의 내용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붉게 상기된 얼굴들에서 그 부르쥔 종주먹들에서 쌍가매는 전에 없던 열류가 몸에서 굽이 침을 느낄수 있었다. 기를 쳐든 학생들은 훈장의 아들을 위시로 하여 구호를 부르고 기를 흔들며 사숙을 떠났다.

 


그날 현성쪽에서는 천주교회의 종소리가 여느때보다 높이 울렸고 구호소리가 간단없이 울렸다. 이윽고 되알진 총소리도 가슴 섬찟하게 울렸다.
그날은 조선의 <<3.1>>운동의 충격파를 받아물고 반일열조의 불씨가 간도에서 잉걸불로 타번진 날이였다. <<조선독립을 성원>>이라는 오장기를 든 기수의 뒤를 묻어 시위행렬은 호호탕탕하게 일본간도총령사관을 향해 매진하였다. <<독립선언서포고문>>을 랑독하고 <<조선독립만세!>>, <<일제의 침략을 반대한다!>>는 구호를 웨쳤다. 이날 현성은 흰옷 입은 사람들이 운집해 들어 파도의 이랑같은 물결을 이루었다. 허나 얼마못가 시위행렬은 일제의 협박에 나선 중국군경들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다.
쌍가매는 집에 돌아온 기쁨보다도 훈장네 아들의 소식에 은근히 속을 썩이고 있었다. 우물가에 나가 아낙네들에게서 현성소식을 귀동냥 해 들었다. 이날 시위에서 십여명이 류탄에 맞아 죽고 백여명이 체포되였다는데 훈장의 아들도 옥에 갇혔다고 했다.


 


  
 
* 용정의 <3.13>반일의사 릉

사당패집 아들은 이제는 쌍가매네 집에 무람없이 놀러 다녔다. 어느날인가는 특별히 쌍가매를 불러내여 무언가 손에 쥐여주었다. 일본제 <<가오우(花王)>>표 세수비누였다. 쌍가매가 난생처음 보는 세수비누였다. 세수비누에서는 환장하게 향기로운 냄새가 났고 그 냄새에 현혹하며 쌍가매는 사당패집 아들의 자기를 향한 마음의 용의를 진하게 맡아낼수 있었다.

밤, 잠들수 없는 쌍가매는 우물가로 나왔다.
우물속에 비낀 자신의 착잡한 표정의 얼굴을 들여다 보며 이름할수 없는 수심에 잠겨들었다.
그러다 쌍가매는 신열나며 몸져 눕고 말았다.
꿈에 포수아들의 밤돌같은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이 하얗게 변하며 도수안경을 건 훈장아들의 얼굴로 변했고 다시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사당패집 아들의 얼굴로 변했다.

 

* 죄악의 소굴 간도일본령사관 옛터
 

마을사람 셋이 보증인으로 나서서 신원보증서를 쓰고서야 겨우 옥에 갇힌 훈장의 아들을 보석하여 내왔다. 간도령사관 감옥에서 릉지가 되도록 뚜드려 맞은 훈장네 아들은 몸이 몹시 상해 있었다. 쑥색물감을 폭 뒤집어 쓴것 처럼 온몸 어데라없이 멍투성이였다. 손가락새에 저가락을 끼우고 틀었고 천장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주리를 트는가 하면 고추가루물을 입에 부어넣고 대꼬챙이로 손톱 틈새를 후비고 벌겋게 달군 인두로 가슴팍을 지지기도 했다 한다. 며칠 내내 그런 험악한 졸경(卒更)을 치르고도 살아남은것이 다행이였다.
그런 훈장의 아들이 걱정되였지만 쌍가매는 남새스러워 훈장네 집에 문안을 가지못했다. 그보다도 사당패집 아들과 훈장아들 사이에서 물살에 좌왕우왕하는 미역처럼 오가지 못하며 마음의 부하를 겪고있는 쌍가매였다.

옥고를 치른 몸이 추어서자 훈장네 아들은 마을을 뜨기로 마음먹었다. 떠나던 날, 마을 젊은이들이 모여 송별주를 마셨다. 훈장의 아들이 술대접을 들어 논에 물꼬를 트듯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가 이렇게 술을 많이 호쾌히 마시는 모습을 모두들은 처음 보았다. 술기운에 불깃해진 얼굴로 훈장아들이 사당패집 아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불쌍하고 착한 애니깐 잘 해줘라! 쌍가맬.>>

아궁이속처럼 깜깜한 어둠을 관솔불을 추켜들고 사르며 떠난 훈장네 아들은 오래도록 마을에 나타나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가 다시 간도령사관의 옥에 갇혔다고 했고 누군가는 홍범도 부대에 참가했다고 했다.


<계속>
조모의 傳說 (3)


김 혁
 
 

이듬해 쌍가매는 등돌린 미운 신랑을 꼭 닮은 아들을 낳았다.
그해 겨울은 여느때보다도 추웠다. 어느 별도 성긴 어두운 밤, 훈장네 아들이 느닷없이 마을에 나타났다.
거쿨진 사람 몇을 거느리고 마을로 찾아 왔다. 뒤따른 사람들은 모두들 그를 <<리대장>>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머리를 짧게 치깎고 있었고 볼이 홀쭉하게 패여있었으나 혁대를 두르고 발목에 각반을 친 훈장의 아들은 그렇게도 기품이 있어보였다. 성에 불린 도수안경속으로 보다 명징하고 날카로워 진 그의 눈길을 모두들은 느낄수 있었다.
그 타는듯한 눈길이 허공에서 쌍가매의 눈길과 얽혔고 쌍가매는 부지중 머리를 숙여 버렸다.


 

오랜만에 나타난 훈장네 아들의 품에는 돐도 안된 아이가 피륙에 쌓여 안겨 있었다. 그가 낳은 아이라고 했다. 밀림에서 생사를 함께 하던 녀자와 결혼했?아이를 보았는데 일본토벌대의 습격에 녀자가 죽었던것이다.
배가 고팠던 애는 꽃잎같은 입술을 열며 애자지게 울었댔다. 어떤 련민이 쌍가매의 가슴을 모질게 훑고 지났다. 쌍가매는 품에서 자는 자기 애를 내려 놓고 낯선 아이의 입에 젖을 물렸다. 가슴을 파고드는 애의 태열과 황달이 채 가시지않은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훈장집 아들을 꼭 닮은 아기를 꼭 껴안으면서 쌍가매는 왠지 구름덩이같이 붙잡을수 없는 이름할수 없는 미열(微熱)을 느꼈다.




* 궐기해 나선 항일련군 전사들

 

 
* 김좌진장군이 일본군 수천명을 전멸한 청산리대첩 유적지


부모에게 아이를 맡기고 떠난후로 훈장의 아들은 자주 마을로 찾아왔다. 허나 아이를 보러 온것이 아니였다. 마을의 청년들을 무어 동맹청년단을 만들었다. 삼굽집이 그들의 거점으로 되였다. 원체 라병환자의 집으로 소박맞던 집이니 일본사람들이 기피하기에 안전하다는 것이였다. 마을의 젊은이들은 밤이면 살며시 모여들어 훈장집 아들의 연설을 들었고 그에게서 노래를 배웠다.

<<만주의 벌에 불이 붙는다
시뻘건 화염 그속에서
반일하는 대중의 함성이 난다...>>

여직껏 노래라고는 엄마가 부르던 <<월강곡>>밖에 몰랐던 쌍가매는 열심히 <<총동원가>>라는 그 노래를 배웠고 훈장아들의 불꽃튀는 연설을 들었다. 나지막하나 박력있는 그의 소리에는 사람을 옭아매고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었다.
방안에는 겨릅대등의 불빛으로 밝은 귤빛이 가득 들어차 있었고 격앙된 노래가 등의 불티처럼 튀여오르고 있었다. 불빛에 익은 얼굴얼굴들이 유약을 바른 질그릇처럼 번들거렸다.
스러진 아궁이에 솔가지를 꺾어넣고 모여온 사람들에게 우물물을 길어 대접에 부어 놓고는 아이를 껴안고 곁에서 훈장아들의 선창을 받아 노래를 부를때면 충격이 달군 인두처럼 쌍가매의 가슴을 지지고 있었다. 신심을 다잡는 노래를 흥얼거리노라면 불꽃 사윈 가슴에 뜨는 별빛을 쌍가매는 은연중 느낄수 있었다.

훈장아들이 보급한 노래소리는 한사람 두사람에 걸쳐 온마을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노래는
뒤산 자락의 자두나무숲에도 이슬처럼 내렸고
내가 갈대숲에서도 바람처럼 서걱이였고
아낙들이 빨래하는 우물가에도 잠자리처럼 내려앉았다.
우물곁에 섰는 버드나무의 수천수만의 잎사귀에도 노래의 음조는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쌍가매는 은근히 훈장의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물에서 물을 푸다말고 두레박을 늘어 뜨린채 멍해 있기가 일쑤였고 겨릅대등 밝힌 집에서 사념에 잠겨있기가 일쑤였다. 로인들은 겨릅대등의 등찌가 우로 꾸불면 손님이 오고 아래로 꼬불면 안온다고 미신 했다.
쌍가매는 겨릅대등의 등찌가 우로 꼬불기를 바랬다. 쌍가매는 자신속에 움추려있는 어떤 주체할수 없는 기다림을 스스로 느낄수 있었다.

일본총령사관놈들과 그들이 사촉하여 무어 만든 자위단이 마을로 덮쳐든것은 그해 겨울이 지난 봄께였다.
총칼차고 군화를 절걱이며 누렁옷을 입은 한무리의 군대가 광분하는 맹수처럼 덮쳐들었다. 혼겁한 나머지 참깨처럼 줄어든 마을사람들은 둔탁한 총박죽에 날큼한 창끝에 윽박질려 우물가로 끌려갔다. 우물가에서 사람들은 공포에 밀려 한폭의 벽화같이 고착되여 버렸다. 매운 봄바람이 사람들의 이마를 날카롭게 베며 지나갔다.





* 항일지사들을 체포하고있는 왜놈토벌대


일본 토벌대가 황구처럼 질질 끌고 온 사람 하나를 마을사람들앞에 내 세웠다.
비인간적인 구박으로 그 사람은 몰골이 말이 아니였다. 매돌속에 들어간 물불린 콩알처럼 으깨여져 있었다. 피투성이 얼굴에 깨여진 안경이 간신히 걸려 있었다.
등뒤로 결박을 지운 그 사람이 비틀거리며 간신히 일어섰다.
바람에 피로 적셔진 그의 머리칼이 불불이 일어서고 있었다.
그것은 꼭마치 화염처럼 보였다.
마을사람들을 향해 그사람은 피발린 얼굴을 비틀어 간신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사람을 겨우 헤아려 본 쌍가매가 입으로 헛비명이 새여나갔다. 그는 다름 아닌 훈장의 아들이였다.
집총자세를 하고 저승사자처럼 험상궃은 표정을 한 왜놈들 무리앞에서도 훈장의 아들은 두렴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처참하게 몰골이 일그러졌지만 그 미소만은 금속같이 세련된 미소였다.
그 찬란한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타앙!
총성이 울렸다.
공포에 응고된 침묵을 찢어발기는 총소리속에 훈장의 아들은 우물가에 천천히 모로 쓰러져 버렸다.
쌍가매는 터져나오는 공포와 울음을 막으려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두눈을 지질러 감았다.
구(區)의 서기직무를 맡아나서 일제의 주구와 악패지주를 청산하고 무기를 탈취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성세호대하게 벌려나가던 훈장의 아들은
광복을 앞둔 어느 날,
그 어떤 신념을 미소와 함께 머금고 쓰러졌다.
산더기마다 류혈하듯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여나던 봄날이였다.


 

        

 

* 항일련군전사를 참살하고있는 일본토벌대

 


그날 훈장네 일가족도 일본토벌대와 자위단에 의해 몰살당했다. 놈들은 훈장네 집에 불을 질렀고 일가족의 시체를 우물에 처넣었다.
토벌대가 간후 마을사람들은 시체를 건져내고 우물을 가셨다. 우물가 높은 더기의 락엽을 걷어내고 부엽토 밀어내고 붉은 흙속에 훈장아들의 시체를 묻었다.
훈장네 아들은 우물의 수호자로 되여 우물가에 묻혔다.
그후로 봄만 되면 사람들은 그 무덤가에 진달래가 아름벌게 놓여 있는것을 볼수 있었다.

훈장네 집은 일가족이 다 죽고 다행이도 밀영에서 낳은 그 돌잡이만이 살아 남았다. 훈장의 아들이 참살당한 우물가에서 쌍가매는 등짝이 터질것 같은 슬픔을 느꼈다. 포수의 아들이 죽었을때 속울음을 울었던 그는 이번에는 소리내여 울었다. 련줄로 자기곁을 떠나는 인연밭은 이들의 죽음을 두고 내장을 토해낼듯 한 뜨겁고 깊디긴 오열을 느꼈다.


빨갛게 짓무른 눈으로 쌍가매가 그 강보의 애를 맡아 나섰다.

<<어째 이래냐? 니하구 훈장집 아들이 무슨 사지어금이라구 다른 사람도 아니구 니가 나서서 이래냐?>>

아버지가 야단을 떨었고 동네 사람들도 의뭉스런 눈을 치떴지만 쌍가매는 흔연히 그애를 맡아 나섰다. 자기의 삶에 조용히 련루되여 있는 훈장의 아들을, 번개맞고 연기나는 자기의 삶에 힘과 정열을 주었던 훈장의 아들을 쌍가매는 잊을수 없었던것이였다. 아이들은 도담도담 잘도 자랐다. 탐스런 머리칼, 호박(琥珀)색피부, 통통히 살이 오르는 손목, 그 작은 생령들을 지켜보는 쌍가매의 부연 눈빛도 아이들의 눈을 닮은 검은 생기로 빛났다.
그리고 그애들을 위해 한 몸을 던졌다. 비행장이나 신작로를 닦는 근로봉사대속에 끼여 인부들에게 밥을 해주기도 했고 정미소에서 벼겨를 넘겨다 팔며 푼돈을 벌기도 했고 솔뿌리를 뽑아 기름 짜는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산에 가 쑥을 뜯어 쑥떡을 해 먹였고 다 캐여간 감자밭을 뚜져 감자알을 얻어냈으며 눈밭을 헤매며 배추뿌리를 캐였다.
애들이 방안이 비좁다하게 텀벙텀벙 기여다니고 장난감같은 이로 질긴 음식을 씹어댈때 그녀의 깎은 듯 패인 볼에 발가우리한 홍조가 떠올랐고 여직껏 경직된 얼굴을 하고 있던 아버지도 험상을 풀며 애들을 바라 소리없이 웃었다.

세월지나도 우물은 그 우물이였다.
피는 꽃과 지는 잎의 섭리를 우물은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사당패집 아들이 다시 마을로 나타난것은 그후로 썩후의 일이였다.
그때 쌍가매는 물초롱을 이고 물을 긷고 있었다. 장님거지처럼 어정거리며 마을어구에서 사당패집 아들은 쌍가매가 물긷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 보았다. 이제는 그제날의 청초함이 사라진 쌍가매, 하지만 그는 아직도 보폭하나 틀림없이 건강하게 걷고 있었다.

우물가에서 소곤대기 좋아하는 아낙들이 옮긴 풍문에 의하면 사당패집 아들은 사금판에서 정말로 떼돈을 벌고 국자가에서 작부퇴물림과 살림을 차리고 짐벙진 한때도 누렸었지만 그 눈맞고 배맞았던 요상스런 녀자에게 재산을 하루밤새에 몽땅 떼웠다고 했다.

<<송충벌거지(벌레) 솔낭구(나무)잎 떠나 못살지비유>>

허기끝의 탐식처럼 사당패집 아들은 우물물을 정신없이 들이마셨다. 자기앞에 섰는 쌍가매와 비온뒤의 제비쑥처럼 자라난 자기를 꼭 닮은 아들과 친형제처럼 곁에 바싹 붙어섰는 훈장네 아들을 면괴에 어린 눈길로 바라 보며 시래기처럼 푸석푸석한 머리를 피나도록 긁적이였다. 쌍가매는 똬리를 만지작이며 허공에 아연하게 떠 있었다. 입에 엿 머금은 사람처럼 우물거리다 아무말도 못했다. 가슴 깊은곳이 막연하게 아프고 습기차 있고 걷잡을수 없는 슬픔에 모대기게 하던 그 사람이 막상 나타나고 보니 욕 한마디도 할수 없었다. 그사이 표나게 수척해진 그가 겨울을 지난 목이 긴 새처럼 허기져 보였고 따라서 그에 대한 대책없는 련민을 느꼈다.
사당패집 아들이 나타나던 날, 마을사람들은 그의 출현보다 더 큰일에 흥분하고 있었다.
간도의 상공으로 비행기가 날아 지났다.
사당패집 아들의 경력담을 들을려고 그의 집에 몰려들었던 마을사람들은 비행기의 동음에 너도 나도 집을 뛰쳐나왔다. 목을 젖히고 비행기를 우러르 었다. 비행기의 꼬리쪽에서 무언가 하얗게 너울너울 날아 내리고 있었다. 하늘의 선녀가 꽃을 뿌리듯 날아 내린것은 삐라였다. 삐라는 우물가에도 날아내렸다. 사람들은 몸을 솟구며 신변에 까지 날아온 그 삐라들을 허겁지겁 받아들었다. 삐라에는 조선글과 중국글이 힘찬 글발로 새겨져 있었다.
그 전문은 이러했다.

<<일본은 무조건 투항을 했다! 이로서 약소민족은 해방되였다!>>

삐라를 집어들고 소리내여 읽던 이가 마른 소리로 웃음을 웃었다.
그 소리를 듣고 그 웃음을 따라 우물가에 개벙하게 모여섰던 사람들이 하나 둘 웃기 시작했다.
질마를 벗은 소처럼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마음을 탁 터놓고 웃음들을 토해 냈다. 쇳목이 잠길때까지 환희의 웃음을 웃고 또 웃었다.

 

 


* 1945년 8월 15일 일본천황은 조서를 발표하여
전세계에 일본의 무조건 투항을 알렸다


 


 

* 1945년 중국 동북지역에서 투항하는 일본군
 

  근 10년세월이 지난뒤에야 나타난 사당패집 아들에게는 이전과 같은 여유와 흥감질이 없었다. 조용히 돈을 내고 사람을 불러 우물의 드레박을 다시 앉혔다. 드레박줄도 새것으로 바꾸었다. 마을사람들이 삐라장을 받아들고 눈굽젖어 만세를 높이웨치던 그날 사당패집 아들은 자기의 실수를 조목조목 회고했고 인연의 자락을 놓지못해 속을 앓아 왔던 쌍가매는 끝내는 배신했던 그를 용서해 주었다. 쌍가매의 조건이라면 렬사의 후대인 훈장 아들의 자식을 함께 키우자는 것 뿐이였다.
  돌아오자 사당패집아들은 그 기간의 밀린 세대주의 힘을 보상하련듯 두 아들의 혼사를 치러주었다.
  해방의 기쁨을 맞았으나 그 희열을 눅잦힐 사이가 마을사람들에게는 없었다. 중국에서 국공량당지간의 전면 내전이 일었다. 해방받은 동북해방구조선족들은 고향의 승리의 열매을 보호하기 위하여 결연히 동북을 해방하고 전 중국을 해방하는 투쟁에 궐기해 나섰다. 현성과 마을에서는 전에 없던 참군열조가 일었다. <<군대에 나가는것은 영광스럽다>>는 것은 그때의 기풍이였다. 마을의 청장년들이 분분히 싸움에 탄원해 나섰다.
  잔치를 치른 이튿날로 쌍가매의 아들은 전장에 나갔다. 쌍가매는 아들은 전장에 보내면서도 훈장아들 자식의 참군요구만은 부득부득 우겨가며 밀막아 바렸다. 자기의 친혈육을 내보내더라도 렬사의 후예를 아끼려는 마음에서 였다.
  아들을 전선에 내보낸 뒤로 쌍가매는 밤만 되면 우물가로 나가곤 했다. 우물물을 길어 대접에 부어놓고 대접을 우물가장자리에 놓고는 언젠가 보았던 엄마의 본을 내여 비손질을 했다. 아들이 전투에서 공세우고 돌아 오기를 빌었고 무양히 살아서 돌아오기를 빌었다.
  허나 마을 앞산더기의 진달래가 색색이 연분홍 등롱을 켜들었을때 쌍가매는 아들의 비보를 듣고야 말았다. 아들은 장춘 동정거장을 함락하는 전투에서 류탄을 맞고 쓰러졌던것이다. 물긷다 억장이 무너지는 비보를 접한 쌍가매는 두레박을 우물 속에 떨어뜨리며 그자리에 퍽적지근 주저앉고 말았다. 두레박줄이 다르르 풀어져 내리는 소리가 공명으로 들렸다. 어머니의 마음도 그처럼 깊은 곳으로 추락해 내렸다. 곧 이어 나의 아버지가 유복자로 태여났다.
 
  예이제이없이 그네들이 일구고 다듬어 온 들판의 곡물들이 무르익어 빛나오를 무렵, 드디여 민족자치의 숙원이 이루어져 연변조선민족자치구가 고고성을 울렸다. 마을에서도 성대한 자치구성립경축대회가 열렸다. 우물가에 경축회장이 꾸며 졌다. 우물 곁 버드나무에 매단 스피카에서 노래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것은 사당패집 아들의 목소리였다. 스피카를 통해 튀여나온 노래소리는 그렇듯 구성지게 명랑한 가을공기를 휘젓고 있었다. 포장이 터지도록 울리는 흥겨운 가락에 맞추어 상모를 돌리고 장고를 두다리며 흰옷 입은 사람들은 신들린듯 춤을 추고 또 추었다. 너나의 마음을 담은 노래소리는 강을 타고 산발을 타고 랑랑히 울려 퍼졌다.

<<에헤라 어절씨구 좋구나 좋네
해란강도 노래하고 장백산도 환호하네
에헤라 어절씨구 장고를 울리세
연변조선족 자치구 세웠네>>
 

  

* 1952년 9월 3일
자치구 성립을 선포하는 연변조선족자치구 초대구장 주덕해
 
 
  환락의 도가니로 끓고 있는 성립대회 회장으로 차 하나가 달려와 섰다. 차에서 젊은 간부 하나가 내렸다.
사람틈바구니를 헤치고 달려와 <<어머니!>>하고 쌍가매를 얼싸안았다. 귀티가 나는 깔끔한 젊은이였다. 그도 아비를 심통히 닮아 안경을 걸고 있었다. 그는 지금 자치구에서 비서직을 맡아하고 있었다. 그의 안내로 차에서 자치구의 구장어른이 내렸다. 주씨성을 가진 구장은 땀발을 씻어 내리며 곧추 우물가로 다가갔다. 명절옷 단장을 한 쌍가매가 새것으로 줄을 바꾼 드레박을 힘껏 우물에 던져 넣었다. 드레박에 물을 푸어 다시 대접에 받아서 구장에게 받쳐 올렸다. 대접을 단숨에 굽 내고 나서 구장이 걸걸한 소리로 웨치다싶이 말했다.
  <<우물맛이 차암- 좋습니다!>>
  마을사람들은 구장의 팔을 잡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자치의 기쁨에 넘쳐 춤을 추고 또 추었다. 
 


  춤에 신명을 바치는 쌍가매의 춤사위는 정말로 고왔다. 희열에 굽이쳐 돋솟아오르는 눈물을 씻어내리며 쌍가매는 춤의 휘모리에 묻혀들었다.
  축제를 맞는 마을은 숫제 봄을 다시 당겨 온듯 마을사람들이 정성껏 결어 만든 꽃송이에 묻혀있었다.
  용드레틀도 꽃송이와 채색기로 정성껏 단장이 되여 있었다.
  보다 다수워진 가을 해살을 담아 안고 우물물은 빛나 오르고 있었다. 
 

  쌍가매는 크렁하게 젖은 눈으로 우물물을 들여다보았다.
그 우물을 지켜보며 쌍가매는 이 맑은 하늘을 별똥별처럼 장식하고 사라진 훈장의 아들을 생각했고 포수의 아들을 생각했고 자기의 아들을 생각했다. 그의 눈에 오늘의 우물가는 그렇게도 아름다워 보였고 그렇게도 비장해 보였고 그렇게도 신성스러워 보였다. 군청색의 이끼가 돋은 돌쯤사이에서 우물은 그 깊숙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내재하고있는 오래된 신산스럽고 고통에 쌓인 삶을 불러 일깨웠고 그 사랑과 증오를 하나하나 되새김하는 그녀는 우물과 자신이 하나로 화함을 느끼고 있었다...
 
  할머니의 전설은 이즈음에 와서 끝나군 했다.
허나 세월의 층적층에는 묻힌 사연들이 많았다. 
 

 * 조선전쟁이 일자 <항미원조 보가위국>이라는 정부의 호소에 맞추어 중국의 젊은이들이 압록강을 뛰어 넘었다.


  광복이 나고 땅을 분여받고 복구건설이 시작되고 조선전쟁이 일고 그다음엔 중국에서 전례없던 문화대혁명이 일었다.
  그해 반란파들에 의해 구장과 그 주변의 일군들이 옥에 갇혔고 <<낡은것을 청산한다>>하여 우물의 석비는 깨여지고 우물은 묻어버렸다. 우물을 묻던날 구장의 비서는 우물을 묻는 반란파들을 제지시키려 했다. 그러다 <<완고분자>>로 락인되여 그들에게 머리를 깎이우고 고깔모자를 씌워 길에서 조리돌림을 당했다. 수모를 더는 이겨내지 못하고 렬사의 후예는 우물자리의 버드나무에 목을 매 달았다.
  우물을 묻어 버린뒤 할머니는 밤이면 가만히 우물자리를 찾군했다. 엎드려 우물자리에 귀를 대여 보았다. 그때 할머니는 분명 땅밑에서 굽이치는 물소리를 들을수 있었다고 했다. 물소리는 호곡하는 녀자의 울음소리처럼 음울하게 들렸다고 했다.

 

 

* 중국전역을 휩쓸며 10년간 지속된 광란의 의 문화대혁명
많은 조선족들이 이 전대미문의 비극에 휘말려 들었다.
 

  그로부터 10년후, 구위비서와 같은 수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뒤집어 썼던 모자를 벗고 하나하나 평판을 받았고 온 중국이 오금꺾었던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정보(正步)로 가기 시작했다. 
 
  그 즈음에 월강족속의 제4대로 내가 태여 났다.

  정부에서는 우물자리를 다시 복원했다. 구두쇠로 이름 있던 나의 증조할아버지가 우물복원에만은 거액의 돈을 내놓았다. 물론 그렇게 된데는 우물과 끈끈한 사연의 동아줄로 얽동여진 할머니의 지청구에 의해 서였다.

  그 동안 우리의 조부들이 첫괭이를 박았던 사득판은 촌마을에서 부락으로, 부락에서 현으로, 현에서 진으로, 진에서 시로 탈바꿈을 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나의 할머니의 쌍가매 진 머리는 창포에서 백발로 바뀌 였고 숱많던 머리가 빠져 이제는 쌍가매도 찾아볼수 없게 되였다.
 
 
  할아버지도 앞세웠지만 그래도 할머니는 만추에도 잎사귀를 떨어뜨리지 않는 고목처럼 그 누구보다 정정하셨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에 등맞은 고양이처럼 만곡된 허리로 할머니는 자주 우물자리를 찾군 했다. 복원된 우물을 희한과 련민과 애상 어린 눈길로 쓸어보군 했다. 자신들을 기쁘게 하기도 아프게 하기도 슬프게 하기도 안도하게 하기도 했던 우물을 지켜보며 오래도록 그 자리를 뜰줄을 몰라 했다.

  모두들 나의 증조할머니가 백세까지는 앉을것이라고 했다. 조선족집거구인 현성의 우리말 텔레비에서 <<세기의 로인>>이라는 제명으로 할머니를 취재한 특집프로를 만들기도 했다. 취재시에 옹근 한 세기를 가로질러 새 세기의 문전까지 닿아온 그 건강의 비결을 물었을때 할머니는 그중 하나가 매일 랭수 한 사발씩 마이는것이라고 했다. 확실히 할머니는 매일이고 빠침없이 랭수를 마시군 했다. 나중에 바깥출입도 할수 없었던 할머니는 <<씨원-한 우물물 한번 마셨봤음 좋겠는데...>>하고 감질나게 되뇌이군 하였다. 우리가 드링크에 포장한 약수물을 랭장고에 넣었다 다시 드려도 할머니는 <<그때 그 우물맛에 비하겠냐? >>하고 감개를 머금군 했다.

  할머니는 증손을 보기를 원했다. 허나 증손녀가 태여나기를 며칠 앞두고 할머니는 끝내는 백세의 정수(正數)를 채우지 못하고 운명하고 말았다. 애가 물이 찌고 나시시 배내머리가 자라고 얼굴모양이 잡혔을때 집식구들은 그만 감개에 젖은 환음(歡音)을 질렀다. 아이의 머리 앞부분에 작은 가마가 하나가 소담히 틀고 앉아 있었던것이다.
  <<격세유전이란 말이 있더니 할매를 꼭- 떼닮았네>>
  친척친우들이 희한해 마지 않았다.
 
 

 


  아이가 돌잡히던 날, 돌잔치를 치르고 나서 우리가족은 우물가를 찾았다. 할머니의 유상을 앞에 모시고 딸애를 안고 우물가에서 가족사진을 남겼다. 흰 수건을 낭자쪽에 겹쳐서 앞이마를 가리우고 하얀 무명실수건을 어깨에 걸치고 모시빛저고리를 받쳐입은 모습으로 할머니는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다. 유현한 눈길로 할머니는 당신의 마늘타래처럼 주렁주렁한 자식들과 당신이 파시고 마셔오고 지켜오신 우물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진을 다 찍고도 나는 오래도록 우물가를 뜨지못했다.
새삼스레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우물은 꼭 마치 우멍눈처럼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영원을 찰나 속에 품은 듯한 외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우물물도 가버렸지만 순간 나는 코를 푹쌍 찌르는 물내음을 맡을수 있었다.
세월의 더께를 밀어내고 청렬한 우물물냄새를 맡을수 있었고 가슴속에 넌출거리는 우물의 창명(彰明)한 물결을 볼수 있었다. 그리고 우물물이 룡트림쳐 솟아오르는 소리를 환청으로 들을수 있었다.
  우물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악기의 하현찰(下弦擦)처럼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 구색이 잡힌 현성의 력사와 그 력사의 년륜에 새겨진 사람들의 전설을 소리에 담아 우물은 무겁고 웅숭깊은 유장한 소리로 세기의 오페라를 속울림으로 연주하고 있는것이였다.

  그리고 그 순간 지지리하고 조악한 삶을 밟아온 할머니의 섬약하나 끈질긴 아집과 그 와중에 기어코 전하고자하는 할머니네 세대들의 상상력에 수렴되는 룡의 전설이 주는 언질을 나는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전설에 비하면 돈과 명리에 매이고 빈약한 상상력에 기대인 요즘 삶의 풍속이 얼마나 부박한 것 인가한 것 을 깨칠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전설을 받아서 이어나가야겠다는 자긍심과 사명 같은 것에 사로잡혀 들기 시작했다.
 
  딸애의 앞이마에 숙명처럼 틀고 앉은 가마를 자꾸만 매만지면서 나는 오래도록 우물가를 뜨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금 할머니의 전설을 되새김 해보았다... ♡
 

* 본 작품에 인용한 귀중한 사진자료들은 "중국조선족사화집", "중국동북년감", "중국옛사진모음집", 용정민속박물관, 한국독립기념관 등 곳에서 차용, 출처를 밝히며  졸고를 빛내준 귀중한 사진자료에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