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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조선족 [ 민 족 역 사 ]

호젓한오솔길 2011. 1. 4. 11:41

 

중국의 조선족은 조선반도에서 중국경내에 이주해 왔다. 19세기 중엽부터 조선인민들은 전쟁과 기아, 봉건통치자들의 폭정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등 여러가지 원인으로 인해 육속 우리나라 동북변강지대에 이주하여 정착생활을 하였다. 금후 이들은 점차적으로 우리나라 경내 민족의 한갈래로 되었으며 중화민족의 공동체로 되었다.

1905년 일본은 조선을 강박하여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되었다. 이는 광대한 조선인민들의 강렬한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제국주의는 수천수만의 항일의병과 애국문화운동 지식분자들에 대해 피비린 탄압을 진해하여였다. 수많은 항일의병과 반봉건통치하의 농민들은 나라잃은 울분을 안고 고향을 떠나 중국의 동북 3성에 이주해왔다. 1990년까지 연변에는 98,0000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었으며 총인구의 76.6%를 차지하였다.

1906년 조선족항일투사 리상우는 룡정에 항일사립학교 "서전서당"을 세워 철저한 민족주의교육과 항일계몽교육을 진행하였다. 이후부터 연변대지에는 선후하여 명동, 창동, 정동, 광성 등 항일사립학교가 우후죽순마냥 일떠섰다. 항일사립학교는 항일인재를 배양하는 요람과 항일투쟁 중심지로 되었다. 이로부터 조선민족의 근 40년에 달하는 굴곡적인 고난의 력사가 시작되었다.

1919년 3월 1일에 폭발한 조선의 "3.1"항일독립운동의 추동하에 상해와 로씨야 항일독립운동자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온 연변의 항일투사들은 "3.1"운동에 즉시 호응하여 한차례의 대규모적인 항일대폭풍을 일으켰다. 3월 13일 연변각지에서 모여온 3만여명의 조선족농민과 사립학교 사생들은 일본 총사령관 소재지인 룡정에 모여 연변력사상 처음으로 되는 대규모적인 항일집회를 소집하였으며 항일독립선언을 선독하고 일본게국주의의 침략죄행을 폭로하였다. 지방당국에서는 일본측의 압력에 못이겨 시위를 잔혹하게 탄압하였다. 당장에서 10명이 총에 맞아 죽고 40명이 부상당하고 7명의 중상자는 병원에서 사망되었다. 3월 17일 1500여명의 조선족군중이 수난자의 유체를 들고 항의시위행진을 진행하였다. 4월말까지 모두 86,670명의 조선족군중이 당지의 항일집회와 시위행진에 참가하였다.

1920년 여름 연변조선족항일부대인 "독립군"은 2900명의 병사와 2600여자들이 총을 갖고있었다. 1920년 6월 7일 홍범도와 최명록이 지휘한 항일부대는 봉오동에서 일본군 19사의 150여며으이 적을 섬멸하였다. "봉오동전투"는 조선항일무자잉 동북에서 대랴으이 일본군을 소멸한 첫번째 전투이다. "봉오동전투"에서 참패한 일본침략자는 연벼느이 조선족 항일부대를 소멸하기 위해 1920년 10월 2일 "훈춘사건"을 빚어냄으로써 일본군 2만여명을 조식하여 2285명의 조선족을 살해하고 2507호에 달하는 주택을 불살랐다. 10월 하순 홍범도와 김좌진이 령솔한 두갈래의 항일부대는 화룡현 성산리, 이도구, 어랑촌, 874고지에서 일본군과 련속 작전하여 천여명에 달하는 적을 소멸함으로써 일본침략자들을 호되게 타격하였다. 이는 연변지구 조선족들의 항일민족해방투쟁정신과 영웅적기개를 충분히 반영하였다.

1931년 일본침략자들은 "9.18"사변을 발동하여 무력으로 동북3성을 점령하였다. "9.18"사변후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조선족들의 리익과 념원을 반영한 조선족에 대한 기본정책을 제정하여 조선족당원간부와 군중의 항일투쟁적극성을 불러일으켰다. 연길, 화룡, 왕청, 훈춘, 안도 등지의 현위 및 각급 서기들은 기본상 조선족들이 담임하였다. 연변조선족인민들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한차례 또 한차례의 항일투쟁을 일으켰다. 1931년 가을의 "추수투쟁", 1932년 봄의 "춘황투쟁"은 이후의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군중기초를 닦아놓았다. 항일투쟁중에서 연변조선족 인민들과 형제민족인민들은 어깨 곁고 싸우면서 조국에 몸까지 바치면서 항일전쟁의 승리를 위해 거대한 대가를 치렀으며 불후의 공헌을 하였다. 항일투쟁중에서 2726며으이 렬사가 용솟음쳐 나옸는데 그중 조선족이 2560명이다.

1945년 8월 8일, 쏘련이 일본에 전쟁을 선고하였다. 8월 14일 쏘련홍군은 왕청, 훈춘으로부터 연변에 진입하여 8월 18일 연길을 해방하였다. 19일 연변 여러민족 인민들은 룡정에서 회의를 소집하고 쏘련홍군을 열렬히 환영하였으며 항일전재으이 승리를 열렬히 경축하였다. 1945년 9월 18일 중공 동북위원회 연변공작위원회 즉 동북항일련군연변분대가 연길에 두둔하였다. 뒤이어 중공연변지위, 연변군분구가 성립되었으며 이는 동만근거지의 건립을 위하여 공고한 정치적 기초와 조직기초를 닦아놓았다.

1945년 11월 미국의 추동과 부추김하에 장개석은 내전을 발동하여 국민당군대는 대폭적으로 동북을 침략하였다. 그들은 선후하여 금주, 심양, 사평, 장춘, 교하를 점령하였으며 "1주일내에 두만강을 뒤엎는다" 고 떠들어댔다. 연변의 용사들은 교하-라법-신역일선에서 국민당군대와 완강한 전투를 벌려 그들의 진공을 물리침으로써 연변대지를 보위하였다.

1946년 7월부터 1948년 4월까지 연변여러민족인민들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들끓는 혁명열정으로 토지개혁을 진행하였다. 조선족농민은 토지의 주인으로 되었고 각급 정권을 장악한 연변조선족인민들은 참군열정으로 들끓었다. 가는곳마다 부자, 부부, 형제지간에 앞다투어 참군하는 감동적인 장면들이였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연변의 52,000여명 청년들이 용약 참군하였는데 그중 85%가 조선족이였다. 그들은 대부분이 동만독립군, 동붑민주련군 제 10종대 제 28사,29사,30사에 편입되였다. 그들은 선후하여 동북해방전쟁, 평진전역, 도강전역에 참가하였으며 후에는 광서 해남도 전역에도 참가하였다. 이중에서 3350명의 렬사가 용솟음쳐 나왔으며 그중 3041명이 조선족이다. 그리고 "김성범모범전투련", "강팔련", "공농영웅련" 등 영웅집체와 "1급 인민영웅" 김천덕 등 290명의 전투영웅이 나타났다.

연변 여러민족들은 적극적으로 전선을 지원하는 길에 나섰다. 담가 3720개, 소마차 19,000대를 동원하였고 전선지원민공이 302,300명에 달하였다. 이중에서 3434명이 공을 세웠으며 해방전재으이 승리를 위하여 공헌하였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연변 여러민족 인민들은 당과 정부의 영도하에 농업, 공업, 교통운수, 우전, 상업, 무역, 교육, 문화 등 각항사업을 회복하였으며 커다란 발전을 가져왔다.

1950년 6월 조선내전이 폭발하였다. 미군을 위수로 한 "련합국군대"는 인천에서 등륙하여 조선내전에 간섭하였으며 북으로 돌진하였다. 연변 여러민족인민들은 중앙인민정부의 호조에 응하여 전국인민들과 함께 "항미원조,보가위국"리라는 기치하에 적극적으로 참군하였다.

1952년 9월 3일 중국공산당 민족정책의 빛발아래 연변조선민족자치구가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조선족의 다년가느이 숙원이 끝내 새중국에서 실현되었다. 1955년 12월에 열린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기 인민대표대회 제2차회의에서는 1954년 9월 반포한 "중화인민공화국헌법"규정에 근거하여 연변조선민족자치구를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고쳤다.

100년래 줄곧 민족압박을 받아오던 조선민족은 끝내 중국소수민족의 일원이 됨으로써 자치주의 주체민족으로 되었으며 진정으로 나라의 주인으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