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솔길 자료실 ♥/여행,산행지

[오영욱의 여행 풍경] 설악동의 추억

호젓한오솔길 2011. 3. 6. 07:37

 

[Why] [오영욱의 여행 풍경] 설악동의 추억

  • 오영욱 건축가·여행작가

 

"스무 번도 넘는 산행… 국립공원 한복판에 어라? 호텔이 있었네"

 

설악산에 대한 내 기억은 여섯 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한민국 남쪽 지방 사람들에게 지리산이 있다면 북쪽 사람들에게는 설악산이 있었다. 여름 휴가지로 설악산은 항상 1등 목적지였다.

휴가철의 설악산행은 만만치 않은 길이었다. 왕복 2차선의 영동고속도로는 주차장이 되기 일쑤였고, 특히 대관령을 넘는 차들은 앞서 묵직하게 기어가고 있는 트럭의 꼬리를 문 채 뙤약볕을 견뎌내야 했다.

첫 설악산으로의 피서 길에선 흔들바위만이 기억에 남는다. 아무리 잘 흔들려도 여섯 살 꼬마가 혼자 흔들 수 있었겠느냐마는 어쨌든 내게 설악산은 혼자 바위를 밀고 있는 작은 아이가 담긴 사진으로 반추됐다. 그리고 그 이후로, 삼십대 중반의 지금까지 설악산행은 스무 번도 넘었던 것 같다. 대청봉엔 고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을 따라 올랐고, 오색약수 맛도 여러 번 마시며 익숙해져 갔다. 자연에 감동할 나이가 아니었던 시절에도 으레 설악산은 동해와 맞물려 가장 선호하는 목적지였다.

설악산 관광호텔 숙소에서 바라본 풍경. 설악산의 거대한 형체가 눈앞에 다가선다. / 글·사진·일러스트=오영욱

 

90년대 후반에 이르러 대학생들의 배낭여행이 일반화되어 거기에 동참하고, 직장인이 되어 가까운 해외로 휴가를 떠나게 되는 시절이 왔다. 물론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설악산은 국내 최고의 여행지이긴 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약간 소원해진 면이 없잖아 있었다. 사나흘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더 이상 설악산을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이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에 잠시 거리를 두자 새로운 모습들이 보였다. 권금성이나 비선대, 울산바위가 아닌 설악산 자체에 의미가 생긴 것이다. 나에게는 여태 몰랐던 새로운 장소 하나를 알게 된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다. 아는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었는데 나만 모르고 있던 것일 수도 있다. 바로 설악산 관광호텔의 존재다.

설악산 관광호텔은 사실 있으면 안 되는 위치에 있다. 설악동 관광단지를 지나 매표소를 거친 후 케이블카를 타는 곳에 이르면 한쪽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국립공원 안 한복판에 있는 것인데, 자연의 가치가 달랐던 시대의 산물일 수도 있다. 지금은 신흥사 소유로 호텔 정문에서 조금 걸어나가면 신흥사 뜰이다. 개인적으로 신흥사는 단아한 맛을 모두 잃은 부자 절의 느낌이 나서 가급적 들어가지는 않으려 한다.

어쨌든 요즘 시대라면 건축 허가가 절대 날 수 없는 곳에 위치한 호텔이기에 얻을 수 있는 경험이 제법이다.

무엇보다 저녁 일곱시 전후 어스름 해가 질 무렵이면 모든 산속의 여행자들이 매표소 밖으로 빠져나가고 기념품과 산채비빔밥을 파는 가게들도 모두 문을 닫는데 그 적막하고 고요한 공기가 주는 차분함은 도시인으로서는 쉽게 맛보기 힘든 체험이다. 물론 템플스테이 등을 통한 산사에서의 머묾이 더욱 차분할 수도 있다. 다만 이곳은 설악산이라는 점이 또한 다르다. 우리나라에는 명산이 참 많지만 설악산은 그중 으뜸에 속할 것이다. 그 산속 깊은 곳까지 어렵지 않게 도달해 잠을 청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설악산 비선대

 

그리고 비록 40년 된 여관 느낌이 나는 호텔이지만 그래도 꽤 쾌적하고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해준다는 점이 또 하나의 이유다. 젊은 나이에 벌써 정신이 느슨해지고 몸이 게을러졌기에 자꾸 편안하고 호사스러운 것을 찾는 것에 대해 비난받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서울에서 너무 열심히 살고 있는 편이라서 그래도 된다고 자위하곤 한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어느 숙소든 발코니가 있는 곳을 선호하는 편이다. 특히나 이곳의 발코니에 서면 아래의 번잡한 몇몇 가게들을 제외하고는 설악산의 거대한 형체만이 보인다. 하늘도 많이 안 보인다. 그야말로 산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선선한 날에 발코니에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을 좋아한다.

이 호텔은 비수기 때는 동네 여관 숙박비 정도로 머물 수 있다가 여름 휴가철과 가을 단풍철이 되면 두 배 이상으로 값이 뛴다. 물론 나는 비수기에만 가는 편이다. 산을 오르기 위함이 아닌, 책을 읽다가 가만히 앉아 쉬고 가끔 원고나 그림 작업을 하러 가는 여행을 하기 때문에 굳이 번잡한 성수기에 비싼 값을 치르고 찾아가지는 않는다.

설악산까지 가서 가까운 폭포 하나 안 보고 누워서 잠만 자다 온다고 뭐라 할 수도 있겠다. 환경을 생각했을 때 적합하지 않은 위치에 지어진 건물에 들어가서 오염물질을 분출하는 주제에 할 말은 아니겠지만, 등산길에 가급적 적은 사람이 들어가야 숲이 살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그래도 좀 더 맑은 공기와 시선의 정화가 필요하다고 느껴지면 비선대나 비룡폭포까지는 오른다. 무난한 길이기도 하고, 아직 80년대의 정취가 남아 있는 곳이라 어린 시절 그곳에 갔던 추억을 되새길 수도 있다.

물론 가장 빠른 시간 내에 가장 높은 곳까지 오를 수 있는 길은 바로 케이블카를 타고 권금성에 오르는 것이다. 호텔 입구에서 30초만 걸어가면 케이블카 정류장이다. 권금성에 오르는 중간에 위치한 털보 아저씨의 작은 통나무 카페는 30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잊은 듯 줄곧 그 자리에 있다가 2년 전에 철거되었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는 권금성이라 하면 항상 그 털보 아저씨를 얘기하곤 하셨는데 사라졌다는 게 조금은 아쉽다.

설악산 관광호텔 입구

 

요즘은 채식하는 삶에 보다 관심이 많은데 호텔 앞에는 채식 위주의 식당들이 몇 있다. 가까이엔 호텔에서 운영하는 식당과 신흥사에서 운영하는 식당 그리고 관광기념품 판매점과 함께 위치한 식당들 등등.

개인적으로는 값이 조금 비싸도 정갈한 음식이 나오는 호텔에서 운영하는 식당이 좋다. 다만 전체적으로 아쉬운 것은 우리나라의 산 밑에 위치한 식당들의 메뉴가 거기서 거기라는 것이다. 산채비빔밥과 더덕구이, 감자전만 먹고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이 낡은 호텔 건물이 예전보다 더한 오늘날의 개발시대에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이제 우리도 제법 낡고 운치가 있는 해방 이후의 건축들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사연이 많은 건물이고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서 더욱 이 호텔이 설악산과 오래오래 같이 머물러 종국에는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느낌'을 얻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