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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관계 많으면 혈액 오염된다" 황당한 '성교육'

호젓한오솔길 2011. 7. 27. 08:00

 

 

 

[조선일보에 비친 '모던 조선'] [47]

"남자 관계 많으면 혈액 오염된다" 황당한 '성교육'

 

 

 

"요사이의 녀학생들은 련애를 아무런 철도 업시 그냥 유희적으로 하는 까닭에 그릇된 길을 밟게 됩니다.…이 원인으로 말하게 되면 학교에서 성교육이 부족한 까닭이라고 하겟습니다."(조선일보 1933년 9월 2일자 의학박사 임모씨 기고)

자유연애의 확산에 따른 성 풍속도의 급변에 어른들이 당혹스러워하던 80년 전, 청소년들에 대한 신개념의 대책 하나가 떠올랐다. 성교육이었다.

조선일보 지면에 '성교육'이라는 단어가 최초로 보이는 것은 1927년.
일본 도쿄의 국민결혼보도회(輔導會)라는 단체가 여학교의 가사 시간 등을 활용해 성 도덕, 성에 관한 생리 등을 가르칠 것을 결의했다는 외신 보도였다(4월 25일자). 2단으로 크게 뽑은 제목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라는 느낌이 묻어 있다. 실제로 이 땅에서도 학생들의 '풍기 문란'이 늘고 있었다. 1928년 4월 11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만평은 '아즉도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정복(正服·교복) 입은 학생들이, 꽃이라면 이즉도 봉오리가 벌어지지 않은 어린 계집을 둘러싸고…' 술 마시는 그림을 그려놓고 "어떤 사람이 조선의 장래는 학생에게 있다고 하였는가?"라고 개탄하고 있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학생들이 10대 여성을 끼고 술 마시는 식당 풍경을 그린 만평. 이런 풍기문란이‘성교육’필요론을 불렀다.(조선일보 1928년 4월 11일자)

 

1929년엔 태화여자관 내 조선직업부인회가 성교육학의 대가 '올스 여사'를 초빙하여 9월 15일에 종로청년회관에서 성교육에 대한 영화 강연회를 연다는 기사도 실렸다(1929년 9월 13일자). 이외에 1920·1930년대 학교 현장의 성교육에 관한 보도를 당시 지면에서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각계 전문가들은 갖가지 대책을 지상에 제시했다. 청소년들의 급격한 변화에 당황했는지, 기발하거나 황당한 방안들도 튀어나왔다. 어느 여고 교무주임은 학생 탈선을 막는 특단의 대책으로 하교 후 집에 도착한 시각을 부모로부터 확인받아 학교에 제출토록 하자는 '하학(下學)증명서' 제도를 제안했다. 어느 의사는 "(여학생은) 항상 든든한 속옷을 입고 단이도록 하는 것이 조켓습니다"라는 조언도 했다(1933년 9월 2일자).

그뿐 아니다. 현대 의학으로는 근거 없는 내용이 성교육을 위한 지식으로 전파됐다. '왈트스타인' 및 '에크렐'이라는 서양 학자는 "여성이 남자와 한번 관계를 하면…(살이 찌는 등) 기혼녀와 가티 체질이 변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조를 소중히 지키라는 '으름장'이었다(1928년 9월 27일자). 또 어느 '외국 전문가'는 "한번 간통한 부인이면 비록 본부(本夫)에 의하여 임신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 태아의 혈액 중에는 간부의 오혈(汚血)이 혼입하는 것"이라는 이론도 제시했다(1928년 9월 27일자). "성교육이라고 하는 것은…너무 지나치면 도리혀 아해의 심리를 조숙케 하여 변태적이 되게 한다"는 주장도 보인다(1929년 11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