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강에서 바라다 본 낙화암이다. 맨 꼭대기에 백화정이 보인다.
이 사진은 20년전에 찍은 사진이다.
어렸을때 어른들이 부르는 유행가를 통해서 낙화암과 삼천궁녀 이야기는 저절로 알게 되었다.
이야기를 들을때면 낙화암을 머리속에 그려보곤 했었다.
상상속에 수직절벽으로 된 낙화암에서 궁녀들이 뛰어내려 강물 속으로 텀벙텀벙 빠저 죽는 장면을 연상했었다.
그렇게 믿고 살아오다가 20년전 현장을 확인하러 낙화암에 가 보았다.
낙화암을 위에서부터 밑에까지 다 훌터보고 그만 실망하고 말았다.
도저히 강물로 뛰어내릴만한 장소가 아니다.
지형상 뛰어 내렸다가는 바위에 부디치고 나무가지에 걸릴뿐 강물 근처에도 가지 못할 형국이다.
이야기만 듣고 상상하는 세계와 실제 상황은 그 괴리가 너무나 컸던 것이다.
20년이 지난 후에 다시 낙화암을 찾았다.
금강은 백제의 젖줄이다. 금강줄기는 하나이지만 흐르면서 이름은 여러개이다.
금강이 부여에 이르면 백마강이 된다. 백마강을 백제시대에는 사비강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금강 하구로가면 백강이라고 했다.
'사비'란 '새벽이 밝음'이란 뜻이다.
사비성 안에 부소산성은 거대한 왕궁의 후원이었다.
왕자와 궁녀들이 거닐던 한적하고 아름다운 후원, 때로는 사비강에서 뱃놀이도 즐길수 있었던 휴양지같은
후원이었던 것이다.
당시 백제국력이 쇠약해서 망한 것은 아니다. 리더를 잘못만나 벌어진 역사적 사실이다.
백제의 마지막 31대 의자왕의 성씨는 '부여'이다.
무왕의 아들로 재임 초기 15년은 성군이었다.
당나라와 외교관계도 돈독했고 신라를 처서 영토도 늘렸다.
의자왕 15년, 서기 655년 이후부터 방탕하였다.
왕후 군대부인 '은고'에게서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부여 효' 둘째 '부여 태' '융''연''풍''용'이었고
서자가 41명이었다.
의자왕이 방탕한데는 왕비 '은고'라는 여인이 중심에 있었다. '은고'는 요부였다고 한다.
655년 정변을 이르켜 왕세자 "융"을 폐하고 "효"를 태자로 재 임명한다.
서기 660년 7월 8일, 당나라 소정방은 13만 대군을 이끌고 백강으로 올라와 사비성을 공격하니 의자왕이
태자 "효"와 웅진성으로 피신한다.
웅진성 성주 "예식"은 의자왕에게 밉게보여 좌천당해 밀려난 인물이다.
둘째 아들 "부여 태"가 사비성에 남아 왕을 자처하다가 웅진성 성주 "예식"에게 꼬임에 빠저 의자왕을
소정방에게 건네준다. 당으로부터 은혜를 받아 왕이될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낙화암 위에 전에 없던 전망대도 만들어 놓았다.
삼천궁녀의 전설은 '일연'이 지은 역사서 삼국유사에 나온다.
"부여성 북쪽 귀퉁이에 큰 바위가 있고 밑으로 강이 흐른다. 바위에서 궁녀와 귀부인들이 뛰어 내려 죽었다하여
'타사암(떨어질 타, 죽을 사)'이라고 부른다."
후일 고려때 시인이 꽃처럼 떨어지던 여인들, 가슴아푼 역사를 지녀 더 애절해 보이는 바위를 보고 "낙화암"
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조선시대에는 시인이 삼천궁녀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
우리 민족에게 삼천이란 숫자는 엄청 많다는 뜻에 불과하다.
역사적기록에 의하면 숙종때 궁녀가 700여명으로 나오는데 이때가 제일 많았던 시대이다.
백제 의자왕때에는 사비성 인구가 40만명 정도였으니 궁녀 3000을 거느릴수 없는 여건이었다.
추정컨대 300에서 700명 정도 였을 것이고 궁궐 식솔들, 장군의 처 자식들, 신하의 가족들등 여러 사람들이
강물로 뛰어 들었음을 짐작할수 있다.
바위에서 떨어진게 아니라 그냥 강물로 뛰어 들었을 것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백마강은 정말 아름다운 강이었었다.
강 건너에 백사장이 넓게 펼처저 있고 프른 강이 굽이처 흐르며 은빛 비늘을 반짝이는 정말 한폭의 시와 같은
장면이었었다.
그러나 오늘 와 보니 4대강사업 결과로 모래는 다 파헤처 간데없고 강물은 여기저기 막아 놓고,
보기에 매우 안타깝다.
660년 8월 사비성은 불에 다 타버리고 남은게 하나도 없다. 의자왕이 항복한 이후 왕족과 신하 그리고
백성 1만2천명을 당으로 압송, 끌고 갔다.
왕과 대신들이 끌려 갈때 나루터와 유왕산에서 가족들과 백성들이 이별가를 불렀다고 한다.
왕족이 없는 백성들은 왜에 볼모로 가 있는 의자왕의 다섯째 아들 "부여 풍"을 옹립 부흥을 꾀하기도 했다.
낙화암은 관광지라고는 해도 유흥지가 아니고 진지한 곳이다.
그러나 소나무에 확성기를 달아 놓고 "백마강 달밤에..."유행가를 들려 준다.
각 나라마다 그나라 국민수준에 맛게 또는 시대에 맛춰 관광지를 개발해 놨는데 아마도 우리의 수준은
여기인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란사 뒷편에 약수가 있다. 20년 전에 찍은 사진이다.
예전에는 절벽 밑에 약수가 있었다. 절벽 위에 '고란초'라고 쓰여진 글귀가 있고 그곳에 작은 잎이 보일까
말까한게 있었다.
고란사 스님이 설명해 주시기를 고란초는 천년에 한번 꽃을 피운다라고 했다.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그런줄만 알고 살아왔다.
오늘 뒷마당에 가 보니 약수터를 정자식으로 기와지붕을 덮어놓고 '고란정'이란 현판을 붙여 놓았다.
건물 안에는 유리관을 만들어 놓고 고란초를 기르고 있는 것이다.
실물이 아니여서 마치 식물원에 들른 기분이다.
거기에가가 친절하게도 고란초의 설명이 써 있다.
"고란초는 고사리과의 다년생 식물로 겨울에도 죽지 않는 상록초이다.
수명은 30 - 50년으로 포자로 씨를 편다. 씨가 잎 뒤편에 일년에 한알씩 달린다.
햇볓이 없는 바위틈 습한곳에 서식한다."
분명, 이 절 스님이 고란초는 천년에 한번 꽃을 피운다고 했는데...
마치 속고 살아 온기분이다.
팔십은 넘어 보이는 노모를 모시고 낙화암에 다녀오는 모자의 뒷모습이 아름답다.
거름이 불편한 노모는
"낙화암이고 나발이고 내려갔다 올라 오는데 사람만 고생시키네...."
아들
"나발이고는 빼고 말씀하시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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