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의 중요한 곳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왕건상, 알고 보니
노명호 교수 저서에서 공개
왕건상은 2006년 전시 당시 북한과의 협의에 따라 아랫도리를 천으로 가렸다. /노명호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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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교수에 따르면, 왕건상은 포클레인에 의해 끌려나오면서 오른쪽 다리가 부러져 떨어지고, 여러 곳이 찌그러지는 손상을 입었다. 왕건상은 출토 당시 표면에 비단 조각과 금도금을 한 청동조각이 붙어있었는데, 출토 13일 만에 평양에서 조사단이 가보니 동상을 깨끗하게 닦아놓아 왕건상에 대한 중요한 정보들이 사라져버렸다.
노 교수는 "2005년 개성 현지답사 때 북한 학자에게 공사 도중 우연히 발견됐다는 증언을 들었다"면서 "이후 동상을 직접 정밀실측한 결과 수리를 한 다리와 몸통이 약간씩 찌그러지거나 뒤틀려 있는 등 북한 학자의 증언과 일치했다"고 밝혔다.
왕건이 고려를 황제국으로 내세웠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새로운 유물도 나왔다. 노 교수는 "왕건상은 천자와 태자가 사용하는 옥허리띠를 차고, 황제만 쓰는 통천관을 썼다"면서 "이는 왕건상이 황제상으로 만들어졌음을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남성 성기까지 적나라하게 묘사된 왕건상은 2006년 북한과의 협의아래 아랫부분을 흰 천으로 가린 채 전시됐다. 학자들은 왕건상이 원래 비단 옷을 걸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과 '고려사'에 따르면, 고구려 동명왕과 동명왕 어머니 유화의 조각도 왕건상처럼 옷을 입히는 착의형(着衣形)이었다. 노 교수는 "왕건상은 고려가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토속문화의 영향을 최상층부까지 깊숙이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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