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북한산 정릉계곡에서 경치를 즐기는 신경림 시인과 엄홍길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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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시를 쓴 사람과 평생 산을 탄 사람이 만났다. 시와 산, 시인과 산악인, 무척 동떨어져 보인다. 동떨어져 지내던 두 사람이 북한산 정릉 탐방안내소에서 인사를 나눈다. 빗속을 걸어오는 노란 등산복의 남자가 신경림 선생이었다. 차분하지만 빨라 어느새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노란 컬러 때문인지 풍기는 기운 때문인지, 일흔여섯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인다.
신경림 선생은 1935년 충북 충주 보련산 자락에서 났다. 동국대 입학 이듬해인 22세에 ‘문학예술’지에 ‘갈대’ 등의 작품이 추천돼 등단했다. 10년을 절필한 그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쌓는다. 1973년 첫 시집 <농무>를 발표한다. 민요처럼 편안하고 소박한 언어로 붕괴돼 가는 농촌의 삶과 산업화 이면의 궁핍함을 노래한 이 시로 제1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1980년대 민요기행을 통해 채집한 가락과 정서를 녹여 만든 시집이 <민요기행>과 <길>이다. 1990년 제2회 이산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외에도 여러 시집과 산문집을 내고 많은 상을 수상했다. 교육전문 월간지 <우리교육>에 연재한 ‘시인을 찾아서’를 묶어 책으로 펴내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 ▲ 등산이 유일한 취미라고 하는 <농무>의 시인 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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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비가 내린다. 그래서 한산한 산 입구, 여느 때 같았으면 “엄 대장님 아닙니까”하고 달려들던 등산객들도 없이 조용하다. 탐방지원센터에서 차를 마시며 가볍게 서로를 알아간다.
“그렇잖아도 엄 대장 만나면 물어보려 했는데, 랑탕 트레킹 하기가 어때요?”
“랑탕 좋습니다. 굉장히 아름답죠. 길이 좋아서 베이스캠프까지 가는 것도 힘들지 않습니다.”
“내년 3월에 가기로 했거든요.”
“그때면 트레킹하기 좋을 때입니다.”
“60세 넘은 실버 친구들하고 같이 가요. 쉬엄쉬엄 가는 거죠.”
“선생님은 일흔여섯인데도 정정하시네요. 히말라야 트레킹도 가시고요.”
“일주일에 두 번은 꼭 산행을 해요. 대개 북한산이죠. 어쩌다 지리산 설악산을 가고, 30년을 산에 같이 다닌 사람들이 있어요. 문인도 있고 기자도 있고요.”
신경림 선생은 1978년에 정릉으로 이사 와서 지금껏 살고 있다. 30년을 넘게 살았으니 두 번째 고향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일요일과 수요일, 일주일에 두 번 꼭 산에 간다. 30년간 함께 산에 다닌 절친들과 간다.
“산을 탄 지 한 30년 됐죠. 처음 산에 다니기 시작한 건 어디 가서 말도 자유롭게 못 하고 그럴 때였으니까 떠들면서 편하게 얘기할 수 있으니까 산에 가기 시작한 거죠. 그때 지명수배 당하고 그런 친구들 길거리에서 만나면 잡혀가니까 산에서 만나고 그랬죠. 국회의장 했던 임채정이 이부영이도 다들 지명수배 중일 때였어요. 산에서 술 먹고 떠들고 그랬죠.”
- ▲ 1 정릉계곡 등산 안내도를 보며 코스에 대해 얘길 나눈다. 2 신경림 선생은 산행 경력 30여 년에 북한산만 천 번 넘게 올랐다. 3 스틱 사용법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시인과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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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이름 없이 다닌다 해서 이름이 없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러니까 무명산악회다”라고 해서 그게 정식 명칭이 되었다. 무명산악회는 문인, 교수, 교사, 해직기자, 학생운동가 연합 모임으로, “건강을 위해서는 가급적 산에 가지 말자”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뒤풀이가 진하다. 무명산악회는 매년 홍천군 살둔으로 가족 모두 총출동하는 집단 텐트생활 하계휴가를 갔었는데, 한때는 그 수가 65명에 이르기도 했다.
“한 달에 한 번은 지방 큰 산에 가고, 나머지는 대개 북한산을 가요. 산행 외에 다른 운동하는 건 없고 오로지 산행만 합니다. 엄 대장은 다른 운동하는 게 있나요?”
“저도 사람들이 무슨 운동을 하냐고 묻는데 산행만 합니다. 산행이 건강에는 최고인 것 같아요.”
신경림 선생은 4년 전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갔다가 고생을 많이 했다. 8일 동안 걷는 코스였는데 파업 때문에 차가 끊어지기 전에 하산하느라 하루에 13시간 반을 걸었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 4,000m대 고지대까지 무난히 산행할 수 있었던 건 일주일에 산행을 두 번씩 꾸준히 해왔기 때문이다.
비가 잠깐 소강상태다. 산에 왔으니 비가 오더라도 한 시간은 넘게 걸어야 할 것 아니냐며 신경림 선생이 먼저 나선다. 우중산행은 의외로 멋스럽다. 평소 수량이 많지 않은 정릉계곡이지만 “캬~”하는 소리가 절로 터져 나오는 물줄기가 곳곳에서 없던 폭포를 만들었다. 선생이 엄 대장에게 세계에서 어느 산을 제일 좋아하는지 묻는다.
“제가 나고 자란 도봉산이 최고인 것 같습니다. 외국에서는 역시 최고봉 에베레스트가 산다운 웅장한 스케일도 있고 힘 있는 면모를 갖춘 것 같아서 좋아요. 선생님도 기회 되시면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다녀오세요. 가보면 역시 다른 8,000m 산과 다른 최고봉다운 기운이 느껴집니다.”
선생은 히말라야 트레킹 외에도 중국의 태산, 노산, 백두산 등을 다녀온 산 마니아다. 개인적으로는 오래 다닌 북한산에 정이 들었다며 가장 좋아하는 산으로 꼽지만 “오밀조밀하고 예쁜 산”으로 설악산을 꼽는다. 시인이니 산에서 여유 있게 걸으며 경치를 즐기는 편이 아닐까 싶지만 반대다. 엄 대장이 “경치 보면서 안 가세요?” 묻자, “그냥 막가는 거죠”라고 응수한다. 걸맞게 오르막이 나와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가볍게 오른다. 걸음에서 오랜 산행의 익숙함이 묻어난다.
빗줄기가 다시 굵어진다. 물줄기가 곡예를 하는 북한산의 새로운 면모를 보고 있기에 쉽게 발을 돌리지 못한다. 선생과 대장이 약속이나 한 듯이 계곡 옆의 산길을 따라 오른다. 신경림 선생은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갔을 때도 비가 많이 왔다고 한다.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며 걷는데 벼락 치고 산 전체가 폭포인데 힘들면서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고 히말라야의 비경을 설명했다.
“히말라야는 엄청나요. 사람에게 뭔가를 말해 주죠. 까불지 말라고, 완전히 압도해 버리지. 그런 큰 산을 16개나 올랐으니 엄 대장을 존경하는 거죠.”
지리산 역시 갈 때마다 비를 만나 천왕봉 일출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유를 알고 보면 비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지리산만 가면 왜 그리 비가 오는지. 또 밤에 술을 많이 먹으니 새벽에 일어날 수 있나. 큰 산은 큰 산이더군요.”
아마도 선생은 시와 산, 그리고 술을 무척 사랑하는 것 같다. 술을 즐기는 건 사람에 대한 애정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