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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홍길의 명사산행] '갈대'의 시인 신경림

호젓한오솔길 2011. 9. 23. 07:48

 

 

[엄홍길의 명사산행] '갈대'의 시인 신경림
 
“시인? 그럼. 난 시인이자 산꾼, 그것도 골수 산꾼이지.”
▲ 북한산 정릉계곡에서 경치를 즐기는 신경림 시인과 엄홍길 대장.

 

평생 시를 쓴 사람과 평생 산을 탄 사람이 만났다. 시와 산, 시인과 산악인, 무척 동떨어져 보인다. 동떨어져 지내던 두 사람이 북한산 정릉 탐방안내소에서 인사를 나눈다. 빗속을 걸어오는 노란 등산복의 남자가 신경림 선생이었다. 차분하지만 빨라 어느새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노란 컬러 때문인지 풍기는 기운 때문인지, 일흔여섯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인다. 


신경림 선생은 1935년 충북 충주 보련산 자락에서 났다. 동국대 입학 이듬해인 22세에 ‘문학예술’지에 ‘갈대’ 등의 작품이 추천돼 등단했다. 10년을 절필한 그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쌓는다. 1973년 첫 시집 <농무>를 발표한다. 민요처럼 편안하고 소박한 언어로 붕괴돼 가는 농촌의 삶과 산업화 이면의 궁핍함을 노래한 이 시로 제1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1980년대 민요기행을 통해 채집한 가락과 정서를 녹여 만든 시집이 <민요기행>과 <길>이다. 1990년 제2회 이산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외에도 여러 시집과 산문집을 내고 많은 상을 수상했다. 교육전문 월간지 <우리교육>에 연재한 ‘시인을 찾아서’를 묶어 책으로 펴내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 등산이 유일한 취미라고 하는 <농무>의 시인 신경림.

 

또 비가 내린다. 그래서 한산한 산 입구, 여느 때 같았으면 “엄 대장님 아닙니까”하고 달려들던 등산객들도 없이 조용하다. 탐방지원센터에서 차를 마시며 가볍게 서로를 알아간다.


“그렇잖아도 엄 대장 만나면 물어보려 했는데, 랑탕 트레킹 하기가 어때요?”


“랑탕 좋습니다. 굉장히 아름답죠. 길이 좋아서 베이스캠프까지 가는 것도 힘들지 않습니다.”


“내년 3월에 가기로 했거든요.”


“그때면 트레킹하기 좋을 때입니다.”


“60세 넘은 실버 친구들하고 같이 가요. 쉬엄쉬엄 가는 거죠.”


“선생님은 일흔여섯인데도 정정하시네요. 히말라야 트레킹도 가시고요.”


“일주일에 두 번은 꼭 산행을 해요. 대개 북한산이죠. 어쩌다 지리산 설악산을 가고, 30년을 산에 같이 다닌 사람들이 있어요. 문인도 있고 기자도 있고요.”


신경림 선생은 1978년에 정릉으로 이사 와서 지금껏 살고 있다. 30년을 넘게 살았으니 두 번째 고향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일요일과 수요일, 일주일에 두 번 꼭 산에 간다. 30년간 함께 산에 다닌 절친들과 간다.


“산을 탄 지 한 30년 됐죠. 처음 산에 다니기 시작한 건 어디 가서 말도 자유롭게 못 하고 그럴 때였으니까 떠들면서 편하게 얘기할 수 있으니까 산에 가기 시작한 거죠. 그때 지명수배 당하고 그런 친구들 길거리에서 만나면 잡혀가니까 산에서 만나고 그랬죠. 국회의장 했던 임채정이 이부영이도 다들 지명수배 중일 때였어요. 산에서 술 먹고 떠들고 그랬죠.”


▲ 1 정릉계곡 등산 안내도를 보며 코스에 대해 얘길 나눈다. 2 신경림 선생은 산행 경력 30여 년에 북한산만 천 번 넘게 올랐다. 3 스틱 사용법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시인과 대장.

 

모임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이름 없이 다닌다 해서 이름이 없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러니까 무명산악회다”라고 해서 그게 정식 명칭이 되었다. 무명산악회는 문인, 교수, 교사, 해직기자, 학생운동가 연합 모임으로, “건강을 위해서는 가급적 산에 가지 말자”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뒤풀이가 진하다. 무명산악회는 매년 홍천군 살둔으로 가족 모두 총출동하는 집단 텐트생활 하계휴가를 갔었는데, 한때는 그 수가 65명에 이르기도 했다.


“한 달에 한 번은 지방 큰 산에 가고, 나머지는 대개 북한산을 가요. 산행 외에 다른 운동하는 건 없고 오로지 산행만 합니다. 엄 대장은 다른 운동하는 게 있나요?”
“저도 사람들이 무슨 운동을 하냐고 묻는데 산행만 합니다. 산행이 건강에는 최고인 것 같아요.”


신경림 선생은 4년 전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갔다가 고생을 많이 했다. 8일 동안 걷는 코스였는데 파업 때문에 차가 끊어지기 전에 하산하느라 하루에 13시간 반을 걸었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 4,000m대 고지대까지 무난히 산행할 수 있었던 건 일주일에 산행을 두 번씩 꾸준히 해왔기 때문이다.


비가 잠깐 소강상태다. 산에 왔으니 비가 오더라도 한 시간은 넘게 걸어야 할 것 아니냐며 신경림 선생이 먼저 나선다. 우중산행은 의외로 멋스럽다. 평소 수량이 많지 않은 정릉계곡이지만 “캬~”하는 소리가 절로 터져 나오는 물줄기가 곳곳에서 없던 폭포를 만들었다. 선생이 엄 대장에게 세계에서 어느 산을 제일 좋아하는지 묻는다.


“제가 나고 자란 도봉산이 최고인 것 같습니다. 외국에서는 역시 최고봉 에베레스트가 산다운 웅장한 스케일도 있고 힘 있는 면모를 갖춘 것 같아서 좋아요. 선생님도 기회 되시면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다녀오세요. 가보면 역시 다른 8,000m 산과 다른 최고봉다운 기운이 느껴집니다.”


선생은 히말라야 트레킹 외에도 중국의 태산, 노산, 백두산 등을 다녀온 산 마니아다. 개인적으로는 오래 다닌 북한산에 정이 들었다며 가장 좋아하는 산으로 꼽지만 “오밀조밀하고 예쁜 산”으로 설악산을 꼽는다. 시인이니 산에서 여유 있게 걸으며 경치를 즐기는 편이 아닐까 싶지만 반대다. 엄  대장이 “경치 보면서 안 가세요?” 묻자, “그냥 막가는 거죠”라고 응수한다. 걸맞게 오르막이 나와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가볍게 오른다. 걸음에서 오랜 산행의 익숙함이 묻어난다. 


빗줄기가 다시 굵어진다. 물줄기가 곡예를 하는 북한산의 새로운 면모를 보고 있기에 쉽게 발을 돌리지 못한다. 선생과 대장이 약속이나 한 듯이 계곡 옆의 산길을 따라 오른다. 신경림 선생은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갔을 때도 비가 많이 왔다고 한다.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며 걷는데 벼락 치고 산 전체가 폭포인데 힘들면서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고 히말라야의 비경을 설명했다.


“히말라야는 엄청나요. 사람에게 뭔가를 말해 주죠. 까불지 말라고, 완전히 압도해 버리지. 그런 큰 산을 16개나 올랐으니 엄 대장을 존경하는 거죠.”
지리산 역시 갈 때마다 비를 만나 천왕봉 일출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유를 알고 보면 비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지리산만 가면 왜 그리 비가 오는지. 또 밤에 술을 많이 먹으니 새벽에 일어날 수 있나. 큰 산은 큰 산이더군요.”
아마도 선생은 시와 산, 그리고 술을 무척 사랑하는 것 같다. 술을 즐기는 건 사람에 대한 애정 탓이다.


 

 

“시인? 그럼. 난 시인이자 산꾼, 그것도 골수 산꾼이지.”

 
▲ 엄 대장은 8,000m 16개 봉우리 등정사진이 담긴 기념품을 신경림 선생에게 전달했다.

 

“산행 끝나면 술 많이 먹죠. 히말라야 8일을 걸으면서 매일 저녁마다 폭음을 했으니까요. 가이드 채경석(외대산악회 OB)씨가 우리 때문에 혼났죠. 밤마다 몰래 술을 먹으니까." 


선생에게 산악회 사람들은 산친구면서, 술친구이고 또 격렬한 토론을 벌이는 문우들이기도 하다. 무명산악회처럼 비슷한 시기에 생긴 산악회가 거시기산악회와 바가지산악회라고 한다.


“거시기산악회에는 이호철, 백낙천씨, 리영희 선생 같은 분이 있죠. 거기도 매주 산에 다녀요. 산행을 굉장히 잘하죠. 거시기산악회는 나이 많은 사람이 많아서 평균 73세인데도 지리산 종주를 했어요. 그러니 우리 산악회에 ‘너희는 뭐하냐’고 큰소리 치고 그래요.”


 

내 취미는 오로지 산

돌탑에 이르자 빗발이 세차다. 더 이상 오르긴 무리라고 판단, 계곡을 내려간다. 암벽은 고소 공포증이 있어 안 한다고 한다. 그래도 북한산을 천 번 이상 산행했고 북한산둘레길, 지리산둘레길 같은 데도 빼놓지 않고 찾아갈 정도로 산에 대해선 열렬하다. 산행이 창작에 도움이 되었는지 엄 대장이 묻자, 중요한 모티브였다고 한다.


“선생님은 등단하고 나서 바로 작품 활동을 하지 않고 10년 정도 틈을 두고 전국을 돌며 농사, 공사판 노동, 광산일 등 온갖 일을 경험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뭐 일을 열심히 한 사람은 아니고 건달처럼 다니면서 구경하고 그랬죠. 직접적으로 체험했다고 보긴 어렵고 공사판에서 일하는 친구 찾아가 함께 있으면서 간접 체험했다고 봐야죠.”


“농민들의 애환을 담은 <농무> 같은 시집을 보면 선생님 시는 땀이 배어 있는 체험에서 나온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데요. 시를 쓸 때 어떤 원칙 같은 게 있나요?”


“특별한 원칙은 없고, 삶과 동떨어진 글은 안 쓰려고 해요. 글이란 게 자연스러워야 되고 삶과 연결되야 하는 거니까 시를 억지로 꾸미려고는 안  하죠.”


“초기 시를 보면 서민적인 느낌을 받는데, 가장 최근 <낙타> 같은 시집에선 색깔은 다르지만 여전히 사람 중심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그렇죠. 역시 가장 중요한건 사람이니까요.”


얘기를 나누며 내려오는 사이 정릉탐방지원센터다. 마침 점심때라 식사를 하며 차분하게 얘길 나눈다. 고령에도 수술하거나 아픈 곳 없이 건강한 비결을 묻자, 산행이라 서슴없이 답한다. 


“나는 취미가 산밖에 없으니까. 도박 같은 것도 안 하고 술하고 산밖에 없어요. 담배는 1970년대에 끊었어요. 산에 자주 가고 소식하니까. 그게 비결이 아닌가 싶어요.” 


너무 일찍 산에서 내려와도 문제가 되는데, 술을 더 오래 마시기 때문이다. 회원들의 부인들은 한 시간 산 타고 10시간 술 먹는다고 안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도 산악회 사람들이 고령에도 건강한 이유는 매주 산에 가기 때문이라 선생은 믿는다.


2007년에 발표한 시집 <낙타>에 보면 ‘나마스떼’란 시가 있다. 히말라야를 다녀와서 쓴 이 시에서 말미에 그는 ‘무엇인가 두렵다’고 했다. 이에 대해 그는 “거대한 자연 앞에서 보잘 것 없이 작은 인간의 두려움”이라 한다. ‘히말라야 순이’란 시에선 네팔의 열악한 상황을 썼다.


“네팔 아가씨 이름이 순이타인데 한국이름으로 순이라고 그러더군요. 한국에 대해 잘 알더라고요. 부산에 가보는 게 꿈이라고 했던 그 아가씨는 우리를 보려고 이웃마을에서 3시간 동안 걸어왔다고 그러더라고요.”


선생의 시는 쉽게 이해되면서도 심도 깊고, 민요의 운율을 살린 서민 이야기를 담은 시로 알려져 있다. 최근 젊은 시인들의 난해한 시 흐름에 대해 물었다.


“꼭 시가 쉬워야 되는 건 아니지만 일단 소통이 되어야지. 소통이 안 되는 건 문제가 있는 거야. 역사적으로 그런 어려운 시들이 꼭 있었어요. 근데 금방 묻혀버려.”


“맞습니다. 정지용의 ‘향수’ 같은 시를 보면 많이 배우고 적게 배우고 상관없이 누구한테나 감동을 주는 것 같아요.”


▲ 북한산을 내려오는 시의 대가와 산의 대가. 오르는 대상은 다르지만 열정은 같다.

 

술을 무척 좋아하는 시인이지만 평소에는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술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만 마시고 시를 쓸 때는 쓰기 며칠 전부터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다가 사유를 깎고 깎아서 완성되면 새벽 일찍 일어나 종이에 옮겨 쓴다. 원래부터 새벽에 일어나 책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반면 낮에는 쉬지 않고 돌아다니는 걸 좋아해서 어디든 나간다.


그는 러시아와 우리나라 사람이 시를 제일 많이 읽는다고 한다. 시집을 상업 출판하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거의 유일할 거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지금도 그는 시를 100편 이상 외운다. 반주삼아 막걸리가 몇 잔 돌고 창밖에는 빗소리가 흐른다. 엄 대장이 슬며시 시를 한 편 읊는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 조용히 울고 있었다. /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 그는 몰랐다.”


신경림 선생이 22세에 썼던 ‘갈대’란 시다. 어떻게 어린 나이에 깊은 연륜의 시를 쓸 수 있냐고 묻자, 그냥 쓴 거라며 웃는다. 선생은 지금도 시를 쓸 때면 설렌다고 한다.


“설레고, 기분 좋고 그렇죠. 한편으론 불안하기도 하고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8,000m를 수없이 갔어도 또 산에 갈 때가 되면 설레면서도 불안하고 사고 없이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 생각이 들면서도, 어린애들 소풍 가듯이 설레고 그렇습니다.”


선생은 상을 꽤 많이 받았다. 그러나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운이 좋았던 편이죠. 진짜 좋은 시를 쓰고도 상 못 받은 시인들도 있거든요. 문학이란 게 그래요. 상에다 기준을 두면 안 될 것 같아요.”


식사를 마치고 볼이 발그레하게 막걸리 잔이 돌자 엄 대장이 시인에게 얘기한다.


“어렵게 생각했는데 만나 보니 완전 산꾼이시네요. 일주일에 두 번씩 산에 가시고요.”


“그럼 나는 산꾼이지. 골수 산꾼이지.”


시의 대가와 산의 대가가 만났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던 이들은 어느새 시인이 산꾼이 되고 산꾼이 술꾼이 되는 경지에 닿아 있었다. 유형의 산을 오르는 사람과 무형의 사유를 오르는 사람, 둘에게는 오르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하는 깊숙한 곳의 뜨거움이 있었다. 오름의 혼을 가진 사람, 신경림·엄홍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