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 <323> 고흥 팔영산 |
선비·부처·사자 등 암봉의 퍼레이드… 다도해 절경도 황홀 |
전대식 기자 |
한국의 산 이름은 산 모양새나 주변 지명, 전설, 산세에서 유래한 게 많지만 때로는 봉우리 개수로 이름을 붙인 곳도 적지 않다. 별 고민 없는 작명인 듯하지만 단번에 산의 모양새를 가늠케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명석하다. 날카로운 세 개의 암봉을 가진 경기 양평의 삼각산, 다섯 개 봉우리가 정겨운 경남 양산의 오봉산, 경북 영덕의 팔각산도 봉우리 덕에 명찰을 달았다. 이번 주 '산&산'이 찾은 전남 고흥 팔영산(八影山·608m)도 이 범주에 드는 산이다.
팔영산은 '봉우리 표' 산 중에서도 바위 봉우리의 조망미와 암릉 타는 재미는 첫 손에 꼽을 정도다. 거기에다 제1봉에서 제8봉으로 가는 내내 보이는 다도해의 은빛 실루엣은 장관 그 자체다.
다도해국립공원에 포함
고흥의 진산이자 최고봉
8개 봉우리 저마다 매력
능가사·편백숲길도 좋아
봉우리로 이름난 산은 이에 얽힌 사연을 한두 개쯤 갖게 마련. 팔영산도 옛날 옛적에 8개 봉의 그림자가 한양까지 드리웠다고도 하고, 중국 위나라 조예 황제의 세숫대야에도 8개 봉의 그림자가 어렸다고 한다. SF영화에 나옴직한 얘기다. 딱히 근거는 없다.
호남정맥 고흥지맥에서 약간 동쪽으로 비켜서 있는 팔영산은 고흥의 진산이자 고흥의 최고봉이다. 지난 1998년 7월 30일 도립공원으로 지정돼 일찌감치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다 역사, 지리, 생태적 가치가 높은 지역으로 판단돼 올해 1월 10일 도립공원에서 국립공원으로 승격됐다. 지금은 다도해해상국립공원 팔영산지구이다. 국립공원으로 바뀌면서 보다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관리가 기대된다. 8개 봉우리에 설치된 철 사다리, 밧줄도 새로 단장하고 등산로도 깔끔히 정비됐다. 가족산행지로도 손색이 없다.
코스는 팔영산 주차장에서 출발, 팔영산 야영장~흔들바위~유영봉(제1봉)~적취봉(제8봉)으로 간다. 주봉인 깃대봉(제9봉)을 본 뒤 편백숲~탑재~야영장으로 내려와 고찰 능가사를 둘러보면 4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산행거리는 8.5㎞. 해안이나 섬 산행의 기점은 표고가 통상 두 자릿수를 넘지 않아 산이 낮다고 얕보다가는 낭패 보기 십상이다. 다행히 팔영산은 그런 곤혹감을 주지 않는다. 호된 가풀막은 없고, 다만 암봉 사이 잘록이에서 숨이 조금 가쁘지만 견딜 만하다.
국립공원 주차장 매표소를 통과하면 곧바로 팔영산 주차장이 나온다. 능가사 앞에 편백이 훤칠하게 서 있다. 그 뒤로 멀리 팔영산의 돌올한 멧부리가 보인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영락없는 부처의 옆모습이다. 절은 날머리에서 보기로 하고 산행을 재촉한다. 능가사 돌담을 따라 길은 왼쪽으로 휜다. 팔영교를 지나 4분 정도 가면 오른쪽에 부도가 있다. 모두 9기로 조선시대 능가사에서 수도한 승려들 것이다. 이 중 사제지간이었던 승려 추계당과 사영당의 부도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다.
부도를 지나면 왼쪽에 팔영산 야영장이 있다. 성수기(4~5월, 7~8월, 10~11월)엔 어른 한 사람당 2천 원(비수기엔 1천600원)을 받는다. 자동차캠프장은 차 한 대당 성수기엔 1만 1천 원을 내야 한다(비수기는 9천 원). 전기와 물을 쓸 수 있고, 화장실도 충분하다.
야영장을 벗어나면 탐방객 집계 센서가 있다. 등산객 수를 헤아리는 장치이다. 센서를 통과해 2분쯤 지나면 실제 산행 들머리인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 왼쪽에 성기리 기와 가마터가 있다. 전시관 안에 실제 가마터가 그대로 보관돼 있다.
갈림길에서 팔영산으로 들어가는 길을 밟는다. 길가에 소크라테스, 공자, 베이컨 등 철학자나 사상가의 명언을 새긴 푯말이 있어 산행이 심심치 않다. 고즈넉한 산길 위로 보기 좋은 솔과 신갈, 떡갈나무가 그늘을 드리운다. 늦여름 매미가 기운 없이 운다. 잔돌이 발에 밟혀 바스락거린다. 너덜을 통과해 15분 남짓 오르면 흔들바위다. 누군가 바위를 흔들어 보려고 지렛대를 괴어 놓았다. 지렛대를 눌러 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흔들바위에서 제1봉 방향 이정표까지는 10분 정도. 오르막을 기엄기엄 오른다. 숲으로 막혔던 하늘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군데군데 폐쇄된 등산로가 있는데, 예전 도립공원 시절 산꾼들이 다니던 길이다. 이제는 길이 묵었고 돌부리가 사나우니 아예 접근을 말자. 국립공원에선 그에 맞는 산행을 하는 게 에티켓이다.
이정표에서 제1봉까지는 15분 정도. 조선 고종 때 편찬한 흥양읍지(흥양은 고흥의 옛 이름)에 팔영산 8개 봉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북쪽 봉우리부터 순서를 매긴다. 제1봉은 유영봉(儒影峰·491m)이다. 선비의 그림자를 닮았다는 봉우리다. 이 봉우리에 송팔응(宋八應) 장군의 전설이 서려 있다. 팔영산 제1봉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송팔응에게 하늘을 나는 백마가 있었다. 어느 날 송팔응은 말의 성능(?)을 시험하려고 화살 한 발을 팔영산 봉우리에 쏘았다. 이내 말을 타고 봉우리로 날았지만, 화살은 온데간데없었다. 낙담한 송팔응은 말의 목을 단칼에 벴다. 그때 화살이 바위 뒤에 와서 꽂혔고, 송팔응은 자신의 경솔함을 탓하며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팔순의 송팔응은 이 산에 올라 '팔십에 팔영산에 오르니 팔영은 늙지 않았는데 팔응은 늙었구나'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팔영산의 다른 이름이 팔응산이다.
유영봉에서 다도해의 푸른 바다를 실컷 본다. 날씨가 좋다면 일본 대마도와 제주도까지 보인다고 하는데 해무 탓에 가늠되지 않는다.
유영봉에서 내려오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왼쪽은 선녀봉, 오른쪽은 제2~6봉을 돌아가는 우회로다. 철 사다리와 쇠사슬 밧줄을 잡고 7분 남짓 오르면 제2봉 성주봉(聖主峰·538m)에 이른다. 산봉우리가 부처를 닮았다고 한다.
성주봉에서 안부로 내려서 10분 정도면 제3봉 생황봉(笙簧峰·564m)에 올라선다. 바람이 바위를 스치면 생황 소리가 난다는 멧부리다. 제4봉은 사자가 엎드린 모양의 사자봉(獅子峰·578m)이다. 이 봉에 서면 비로소 제8봉이 어엿하게 드러난다. 유영봉이 기이하다 싶었는데 어느새 사자봉이 신기하다. 그러고 보니 TV의 서바이벌 경연 프로그램처럼 암봉을 오를 때마다 앞서 지나온 봉우리와 견줘보는 재미가 있다.
사자봉에서 다섯 신선이 노닐었다는 제5봉 오로봉(五老峰·579m)까지는 단숨에 닿는다. 오로봉과 제6봉 두류봉(頭流峰·596m) 사이 안부가 다른 데 비해 가파르다. 두류봉의 조망은 일망무제다. 다른 봉에선 반쯤 가렸던 다도해의 전모가 드러난다. 좌우를 보니 여수와 장흥의 앞바다가 지척인 듯하고, 우주센터가 있는 나로도도 뚜렷하다.
두류봉과 제7봉 칠성봉(七星峰·598m) 사이 안부는 길고 넓지만 순하다. 숲을 거닐다 통천문을 지나면 칠성봉이다. 공깃돌 모양의 바위들이 널브러져 있다.
칠성봉에서 무명 봉우리를 넘어 15분쯤 가면 제8봉인 적취봉(積翠峰·591m)이다. 칠성봉에서 본 다도해의 섬들은 농도를 달리하며 푸른빛을 주름 치고 있다.
적취봉에서 3분 정도 내려가면 제9봉(깃대봉·608m) 방향 이정표가 나온다. 잰걸음으로 7분 정도 가면 깃대봉 표석에 닿는다. 주봉인 깃대봉은 정확한 위치는 표석에서 동쪽으로 120m가량 떨어진 곳이다. 경찰 통신초소가 들어서면서 비석을 여기로 옮겼다. 국립공원 측은 경찰과 협의해 조만간 깃대봉 표석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을 방침이다.
갈림길로 다시 돌아와 하산길을 연다. 데크 전망대를 잇달아 지나 15분 정도 내려서면 편백 숲을 만난다. 알싸한 편백 향이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편백 숲을 빠져나오면 임도가 나오고 이내 탑재에 닿는다. 탑재부터는 임도를 가로질러 등산로가 나 있다. 이정표와 산행 안내리본을 살펴서 걷자.
30분가량 산책하듯 걸어 내려와 숲 터널을 빠져나오면 팔영산 야영장 일대로 들어선다. 10분 정도 걸어 팔영교를 지나 왼쪽으로 틀어 능가사로 들어선다. 보물 제1307호인 능가사 대웅전은 특이하게도 북향이다. 주역 팔괘를 새긴 동종(보물 제1557호)도 볼 만하다. 사천왕문을 빠져나와 뒤를 돌아보니 저녁노을에 젖은 팔영산이 누렇게 물들어 있었다. 산행문의 : 라이프레저부 051-461-4164. 다도해해상국립공원 고흥분소 061-835-7828. 전준배 산행대장 010-8803-8848.
글·사진=전대식 기자 pro@busan.com
그래픽=노인호 기자 nog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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