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강화 나들길 7코스의 하이라이트인 갯벌 제방길. 갯벌을 따라 하염없이 걷는 행복한 고독을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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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학생들! 여학생 뒤에 가서 서야지! 아침 안 먹었니!”
화도버스정류장에 내리자 쩌렁쩌렁 마이크 소리가 초등학교 담장 밖까지 울린다. 가을운동회를 준비하는 것 같은데 누가 잘하고 누가 요령 피우는지도 마을에 중계되고 있었다. ‘도보여권 기념도장 받는 곳’ 간판이 있는 편의점에서 도보여권과 안내지도를 준다. 아기자기한 여권에 7코스 출발 도장을 찍는 게 소꿉놀이마냥 유치하면서도 한편으로 재미있다.
‘강화 나들길’은 지난해까지 8개, 130여 km의 걷기 코스가 개발되었다. 올해 개통한 교동길과 개발 중인 석모도와 서도면(주문도, 볼음도)의 길까지 보태면 조만간 13개 코스가 된다. 나들길이라는 이름에는 가족이나 좋은 이들과 함께 소풍하듯 즐겁게 나들이 올 수 있는 길이 되었으면 하는 염원과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길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나들길을 개발한 김은미씨는 “걷기는 사람을 자연 속에 존재하는 일원임을 느끼게 한다”며 “이런 걷기를 통해 인간이 가진 오만을 내려놓게 된다”고 걷기의 의의를 설명한다. 그렇게 ‘나’를 낮추고 ‘들’어서는 길이라는 데나들길의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나들길은 걷기코스라고 만만히 봤다간 녹초가 된다. 대부분의 코스가 15km가 넘고 긴 곳은 23km에 이른다. 길이 편하다고 해도 하루에 20km 이상 걷는 것이 만만치는 않다. 출발 여권에 도장을 찍고 7코스 기점인 화도초등학교를 출발한다. 출발한 지 20분 만에 길을 헤맨다. 무심결에 찻길을 버리고 왼쪽 골목으로 접어든 게 화근이었다. 마을 주민에게 묻자 자신 있게 길을 알려주는데 잘못된 것이었다. ‘나들길’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이가 많고, 안다고 알려줘도 잘못된 정보이기 쉽다. 등산할 때도 길을 물었을 때 엉뚱한 곳을 알려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고의는 아니지만 확실치 않은 정보를 대충 알려주기 때문이다. 지도와 나침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산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자기 독도능력만큼 믿을 수 있는 건 없다.
- ▲ 내리마을에서 갯벌로 이어진 숲길. 7코스는 마니산 둘레의 갯벌과 숲을 잇는 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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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들길은 얘기가 다르다. 성공회 내리성당을 지나면서부터 미로 같은 골목길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처럼 산적해 있다. 표지기나 화살표의 위치가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있어 잘못 갔다 되돌아오기 일쑤다. 지도는 가야 할 큰 방향만 표시하고 있어 거미줄 같은 골목길에선 발로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짧은 ‘알바’를 몇 번 하고 나니 골목 갈림길만 나오면 일행이 신중해진다. 흩어져 표지기를 확인한 다음에야 같이 이동한다. 강화도 나들이에 함께한 이는 아이더 검단산점의 안명선(38), 김우천(32)씨다.
길 냄새를 맡느라 곤두선 오감을 푹신한 숲길이 무장해제시킨다. 흙냄새와 온갖 풀 냄새가 구수한 청국장 냄새처럼 슬금슬금 다가온다. 경직된 몸에 힘이 스르륵 빠지며 이제야 제대로 걷기가 시작되는 기분이다. 한동안 숲을 걷자 굳어 있던 사람들의 표정에도 여유가 생기며 목소리에 장난기가 어린다.
숲을 지나자 대형 펜션단지가 나온다. 강화도는 펜션의 섬이라 해도 좋을 만큼 펜션이 널렸다. 새 건물이다 싶으면 10집 중 9집은 펜션이다. 가격은 저렴하지 않아서 비수기 평일이라 손님이 없는데도 10만 원 이하의 방을 찾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현지인의 말에 따르면 수도권에서 은퇴한 이들이 이곳에 펜션을 짓고 안정된 수입으로 노후를 보내러 오는 이들이 많단다. 그러나 보기보다 일이 많고 여간해선 안정적으로 좋은 수입을 얻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 ▲ 1 7코스 기점인 화도초등학교. 원점회귀 코스라 승용차나 버스 모두 이용에 불편이 없다. 2 화도초교에서 성공회 내리성당으로 이어진 논둑길. 벼가 황금빛으로 익을 때면 제법 운치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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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로 들어서는 찰나 날카롭게 개 짖는 소리가 걸음을 멈칫하게 한다. 다닥다닥 붙은 철창 안에 갇힌 영양탕용 개들이다.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듯 전력을 다해 공격적으로 짖는다. 개들도 자기들이 죽을 거란 걸 안다. 그래서 사람이 두려워서, 살아남기 위해 악을 쓰고 있는 것이다.
한 명씩 걸어야 하는 작은 동네 숲길을 나오자 다른 세상이 기다린다. 갯벌이다. 새장을 막 나온 새가 창공을 향해 날아가듯, 가뿐한 걸음으로 제방길을 걷는다. 바다는 낮고 잠든 듯 고요하고 서해 특유의 회색빛이다. 생의 격동기를 다 흘려보낸 이의 관조의 눈빛처럼 차분하다. 사람 한 명 없는 갯벌을 제왕처럼 강력한 햇살이 점령했다. 시선이 닿는 저 끝까지 그늘은 없다. 우산이 양산으로 유용하게 쓰인다.
둔덕 같은 낮은 산 숲길을 지나니 다시 갯벌과 논의 경계를 이룬 제방길이다. 편의점이 있으면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며 여유를 부릴 텐데 나들길에는 갯벌, 논, 산뿐이다. 핑크색 데크에서 도시락을 먹는다. 벙커처럼 갯벌 쪽으로 구멍을 작게 만들었는데 이는 철새들을 관찰하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