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KBS 울릉중계소 들머리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설산과 바다가 어우러져 멋진 겨울풍경을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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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으로 간다. 무리를 벗어나 외따로이 등 돌리고 앉은 사내의 뒷모습 같은 섬. 누굴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것도 단념한 사내의 빈 눈빛처럼, 현실에서 등 돌리고 망망대해를 보고 있는 울릉도. 먼 섬으로 간다.
옛날엔 제주도나 강원도 산골이 먼 곳이었는데 지금은 항공편이 늘고 길도 잘 나 먼 곳이 귀해졌다. 항공편이 없고 포항에서 3시간 이상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울릉도는 우리나라의 마지막 먼 데다. 겨울이면 평소보다 더 멀어진다. 묵호나 속초에서 운행하는 배편이 모두 운행을 중단하고 포항에서만 하루에 한 번 배가 뜬다. 파도가 높은 계절인 탓에 포항에서 뜨는 배편도 일주일에 반 이상 취소될 때가 많다.
- ▲ 바람등대 지나 정상으로 이어진 능선길. 인원이 많을수록 러셀의 수고도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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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울릉도는 모든 것이 눈보라 속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눈이 많이 오는 곳답게 차로 갈 수 있을지, 러셀이 되어 있을지, 걸어서 저 산을 넘을 수 있을지 무엇도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간다. 우리나라에서 자유롭게 설동을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춘 곳은 울릉도 성인봉뿐이다. 설동을 파 하룻밤 산과 몸을 섞기 위해 가는 것이다.
원시림을 침묵케 한 큰 눈
망망대해에 예사롭지 않은 산이 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산, 배 위의 모든 이들의 시선을 움켜쥐는 묘한 힘이 있다. 지난 여름에도 이 섬에 왔었다. 그때와 다른 섬이다.
백의를 두른 속을 알 수 없는 하얀 능선에서 자신이 견뎌내고 있는 고통이 얼마나 가파르고 엄숙한지 보여주려는 산의 마음이 보인다. 설동을 파려면 하얀 고통의 가장 높은 곳으로 걸어 들어오라고 얘기하는 것만 같다.
취재팀이 배를 타고 들어간 날만 맑았다. 이후 3일 동안 눈이 쌓였다. 러셀 여부와 설동 인력을 감안해 하루 더 기다려 주말 등산객들과 함께 산을 오르기로 했다. 오래 기다린 덕분인지 일주일 만에 가장 맑은 날, 산에 들어섰다.
- ▲ KBS 울릉중계소에서 산에 들면 짙은 곰솔숲이 산객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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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울릉중계소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같이 든 이는 울릉산악연맹 김두한 회장을 비롯한 회원들과 육지에서 온 드림라이더 회원들이다. 수다스러웠던 양치식물 빼곡한 원시림을 침묵시킨 건 큰 눈이다. 눈 천지라는 말이 들어맞을 정도로 눈이 산을 폭압적으로 점령했다. 평균 1m 정도 쌓였는데 다른 해보다 적게 와서 그 정도라고 한다. 고요한 허공 속을 걷는 듯 설산은 꿈쩍하지 않는다. 앞서간 이들의 발자국이 더 없이 선명해 궤적을 등산로 삼아 따른다.
발자국 사이에서 직선으로 난 자국, 스키 자국이다. 이 가파른 성인봉에서 산악스키로 산을 자유자재로 오를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다. 울릉산악회원이며 울릉콘도 사장인 최희찬씨다. 울릉도 산악스키 전문가인 그는 이곳 산등성이만큼 거칠게 보이지만 풍부한 먹을거리로 사람을 품어 안는 성인봉처럼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이다.
- ▲ 울릉도 성인봉 개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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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만치 않다. 며칠 동안 쌓인 눈을 처음 헤치고 가는 것이라 걸음이 어렵다. 앞선 발자국이 있어도 체중이 쏠리며 균형 잡기 어려울 때가 잦다. 낭떠러지 같은 사면길 특성상 한발 잘못 디디면 어디까지 미끄러질지 가늠하기 어려운 것도 속도를 더디게 한다. 산은 더 깊은 겨울잠을 원하는 것처럼 흰 이불을 계속 수북이 덮으려 한다.
모처럼 사람들 소리로 시끄럽다 싶어 보니 목재다리에 쌓인 눈을 울릉산악연맹회원들이 삽으로 치우고 있다. 사면을 연결하는 절벽 위의 다리에 1.5m 정도의 난간이 있는데 이미 눈이 그 위까지 가득 찼다. 김두한 회장은 몇 년 전에도 여길 지나던 등산객이 미끄러져 추락해 죽은 사례가 있다며, 이후 울릉산악연맹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다리의 눈을 치우고 있다고 한다.
- ▲ 1 산악스키로 성인봉을 오르는 최희찬씨. 울릉콘도를 운영하는 토박이 산악인으로 울릉도 산악스키 전문가다. 2 정상 아래에 설동을 판다. 팀워크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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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내내 성인봉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두 번째로 높은 간두산은 실컷 볼 수 있다. 이곳에선 주로 말잔등이라 부르는데 백곰 같은 큰 덩치에 군부대 건물이 볼록 솟아 눈길을 끈다. 추위를 가시게 하는 위압적인 오르막이 계속 덮쳐온다. 가쁜 호흡을 안다는 듯 정자가 나타나 한 숨 돌리며 허기를 채운다. 산은 계속 사람을 시험한다. 성인봉을 오를 자격이 있는지 체력, 정신력, 경험 중에서 어느 하나 모자람 없는지 묻는다. 가벼운 마음으로 온 이들은 대부분 정자 못미처 내려간다. 산은 자신에게 전념하지 않는 이들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바람등대를 넘자 달콤한 풍경이다. 바다와 산의 비범한 조화, 공룡의 뿔처럼 독특한 산세가 바다로 흘러내린다. 누구도 기막힌 전망 터를 1분 이내에 떠나지 못한다. 카메라로 담아보지만 눈으로 직접 보는 아름다움에 반도 미치지 못한다. 따스함에 가까운 겨울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의 느낌을 사진은 담아내지 못한다. 활자는 더 부족해 마음의 망막에 비친 산 실루엣을 얼핏 보여줄 뿐이다.
- ▲ 다리에 쌓인 눈을 치우는 울릉산악연맹 회원들. 다리에서 추락해 사망사고가 난 이후 울릉산악연맹에서 매년 솔선수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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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쉽지 않은 설동 파기
경치의 클라이맥스는 정상에서 완성된다. 숲으로 둘러싸인 암릉이라 여름에는 경치가 신통찮지만 겨울은 얘기가 다르다. 바위를 눈으로 덮어 구경하기 좋게 겨울이 평탄 작업까지 마쳤다. 눈 덕분에 천혜의 전망대가 된 것이다. 산행 내내 모습을 감추었던 정상은 의외로 손이 커서 파노라마로 시원한 경치를 내준다. 화이트와 블루가 매력적인 설산과 망망대해다. 나리분지와 끝에 솟은 송곳봉이 시선을 당긴다. 눈의 깊이만큼 침묵이 깊다.
울릉연맹회원들은 나리분지로 내려가고 드림라이더 회원들은 설동을 판다. 정상에서 말잔등으로 이어진 능선, 북풍이 밀어제친 눈이 쌓여 6m쯤 되는 벽을 만들었다. 그 아래에 설동을 판다. 10명쯤 되는 인원이 잘 곳을 파다보니 삽질도 한참 해야 한다. 그 옆에 우리가 잘 설동을 판다. 최희찬씨와 조중호씨가 베테랑 산악인다운 솜씨를 발휘한다. 조중호씨는 도봉산 아래에서 오랫동안 어택캠프 장비점을 운영하다 몇 년 전부터 부인 이소민씨와 함께 울릉도에 터를 잡았다. 게스트하우스와 혜초여행사 울릉지사를 운영한다. 발 뻗고 자려면 부지런히 삽질해야 한다. 쉬운 것 같지만 눈이 층을 이루며 단단히 굳어 있어 잠깐만 삽질을 해도 거친 숨을 토해낸다. 돌아가며 3시간 파내니 누울 공간이 나온다. 텐트보다 더 아늑한 냉장고다.
- ▲ 1 일인용 비박 설동. 비상시 한 명이 자기에 알맞다. 2 간단하게 만들수 있는 설동 안의 음식 보관 선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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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턴 만찬의 시간이다. 산행에, 삽질에 주린 배를 고기와 밥으로 채운다. 텐트보다 아늑하고 분위기 있는 밤, 산에 심하게 취한다. 산에 취해 정신을 잃은 아침, 저동으로 하산한다. 봉래폭포로 이어진 길은 이곳 주민들이 다니는 지름길이다. 그러나 눈이 깊어 어디가 길인지 알 수 없다. 사람의 흔적이 길이 된다. 낭떠러지 같은 비탈을 트래버스하거나 내려간다. 미끄러지듯 위태로운 하산, 설피를 신어 속도를 줄이려 애쓴다. 순간 설피 발톱이 돌에 걸리고 무릎이 꺾인 채 미끄러진다.
순백의 설경이 하얀 통증으로 바뀌어 몸 안에 번진다. 산등성이와 골의 미세한 지형들이 고통으로 와 닿는다. 누구도 대신 읽어 줄 수 없는 산이라는 책을 절뚝절뚝 읽어 내린다. 봉래폭포 버스정류소에 닿자 가두어 두었던 하얀 풍경이 봇물처럼 무너져 내린다. 산에서의 실수는 죄다. 죄 지은 사내가 도망치듯 섬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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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길잡이
KBS 중계소~정자~바람등대~정상~봉래폭포 8.3km
겨울 성인봉은 까다롭다. 1m 이상 눈이 쌓여 있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10명 이상의 인원이 러셀을 하거나 설피를 신고 오르는 것이 좋다. 눈에 덮여 길의 구분이 어려우므로 독도에 주의하고 GPS를 준비하거나 현지인과 함께 오르는 것이 좋다. 나리분지로 하산할 경우 겨울철 나리분지에서 천부리까지 차량통행이 어려운 경우가 많으므로 나리분지에서 1시간 이상 다시 걸어 천부로 나가야 한다. 가파른 비탈을 트래버스하는 눈길이 많으므로 보행에 주의해야 한다.
정상에서 저동 봉래폭포로 이어진 길은 2.5km로 가깝지만 주민들만 주로 다니는 길이라 희미하고 겨울에는 길이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봉래폭포에서 잘 정비된 숲길을 따라 1.5km 내려가면 버스정류소다. 겨울에는 봉래폭포까지 버스가 운행하지 않는다. 총 8.3km에 6시간 정도 걸린다.
- ▲ 성인봉 정상. 표지석 있는 곳이 대청봉 암릉지대 같은 곳 꼭대기지만 눈이 쌓여 천연 전망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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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 동절기에는 포항에서 하루 1회(09:40) 출발하는 대아고속해운(1544-5117) 배편이 유일하다. 특히 파도가 높은 겨울에는 배가 뜨지 않는 날이 더 많으므로 출발 유무를 미리 확인하는 것이 좋다. 세 시간 정도 걸리며 울릉도에서 14:40에 포항으로 되돌아 나온다. 일반 5만8,800원 우등 6만4,400원이다. KTX와 대아고속해운이 연계해 할인 판매하는 교통편도 있다. 서울역에서 신경주역으로 온 다음, 봉고로 포항여객터미널로 이동해 배를 타는 상품이며, 정상가격보다 할인된 가격에 구매 가능하다. 신경주역에서 포항여객터미널까지 바로 가는 버스편이 없는 걸 감안하면 편리하다. 부산역에서도 이용가능하다. 코레일 홈페이지(www.korail.com)나 KTX 정차역에 문의하면 된다. KBS 중계소는 도동에서 2.5km 떨어져 있다. 택시로 이동해야 하며 하산지점인 봉래폭포에서도 콜택시를 불러서 타고 나가야 한다.
문의 개인택시 울릉지부(054-791-2612), 울릉택시(054-791-2315).
숙식 산 입구에 있는 울릉 KBS의 울릉콘도(016-508-9962)가 등산인들이 즐겨 찾는 숙소다. 토박이 산악인 최희찬씨가 운영하며 울릉도의 여느 숙소에 비해 저렴하고 넓고 깨끗하다. 방 5개의 30평형이 20만 원, 방 3개의 25평형이 15만 원이다. 산 입구가 가깝고 경치가 좋아 산악회들이 즐겨 찾는다. 1~2명이 왔을 경우 저동 어택캠프게스트하우스(011-276-0428)가 추천할 만하다. 산악인 조중호, 이소민 부부가 운영하며 깔끔하고 식당 등 편의시설이 가깝다. 1인당 1박 2만 원, 대학생 1만5,000원이다.
겨울 제철 회인 불볼락(현지에서는 ‘매바리’라 부른다) 물회가 별미다. 해산물을 취급하는 울릉도의 식당 대부분에 있다. 저동 항구 앞에 있는 1번지횟집(010-2877-7771) 물회가 별미다. 봉래폭포 앞 산장휴게소(010-8949-9515) 호박막걸리(1만 원)가 유명하고, 더덕전(1만 원), 도토리묵(1만 원), 감자전(1만 원), 해수손두부(8,000원) 등이 맛나다.
- ▲ 1 봉래폭포 앞 산장휴게소의 별미인 해수손두부와 호박막걸리. 2 저동 1번지횟집의 물회. 3 경치가 좋고 방이 큰 울릉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