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벌나비처럼 바위꽃 위에 사뿐히 올라앉아 팔영산 기슭을 바라보고 있다. 제6봉 두류봉. 능선 왼쪽 끄트머리에 팔영산 깃대봉이 동산처럼 솟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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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명산은 봄을 기대하며 찾아온 유산객을 매서운 바닷바람과 추위로 맞아 주었다. 쌩~ 소리와 함께 불어댄 바람은 몸을 움츠러들게 하고, 바위틈에 달라붙은 흰 눈은 손가락을 시리게 했다. 게다가 누가 시샘을 부리는지 스멀스멀 밀려온 바다 안개는 기대했던 다도해 풍광을 누릴 기회를 앗아갔다. 그래도 좋았다. 즐거웠다. 봄은 아직 저만치 떨어져 있지만 하늘에서 간간이 쏟아지는 햇살은 얼굴을 따사롭게 하며 봄을 향하고 있고 숲속의 동백은 빠알간 꽃을 피운 채 봄을 재촉하고 있었다.
“ 옛날 중국 위왕이 세숫대야 물에 여덟 봉우리가 비치자 산세의 빼어남이 중국까지 소문났다는 얘기가 전해지면서 그림자 ‘영(影)’ 자를 써서 팔영산(八影山)이라 불리게 되었대요. 하지만 원래 ‘영’은 신령을 뜻하는 거예요. 그래서 신령 ‘靈’ 자가 맞아요.”
2월 초, 팔영산은 한반도 최남단에 있는데도 찬바람이 쌩쌩 불고 있었다. 다도해국립공원 고흥분소에서 만난 마이수(고흥군청 문화관광과)씨는 “제1봉 유영봉에서 한 번, 제2봉 성주봉에서 두 번 등 봉우리 수에 맞춰 제8봉까지 절을 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며 동네 산인 팔영산 자랑에 신이 났다. 그는 무엇보다 팔영산이 ‘신령스런 산’으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마이수씨가 자랑하지 않더라도 고흥 최고봉 팔영산(八影山·608.6m)은 분명 전남 명산이다. 고흥반도에 돌병풍처럼 신비로운 풍광을 자아내며 솟구친 이 산은 기암괴봉이 기운차게 솟은 데다 다도해 풍광이 아름다워 예로부터 보석해(輔石海)라 일컬어져 왔고, 이러한 풍광 덕분에 1998년 7월 30일자로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데 이어 2011년 1월 1일자로 다도해국립공원에 편입되었다.
- ▲ 능가사 천왕문을 들어서면서 팔영산을 바라본다. 여덟 개 암봉이 돌병풍 같은 모습으로 실루엣을 그리고 있어 더욱 신령스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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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기슭 고찰 능가사로 가는 길은 돌담길로 시작된다. 길가 민가에 둘러쳐 있는 돌담은 마삭덩굴 옷을 입고 겨울을 나고 있다. 아직 찬바람에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자아내는 콘크리트길은 능가사 천왕문을 앞두고 두 갈래로 나뉜다. 우측 편백나무숲 코스는 하산길에 들르기로 하고 절 안으로 들어서자 산행 안내를 맡은 박호민 고흥작가회 사무장은 “그래도 오늘은 날씨가 풀려 다행”이라며 명동종(銘銅鐘) 앞으로 안내한다.
대숲이 만경암 터의 슬픈 역사 덮어 버려
송광사 말사인 능가사는 1,500여년 전 신라 눌지왕 때(420) 아도화상(阿道和尙)이 보현사란 이름으로 창건했다. 이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조선 인조 22년(1644) 벽천(碧川)대사가 중창하면서 ‘인도의 명산을 능가한다’는 의미로 능가사(楞伽寺)로 이름이 바뀌었다 전하는 고찰이다.
“저기 보이는 명동종은 종을 치면 점암면 일대에 울려 퍼질 정도로 소리가 좋았대요. 한데, 일제 때 일본인들이 자기 나라로 가져가려고 헌병대에 옮겨 놓고 종을 치자 소리가 나지 않아 예사롭지 않다 싶어 다시 능가사에 돌려주었다 합니다.”
평지에 들어앉은 능가사는 썰렁하다 싶을 만큼 당우가 적은 고찰이다. 하지만 등 뒤에 돌병풍처럼 펼쳐진 팔영산은 실루엣을 그리며 능가사를 감싸안아 고즈넉하면서도 고찰다운 분위기를 돋워주고 있었다.
- ▲ 팔영산 개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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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을 벗어나 산길로 들어서기 전 야영장에는 아직 한겨울 같은 날씨 속에서도 오토캠핑을 즐기는 이들이 눈에 띈다. 캠퍼들에게 계절은 아무 상관없는 듯하다. 국립공원 내 식당 겸 숙박업소인 팔영산장을 지나 산 안으로 들어서자 팔영산은 기다렸다는 듯이 산그림자로 일행을 감싸 안았다.
“골짜기 건너편 능선은 천짓등이라 불러요. 옛날 기우제를 지내던 능선이에요.”
박호민씨는 커다란 바윗덩이로 꽉 차 있는 골짜기 너머 능선을 가리키며 산세를 설명하다가 흔들바위(능가사 1.2km, 유영봉 0.6km)에 도착하자 “마당처럼 꼼짝하지 않아 ‘마당바위’로 불린다” 말한 뒤 대나무숲 속으로 안내한다.
“재작년에 싹 베어냈는데 또다시 우거졌네요. 대나무숲이 슬픈 역사를 덮어버린 것 같네요.”
이제 터만 남아 있는 만경암(萬景庵)은 서불암(西佛庵), 칠봉암(七峰庵)과 더불어 능가사에 달린 암자였으나 항일의병들의 격전지이기도 했다. 맹감절터, 맹갱절터로도 불리는 망경암 터에는 1909년 7월 7일 의병 125명이 이곳에 집결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흥양(현 고흥읍)과 벌교주재소 대원들에 의해 의병 16명이 전사했다고 <비록한말전남의병전사(秘錄韓末全南義兵戰史)>에 기록돼 있다.
- ▲ 1 팔영산 산행은 암릉 산행의 묘미와 함께 멋들어진 조망의 즐거움이 더해진다. 2 팔영산 바윗길에는 쇠발판, 쇠봉, 쇠사슬이 설치돼 있어 안심하고 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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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신선 다섯 명이 놀았다는 오로봉
흔들바위를 지나면서 산길은 한결 가팔라지지만 바윗길 대신 흙길이 나타나 한결 부드럽다. 그렇게 유순한 숲길을 거슬러 오르다가 고개 드는 순간 어마어마한 바위절벽이 눈앞에 우뚝 솟구친다. 선비의 그림자를 닮았다는 제1봉 유영봉(儒影峰·491m)이다.
길목을 가로막은 푯말 뒤로 들어서자 발아래가 절벽이다. 쇠발판, 쇠봉, 쇠사슬 등으로 안전시설이 돼 있는 제1봉 오르는 절벽 길은 조망 코스다. 옅은 이내가 원경을 가려 아쉽기는 하지만 백일도, 진지도에 이어 대여자도와 송여자도 등 여자만(汝自灣) 일원의 크고 작은 섬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바닷길처럼 느껴지는 여자만은 간척지에 빼앗긴 바다가 아쉬운지 뭍으로 파고드는 형국이고, 그 바닷길 타고 올라온 바람은 북풍한설을 밀어낼 기세로 세차게 불어댔다.
“팔영산은 예전에 봉우리마다 숫자로 표시했으나 이제는 능가사를 보수할 때 발견된 ‘만경암 중수기’에 기록돼 있는 이름을 봉우리 이름삼고 있어요. 아무튼 암봉 하나하나가 팔영산 조망대예요. 저기 보세요, 섬들이 고래가 떠오른 듯 보이잖아요.”
1봉 정상에 올라서자 깃대봉으로 뻗은 암봉들보다 북동릉 상의 옥녀봉과 신선대가 눈길을 끈다. 옥녀봉은 그 아랫마을에 살던 처녀총각의 애틋한 사랑 얘기가 전하는 곳이고, 신선대는 예로부터 신선들이 노닐며 바둑을 두던 곳이라 전한다.
- ▲ 제5봉 오로봉을 오르는 취재팀. 등뒤로 4봉에서 1봉으로 이어지는 암봉과 여자만 일원이 바라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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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봉 정상에서 내려서자 바람이 언제 불어댔느냐는 듯 고요해지고 따스한 햇살이 내리쬔다. 봄이 왔구나 싶을 만큼 따스한 햇살을 누리며 물 한 모금 마신 뒤 제2봉을 오르는데 “엄마야!”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즐겁게 해주겠다고 데려온 20대 여자친구가 절벽에 매달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울상 짓다 못해 울부짖는 소리였다.
제2봉 성주봉(聖主峰·538m)을 넘고, 제3봉 생황봉(笙篁峰·564m)을 오르는 사이 바람소리가 생황소리인양 한결 가늘어지더니 제4봉 사자봉(獅子峰·578m)에 다가서자 사자가 포효하듯 바람소리는 한층 거칠어진다. 그 사자봉 정상에 서서 바람소리를 꺾어볼 요량으로 일행 모두 소리쳐보지만 목소리는 바람소리에 이내 묻히고 만다.
“고흥군 진산인 팔영산은 이름이 여럿이에요. 옛 문헌에 보면 팔영산 외에도 팔전산(八田山), 팔전산(八顚山), 팔령산(八靈山), 팔점산(八占山), 팔봉산(八峰山) 등으로 불려왔으니까요.”
박호민씨는 팔영산 지명 유래에 대해 얘기하면서 “특히 그림자 ‘影’ 자를 쓴 팔영산은 팔봉의 그림자가 멀리 한양 땅까지 드리워지기 때문”이라 귀띔해 준다.
- ▲ 제7봉 칠성봉을 장식하는 바위통로. 덧장바위가 굴을 만들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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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늙은 신선들이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 어디메뇨, 무릉이 여기로세”라고 극찬했다는 제5봉 오로봉(五老峰·579m)에 올라서자 앞 봉우리들에 가려 있던 제6봉 두류봉(頭流峰·596m)이 모습을 드러내고 제7봉 칠성봉(七星峰·598m) 또한 웅자를 슬쩍 드러내는 것이 어서 오라 손짓하는 듯하다.
유혹에 넘어간 듯 부지런히 서둘러 제6봉에 올라서자 여수 화양 일원의 반도뿐만 아니라 적금도, 조발도, 낭도에 이어 금오도까지도 눈앞에 펼쳐진다. 박호민씨는 “고흥 적금도와 여수 조발도를 잇는 다리가 놓이면 순천을 거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고흥과 여수는 거리가 한 시간 반 이상 가까워진다”고 알려준다.
“예전에 내가 올려놓은 돌인데 아직 그대로 있네.”
제7봉 칠성봉은 기암 여럿을 모아놓은 듯한 모습으로 솟아 있다. 배병달씨는 중턱쯤 위치한 바위틈바구니 앞에서 서서 뒤이어 오는 일행에게 “통행료 내고 지나가라” 하지만 일행은 반응을 보이지 않고 휑하니 바위통로를 빠져 칠성봉 위로 올라선다.
“야~, 완전 고기비늘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