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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중의 내 발길은 미래로 향하는 발길”

호젓한오솔길 2012. 8. 31. 20:46

 

[엄홍길과 함께하는 명사산행 | 이영탁 세계미래포럼 이사장]
 
“산행 중의 내 발길은 미래로 향하는 발길”
 
  • 글·박정원 부장
  • 사진·C영상미디어 한준호 기자 

 

산은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아우른다. 과거의 역사를 고이 간직하고 있으며, 현재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고, 미래의 비전을 제시해 준다. 특히 모든 종교의 지도자들은 산에서 영감을 받아 크게 깨친 사례가 많다.

이영탁(李永鐸·65) 세계미래포럼 이사장. 제7회 행정고시 합격 이후 1970년 사무관으로 공직을 시작한 이래 장관급으로 30년 가까운 공직생활을 마쳤다. 그중 20여 년을 경제부처에서만 일했다. 이른바 ‘경제통’, ‘경제전문가’로 불린다. 그런 그가 인생 후반기에 미래학자로 변신했다.


▲ 엄홍길 대장이 “싱그러운 나무 색깔이 너무 좋다”며 나무를 가리키고 있다.
 
“사람들을 만나면 대부분 과거 얘기를 하더군요. 과거는 쉽게 얘기해서 자기자랑입니다. 자기자랑도 한두 번이지, 계속하면 누가 가만히 듣고 있겠어요.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아, 과거이야기를 가급적 자제해야겠구나’라고 절실히 느꼈죠. 그러면 상대방이 들어도 지겹지 않을 얘기, 미래에 먹고 살 얘기를 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세계미래포럼을 만들게 됐습니다.”

과거에 얽매인 우리 사회에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고 미래의 먹거리를 찾겠다고 만든 게 세계미래포럼이다. 포럼의 설립취지는 몇 가지 된다.

우선은 과거지향 내지 현실안주에 빠지려는 사회 분위기를 미래지향적 분위기로 조성하는 게 급선무다. 그리고 미래지식을 실용화해 체계적으로 전파함으로써 다수의 미래학자(Futurists: 사회흐름을 분석하고 향후 유행을 점치는 전문가를 말하며, 학자의 개념인 Futurologist와는 조금 다름)를 양성한다. 미래지식시장에 미래경영 교육 및 컨설팅을 통해 개인·기업·정부의 미래경영을 지원한다.
▲ 이영탁 이사장이 잠시 휴식을 취하며 물을 마신 뒤 엄홍길 대장에 건네고 있다.

 

포럼은 이 같은 취지로 미래지식시장을 선점하겠다고 선언했다. “미래를 모르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마치 어둠 속에서 방향감각을 잃고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것과 같다”는 미래 석학 윌리엄 할랄(William Halal) 워싱턴대학 교수의 말을 좌표로 삼았다.
경제전문가에서 미래학자로 변신한 이영탁 이사장이 가장 좋아하는 취미가 등산이다. 거의 매주 산을 찾는다. 산이 좋아서이기도 하고, 산을 통해서 만나는 사람이 좋아서이기도 하다. 공식적인 산행모임만 해도 두 개나 된다. 이사장으로 있는 세계미래포럼의 교육과정 수료생들로 구성된 ‘미래로산악회’ 회원들과 매월 전국의 명산을 찾아간다. 한 번도 빠진 적 없다. 그리고 과거 기획재정부 예산실에서 같이 근무하던 동료들이 ‘예우회’를 만들어, 거기서도 매월 한 차례 정기산행을 하고 있다. 이 이사장이 예우회 회장이다. 이 이사장은 당시 국가의 전체 예산을 집행하는 예산실장으로 있으면서 국가경제의 살림을 운영한 실질 책임자였다.

지난 7월 7일 이 이사장과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산악인 엄홍길 대장이 함께 산행에 나섰다. 사람들이 덜 찾는, 그가 좋아하는 호젓한 팔당역 근처 예봉산 산행코스를 선택했다. ‘미래로산악회’ 회원 10여 명도 함께했다. 이 이사장이 먼저 나서 인사를 했다.

“미래를 모르면 방향감각 잃고 걷는 것”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지금부터 일품 산행코스로 안내하겠습니다. 이 등산로는 사람들이 잘 찾지 않으며, 오르막길로 올라가다 힘이 들면 다시 평탄한 길로 바뀌는 등산하기 좋은 코스입니다.”

이 이사장의 말대로 완만한 길로 오르는 듯하다 조금 가파른 길이 시작된다. 제법 땀이 흐른다. 그러나 우거진 참나무들이 내려쬐는 햇빛을 가려준다. 나뭇잎에 한번 투과된 싱싱한 햇살만 어렴풋이 등산로로 비칠 뿐이다. 엄 대장도 처음 오는 코스라며 “너무 좋다”고 맞장구친다.


▲ 이영탁 세계미래포럼 이사장과 엄홍길 대장이 예봉산 자락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를 배경으로 대화를 나누며 웃고 있다.

 

“산도 생각하기 나름 아닙니까? 무의도 호룡곡산 같은 산은 낮지만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쉽게 올라갈 수 있는 높은 산도 있지만 수면에서 바로 시작되는 호룡곡산은 낮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찹니다. 낮은 산이든 높은 산이든 산은 낮은 자세로 조심조심 올라야 하지 않습니까, 엄 대장님?”

“맞습니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이사장님은 산행을 잘 하십니다. 언제부터 등산을 시작하셨습니까?”

“YS 시절 공직자 골프금지령이 내렸던 적이 있지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산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당시엔 뭐든지 남들보다 잘한다는 얘기를 듣고 싶어 열심히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산이 있습니까?”

“얼마 전에 두타산에 갔다 왔습니다. 무릉계곡이 있는 그 산 있지 않습니까. 시원한 계곡이 보기 좋았고, 여름산행하기에 딱 알맞은 산이었어요. 산마다 나름대로 특징이 있죠. 큰 산은 큰 산대로, 작은 산은 작은 산대로 다 다르죠. 그동안 다닌 곳 중에서 겨울에 눈꽃이 하얗게 내려앉은 한라산 등산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뭇가지 위 하얀 눈꽃이 만들어낸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입니다. 그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은 겨울철 한라산 눈꽃산행의 백미라 할 만합니다.”

“그동안 다니시면서 본, 계절마다 가볼 만한 산행지를 추천해 주십시오.”

“산은 계절마다 다른 옷을 갈아입고, 그래서 특징이 다 있습니다. 봄에는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 연분홍색으로 물든 소백산이 장관입니다. 여름은 두타산 무릉계곡의 시원한 물살을 느끼는 산행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가을은 온 산이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들지만 설악산 단풍이 단연 최고지요. 마지막으로 겨울은 그 계절에만 볼 수 있어 더 아름다운 태백산과 한라산의 눈꽃산행이지요.”


▲ 이영탁 이사장과 엄홍길 대장이 앞장서서 걸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산의 사계절은 곧 그 산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습이다.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산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고, 비전을 볼 수는 있다. 그 영감과 비전도 현재와 과거를 잘 알아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미래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이 이사장의 과거는 공무원이고, 현재는 미래의 비전을 제시할 인재를 양성하는 포럼의 이사장이다. 그의 이러한 과거와 현재를 알면 미래의 자연인 ‘이영탁’의 모습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지 싶다.

이 이사장은 재정경제원 예산실 실장으로 있을 때인 1995년 사상 첫 흑자예산을 편성했다. 흑자예산은 경기가 과열됐을 때 세입을 세출보다 많게 책정한 예산을 말한다. 세입을 많이 잡아 과열 경기를 조정할 필요가 있을 때 편성하는 예산이다. 당시 주가가 1,000포인트에 육박해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1996년의 교육예산을 사상 첫 GNP 5%까지 편성하기도 했다. 미래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 교육에 대한 그의 소신이 적극 반영된 결과였다. 이러한 결정으로 그해 연말 교육부 차관으로 발탁되는 의외의 인사가 단행됐다. 이후 국무총리 행정조정실 실장(장관급), 한국종합기술금융 회장(1999년 6월~2000년 3월), 국무총리 국무조정실 실장(장관급), 한국증권선물거래소 초대 이사장(2003년 2월~2004년 2월)에 이어 2009년 세계미래포럼을 만들어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등산과 인생은 닮은 점 많아”

그는 경제통에서 이후 여러 조직을 거치면서 다양한 경험을 했다. “다양한 경험을 하고 나니 세상에 보이는 게 더욱 많아졌어요”라고 말한다. 그 다양한 경험은 소설가로 데뷔하게 했다. 이 이사장의 현재의 모습이다. 세계미래포럼 이사장이면서 소설가 이영탁인 셈이다. 소설도 그냥 흔히 볼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 제목부터 눈길을 끈다. 누구의 실명 같은 <이정구, 벌족의 미래>(미래를소유한사람들 刊)다. ‘이정구’는 재벌로 대표되는 한국의 3대 기업 창업주인 삼성 이병철, 현대 정주영, LG 구인회 회장의 성을 따서 지은 것이다. 그리고 ‘벌족의 미래’는 재벌이 미래에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내용을 담았다.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경제민주화의 탄생배경이 뭔지에 대해 알 필요가 있습니다. 기업권력이 된 재벌이 과연 정당한 절차를 거쳐 성장했는지는 의문입니다. 성장과정이 투명치 않고, 만연된 편법과 불법으로 지금과 같이 거대해졌다고 봅니다. 기업은 법적으로 문제없다고 주장하지만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건 아닙니다. 편법·불법을 통한 성장 결과가 양극화와 사회갈등을 심화시켰고, 1% vs 99%의 대결을 야기했습니다. 1%가 먼저 양보하고 배려하고 겸손하고, 때로는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야 경제민주화가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 이영탁 이사장과 엄홍길 대장이 이정표를 보고 방향을 확인하고 있다.

 

벌족은 재벌만이 아니라 정치인의 정족, 관리의 관족, 법조계의 법족, 의료계의 의족, 교육계의 교족, 예능계의 예족, 종교계의 종족, 노동계의 노족, 언론계의 언족 등 10개 집단의 1% 귀족을 말한다. 이들이 먼저 양보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야 부정적 이미지를 씻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산행하면서 그의 책 이야기는 계속된다. 전체 내용을 꿰뚫고 쉼 없이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논리정연하게 전달하고 있다.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한편으로는 역시 산행은 머리를 맑게 정리해 준다는 느낌이다.

10개 벌족 중에 그도 ‘관족’에 속한다.

“10개 벌족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이들이 먼저 양보하고 배려해야 사회갈등을 줄이고 미래의 발전된 모습을 보인다는 겁니다. 지금도 이런 모습을 보이는 소수는 있습니다.”


▲ 이영탁 이사장과 엄홍길 대장 일행이 예봉산 정상 직전 봉우리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그의 과거, 현재의 모습을 보면 그는 항상 앞서간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사상 첫 흑자예산이나 교육예산 5% 편성 등과 관족으로서 10개 벌족의 변화를 촉구하는 자세는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를 지향하는 모습의 단면들이다. 어쩌면 그는 애초부터 미래학자의 기질을 타고 난 것이 아닌가 할 정도다.

앞서가는 자 이영탁, 히말라야 14좌를 등정한 자 엄홍길, 묘한 공통점이 있다. 앞서가는 자가 최초의 인물이고, 최초의 인물이 앞서가는 자가 아닌가. 또한 앞서가는 것은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 엄 대장님은 존재만으로도 젊은 세대들이 꼭 배워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은 겸손과 용기를 갖추지 않은 사람에게 자신의 영역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 산을, 쳐다보기만 해도 위압감을 주는 히말라야 14좌를 등정한 엄 대장의 도전정신은 두려울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은 반드시 배워야 할 것입니다.”

“엄 대장의 도전정신, 젊은 세대가 배워야”

역시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항상 상황을 앞서간 고수가 산악계의 최고수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 하긴 요즘은 통섭과 융합의 시대니, 알아보지 못하면 고수가 아니다.

모두들 땀을 뻘뻘 흘리자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한다. 엄 대장이 우거진 나무 사이로 얼핏 보이는 하늘을 보며 말한다.

“싱그러운 나무 색깔이 너무 좋습니다.”


▲ 엄홍길 대장이 이영탁 이사장이 보는 가운데 두물머리를 가리키고 있다.
 
“숲이 계속 돼, 햇빛 한 번 안 보고 정상 부근까지 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엄 대장은 산악인 치고는 얼굴이 너무 맑고 곱습니다.”

모두들 동감하며 한바탕 웃는다.

“산에 오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산이 주는 교훈이나 단상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시죠.”

“산에 올라 정상에 서면 기분도 좋지만 많은 것을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힘든 산행도 마다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또 하산이 쉬운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내려올 때 더 조심해야 합니다. 산행 중 대부분의 사고는 하산 시 발생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목표를 잡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마무리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등산과 인생은 닮은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이사장은 지금 하산 중이다. 인생을 잘 마무리 하려고 미래포럼을 만들었다. 잘 마무리 하는 방법이 미래의 비전을 제대로 제시하는 것이다. 매주 산을 찾아 오르는 이 이사장이 과연 산에서 어떤 영감을 받아 후손들에게 미래의 비전을 제시할지 벌써 궁금해진다. 그의 인생 후반기에 남은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