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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 특집 | 축제 따라 걷는 하늘억새길] 마치 유럽 알프스 온 듯 하늘과 바람과 구름… 살랑이는 억새, 그 사이로 난 길…

호젓한오솔길 2012. 11. 9. 22:25

 

[영남알프스 특집 | 축제 따라 걷는 하늘억새길]
마치 유럽 알프스 온 듯 하늘과 바람과 구름… 살랑이는 억새, 그 사이로 난 길…
 
  • 글·박정원 부장 
  • 사진·정정현 국장 
 
 
5개 구간 30㎞ 원점회귀 코스, 가을 대표적인 걷기길로 인기

영남알프스, 이름만 들어도 설렌다. 지리산·설악산 등이 한국적 특징을 지녔다면 영남알프스는 말 그대로 유럽풍의 아름다운 산군(山群)이다. 이름부터 이국적이다. 간월산(1,083m), 신불산(1,209m), 영축산(1,059m), 재약산(1,108m), 천황산(1,189m), 가지산(1,240m), 고헌산(1,032m) 등 해발 1,000m 이상의 7개 산군의 형상과 풍광이 유럽 알프스 못지않다고 해서 붙여졌다.


봄 진달래와 철쭉, 여름 폭포와 계곡, 가을 억새와 단풍, 겨울 설경 등 4계절 풍광은 어느 산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다. 특히 해발 1,000m 내외에서 드넓게 펼쳐진 신불평원과 사자평원, 간월재, 고헌산 정상 등의 억새는 면적과 군락의 크기에서 전국 최대를 자랑한다.

 


▲ 바람에 살랑이는 억새가 영남알프스 자락을 수놓은 가운데 저 멀리 산능선이 길게 늘어서 있다. / 사진 울산시청 제공

 

영남알프스 억새군락은 총 711만㎡(240여만 평)에 이른다. 재약산과 천황산에 걸쳐 있는 사자평원이 413만여㎡로 가장 넓고, 신불평원이 198만여㎡, 고헌산 정상이 66만여㎡, 간월재가 33만여㎡ 규모다. 이들 억새군락들은 가을만 되면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새하얀 자태를 여기저기서 뽐낸다.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은 영남알프스 억새군락을 가을의 주요 출사지역으로 꼽는다. 가을 영남알프스에 등산하면 억새를 촬영하는 사진작가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가을의 대표적인 자연경관인 억새밭의 억새를 경기 일부 지역에서는 ‘으악새’라고도 부른다. 우리 노래에 나오는 그 으악새다. 전국 어느 산에서나 볼 수 있어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식물이다. 보통 키가 120cm 정도로 사람보다 키가 작으나, 일조량이 풍부한 지역에는 사람 키보다 큰 억새도 있다. 중북부의 경우 2m 이상 자라기도 한다. 남부지방의 경우엔 어른의 허리 정도로 작다.


억새의 종류는 잎이나 꽃에 따라 참억새, 가는잎억새, 물억새, 금억새 등으로 구분한다. 이 중 우리나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가장 흔한 종류가 참억새다. 영남알프스에 대군락을 이루고 있는 것도 이에 속한다.


억새꽃은 그 생김새가 백발과 비슷해 황혼과 잘 어울린다. 따라서 황혼 무렵에 억새를 감상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햇빛이 너무 강하지 않은 아침 또는 오후 늦게 감상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사진작가들도 주로 이 시간대에 몰린다. 오후 3~4시에 억새밭에 들어가 있으면 은빛이던 억새는 두세 시간 후 황혼 무렵에 온통 황금빛으로 변하는 장관을 연출한다. 사진작가들도 감탄을 금치 못한다.


9월부터 피기 시작하는 억새는 보통 은색이나 흰색을 띄며, 가끔 얼룩무늬를 보이는 것도 있다. 억새의 절정시기는 단풍보다 대개 일주일 정도 빠르며, 시기만 잘 맞춘다면 억새와 단풍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더욱이 억새는 단풍과 달리 11월 말 늦가을까지 즐길 수 있다. 단풍과 억새의 관계에 있어 ‘단풍이 좋으면 억새가 나쁘고, 억새가 좋으면 단풍이 나쁘다’는 말이 있다. 이는 단풍과 억새의 생장조건이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 간월산 내려가는 길에 수만㏊의 억새평원이 길게 펼쳐져 있고, 그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고 있다.

 

사진작가들의 주요 출사지역으로 꼽혀


억새의 꽃말은 친절과 세력 또는 활력을 나타낸다. 영남알프스의 억새는 이 군락 면에서 이미 큰 세력을 과시하고 있다. 바람에 산들거리는 억새의 활력과 생동감은 가을의 정취에 한껏 빠져들게 하고도 남는다.


영남알프스의 억새군락지 총 711만㎡(240여만 평) 중 3분의 2가량이 울산시에 속한다. 울산이 150여만 평, 양산이 25만여 평, 밀양이 40여만 평 등이다. 울산은 이 어마어마한 자연경관을 매년 억새축제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름도 ‘영남알프스 억새대축제’다. 올해부터 매년 분산 개최하던 축제를 한데 모아 10월 중에 6개 축제를 집중적으로 열기로 했다. 올해 억새대축제는 10월 7~8일 양일간에 걸쳐 개최한다. 개최장소도 하늘억새길이 지나는 간월재가 메인 행사장이다.


하늘억새길은 영남알프스의 하늘과 바람과 구름과 억새와 길이 어우러진 걷는 길이다. 낮엔 햇살을 받아 산들거리고 밤엔 달과 별빛을 받아 반짝이는 억새의 매력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영남알프스에 한껏 빠져들게 한다.


▲ 신불산 정상 다다라서 힘들게 올라가는 능선 뒤로 영남알프스의 다양한 산군들이 길게 펼쳐져 있다.

 

밀양시는 가지산과 고헌산을 제외한 영남알프스 5개 산군과 능동산을 이어 걷는 동시에, 억새를 즐기면서 등산하는 효과도 거둘 수 있도록 해발 1,000m 내외에 길을 조성했다. 마치 하늘 위에서 억새를 내려다보는 것 같다고 해서 이름도 ‘하늘억새길’이라고 명명했다. 총 5개 구간 29.7km로 원점회귀하도록 만들었다. 1구간은 간월재~신불산~신불재~영축산까지 4.5km, 2구간은 영축산~청수좌골~국도69호선~죽전마을까지 6.6km, 3구간은 죽전마을~향로산갈림길~재약산~천황재~천황산까지 6.8km, 4구간은 천황산~샘물상회~능동산~배내고개까지 7km, 5구간은 배내고개~배내봉~간월산을 거쳐 다시 간월재까지 4.8km에 이르는 총 30km 가까이 되는 길이다.


영남알프스 억새대축제가 열리는 간월재에서 출발한다. 간월재가 1구간 시종점이다. 잠시 영남알프스 간월산에 대해 살펴보고 넘어가기로 하자. 간월산은 전형적인 육산이지만 살짝 악산의 모습도 보여준다. 동쪽으로는 간월공룡능선이 쭉 뻗어 있다. 간월산이란 이름을 아무리 살펴봐도 뜻을 알 수 없다. <대동여지도>에는 ‘看月山(간월산)’으로, 등억리의 사찰엔 ‘澗月寺(간월사)’로 돼 있다. ‘看月山’은 달을 볼 수 있는 산이란 뜻인 듯하고, ‘澗月寺’은 계곡과 달이 있는 산이란 의미로 볼 수 있다. 한자가 모두 다르다. 단순히 1,500여 년 전 간월산 기슭에 간월사라는 사찰이 있어, 산 이름도 간월산이라 했다고만 전한다. 이름만 정해지고 정확한 유래를 알 수 없어 한자표기가 들쭉날쭉한 듯했다.


간월산의 동북쪽에 태화강의 지류인 작괘천 발원지가 있다. 그러고 보니 낙동정맥 줄기인 영남알프스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울산 태화강의 발원지가 되고, 서쪽으로는 낙동강으로 합류한다. 낙동강이야 태백에서 시작된 거대한 물줄기지만 태화강은 울산의 강으로서 간월산이 발원지인 것이다. 작괘천에서 나온 물이 바로 아래 있는 등억온천의 온천수로 사용되고 있다.


간월재의 커다란 돌탑에 간월재란 비석이 있다. 그런데 그 옆에 있는 이정표에 간월산 1,068m, 신불산 1,159m 등으로 표시돼 있다. 지도와 이정표와 정상 비석의 고도 표시가 전부 제각각이다. 간월산만 하더라도 정상 비석엔 1,083m, 이정표엔 1,068m, 지도엔 1,037m로 돼 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신월산도 마찬가지였다. 이정표에서나마 높이 표기를 통일해야 할 것 같다.


 

억새평원은 영남알프스의 명물


이제부터 본격 걷기가 시작된다. 1코스로 접어들어 신불산으로 간다. 30여 km를 5개 코스로 나눴으니 한 개 코스에 6km 내외쯤 된다. 각 코스 시·종점마다 등산로로 하산길이 연결된다. 좋은 코스를 골라 감상하면서 걸으면 영남알프스 보는 재미와 걷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다. 특히 가는 곳마다 펼쳐진 억새평원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영남알프스만의 명물로서 감동을 배가시킬 것으로 보인다.


인생과 마찬가지로 산도, 길도 내려오면 다시 올라간다. 고도 900m 남짓 되는 간월재에서 신불산 정상 1,209m까지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억새만 있다고 해서 길이 전부 햇빛에 노출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길 주변으로 한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소나무와 참나무가 그늘을 드리운다. 노출된 부분은 어김없이 쉼터를 조성했다.


▲ 쇠점골약수터에서 내려와 샘물산장까지는 임도로 계속 걷는다. 이 임도가 울산과 밀양의 경계선이기도 하다.

 

숨이 조금 거칠어지자 능선 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는 대개 옛날 공비토벌을 위해 빨치산 지휘소가 있던 자리에 조성했다. 산이 깊으면 몸을 숨길 곳이 많고 자연 공비들의 좋은 은둔처가 됐다. 영남알프스도 그만큼 깊은 산이라는 얘기다. 신불산은 간월산과 함께 1983년 울주군 군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신불산(神佛山)은 국토지리정보원에 따르면 옛날 산중허리에 신불사라는 사찰이 있어 신불산이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정상에 도착했다. 영남알프스 산군 중에 도립공원 가지산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비석엔 1,209m로 돼 있다. 다른 이정표에는 1,159m, 1,166m 등 높이표시가 들쭉날쭉하다. 영남알프스에 대한 깊이 있고 체계적인 연구나 조사가 있어야 할 것 같다.


동쪽으로는 신불공룡능선이 쭉 뻗어 있다. 공룡능선의 끝자락 즈음에 자수정 광산이 있다. 얼마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나름 유명한 자수정을 생산했다고 한다. 지금은 파헤쳐진 폐광 상태로 방치돼 있다.


이젠 영축산으로 길이 연결된다. 하늘억새길은 정말 하늘과 억새가 연결된 길인 듯하다. 1,000m 능선을 오르내리면서 억새 군락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만㎡의 억새가 군락을 이룬 신불평원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능선 따라 억새 사이로 걷기에 너무 운치 있다. 한마디로 ‘억새 천국’이다.


신불평원의 억새 천국을 지나다 인기척에 놀란 고라니가 푸드덕하고 억새 사이로 도망간다. 꿩도 간혹 화들짝 놀라 비상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억새 사이 고라니가 도망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이다.

영축산(靈鷲山)에 도착했다. 영축산은 취서산(鷲栖山)으로도 불린다. 한글 표기는 영축산·영취산·축서산·취서산 등 다양하게 적혀 혼란을 불러왔다. 이는 ‘鷲’자가 한자로는 ‘취’가 되지만 불교에서는 ‘축’으로 발음하는 것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양산시 지명위원회에서 2001년 1월 영축산으로 최종 확정했다.


영축산은 낙동정맥 영축지맥의 기점이기도 하다. 평원을 지나 봉우리는 바위로 돼 있다. 육산에 이어 악산의 모습을 보이니 이곳이 명당인가 보다. 정상 비석엔 ‘해발 1,081m’로 적혀 있다. 삼각점도 바로 옆에서 방향과 위치를 가리키고 있다. 이젠 다시 죽전마을로 하산하면 된다. 경관을 조망하면서 천천히 걷기엔 너무 좋은 길이다. 영축산이 1코스 종점이자 2코스 시작점이다.


하산길은 청수좌골로 간다. 길은 억새밭 사이 5m가량이 그냥 자갈땅으로 길게 나 있다. 몇 십 년 전 울주군 공무원들이 억새밭에서 불을 방지하기 위해 ‘방화벽’으로 억새를 파헤쳤다고 한다. 얼마나 깊게 팠는지 풀조차 자라지 못한 채 아직 볼썽사납게 방치돼 있다.


곧이어 단조성터가 나온다. 억새밭 너머 긴 띠를 형성한 석성이다. 이곳 지형이 단지모양을 이룬다 하여 단지성(丹之城)이라고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취서산고성’으로 기록돼 있다. 습지가 바로 옆에 있다.


▲ 영남알프스 하늘억새길 개념도

 

청수좌골 하산길은 참나무숲 사이 오솔길 같은 길의 연속이다. 1시간쯤 내려갔을까, 들리는 물소리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계곡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천으로 합류하기 전부터 물이 넘쳐난다. 숲속 오솔길 사이로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계속 내려간다. 


죽전마을이 2코스 종점이자 3코스 시작지점이다. 죽전마을엔 베네치아산장, 영남알프스펜션 등 숙박시설이 즐비하다. 69번도로가 지나는 길이라 접근하기도 쉽다.


배내자연농원 옆으로 가파른 길로 올라서면 3코스가 본격 시작된다. 바로 숲속이다. 뻐꾸기와 이름 모를 새들의 소리가 여기저기 들린다. 숲이 우거졌기 때문에 새들의 둥지도 많을 성싶다.


 

1,000m 고지에 습지보호구역도 있어


제법 길이 가파르다. 앉아서 쉬기 좋은 바위가 나온다. 잠시 쉬면서 다시 주변을 둘러본다. 맞은편 봉우리 꼭대기에 정자 같은 건물이 보인다. 공비 감시초소라고 한다. 옛날에 있던 초소를 없애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조그만 능선에 올라서니 삼거리에서 서북 방향으로 ‘천황산(사자봉) 4.35km, 재약산(수미봉) 3.26km’라는 이정표가 있다. 바로 그 옆에 ‘여기서부터 습지보호구역입니다’라는 다른 이정표도 있다. 삵 등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야생동물과 멧새·붉은머리오목눈이·아무르장지뱀·천마 등 희귀 동·식물이 서식하는 소중한 자연자산이라고 보호를 당부하고 있다.


▲ 간월재 활공장에서 등산객과 어우러진 패러글라이딩 동호회 회원들이 이륙을 위해 힘차게 뛰어가고 있다. / 사진 울산시청 제공

 

오솔길을 지나면 드넓은 사자평원이 펼쳐진다. 다시 억새밭이 방문객들을 맞는다. 가는 곳마다 억새다. 이곳의 억새평원은 수미봉·사자봉·능동산까지 능선으로 수십km 이어진다. 이 일대 800m 고지에 한때 초원녹지를 활용한 목장이 개발되기도 했다.


우뚝 솟은 봉우리가 보인다. 재약산(載藥山·수미봉 1,108m)이다. 하늘억새길에 있는 봉우리들은 전부 너덜지대 위에 정상 비석이 세워져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지형의 특성인지. 국토지리정보원에 따르면 재약산이란 이름은 신라의 한 왕자가 이 산의 샘물을 마시고 병이 나아, 그 자리에 영정사를 짓고 ‘약이 실린 산’이라고 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영정약수(靈井藥水)’를 갖고 있는 산이란 뜻이다.


재약산에서 천황산 사자봉으로 가는 길은 억새 사이로 나무데크가 깔려 있다. 정말 유럽 알프스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다. 저 아래로 목장도 보인다. 지금은 철수했다.


나무데크 위로 내려와 털보산장에 다다랐다. 천황재라고 하기도 하고 사자고개라고도 부른다. 산장 앞에는 나무로 만든 의자와 테이블이 여러 개 놓여 있다. 서북 방향으로 천황산 0.9km, 샘물상회 1.7km 남았다는 이정표도 있다. 천황산 사자봉이 코앞에 있다. 천황산이 3코스 종점이자 4코스 시작 지점이다.


길을 걷다 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관계와 세상살이, 가족사 등 남들에게 말하지 못했던 일들을 혼자 떠올리며 걷는다. 그런데 영남알프스 하늘억새길을 걸을 땐 다른 길을 걸을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산이 어떻게 이렇게 완만한 능선의 연속일까’라는 생각과 정말 유럽 알프스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자주 빠지게 된다. 그 감상에 빠져 다른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다.


▲ 사자고개 주변은 나무데크로 길이 잘 조성돼 있으며, 영축산 억새평원 사이로 난 길로 걷고 있다.

 

천황산과 밀양 얼음골 정상을 지나 어느 덧 샘물산장(상회)에 다다랐다. 산장 주인의 억센 경상도 말투가 멀리서 들린다. 아니나 다를까 도착하니, 낮선 일행에 바로 합류하며 이런저런 세상사를 늘어놓는다. “딸이 이화여대 입학해서 연구실에서 생활한다”며 자식자랑도 빠지지 않는다. 세상 모든 부모들의 심정이려니 하고 듣는다.


샘물산장에 배내고개가 5.8km 남았다는 이정표가 있다. 길은 임도로 바뀐다. 임도는 밀양과 울산의 경계, 즉 경남과 울산광역시의 경계다. 이 경계는 능동산을 거쳐 석남터널 입구까지 계속된다.


임도 중간쯤 산 중턱에 요새 같은 건물 하나가 우뚝 솟아 있다. 밀양시에서 건립한 케이블카다. 이미 완공했지만 형제간 재산소송으로 운행이 늦어지고 있다. 늦가을부터 개통할 예정이라고 한다.


임도로 가다가 산길로 다시 접어드는 길이 쇠점골약수터와 능동산으로 가는 방향이다. 접어든 산길은 조금 가파르지만 분위기가 다르다. 약수터가 있고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워 쉴 곳도 많다. 산길을 걷는 재미는 바로 이런 맛이다.


쇠점골약수터에 도착했다. 이전에 약수터 바로 옆에 남근목이 있었는데 누군가 부러뜨려 없애버렸다. 누가 그랬을까? 본인도 남근목 당한 만큼 직접 당해 봐야 그 아픔을 알까? 영남알프스는 아니지만 쇠점골약수터와 능동산의 명물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젠 영남알프스 하늘억새길의 능동산 봉우리다. 정상비석에 981m라고 적혀 있다. 배내고개까지 1.7km라고 가리키고 있다. 나무계단으로 된 내리막길이다.


산은, 걷기는, 인생은 역시 굴곡이 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힘들게 올라가 쉽게 내려온다. 걷는 일은 역시 철학이다. 영남알프스 하늘억새길은 철학과 사색과 유럽 알프스에 온 듯한 여유와 풍광을 주는 그런 운치 있는 길이다.


▲ 배내봉 정상에서 울산시청 산림정책과 허상용씨와 권창욱씨가 하늘억새길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접근하기엔 배내고개·죽전마을이 좋아


드디어 배내고개에 도착했다. 접근하기엔 69번도로가 지나는 배내고개나 죽전마을이 좋다. 하지만 억새축제는 간월재에서 열리기 때문에 간월재를 출발지로 삼았다.


배내고개는 맑은 계곡 옆으로 야생 배나무가 많이 자란다 해서 배내골이라 했고, 그 배내골 중에 가장 높은 고개길을 말한다. 한자음으로는 이천리(梨川里)라 하고, 그 이천리가 바로 행정구역명이다.


배내골 자체가 GPS로 고도 703m쯤 된다. 웬만한 산 높이다. 하늘억새길이라더니 정말 하늘로 향하는 듯한 등산로가 배내봉으로 향한다. 길은 나무데크로 정돈이 잘 돼 있다. 참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져 그늘을 드리운다.


703m 고지에서 출발했는데도 길이 조금 가파르다. 1,000m쯤 되는 능선에 올라서니 삼거리가 있다. 동북쪽으로 오두산 2.4km, 동남쪽으로 배내봉 1.4km란 이정표가 방향을 가리킨다. 벌써부터 억새들이 하늘거리며 방문객을 반긴다. 억새가 하늘거린다고 하늘억새길이라고 했나. 하늘 위에서 내려본다고 하늘억새길이라고 했나.


영남알프스는 큰 봉우리만 7개지만 작은 봉우리까지 합치면 수십 개는 족히 된다. 오죽하면 유럽의 알프스에 비유했겠나. 여러 봉우리가 각양각색 형형색색의 모습을 뽐낸다. 때로는 육산으로, 때로는 악산으로….


배내봉은 전형적인 육산에 속한다. 대개 억새는 육산에서 군락을 이룬다. 그러니 하늘억새길은 푹신한 육산의 길로만 연결된다. 물론 악산도 일부 나오긴 하지만. 악산에 육산이 있어야 명당이고, 육산에 악산이 있어야 명당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육산의 배내봉 가는 길에 동물 배설물도 보인다. 울산시청 산림정책과 허상용씨는 오소리 흔적이라고 한다. 허씨는 이 길을 조성하느라 무려 20번 이상 왔다 갔다 했다고 한다. 30km를 20회만 걸어도 백두대간 거리에 해당하는 600km다. 그에게 걷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배내봉은 해발 966m. 주변 산군이 파노라마처럼 훤히 펼쳐져 보인다. 북쪽으로 오두산, 서북쪽으로 능동산, 남쪽으로는 간월산, 서쪽으로 천황산·사자봉 등이 우뚝 솟아 있다. 동쪽으로는 명당으로 유명한 롯데 신격호 회장의 생가마을도 보인다. 왜 명당인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유심히 살펴진다. 그 뒤로는 경부고속도로가 나란히 달리고 있다. 등억온천지구도 저만치 자리 잡고 있다.


배내봉 서쪽 사면은 숲가꾸기 모델숲 조성지다. 나무들이 우거져 짙은 녹색의 향연을 제공하고 있다. 길도 편안하게 걸을 수 있어 좋다. 시원하게 트인 주변 조망을 끝내고 다시 간월산 방향으로 나아간다. 경사가 급하지 않은 완만한 능선길이다. 길 주변엔 억새들이 하늘거리며 반긴다. 허씨는 경남북의 웬만한 산은 전부 다녀본 공무원 산꾼이다. 그는 “억새로 제일 유명한 산은 아마 경주의 무장산일 것”이라고 말했다. 높지는 않지만 창녕의 화왕산보다 더 크고 넓다고 한다.


능선 아래로 살짝 내려선 뒤 다시 간월산 능선길로 올라가는 서쪽 비탈에 100년 이상은 된 듯한 대형 철쭉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억새에 철쭉까지 사계절 내내 숲과 꽃의 향연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봉우리를 지나 다시 능선으로 간월재대피소까지 그대로 내려간다. 나무데크로 길이 잘 정돈돼 있다. 올라서기까지가 문제지 올라서면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올라서기까지는 등산이고, 올라서면 걷는 길인 셈이다. 간월재 주변도 억새능선으로 완전 뒤덮여 있다. 정말 스위스 알프스의 어느 곳에 와 있는 듯한 아늑한 분위기다.


출발한 간월재에 원점회귀했다. 이틀 꼬박 걸었다. 울산시청에서는 하늘억새길이 29.7km라고 했지만 GPS로 직접 측정해 보니 31.4km로 기록됐다. 첫날 17.2km에 8시간 30분, 둘째 날 14.2km에 6시간 40분. 이틀 동안 울산시청 환경정책과 허상용씨와 권창욱씨가 줄곧 동행하며 길을 안내했다. 지면을 빌어 감사의 뜻을 전한다. 너무 좋은 길을 너무 급하게 걸어 하늘억새길의 정취를 맘껏 즐기지 못했다. 다음엔 꼭 여유를 갖고 운치 있게 걸어보련다.


교통 서울 출발 기준 승용차로 경부고속도로에서 서울산IC에서 우측으로 빠져나와 언양교차로를 타고 가다 덕현교차로로 갈아 탄다. 여기서 69번도로로 계속 가면 배내고개가 나온다. 약 4시간 30분 소요.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고속버스가 20분 간격으로 서울-울산 간을 운행한다. 요금은 일반 2만2,000원, 우등 2만9,300원, 심야 3만2,200원. 약 4시간 30분 소요. 고속버스나 시외버스터미널에서 1713번을 타면 석남사까지 간다.


KTX도 서울에서 울산역까지 바로 운행한다. 동대구 경유하는 노선도 있어 소요시간은 4시간 내외 걸린다. 주말과 공휴일은 4만9,500원, 평일은 4만6,300원.


맛집(지역번호 052) 배내골 죽전마을 주변엔 콘도와 펜션, 민박시설이 많다. 그중  현지에서 추천하는 음식점은 청수골식당(264-5252), 베네치아토종음식점(264-8188) 등이 있다. 고래고기집으로는 고래막집(266-1585)과 장생포고래고기원조할매집(261-7313) 등을 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