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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등반 | 알프스 트레킹] 샤모니-체르마트 오트 루트 트레킹

호젓한오솔길 2012. 11. 30. 08:33

 

[해외 등반 | 알프스 트레킹]
샤모니-체르마트 오트 루트 트레킹
 
  • 글·사진 | 허긍열 샤모니 주재 산악인
 
고개 넘고 호숫가 지나 닷새 꼬박 걸어
▲ 알프스 산골마을의 정취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융겐 마을.

 

샤모니에서 체르마트까지 이어진 서너 갈래의 오트(Haute) 루트들이 있는데, 아이젠과 피켈 등이 필요한 3,000m 이상의 설원과 고개를 넘나드는 코스 외에 트레커를 위한 3,000m 아래의 고개들을 넘는 코스도 몇 있다. 크게 분류해 3,000m 위아래의 두 갈래길은 도중에 만나고 헤어지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서부 알프스 산맥을 종주해 간다. 알프스의 대표적인 두 산악도시를 연결하는 만큼 알프스의 대표적인 트레킹 코스라 추천할 만하다. 드넓게 펼쳐진 알파인 초원과 돌밭, 황량한 모레인 지대와 빙하, 급류를 건너고 비바람과 눈, 강렬한 햇살 아래를 걷고 또 걷는 코스이다.


몽블랑 일주와는 또 다른, 좀 더 힘든 알프스 산록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이 코스들은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면 14일 정도, 짧게는 7일 정도 소요된다. 한편 오트 루트의 초반부는 몽블랑 일주 코스와 겹치기에 이 구간을 빼면 더 짧게 샤모니~체르마트 오트 루트를 걸을 수 있다.


8월 말이었다. 함께한 이는 장정미씨다. 우리는 샤모니에서 첫차를 타고 스위스 국경을 넘어 르 샤블(Le Chable·821m)에 이른다. 한 달 전에 혼자 샤모니에서 출발해 국경인 발므고개(Col de Balme·2,204m)를 넘고 다르페트고개(Fenetre d'Arpette·2,665m)까지 넘어 르 샤블까지 이틀거리를 하루 만에 걸었다. 날씨도 나빴거니와 혼자만의 트레킹에 마음이 동하지 않아 포기한 적이 있어 르 샤블을 출발지로 정했다. 침봉들을 즐겨 오르던 필자가 알프스 수평의 세계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기도 했다. 벗은 자기와 함께하지 않은 당연한 결과였다며 이렇게 멋진 트레킹을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반겼다.


▲ 스위스 산악회 소유의 몽포트산장. 오트 루트는 이런 산장들을 기점으로 이어진다.

 

르 샤블에서 베르비에(Verbier·1,490m)까지 버스로 오른 우리는 곤돌라를 이용, 레 뤼네트(Les Ruinettes·2,195m)까지 오른다. 서쪽으로 몽블랑산군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이곳이 본격적인 산행 출발지다. 오전 10시가 조금 넘었다.


한동안 산판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난 길은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몽포트 산장(Cab. du Mont Fort·2,457m)으로 이어진다. 남쪽 저 멀리 그랑 콤벵(Grand Combin·4,314m)이 버티고 있다. 마터호른이 있는 발레산군과 몽블랑산군 사이에 홀로 당당히 솟아 있는 4,000m 명봉이다. 아직 오르지 못한 봉우리라 언젠가는 오르리라 여기며 오솔길을 따라 걷는데, 한 무리 소들이 지나간다. 나이 드신 아버지가 앞장서고 젊은 딸이 뒤에서 소를 몰고 있다.


 

붉게 물든 호수에 알프스의 봉우리들 잠겨


정신이 사나울 정도로 요란한 방울소리에서 벗어나자 몽포트산장이다. 언덕 위에 지어진 산장 마당에서 몽블랑산군의 파노라마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제부터 우리는 몽블랑산군을 뒤로하고 걷는다. 우선 쇼고개(Col de la Chaux·2,940m)를 넘는다. 남쪽으로 산허리를 도는 샤모아(산양) 길도 있지만 좀더 짧은 길을 택한다. 한동안 스키슬로프를 따라 걷다 너덜바위지대를 오른다.


▲ 쇼 고개 아래의 모레인 지대 너머로 그랑 콤벵이 보인다.

 

우리보다 앞서 걷던 두 명의 나이 드신 프랑스인 트레커들을 앞지른다. 길이 험하다. 8월 말인데도 눈이 남아 있고 몇몇 구간에서는 얼음 위에 박힌 돌 위를 조심해서 오른다. 산행을 시작한 지 3시간이 되지 않아 고갯마루에 올라선다. 바람이 불지 않는 양지바른 곳에서 점심을 먹고 길을 재촉한다. 거친 돌밭이 끝없이 이어진다. 길 표시는 잘 되어 있다. 하얀색 두 줄에 파란색 한 줄이 큰 돌 곳곳에 그어져 있다. 이 구간 외에는 흰색과 붉은색 두 줄이다.


한 시간 넘게 모레인 지대를 걸어 지겨워질 무렵, 산양이 반겨주었고 옥색을 띤 작은 호수가 보인다. 호수 옆을 끼고 내려가자 삼거리다. 산허리길인 샤모아 길과 만난 셈이다. 이제 루비에고개(Col de Louvie·2,921m)로 오른다. 돌밭이 아니라서 편하다. 삼거리에서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고갯마루에 올라선다. 이제 또 하나를 넘었으니 배낭을 내려놓고 쉰 후, 다시 출발이다. 일기예보에 이삼일 후에는 날씨가 나빠진다고 했기에 발걸음을 재촉한다. 30분간 돌밭을 걸어내려 빙하호 아래의 10m 넓이의 개울을 건넌다. 물에 잠긴 돌다리를 바짝 긴장해서 건넌다. 방수가 확실하게 되는 중등산화와 스틱의 덕을 톡톡히 본다. 완만한 돌밭 길을 걸어올라 작은 언덕을 넘는다. 제법 험하다. 나중에 보니 프라프레리산장(Cab. de Prafleuri·2,624m)에 이르는 이 구간이 가장 메마른 돌밭지대였다.


작은 호수를 끼고 바위지대를 한 시간 이상 오르니 프라프레리고개(Col de Prafleuri·2,965m)다. 제법 시간이 흘러 고갯마루에 선 우리의 그림자가 꽤 길다. 고개 아래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한 산장이 보이며 해지기 2시간 전이었지만 곧장 넘어야 하는 루고개(Col des Roux·2,804m)가 산장 위로 보인다.


프라프레리고개를 넘자 응달 속으로 들어간다. 반시간 즈음 걷자 산판도로가 나타났다. 우리는 산장으로 가지 않고 우회해 루고개로 향한다. 온통 거친 바위뿐인 사면에서 수평으로 반시간 이상 헤맨 다음에야 고갯마루에 이르는 길에 접어든다. 채 반시간이 걸리지 않아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딕스호수가 한눈에 들어오고 붉게 물든 봉우리들이 호수와 어울려 있다. 멋진 풍광이다. 고생해서라도 이 고개를 잘 넘었다 싶다. 산장에 머문 독일인 두 명도 함께 올랐는데, 그들도 멋진 저녁 풍광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는다. 그들과 헤어져 고개를 내려오는데, 산양이 반긴다. 더없이 평화롭다. 곧 어두워질 무렵이라 아쉽게 산양과 헤어진 우리는 딕스호수가 내려다보이는 풀밭에 텐트를 친다. 4개의 고개를 넘어온 힘든 하루였지만 야영지 주변 풍광은 그만한 대가 이상이었다.


▲ 루고개를 내려가 마주친 딕스호수의 풍광. 산양이 반겨주었다.

 

30kg 배낭 무게에 어깨 짓물러


아침 6시 30분경의 일출시간에 맞춰 한 시간 앞당겨 울린 알람시계의 요란함에 눈을 뜬다. 어둠을 헤치며 아침을 먹고 짐을 챙기니 날이 밝아온다. 어둠이 물러간 자리에 딕스호수의 장대함이 드러난다. 아침 7시, 배낭을 메고 걷는다. 어제 루고개를 넘으며 떠온 물이 적었기에 30분 걸어 도착한 첫 개울에서 깨끗한 물을 떠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부린다. 곧이어 아침햇살이 반길 즈음 배낭을 메고 딕스호수로 내려간다.


호수 옆 풀밭언덕에 위치한 바르마산장(Ref. La Barma·2,458m)이 보이지만 그곳을 거치지 않고 곧장 호수를 끼고 도는 산판도로를 따라 걷는다. 빙하가 녹은 물을 가둔 딕스호수의 크기를 가늠하기라도 하듯 한 시간 이상 걸은 후에나 호수 끄트머리에 닿는다. 이 즈음 몇몇 트레커들이 지나간다.


이제 길은 오르막이다. 가이드북에는 우리가 오를 리에드마텡고개(Col de Riedmatten·2,919m)로 이어진 길이 호수 바로 위에서 딕스산장으로 이어지는 길과 갈라진다고 되어 있었지만 이정표에는 고개로 오르는 길 또한 딕스산장으로 이어진다고 되어 있다. 의심스럽게 가파른 길을 오르는데, 저만치 아래에 예전의 고갯길이 보인다. 이런 젠장, 30분 이상 올랐더니 다시 내려가야 하느냐며 어찌할까 망설이다가 딕스산장까지 올라 빙하를 건너기로 한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리에드마텡고개로 이어진 이정표와 새로 난 길이 보인다. 너덜바위 지대를 굽이돌며 이어진 트레킹 코스 군데군데 표시된 페인트칠도 선명하고 급류를 건너게 설치된 철다리도 새 것이다. 오트 루트에 대한 이곳 사람의 정성이었다.


▲ 샤모니-체르마트 오트 루트 트레킹 개념도

 

길은 마치 히말라야 5,000m 지대의 축소판 같다. 침봉과 빙하 아래의 메마른 황무지가 계속해서 이어진다. 딕스호수에서 2시간 걸려 리에드마텡고개 아래다. 서쪽으로 펼쳐진 빙하 건너편 언덕에 딕스산장이 보인다. 잠시 쉬고 있는데, 아일랜드에서 온 트레커 네 명이 지나간다. 딕스호수 어귀에서 이야기를 나눈 부부 두 쌍이었다. 산장을 이용해 짐이 적은 그들은 우리를 추월해 간다. 그들은 철사다리를 오르는 좀더 낮은 쪽(Pas de Chevres·2,855m)으로 가고 우리는 걸어 오르는 리에드마텡고개를 넘는다.


고갯마루에 오르자 바람이 차서, 곧장 내리막을 걷는다. 반시간 즈음 급사면을 내리자 풀밭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고등학생들이 야외수업으로 인솔교사 3명과 이곳 오지까지 올라와 있다. 알프스 자락에서 자라는 학생들의 복이다.


첫날 30kg 가까이 되던 배낭이 제법 가벼워졌다고는 하지만 배낭끈이 어깨를 파고들어 특히 내리막길에서 고통스럽다. 그저 걷기만 하면 되겠지 싶어 이것저것 아무렇게나 꾸려온 짐의 무게에 짓눌렸다. 나중에 보니 어깨 살이 터져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여 겨우 산행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 리에드마텡고개로 오르면서 마주친 트레커들. 히말라야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이다.

 

고개에서 약 900m 높이를 내려 아로라마을(Arolla·2,006m)에 이른다. 작은 산간마을이다. 우체국 옆 작은 매점에서 파는 유일한 캔 맥주 두 개를 구입했는데, 도수가 11.6%나 된다. 할 수 없이 하나는 남겨 물이 귀했던 다음날 아침에 휘발시켜 마셨다. 아로라에서 다음 산행지까지 걸어갈 수도 있지만 버스를 탄 우리는 레 조데르(Les Hauderes·1,452m)에서 갈아타고 빌라(Villa·1,714m)까지 간다. 4시간을 벌었다.


하늘엔 잔뜩 구름이 끼었고 저녁 6시 반이 넘어 산으로 오른다. 풀밭 언덕 여기저기에 목가적인 집들이 있는 산판도로를 따라 걷는다. 한 시간 이상 올라 오솔길에 접어든다. 지도에 표기된 베플랑호수(Lac de Beplan·2,536m)까지 어둡기 전에 가야 하는데 어둠이 내린 후에도 보이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무게를 줄이기 위해 마을에서 물을 담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3시간 가까이 걸은, 저녁 9시가 지나서야 호수가 나타났다. 호수라 하기엔 너무 실망스러운, 주변에 온통 소발자국과 똥들이 난무한 자그마한 웅덩이에 가깝다. 깨끗하고 멋진 큼지막한 알파인 호수를 기대했는지라 실망이 컸지만 어쩔 수 없다. 소똥이 없는 좁은 공간의 풀밭에 텐트를 치고 웅덩이에서 의심스러운 물을 떠 라면을 끓인다. 벗은 그렇게나 허기지고 갈증에 시달렸건만 국물은 아예 넘기지도 못한다.


 

진한 옥빛의 거대한 인공호수 므와리


다음날도 해 뜨기 한 시간 전에 일어나 출발을 서두른다. 전날 14시간 이상 움직인 탓에 피곤할 만도 하지만 이 불결한 호수 주변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하늘에 구름은 많지만 비는 내리지 않는다. 토랑고개(Col de Torrent·2,916m)로 오르는 길은 좋다. 완만한 오르막이다. 상쾌한 아침공기를 마시며 발데랑계곡을 뒤로 하며 걷는다. 한 시간 만에 토랑고개에 오르니 좀더 가까워진 발레산군의 몇몇 봉우리들이 반긴다. 목이 말라 베플랑호수 물로 끓인 녹차를 마시는데, 자세히 보니 벌레 한 마리가 떠 있다. 마실 물이라곤 그것밖에 없었기에 맛있게 들이키고 므와리계곡(Val de Moiry)으로 내려간다.


므와리계곡은 딴 세상이었다. 아담한 알파인 호수 오탄느(Lac des Autannes·2,686m) 및 유난히 진한 옥빛의 거대한 인공호수 므와리호수(Lac de Moiry·2,250m)를 발아래에 두고 걷는다. 한국의 대중가사에도 있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고픈 바로 그런 알파인 초원 위에 아름답게 지어진 돌집들을 지나친다.


▲ 옥빛의 므와리호수를 배경으로 소레브와고개로 오른다.

 

알파인 목장 하나를 지나 토랑고개에서 2시간 걸려 므와리호수에 닿는다. 협곡을 가로막아 세운 거대한 댐 위에는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들이 무거운 배낭을 멘 우리에게 인사를 건넨다. 댐 옆 휴게소에서 오랜만에 현대식 화장실을 이용한 후, 다시 산길을 오른다. 소레브와고개(Col de Sorebois·2,835m)로 오르기 위해서다. 나무 하나 없는 풀밭 언덕이다. 옥빛 호수를 뒤로하고 쉬엄쉬엄 걸어 오르는데 산악자전거를 탄 50대의 중년이 내려왔으며 얼마 후 피켈을 배낭에 단 이가 내려간다.


댐에서 한 시간 반 만에 소레브와고개에 올라선다. 허기진 우리는 고개 넘어 바람이 불지 않는 풀밭에서 라면을 끓여 먹고 40분 걸어내려 케이블카를 이용, 지날(Zinal·1,675m)마을에 닿는다. 산행 중 만난 가장 큰 마을이다. 이곳에는 슈퍼마켓도 제법 크다. 오늘은 포르크레타고개(Col de la Forcletta·2,874m) 아래까지만 오르면 되겠기에 여유를 부려 슈퍼마켓에서 과일이며 시원한 맥주도 구입한다.


▲ 딕스호수를 배경으로 리에드마텡 고개로 오른다. 저멀리 우측에 우리가 넘어온 루고개가 있다.

 

여름시즌의 막바지라 한적한 산간마을 지날에서 한 시간 이상 쉰 후, 다시 오르막이다. 마을 중심에 위치한 교회 좌측 옆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전나무 숲길을 오른다. 한 시간 이상 올라 숲을 벗어나 2,000m 고지에 이르는데, 빗방울이 떨어진다. 고개 아래의 나바(Nava·2,523m)목장 위 풀밭에 닿기도 힘들겠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진 상태에서 한 시간 이상 돌길을 걸어 오른 다음, 첫 돌집에 이른다. 문이 닫혀 있는 돌집 앞 풀밭이 평탄해 텐트를 친다. 오늘도 12시간 이상 걸었다.


다음날 새벽까지 비가 내렸지만 다행히 날이 밝아올 무렵에는 그쳤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텐트를 걷고 짐을 꾸린다. 30분 이상 잘 정비된 산길을 오르자 나바 알파인목장이다. 여기서 나무 한 그루 없는 완만한 알파인 언덕을 두 시간 오르자 포르크레타고개 정상이다. 하늘엔 구름이 짙지만 비는 내리지 않아 고갯마루에서 커피를 끓여 마시는 여유도 가진다. 하지만 얼마 걸어 내리지 않아 빗방울이 떨어진다. 도중에 만난 알파인 목장(Chalte Berg·2,488m)에선 제법 비가 내린다. 그루벤(Gruben·1,818m)마을까지 숲길을 걸어 정오경에야 닿는다. 작은 산간마을이라 식료품점이라곤 없어 슈바르츠호른 호텔에서 맥주 한 잔에 비싼 비스켓 하나로 점심을 때우고 마지막 고개 아우그츠보드패스(Augstbordpass·2,893m)로 오른다. 이 고개만 넘으면 체르마트계곡이기에 빗속이지만 힘이 난다.


 

몽블랑 일주와는 또다른 묘미


도중에 목장 처마 아래서 커피 한 잔을 끓여 마신 후, 그루벤에서 3시간 반 이상 걸려 고개에 올라선다. 찬바람에 맞서 반시간 즈음 내려와 물이 있는 적당한 풀밭에 텐트를 친다. 하루 내내 빗속에서 움직여 몸이며 침낭 또한 젖어 저녁 내내 버너에 말린 후에나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계곡 옆 바위지대에서 밤새 돌 구르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 오트 루트 트레킹 중에 만난 가장 큰 산간마을 지날. 큰 슈퍼마켓이 있다.

 

새벽에 비가 눈으로 바뀌더니 바람이 제법 찼다. 추워 몇 번이나 일어나 밖을 살피니 갑자기 겨울이 온 듯 텐트 주변에 눈이 쌓여 있다. 다행히 가스가 충분해 열심히 텐트를 데워 추위를 이겨내고서 평소보다 한 시간 늦은 아침 8시에 길을 떠난다. 춥고 눈이 내리지만 체르마트계곡으로 걸어 내리기만 하면 되기에 시간적인 여유는 있다. 돌밭을 돌아 융겐(Jungen·1,955m)마을로 이어진 산허리를 따라 돈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쳐 체르마트 계곡의 풍경이 열리는가 싶더니 이내 닫힌다.


전형적인 알프스 산골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길을 따라 융겐에 도착한다. 잘 보존된 전통마을이 탁 트인 알파인 언덕에 자리하고 있었다. 잠시 마을을 둘러보고 체르마트계곡을 향해 생 니클라우스(St. Niklaus·1,138m)로 하산한다. 4박5일간 강행군한 샤모니-체르마트 오트 루트는 트레킹에 관심이 없었던 필자에게 몽블랑 일주와는 또 다른 트레킹의 묘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 포르크레타 고개에서 그루벤으로 내려오면서 비를 만나 이틀간 고생했다.
▲ 마지막날 체르마트 계곡으로 내려오면서 구름 사이로 펼쳐진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