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덕왕릉(興德王陵)
* 지정번호 - 사적 제30호
* 시 대 - 서기 836년경
*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42
* 지 정 일 - 1963년 1월 21일
흥덕왕릉(興德王陵)은 괘릉(掛陵)과 함께 능묘제도가 잘 갖추어진 신라 왕릉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왕과 왕비를 합장(合葬)하였다고 전한다. 능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20.8m, 높이 6m이며 봉토(封土) 밑에는 판석조(板石造) 호석(護石)을 둘렀다. 호석은 바닥에 지대석(地臺石)을 놓고 그 위에 판석(板石)으로 면석(面石)을 세우고 면석 사이에는 탱석(撑石)을 끼워 면석을 고정시켰다. 아울러 탱석에는 각각 방향에 따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고, 그 위에는 갑석(甲石)을 올려 호석을 마무리하였다. 호석이나 십이지신상의 조각은 괘릉의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그 조각수법은 괘릉에 뒤진다. 호석의 주위로는 판석을 깔아 회랑(廻廊)을 설치하고 그 밖으로 돌난간을 세웠는데 난간(欄干) 석주(石柱)는 상하 두곳에 원공(圓孔)이 뚤려 관석(貫石)을 끼우는 형식이다.
현재 난간 석주는 없어진 것이 많다. 왕릉의 외부에는 네 모서리에 석사자(石獅子)가 배치되었는데 이는 성덕왕릉(聖德王陵)의 석사자 배치와 같다. 능 앞으로는 문인석(文人石) 한쌍과 무인석(武人石) 한쌍, 석화표(石華表) 한쌍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왕릉의 전방 좌측에는 능비(陵碑)를 세웠는데, 능비는 현재 귀부(龜趺)만 남아 있고 비신(碑身)과 이수는 없어졌다. 귀부의 조각 수법은 성덕왕릉(聖德王陵)의 귀부와 유사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왕릉은 성덕왕릉과 괘릉의 형식을 모방하여 건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장자인 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은 본명이 김수종(金秀宗, 또는 景徽)이고, 헌덕왕(憲德王)의 동생으로 왕비는 장화부인(章和夫人)이다. 재위기간에는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莞島)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고 장보고(張保皐)를 대사로 삼아 서해를 방어하게 하였으며, 당(唐)으로부터 가져온 차(茶) 종자를 지리산(智異山)에 심게 하고 재배시켰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장지가 "안강북 비화양(安康北 碑火壤)"이라고 하여 현재의 위치와 대체로 부합되며, 특히 왕릉의 주위에서 "흥덕(興德)"이란 명문의 비편(碑片)이 발견되어 이 능이 흥덕왕릉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 흥덕왕릉 가는길...
* 흥덕왕릉 입구 전경..
* 안내판 상세..
* 왕릉앞 욱어진 노송들 싸이로..
* 왕릉의 전경..
* 왕릉 앞 양쪽에 세워진 팔각 돌기둥...?
* 솔 숲으로 애워 싼.. 왕릉의 아늑한 전경..
** 흥덕왕(興德王) **
* 흥덕왕(興德王)이 즉위하니, 휘(諱)는 수종(秀宗)이나, 후에 경휘(景徽)라 고치니 헌덕왕(憲德王)의 동모제(同母弟)다. 12월에 왕비(王妃) 장화(章和)부인이 죽으니 추봉(追封)하여 정목왕후(定穆王后)라 하고, 왕은 사모(思慕)에 쌓여 (망비(亡妃)를) 잊지 못하고 창연불락(愴然不樂)하였다.
* 군신이 상표(上表)하여 비(妃)의 재빙(再聘)을 청하니 왕이 말하기를, "척조(隻鳥:외짝새)도 짝을 잃은 슬픔이 있거늘 하물며 좋은 배필(配匹)을 잃고서랴. 어찌 차마 무정(無情)하게 곧 재취(再娶)를 할까 보냐" 하고드디어 청종(聽從)치 아니하였으며, 또한 시녀(侍女)까지도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좌우(左右) 사령(使令:부림)에는 오직 고자가 있어 할 뿐이었다[장화(章和)의 성은 김(金)씨니 소성왕(昭聖王)의 딸이다].
* 2년 정월에 왕이 친히 신궁(神宮)에 제사하였다.
* 당문종(唐文宗)이 왕의 승하함을 듣고 조회(朝會)를 폐하고 태자좌유덕겸어사중승(太子左諭德兼御史中丞) 원적(源寂)을 명하여 절(節)을 가지고 가서 조제(弔祭)케 한 후 사왕(嗣王)을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 검교대위사지절대도독 계림주제군사겸지절충영해군사신라왕'(開府儀同三司檢校大尉使持節大都督?林州諸軍事兼持節充寧海軍使新羅王)이라 하고 어머니 박(朴)씨를 대비(大妃), 아내 박(朴)씨를 비(妃)로 봉하였다. 3월에 고구려승(高句麗僧) 구덕(丘德)이 당(唐)에 갔다가 경(經)을 가지고 돌아오니, 왕이 여러 사찰의 승려를 소집하여 그를 출영(出迎)케 하였다.
* 5월에 서리가 내리고 8월에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나더니 서울에 큰 가뭄이 있었다.
* 시중(侍中) 영공(永恭)이 퇴관(退官)하였다.
* 3년 정월에 대아찬(大阿飡) 김우징(金祐徵)[김우징:균정(均貞)의 아들이요 그의 종질(從姪)]으로 시중(侍中)을 삼았다.
* 2월에 사신을 당(唐)에 보내어 조공(朝貢)하였다.
* 3월에 깊이 석자나 눈이 왔다.
* 4월에 청해대사(淸海大使)(청해[지금의 전남(全南) 완도(莞島)]대사) 궁복(弓福),성은 장(張)씨[일명(一名명)은 보고(保皐)]니 (일찍이) 당(唐)의 서주(徐州)[서주: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동산현(銅山縣)]에 건너가 군중(軍中) 소장(小將) 이되었다가 후에 귀국(歸國)하여 (이 때) 왕에 진알(進謁)하고 병졸(兵卒) 만명으로써 청해(淸海:청해(淸海)는 지금의 전남(全南) 완도(莞島)이다)를 진수(鎭守)하게 되었다.
* 한산주(漢山州) 표천현(飄川縣)[표천현:지금의 파주(坡州)부근 ?]의 요인(妖人)[요인:요술인(妖術人)]이 자칭 속부(速富)의 술(術)[술:속히 부자되는 술법(術法)]을 가졌다 하여, 중인(衆人)이 자못 혹신(惑信)하는 지라, 왕이 듣고 말하기를, "좌도(左道)[좌도:사도(邪道)]를 가지고 중인(衆人)을 혹하게 하는 자에게 형벌을 하는 것은 선왕(先王)의 법이라" 하고 그 사람을 먼 섬으로 귀양보냈다.
* 12월에 사신을 당(唐)에 보내어 조공(朝貢)하니 [당주(唐主)] 문종(文宗)이 인덕전(麟德殿)에서 (사신을) 불러보고 사연(賜宴)·사물(賜物)에 차등이 있었다. 입당회사(入唐廻使:당(唐)에서 돌아오는 사신) 대렴(大廉)이 차[다(茶)]의 종자(種子)를 가지고 오니, 왕은 그것을 지리산(地理山)[지리산:지금의 지리산(智異山)]에 심게 하였다. 차[다(茶)]는 선덕왕(善德王:제27대) 때부터 있었지만 이 때에 이르러 성(盛)하였다.
* 4년 2월에 당은군(唐恩郡)을 당성진(唐城鎭)으로 고치고 사찬(沙飡) 극정(極正)을 보내어 진수(鎭守)케 하였다.
* 5년 4월에 왕이 [병환(病患)으로] 편치 못하므로 기도를 하고 이내 150명 정도의 도승(度僧:승려(僧侶)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 12월에 사신을 당(唐)에 보내어 조공(朝貢)하였다.
* 6년 정월에 지진이 있었다.
* 시중(侍中) 우징(祐徵)이 사면(辭免)하여 이찬(伊飡) 윤분(允芬)으로 시중을 삼았다.
* 2월에 왕자(王子) 김능유(金能儒)와 승려(僧侶) 9명을 당(唐)에 보냈다.
* 7월에 입당진봉사(入唐進奉使) 능유(能儒) 등 일행이 돌아오다가 바다에 빠져 죽었다.
*11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어 조공하였다.
* 7년 춘하(春夏)에 가뭄으로 적지(赤地)가 되므로 왕이 정전(正殿)을 피(避)하고 상선(常膳)[상선:통상(通常) 음식(飮食)]을 감(減)하고 중외(中外)의 옥수(獄囚)를 사(赦)하였다.
* 7월에야 비가 왔다.
* 8월에 기근과 연흉(年凶)으로 도적이 처처에 일어났다.
* 10월에 왕이 사자(使者)를 명하여 (백성을) 안무(安撫)케 하였다.
* 8년 봄에 국내(國內)에 큰 기근이 있었다.
* 4월에 왕이 시조묘(始祖廟)에 배알(拜謁)하였다.
* 10월에 도리(桃李)가 꽃을 다시 피우고 유행병(流行病)에 걸려 죽는 사람이 많았다.
* 11월에 시중(侍中) 윤분(允芬)이 사직(辭職)하였다.
* 9년 정월에 우징(祐徵)으로 두 번째 시중(侍中)을 삼았다.
* 9월에 왕이 서형산(西兄山)[서형산:경주(慶州) 서악(西岳)] 아래에 행행(行幸)하여 [군병(軍兵)을] 대열(大閱)하고, 무평문(武平門)에 어(御)하여 활 쏘는 것을 보았다.
* 10월에 왕이 나라 남쪽의 주군(州郡)을 순행(巡幸)하여 기로(耆老)와 환(鰥)·과(寡)·고(孤)·독(獨)을 존문(存問)하고 (그들에게) 곡(穀)·포(布)를 차등을 두어 나누어 주었다.
* 10년 2월에 아찬(阿飡) 김균정(金均貞)으로 상대등(上大等)을 삼았는데, 시중(侍中) 우징(祐徵)은 아버지 균정(均貞)의 입상(入相)을 이유로 상표(上表)하여 해직(解職)을 청하므로, 대아찬(大阿飡) 김명(金明:왕제(王弟) 충공(忠恭)의 아들)으로 대신 시중(侍中)을 삼았다.
* 11년 정월 초하루 신축(辛丑)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 왕자 김의종(金義琮)을 당(唐)에 보내어 사은(謝恩)하고 겸하여 (그를) 숙위(宿衛)케 하였다.
* 6월에 패성(?星:요성(妖星)이 동쪽에 나타나고 7월에 태백성(太白星)이 달을 범(犯)하였다.
* 12월에 왕이 돌아가니 시(諡)를 흥덕(興德)이라 하고, 조정(朝廷)이 (왕의) 유언(遺言)에 의하여 장화왕비(章和王妃)의 능(陵)에 합장(合葬)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10 신라본기 제10 흥덕왕조에서)
* 왕릉의 정면에서..
* 정면에서 우측..
* 정면에서 좌측..
* 왕릉의 뒷 모습..
* 두더지란 놈의 짖인가...? 겨울잠 잘려고 굴을 판 모양이다.. 토질이 너무 좋다..
* 동지섯달에.. 왕릉의 돌틈에는 아름다운 꽃이피고..
* 계절을 잊은체 화사 하기만 하다..
* 잡초도 자라서 꽃을 피우고..
* 왕릉 좌측에서 전경..
* 왕릉 우측에서의 전경..(갑자기 왕이 된 기분이다..ㅋ)
* 비석의 흔적... 밭침 거북이 만.. 천년을 남도록 아직도 용을쓰고 있다...
* 나오다 돌아 보니 어디서 왔는지 남녀학생 한 쌍이 왕릉 앞 양쪽 사자머리 위에.. 각각 올라 앉아서 포즈를 취해 가며 열심히 데이트 중이다.......(클릭하면 잡혀요.. 좌:여. 우:남)
** 흥덕왕의 슬픈 사랑 **
신라 42대 흥덕왕은 왕이 된 지 불과 2개월 만에 사랑했던 장화왕비를 잃는다. 슬픔에 젖어있는 왕을 보다 못한 신하들은 새 왕비를 맞이하도록 청해도 흥덕왕은 모두 거절하면서 "새도 짝을 잃으면 슬피 우짖는데 하물며 훌륭한 배필을 잃고서 어찌 차마 무정하게도 다시 아내를 맞이하겠는가"하였던 왕이다.
삼국유사는 흥덕왕의 슬픔을 극적으로 표현해 놓았다.
"당나라에 갔던 사신이 앵무새 한 쌍을 갖고 왔다. 얼마 후에 암컷 앵무새가 죽자 수컷이 슬피 울어 왕은 거울을 달아 주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제 짝인 줄 알고 열심히 거울을 쪼다가 제 모습인 줄 알고는 지쳐 죽었다."
흥덕왕의 사랑을 비유한 것인데 그의 맑고 순수한 사랑이 가슴을 울린다.
솔숲을 한참 지나면 완벽한 왕릉이 당당히 버티고 있고 좌, 우에는 서역인 얼굴을 한 문무인상이 순박하게 도열해 있고 왕릉 옆에는 네 마리 사자가, 그 안에는 41개의 돌 난간이, 마지막 무덤의 둘레돌에는 12지신상이 왕을 지키고 있다.
왼쪽 모퉁이에는 거대한 거북이가 비신과 이수도 없이 처연하게 있는데 거북이는 처참한 파괴의 흔적으로 인해 마치 미완성같이 보인다.
* 비극 간직한 왕릉들
흔히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릉을 인도의 타지마할 궁전으로 꼽고, 북한에서는 노국공주와 합장한 개성의 공민왕릉을 꼽는다. 거기에 이 흥덕왕릉을 아름다운 왕릉으로 더한다.
아름다운 왕릉을 남긴 세 왕의 공통점은 사랑했던 왕비가 먼저 죽었고, 왕비가 죽은 뒤에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정치가 혼란에 빠졌고, 그러다가 스스로 비참하게 죽었다는 것이다.
타지마할 궁전은 아기를 낳다 죽은 왕비 뭄타르마할을 위해 샤자한 왕이 22년에 걸쳐 완성하지만 국고를 탕진했다는 이유로 아들에게 폐위를 당해 7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쓸쓸히 죽었고,
공민왕도 원의 지배를 벗어나고자 자주 노선을 걸었지만 왕비 노국공주가 아기를 낳다가 죽자 모든 정사를 신돈에게 맡기고 결국 비참하게 칼을 맞아 죽는다.
이 흥덕왕도 왕비가 죽자 시름시름 병이 들어 왕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죽었다.
다만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하여 해상왕국을 구가하게 했고 김대렴이 차씨를 갖고 와 지리산 일대에 차 재배가 융성하였다.
그래도 죽으면서 "사랑하는 왕비 곁에 묻어다오"라는 말을 남겼기에 왕비와 함께 묻히는 행복을 누리고 있다....
* 무덤속의 흥덕왕과 장화왕비.. 데이트 중인 젊은 남녀 한쌍을 뒤로하고.. 얼른 걸어 나오다 돌아 본 노송들은 다사로운 겨울 햇살에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2006.12.24 호젓한오솔길
'♥ 오솔길 산행방 ♥ > 문화,고적답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淨惠寺址十三層石塔] (0) | 2010.11.19 |
---|---|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 [玉山書院] (0) | 2010.11.19 |
영일 장기읍성 [迎日長鬐邑城] (0) | 2010.11.19 |
오어사의 가을 풍경 (0) | 2007.11.04 |
봄비 내리는 오어사 (吾魚寺) (0) | 2007.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