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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용탑선원

호젓한오솔길 2010. 12. 2. 23:26

 

 

해인사 용탑선원

 

 

 

 

 

해인사 용성선사 부도 및 탑비 [海印寺 龍城禪師 浮屠-塔碑]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번지 해인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승려 용성선사의 부도 및 탑비.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번지 해인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승려 용성선사의 부도 및 탑비이다. 해인사 용탑선원의 입구 쪽에 부도와 탑비가 나란히 있으며 일제강점기 때 건립되었다. 용성선사(, 1864~1940)는 16세에 해인사에서 출가하였고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이 때문에 3년간 감옥생활을 하였고 그 후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불경을 국문으로 번역하는 활동도 하였다.

부도는 전체높이가 약 311㎝이며 겉모양이 부도라기보다는 탑에 가깝다. 이중 기단 위에 탑신을 3개 얹은 형태를 하고 있다. 아래층 기단 위에는 위층 기단을 받히기 위한 기단 받침이 있고 위층 기단 위에는 탑신 받침이 있다. 탑신과 옥개()는 각각 한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옥개의 추녀는 수평을 이루며 층급받침은 5단이다. 상륜부는 노반(; 머리장식 받침)과 복발(; 탑의 노반 위에, 바리때를 엎어놓은 것처럼 만든 부분)을 두었다.

탑비는 전체높이가 약 341㎝이며 이중 지대석 위에 귀부(), 비신, 이수(螭)를 올려놓았다. 귀부는 웅크린 채 네 다리에 힘을 주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윗면에는 귀갑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수는 반룡 2마리가 마주 보고 있게 장식되어 있다. 비신에는 용성선사의 생몰년과 업적을 적어 놓았는데, 한용운()이 비문을 짓고 오세창()이 두전()을 썼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때 세워진 것이지만 조선시대의 전통을 잘 계승하는 조각 형태와 수법을 갖추고 있다. 또 탑비의 경우에는 한용운과 오세창이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다. 2009년 12월 3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92호로 지정되었다.

 

 

 

 

 

* 고암 [古庵, 1899~1988] 

현대의 고승으로 대한불교조계종 3대 4대 6대 종정을 지냈다. 계율을 중히 할 것을 강조하고 스스로도 계율을 엄격히 지켜 율사(律師)로 존경받았다. 호는 환산(), 법명은 상언()이며, 고암은 법호이다. 속명은 윤지호()이다. 아버지는 문, 어머니는 정원행이다.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식현리에서 태어났다. 1917년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제산을 은사로, 한암을 계사로 득도하였다. 20세부터 운수승으로 전국의 사찰을 순례하였는데, 부처의 행적을 본받아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1938년 내원사 천성선원에서 깨달음을 얻어 용성으로부터 전법게를 받았으며, 상언이란 법명 대신 고암이란 당호를 얻었다. 1967년 대한불교조계종 3대 종정에 추대된 뒤 4대·6대 종정으로 재추대되었다. 1970년 해인총림 2대 방장, 1980년 용성문장에 추대되었다.
종정 시절, 설법 서두에 항상 목격전수()라는 말을 하였는데 이는 계율은 계를 전하는 이와 받는 이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에 이미 다 전해졌다는 뜻이다. 계율을 중요시 할 것을 강조하고, 스스로도 계율을 엄격히 지켜 율사()로 존경받았다. 80세가 넘는
나이에도 해외에 나가 포교하는 등 대중포교에 힘쓰다가 1988년 해인사 용탑선원에서 입적하였다. 나이 90세, 법랍 71세였다.

 

 

 

 

 

 

2010. 호젓한오솔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