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전사 경내 풍경.
<주왕산 국립공원> : 면적 105.6㎢. 주왕산(721m)은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 있다 하여 석병산(石屛山)이라고도 하며, 주방산(周房山)이라고도 한다. 중심부는 금은광이산(812 m)과 주왕산을 잇는 지역이며 태행산(太行山:933m)·연화봉(蓮花峰)·장군봉(將軍峰) 등을 거느리고, 이들 사이를 월외(月外)·주왕·내원(內院) 등의 계곡이 흐른다. 대전사(大典寺)·광암사(光岩寺)·연화사 등의 절과 주왕암 ·백련암(白蓮庵)·연화암 등의 암자와 기암(旗岩)·석벽암·급수대(汲水臺)·정암(淨岩)·아들바위 등의 기암과, 주왕굴·무장굴(武藏窟)·연화굴 등의 굴, 제1·2·3 폭포 외 월외·주산 폭포 등이 주요 관광자원을 이룬다.
망개나무·눈측백나무 등 393종의 식물이 자라고, 59종의 산짐승, 콩새 등 산새 100여 종이 서식한다. 주왕산 4대명물의 하나인 수단화(水丹花)를 비롯하여 망개나무·고양목·산작약 등이 봄에 만발하며, 복령(茯笭)·백출(白朮) 등의 약초와 송이버섯도 유명하다. 산허리에 높이 6 m의 자하성(紫霞城)이 15km 가량 뻗쳐 있고, 괴내[塊川] 중류에 있는 달기물 약수터도 찾는 사람이 많다.
주왕산은 1976년 3월 12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산세가 웅장하고 특이한 기암괴봉으로 이루어져 있어 장관이다. 설악산 및 영암 월출산과 더불어 남한의 3대 암산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주방천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대전사에 이르러 주왕산의 진면목이 펼쳐지기 시작하며. 절에서 오른쪽으로 계류를 끼고 올라가면 우람하게 치솟은 기암을 필두로 암벽과 기암괴봉이 치솟아 마치 바위병풍을 두른 듯하다고 하여 석병산(石屛山)이라고 불렸다.
그러다가 주왕산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다음과 같은 전설에 의해서다.
중국 당나라 덕종 15년(799년, 신라 소성왕 1년), 후주천왕(後周天王)을 자칭하고 난을 일으켰던 주도(周鍍)가 당나라 군사에게 패하여 쫓겨 신라의 석병산으로 숨어든다. 석병산의 천연암굴에 숨어 있던 주도는 암굴 입구의 벼랑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에 세수를 하러 나왔다가 당나라 마(馬)장군의 화살에 맞아 죽는다. 이에 따라 주도가 숨었던 암굴을 주왕굴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또한 그 후 나옹화상(1320∼1376)이 석병산을 주왕산으로 고쳐 불러야 이 고장에 복이 온다고 하여 산이름을 바꾸었다는 전설이있다.
* 대전사로 가는 길가에 늘어진 상가지역.
<주왕산 대전사> :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다. 672년(신라 문무왕 12)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 919년(고려 태조 12) 눌옹(訥翁)이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절이 있는 산과 절의 이름은 주왕의 설화에서 유래한다. 《주왕내기(周王內記)》에 따르면, 중국 당나라의 주도(周鍍)라는 사람이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에 쳐들어갔다가 크게 패하고 신라로 건너와 주왕산에 숨었다. 이에 당나라에서 신라에 주왕을 없애달라고 부탁하자 마일성 장군 오형제를 보내 주왕의 무리를 죽였다고 한다. 그 뒤부터 주왕이 숨었던 산을 주왕산이라 하고, 절은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大典道君)의 이름을 따서 대전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절 이름은 나옹화상 혜근(惠勤)이 붙였다고 한다.
신라의 주원왕(周元王)이 수도했던 산이라서 주왕산이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다. 주원왕은 태종무열왕의 8대손인 김주원(金周元)을 말하는데, 김주원이 김경신(뒤의 원성왕)에 밀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자 이곳에서 수도를 하다가 명주(지금의 강릉)로 가서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창건 이후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주방사(周房寺)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 유정(惟政)이 승군을 훈련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 중기에 불에 탄 것을 다시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부속 암자로는 백련암(白蓮庵)과 주왕암(周王庵)이 있다. 이 중 백련암은 주왕의 딸 이름에서 유래하며, 옛날에는 이 암자에 큰 종이 걸려 있어 아침 저녁으로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퍼졌다고 하나 지금은 걸려 있지 않다. 주왕암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주방사로 추정되며, 나한전과 가학루·산령각 등이 남아 있다.
대전사 건물로는 보광전(普光殿)과 명부전·산령각·요사채 등이 있고, 유물로는 보광전 앞 삼층석탑 2기와 사적비·부도 등이 남아 있다. 이 중 보광전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2호로 지정된 정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부에 임진왜란 당시 이여송(李如松)이 유정에게 보냈다는 친필 서신을 목판으로 음각한 것이 보관되어 있다. 보광전 앞의 석탑은 근처에 흩어져 있던 석탑재를 짜맞춘 것이다.
절 오른쪽 밭에는 우물을 메운 자리가 남아 있는데, 이 우물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본래 이 절에서는 부처에게 올리는 물을 매일 냇가까지 가서 길어오곤 하였다. 이를 귀찮게 여긴 승려들이 조선 중기에 앞뜰에 우물을 파고 그 물을 길어서 청수(淸水)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곧 불이 나서 전각이 불에 타고 말았다. 뒷날 한 도사가 와서 불이 난 이유를 설명하기를, 이 절의 지세는 배가 바다에 떠서 다니는 부선형(浮船形)인데 우물을 판 것은 마치 배 바닥에 구멍을 낸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다시 우물을 메웠다 한다. 이밖에 노루가 우물에 빠져 죽은 뒤 메웠다는 설도 있고, 이 물을 마신 승려들의 힘이 넘쳐 난폭해지는 바람에 인근 주민들의 원성이 많아지자 메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절이 들어선 산은 1976년 3월 26일 주왕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 보광전과 기암.
* 보광전.
<청송 대전사 보광전> : 경상북도 청송군 부동면(府東面)에 있는 조선시대의 불전. 1985년 10월 15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02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7월 28일 보물 제1570호로 변경되었다. 대전사는 청송 주왕산에 있는 사찰로, 672년(신라 문무왕 12)에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 919년(고려 태조 12) 눌옹(訥翁)이 중창할 때, 이 산에서 숨어 살았다는 중국 당나라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大典道君)의 이름을 따서 대전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대전사의 본당인 보광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린 것을 1672년(조선 현종 13)에 다시 지은 것이다. 화강석 기단 위에 화강석 주춧돌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운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공포는 내외 모두 2출목이며, 전면은 앙설형이고 뒷면은 교두형으로 되어 있다.
내부에는 석가모니삼존불을 봉안하고 있다. 불단 내부에 높은 기둥 2개를 얹고 그 위에 우물천장을 올렸으며, 불단 상부의 닫집은 없다.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천장은 우물천장과 빗천장이다. 중창 당시의 것으로 짐작되는 내부의 단청은 회화성이 돋보이는 빼어난 작품으로, 조선중기 불교미술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건축연대가 명확한 다포계의 목조건물로, 조선 중기 이후의 목조건축 양식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왼쪽에 요사(寮舍), 오른쪽에 망부전, 앞쪽에 파괴된 부재를 모아 쌓은 삼층석탑이 있다.
* 대전사 돌탑.
<주왕산의 기암> : 주왕산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고개를 들어 보이는 것이 바로 이 기암으로 산에 들어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위엄을 갖추고 있다. 주왕이 신라 마장군과 일전을 벌일때 이바위에 이엉을 두르고 쌀 뜨물을 흘러 보내 적을 현옥시켰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 웅장한 자태는 주왕산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다.
* 대전사를 지나 주앙산 계곡으로 들어가는 입구 풍경.
2010. 호젓한오솔길
'♥ 오솔길 산행방 ♥ > 문화,고적답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학산 법광사 (0) | 2010.12.09 |
---|---|
주왕산 주산지 (0) | 2010.12.04 |
문경 대승사 윤필암 [閏筆庵] (0) | 2010.12.03 |
문경 사불산 대승사 (0) | 2010.12.03 |
해인사 성철대종사부도탑 (0) | 2010.1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