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 <318> 경주 도덕산 |
올곧은 산세, 고즈넉한 문화 유적… 올려다보니 시간 멈춘 듯 |
전대식 기자 |
"평생 경전 연구에 뜻 둠은/ 구차하게 이름 내려 함이 아닐세/ 도를 얻어 세상에 나가서는 충의에 의지했고/ 운이 다해 산에 와서는 성령을 길렀네/ 어찌 삶이 굴곡졌다 불쾌해 하리오."
이 글은 조선 중종 때 유학자이며 정치가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의 '산당에 병이 일어(山堂病起)'라는 시다. 회재는 27세 때 한참 선배인 50세의 망기당 조한보와 태극 논쟁을 벌였다. 조선 유학사에 기록된 최초의 이기논쟁이다. 유학의 이론적 기틀을 만든 회재지만 두 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역사의 격랑에 휘말렸다. 무오사화(1498년)가 일어나자 회재는 외가인 경주 양동리와 가까운 안강읍 옥산리로 귀향했다.
진득한 흙길, 넓은 들 품은 산
조선 유학자 이언적이 명명
날머리엔 정혜사지 13층 석탑
조선 명필 가득한 옥산서원도
그가 '운이 다해 성령을 길렀던 산'이 경북 경주시 안강읍과 영천시 고경면, 임고면을 경계로 하는 자옥산(紫玉山·570m)과 도덕산(道德山·708m)이다. 산세는 회재의 품성처럼 말끔 담백하다. 이름난 암봉 하나 없는 오롯한 육산이다. 질박한 산이지만 산주름은 낙동정맥과 어엿이 이어지는 뼈대 있는 산이다.
한때 '옥산 환종주'가 산꾼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자옥산~도덕산~봉좌산(鳳座山·600m)~어래산(魚來山·572m)을 잇는 10시간짜리 코스다. 부산·울산·경남에서 가까운 데다 경북 영천·포항 땅과 동해, 옛 서라벌의 너른 들판을 조망할 수 있어 고산준령에서 만나는 조망미와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연일 예측을 불허하던 궂은 날씨가 잠잠해질 태세다. 아직 가을이라고 말하기엔 민망하지만, 산 품으로 들어가면 제법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도덕산은 초가을을 준비하는 '몸 풀기' 산행지'로 적격이다. 날머리 부근에 있는 정혜사지 13층 석탑(국보 제40호)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독락당(보물 제413호), 옥산서원(사적 제154호)은 땅 위의 박물관이다. 아이의 손을 잡고 한 번쯤 들를 만하다.
코스는 자옥산을 거쳐 자옥산~도덕산 안부를 지난다. 도덕산에서 낙동정맥 합류점을 지나 459봉을 거쳐 갈림길에서 하산길을 연다. 기점~자옥산 정상, 자옥산 안부~도덕산 정상 구간이 땀깨나 빼는 가풀막이다. 도덕산 동쪽 능선을 타고 내려오는 하산길은 오르내리막이 번갈아 나오는데 그다지 힘겹지 않지만, 조금 성가신 편이다. 쉬고 먹는 시간을 포함해 5시간 정도 걸린다. 산행 거리 약 11.2㎞. 진득한 흙길의 연속이라 제대로 걷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
산행 기점은 독락당에서 남쪽으로 380여m 떨어진 산장식당이다. 식당 우측으로 난 오솔길로 1분쯤 가면 너른 공터가 있다. 공터 오른쪽에 자옥산 방향 이정표가 있다. 키 낮은 솔들이 길가에 빽빽하게 들어섰다. 등산로 바닥은 퇴적암이 훤히 드러나 마치 돌계단을 밟고 오르는 것처럼 신기하다. 산은 조금씩 키를 높인다. 산행 초급자라면 길이 사나울 법하겠다. 앞을 보고 뒤돌아봐도 조망은 인색하다. 이름 모를 산새가 '꽉꽉' 대며 산꾼을 놀라게 한다. 쉼터로 삼을 만한 데가 중간마다 있다.
산장식당에서 출발한 지 40여 분 만에 자옥산 턱밑까지 올랐다. 전망이 썩 좋을 법한데, 아침부터 낀 안개가 기어이 사달을 내고 만다. 안강읍과 안강평야가 보일락 말락 하며 애를 태운다. 안개가 사라지길 속으로 빌지만 희망사항일 뿐이다. 결국 조망을 포기하고 자옥산에 올랐다. 옥산산수회가 쌓은 돌탑과 표석이 정상에 있다. 느티나무, 상수리나무, 갈참나무가 주변 조망을 가렸다. 길은 세 갈래다. 남동쪽으로 산행팀이 오른 등산로, 남서쪽은 안강읍 하곡리, 도덕산은 북쪽이다.
북쪽으로 간다. 길은 툭툭 표고를 떨어트리며 아래로 내려선다. 검은빛 흙길이 제법 미끄럽다. 자옥산 정상에서 안부까지는 15분 정도. 안부 좌우로 하산로가 있다. 왼쪽은 고경면 오룡리, 오른쪽은 정혜사지로 연결된다.
안부를 지나면서 두 번째 된비알과 씨름해야 한다. 첫 번째 된비알보다 조금 수월하다. 경사는 가파르지만 길바닥은 순한 편이다. 가는 여름을 아쉬워하는지 매미들이 떼 지어 합창이다. 그 바람에 호젓한 산길이 매미 소리로 어지럽다.
안부에서 25분 정도면 전망대에 닿는다. 자옥산 부근에 있던 안개가 산행팀을 따라왔는지 아까보다 더 심하게 깔렸다. 능선만 어렴풋이 보일 뿐 옥산서원이 있는 마을은 안개에 묻혔다. 날이 좋으면 동해와 포항 땅이 보일 텐데. 애꿎은 안개를 자꾸만 나무란다.
전망대에서 5분 정도 오르면 도덕산 정상이다. 돌출된 암봉이 나무에 가려 있다. 국토지리정보원 2만 5천 분의 1 지도는 정상 높이를 708m로 표시했다. 하지만 정상 표석엔 702m로 새겼다. 산행팀은 국토지리정보원의 높이를 따랐다. 정상엔 표석이 두 개가 있다. 그 중 하나에 도덕산의 유래가 적혀 있다. 신라 선덕왕(780년) 때 당나라의 첨의사인 백우경이 참소돼 자옥산에 숨어 살면서 지금의 정혜사지에 영월당과 만세암을 세웠다. 선덕왕이 이곳을 방문한 뒤로 이 산을 두득산(斗德山)이라고 불렀다. 이후 회재가 1533년에 옥산리에 오면서 이 산을 도덕산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정상 암봉을 약간 우회하면 전망 좋은 곳이 있다. 발밑으로 옥산리가 보이는 곳이다. 여전히 안개와 구름에 가려 시계는 '제로'다. 희미한 마을을 대하니 애틋한 마음뿐이다. 사화로 벼슬에서 물러나 도덕산에 올랐던 회재도 한양 땅을 바라보며 애틋했을까?
한참을 기다렸지만 결국 옥산리 전망을 사진에 담는 데 실패했다. 하산길에서 도덕산 전경을 바라보기로 하고 갈 길을 재촉했다.
송전탑을 지나 640여m 내려가다 잘록한 지점에 반석(너럭바위)이 나온다. 70~80명이 앉아도 될 정도로 넓다.
반석에서 2분 정도 직진하면 낙동정맥 합류지점이다. 정맥은 여기서 삼성산(589m), 단석산(827m)을 밟고 영남알프스의 고헌산(1034m)까지 남하한다.
여기서 582봉을 넘어 천장산 삼거리를 지나 임도까지 30분 남짓 걸린다. 임도를 조금 걷다가 산악대피소 정자 왼쪽으로 난 등산로로 다시 붙는다. 435봉, 459봉을 지나 10분 정도 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눈에 띄는 지형지물이 없어서 산행 안내리본을 잘 살펴야 한다.
갈림길에서 오르내리막이 반복된다. 길이 지루하다 싶을 무렵 송전탑이 나온다. 송전탑에서 도덕산을 바라보면 산자락보다 어지러운 배전선이 눈에 먼저 걸린다. 한때 주민들이 세계문화유산이 있는 마을 주변에 '흉물이 지나간다'며 한국전력 측과 다투기도 했다. 송전탑에서 20분 정도 능선을 밟으면 마지막 봉우리인 300봉을 만난다.
능선을 따라 안장된 여강 이씨들의 묘 옆길을 따라가면 옥산지 앞 임도로 떨어진다. 잠시 뒤 회재의 아들인 잠계 이전인(李全仁·1516~1568)을 봉향하는 장산서원이 나온다. 잠계는 회재가 평안도 강계에 유배돼 운명할 때까지 7년 동안 곁을 지켰다.
장산서원에서 10분쯤 더 가면 오른쪽에 정혜사지 13층 석탑이 보인다. 흙으로 쌓은 기단에 높이 5.9m의 13층 몸돌을 올렸다. 통일신라시대 석탑 중에서 가장 독특하다고 평가된다. 정혜사지에서 독락당까지는 5분 거리. 회재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회재가 공부하고 놀았다는 '계정'은 공사 중이다.
독락당 주차장에서 산행을 마쳤다. 여기서 자동차로 5분쯤 서원마을 방향으로 가면 회재를 기리는 옥산서원이 있다. 석봉 한호, 추사 김정희 등 조선 명필의 글이 수두룩하다. 문화해설사가 있어 안내를 받아도 된다. 산행문의 : 라이프레저부 051-461-4164. 전준배 산행대장 010-8803-8848.
글·사진=전대식 기자 pro@busan.com
그래픽=노인호 기자 nog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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