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부 없이 잘 먹고 잘 쓰는 법
“내가 벌어다주는 돈은 다 어디 갔어?”라고 남편이 묻는다. 이 말만큼 울화가 치미는 말이 없다. 당신이 지금 입고 있는 옷, 오늘 아침에 먹은 사과랑 우유, 애들 준비물, 공과금, 휴대폰요금… 일일이 열거하기도 목구멍 따갑다. 그보다 더 뒷목 당기는 일은, 솔직히 말하면 생활비가 매달 어디로 사라지는지 정말 모르겠다는 거다. 풍족하게 써본 적도 없는데 말이다.
굿바이 가계부
“왜 항상 돈이 부족할까요? 어떻게 하면 돈이 부족하다는 느낌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생활경제상담센터 소속 재무상담가 박미정 팀장이 상담때마다 사람들에게 듣는 질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버는 돈에 비해 나가야 하는 돈이 많아 늘 돈이 모자란다고 한다. 지출 항목별로 점검하면 버는 돈 이상을 쓰고 있다. 한 달에 정확히 얼마를 지출하고 사는지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대부분의 가정에 적자가 발생되는 시점은 대출금이 생기는 시점과 겹친다. 매달 ‘대출이자’라는 고정 지출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매달 얼마를 쓰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각 가정의 재무 상황에 맞게 지출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이른바 ‘소비예산’이다.
결산 대신 예산, 날짜순 아닌 항목별로
한 달 살림비용을 알려면 먼저 고정적인 지출비용을 파악해야 한다. 아파트 대출금에 붙는 이자, 시댁 혹은 친정에 매달 보내는 용돈 등이 있다면 이는 쥐어보지도 못하고 나가는 돈이다. 예를 들어 남편의 월급이 4백만 원이라도, 양가에 용돈 부치고 대출이자 갚고 남는 돈이 225만 원이라면 이 집 생활비는 400만 원이 아니라 225만 원이다. 돈의 누수를 막으려면 이 테두리 안에서 지출 규모를 정하는 게 먼저다. 가계부를 쓰는 대신 예산을 먼저 세우길 권한다. 수입과 지출의 규모를 알 수 있고 적자가 나지 않도록 사전 대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가계부는 지출에 대한 기록이자 돈을 다 쓴 후 적는 결과다. ‘많이 썼다’, ‘또 많이 썼다’는 식의 고해성사는 반성이지 개선이 아니다. 개선을 위해서는 ‘우리 가정에 꼭 필요한 지출은 무엇인가’를 정해 우선순위에 따라 예산을 배분하고, 나머지는 줄여야 한다. 먹는 것보다 문화 향유를 중요시하는 가정이라면 공연 관람, 도서 구입 등 문화비 지출 항목을 정하고 나머지 항목을 줄인다. 외식이나 교육이 중요할 때도 마찬가지다. 교과서 같은 이야기지만 이를 실제로 실천하는 집은 생각보다 적다. 기본 식비도 지출하고 충동적으로 외식비도 지출하는 등 중복 지출을 하면 소비의 기억이 죄책감으로 남지만, 외식 예산을 정해두고 그 안에서 기분을 내면 한 달이 깔끔하다. 소비 내역을 적을 때는 시간순이 아니라 항목별로 적는다. 외식을 했으면 식비 란에, 영화를 봤으면 문화비 란에 적는다. 초기 예산의 범주 안에서 소비할 수 있는 비결이다.
카드 긁기 전에 현금인출기에 들러라
또 하나, 신용카드보다 체크카드를 쓴다. 신용카드의 한도는 마치 통장 잔고 같은 착시현상을 만든다. 한도가 3백만 원이라고 해서 내 잔고가 3백만 원인 건 아니다. 빚을 내서 쓰고 갚는 방식의 신용카드보다는 내가 가진 잔고 안에서 지출하고 다음 달로 이월시키지 않는 체크카드형 지출습관이 건강하다. 계산할 때 되도록 현금을 쓰는 것도 좋다. 박미정 팀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큰 고민은 돈을 쓰고 후회하는 것”이라고 한다. 돈을 썼으면 행복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만족감보다는 후회가 큰 경우가 많아서다. 그런데 현금으로 결제하는 습관을 들이면 소비습관도 달라진다. 예를 들어 30만 원짜리 원피스를 봤을 때 카드로 긁기는 쉽다. 3개월부터 6개월까지 가능한 만큼 할부로 결제하면 당장 나가는 돈도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를 현금으로 결제하면 다르다. 정말 이만한 가치가 있는지, 꼭 필요한지 다시 한 번 점검하게 된다. 돈을 쓰고 난 후 후회가 덜 남는 결제방식은 물론 후자다.
경제상담소
Q 시댁에서 살림에 대한 간섭이 너무 심해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혹시 결혼할 때 시댁에서 집을 장만해주지 않았나요? 충분히 여유 있는 집이 아니라면 부모가 자식이 결혼할 때 집을 사줬다는 건 노후를 의지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노후자금으로 집을 샀을 테니 말입니다. 결혼은 했지만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하지 못한 경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감정소모를 줄이려면 결혼 전 이 부분에 대해 충분히 의견 조율을 해야 합니다.
Q 실질적인 수익, 그러니까 연봉이 너무 적습니다. 자꾸 다른 집과 비교하게 돼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면 급여를 적게 받을 수밖에 없어요. 돈을 많이 준다는 건 그만큼 포기해야 할 것이 많다는 걸 의미합니다. 보통 대기업 사원의 경우 보너스나 연봉이 높은데, 주는 만큼 그 사람을 통해 수익을 내려고 합니다. 그러려면 일단은 독립적인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하고, 거대 조직의 부속품이 될 각오를 해야 합니다. 냉정히 말해 자의식을 버리고 조직의 생리에 순응할 것인지, 자신이 버는 만큼 생활을 거기에 맞출 것인지를 선택하는 게 좋습니다.
Q 평균수명 100세 시대라는데, 흔히 하는 말처럼 10억 정도는 있어야 노후가 보장될까요?
스스로를 돈벌이의 원천으로 만드는 게 노후보장의 비결입니다. 나이가 들면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뭔가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해집니다. 나 아닌 돈이나 자본이 나를 지켜주는 게 아닙니다. 상담을 진행해보면 돈이 많아서 불행한 경우가 더 많아요. 10억이 있어야 노후가 안전하다는 건 사실과 다릅니다.
경제보건소
경제 기사를 읽다 보면 조사와 종결어미 말고는 온통 외계어처럼 보이고, 은행이나 증권사의 재무상담사 앞에 서면 왠지 모르게 위축된다. 가계에 대한 재무상담을 받고 싶지만 속으로 끙끙 앓거나, 들리는 풍문에 의지하게 된다. 이런 평범한 우리를 위한 경제보건소가 문을 열었다. 목적은 일반 가정이 건전한 재무관리를 통해 건강한 생계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 경제보건소는 두 번의 상담을 통해 재무건전성을 진단해 문제점을 짚어주고, 앞으로의 재무관리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
상담시간 매주 월요일 오전 10시, 오후 7시 30분
위치 서울 마포구 민중의 집
문의 02-333-7701
/ 여성조선(http://woman.chosun.com/)
취재 유슬기 기자 | 도움말 박미정(생활경제상담센터 재무상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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