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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봄·여름 패션은 현란한 실용주의

호젓한오솔길 2012. 10. 12. 08:26

 

2013 봄·여름 패션은 현란한 실용주의

"패션 거장들도 이젠 꽉 닫힌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려면 디자인이 근사하면서도
편한 옷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다"
내년 봄, 겉과 속 다른 '앙큼女'가 온다
단아한 재단선에 화려한 컬러… 거리 패션 입은 고급 기성복
파리·밀라노 패션위크 2013 S/S 미리보기

 

 

파리·밀라노 패션위크 ①섬세하게 완성한 고급 기성복을 집시풍으로 풀어낸 돌체앤가바나. ②폭죽처럼 튀어오르는 색의 향연을 보여준 모스키노. ③대담한 색채 배치를 보여준 펜디. ④화려한 의상을 거리 패션처럼 경쾌하게 보여준 디스퀘어드. ⑤마치 구름을 쓴 것처럼 보이는 존 갈리아노 모자. ⑥가볍게 손에 끼울 수 있도록 만든 겐조 가방. / AP·로이터

 

현실에선 가을 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있건만, 패션쇼 무대에서만큼은 벌써 봄·여름이 한창이다. 지난달 중순부터 이달 초까지 열렸던 '2013년 봄·여름 파리·밀라노 패션위크'. 오래전부터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패션위크가 실용주의의 상징이었던 것과 달리, 파리밀라노 패션위크는 낭만주의자가 빚어낸 무대처럼 여겨져 왔다. 극적(劇的)인 의상, 눈을 의심하게 하는 현란한 무대. 현실에선 소화할 수 없는, 그야말로 '패션을 위한 패션'이 각축을 벌이는 현장처럼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불황 속에 열린 올해 파리·밀라노 패션위크는 예년과는 확실히 달라 보였다. 고급 맞춤복(오트 쿠튀르·Haute Couture)과 길거리 패션, 남성성과 여성성, 실용성과 화려함을 한꺼번에 녹여낸 패션이 대세로 떠올랐다. 이른바 '듀얼리티(Duality·이중성이라는 뜻)'가 대세가 됐다. 패션컨설팅 회사 '크리에이티브 팩토리' 안수경 이사는 "이번 파리·밀라노 컬렉션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어떤 낭만주의자의 실용적 선택'이 될 것 같다"면서 "패션 거장들도 이젠 꽉 닫힌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려면 디자인이 근사하면서도 편한 옷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다"고 했다.

실제로 샤넬·프라다·펜디·로베르토 카발리·드리스 반 노튼·페라가모·디스퀘어드·지방시·랑방·루이비통 등의 브랜드가 내놓은 내년 봄·여름 옷엔 그 어느 때보다 창의적 아이디어가 넘쳐난다. 팝아트, 1960년대와 1980년대 복고풍, 일본·중국 의상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오리엔탈리즘과 퓨처리즘(미래에 대한 상상을 옷으로 옮긴 것)까지…. 화려하고 현란할 수 있는 모든 요소가 총동원됐으나, 정작 그 옷의 선(線)은 단순하고 정직한 경우가 많다. 입기 편하고 아무렇게나 걸칠 수 있지만, 시선을 끌기엔 충분한 옷. 내년 봄·여름은 바로 그런 옷으로 뒤덮일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이건 어쩌면 옷을 통해 '낙관'을 애써 되찾으려는 몸짓일 수도 있다. 계속되는 경기침체. 탈출구가 아직은 멀어 보이는 현실. 이 속에서 디자이너들은 그렇게 컬렉션 무대에 올린 옷을 통해 "내년엔 더 밝아질 것"이라고 우리를 격려하는 것이다. 패션이 결코 '그들만의 축제'로 그치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색채와 패턴은 화려하게, 선은 간결하게. 내년 봄·여름 파리·밀라노 패션위크 무대에 오른 의상들의 특징이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마르니, 돌체앤가바나, 드리스 반 노튼, 루이비통, 엘리사브 컬렉션. / AP·로이터·연합뉴스

내년 봄·여름 파리·밀라노 컬렉션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화려한 색채와 패턴. 그럼에도 지극히 단순하고 정제된 선(線)과 재단이다. 팝아트부터 바로크, 고전주의, 복고풍, 미래주의, 오리엔탈리즘까지…. 이름 붙이기에 따라 그 종류는 천차만별이겠지만, 결국은 이 한 단어로 압축될 수 있을 것 같다. '현란한 실용주의'다.

◇색채가 팝콘처럼 터지다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는 내년 봄·여름 시즌 루이비통 쇼를 통해 색채가 통통 튀는 동화책 속 한 페이지를 그대로 구현했다. 거대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모델들은 큼직한 장기판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등장인물처럼 보인다. 노랑·연두·하양·베이지·갈색·검정…. 격자무늬로 일관되는 옷은 그러나 정직한 1960년대풍 실루엣으로 완성됐다. 머리엔 작은 리본, 손엔 작은 핸드백. "색채가 팝콘처럼 터지는 튀는 옷을 단아하고 실용적인 차림새로 포장한 영리한 컬렉션"이라는 게 스타일닷컴·보그닷컴 등의 평이다.

이탈리아 브랜드 마르니와 펜디 역시 대담한 색깔 배치로 박수를 받았다. 마르니는 마치 물감통에 담갔다 꺼낸 듯 강렬한 색채로 런웨이를 장식했다. 빨강과 파랑, 파랑과 검정, 분홍과 갈색, 진초록과 분홍 등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색채를 녹이고 덧칠하고 겹쳐 만든 패턴은 관객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펜디는 대담한 칼라 블로킹(서로 다른 색채가 경쟁하듯 마주 보고 있는 패턴)을 마치 종이접기하듯 보여줘서 이채로운 매력을 선사했다. 패션 칼럼니스트 팀 블랭스(Blanks)는 이를 두고 "일종의 빅뱅"이라고 표현했다.

질 샌더, 디올, 랑방, 우리나라 디자이너 정구호의 헥사바이구호 등도 대담한 색채에 구조적인 선을 적용한 드레스와 정장을 선보였다. 로베르토 카발리, 이세이 미야케 등은 다채로운 색채를 한데 휘저어 만든 듯한 옷으로 관객의 갈채를 받았다.

◇고급 맞춤복과 길거리 패션의 만남

눈에 띄는 또 다른 특징은 지극히 섬세하게 손으로 작업했을 법한 고급 맞춤복(오트 쿠튀르·Haute Coutre)을 마치 거리 패션처럼 풀어낸 디자이너가 많았다는 것이다. 디스퀘어드는 손으로 촘촘히 보석과 수를 박아 만든 의상을 1990년대 길거리 풍으로 풀어냈다. 모델들은 화려한 보석을 아무렇게나 면 티셔츠 위에 감고 런웨이를 횡보한다. 돌체앤가바나는 섬세하게 세공하듯 프린트를 찍어낸 고급 의상을 모델에게 입히면서도 길거리 패션다운 재기 발랄한 스타일링을 잊지 않아 박수를 받았다. 우아한 스타일의 대명사로 꼽히는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이번 시즌엔 로커 스타일의 거친 느낌을 여성스러움에 녹여내 찬사를 받았고, 샤넬은 백의 손잡이를 거대한 훌라후프처럼 디자인해 유머감각을 과시했다. 왕실 의상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패턴의 옷을 느슨한 집시풍으로 풀어내 이중적 매력을 보여준 비비안웨스트우드도 패션위크 기간 내내 화제였다.

◇복고풍과 퓨처리즘, 그리고 오리엔탈리즘

1960년대·1980년대 스타일은 패션업계에선 여전히 화두인 모양이다. 큼직한 안경, 배꼽까지 가리는 얌전한 투피스 수영복, 둥근 어깨, 대담한 색채. 디자이너들은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새로운 스케치에 현명하게 녹여내는 '줄타기'를 시도했다. 로샤스 등이 대표적이다. 복고풍의 반대편엔 퓨처리즘이 있다. 비닐, 몸이 슬쩍 들여다보이는 망사, 반짝이로 대표되는 퓨처리즘도 여전히 눈에 띄었다. 엠포리오 아르마니 등이 대표적. 프라다 등은 일본풍에 무게를 둔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정제된 화려함을 구현했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금지된 꿈, 불가능한 꿈을 꾸는 사람을 위한 옷"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