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장(崔文章)
현 연일읍 자명1리는 40여 가구의 해주최씨들이 씨족을 이루어 살고 있는 우리 지방 해주최씨의 대표적 집성촌이다. 조선 숙종조에 흥해군 남면 자방리(自芳里)(현 연일읍 자명1리)에 최문장이라는 착한 선비가 살고 있었다. 그는 학문과 덕행이 높아 이름보다 ‘ 최문장 ’ 으로 통하였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나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동(神童)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최문장은 청운의 뜻을 품고 수차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어찌된 이유인지 낙방만 거듭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도 최문장은 낙심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학문이 부족한 것이라 생각하고 학문 연마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던 어느 해 과거가 또 있다는 방문(榜文)이 나붙었다.최문장은 다시 응시키로 하고 등과의 길에 오르기 전 향리의 어느 분에게 인사를 갔는데, 그분은 한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서울에 당도한 즉시 이번 과거의 시관(試官)이 누구인지 알아본 후 시관댁을 방문하여 인사해 두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최문장은 서울에 당도한 즉시 시관이 누구인지 탐문하니 당대의 세도가요 권신(權臣)인 민 판서였다. 최문장은 아침 일찍 그 댁을 방문하였다.
최문장을 접견한 민판서는 최문장의 풍채가 보잘것없고 용모도 추잡하여 양반의 반열에는 도저히 배열시킬 수 없는 인물로 보았다. 이같이 보잘것없이 생긴 자가 감히 과거를 보러 온다는 것이 가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 판서는 이 자로 하여금 다시는 과거를 보겠다는 생각조차 못하도록 할 작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 누구 문하에서 공부하였는가? ”
“ 영남거유 낙제 선생에게 사사하였습니다. ”
“ 그대로부터 3대 이내의 어른들 가운데 벼슬한 일이 있는가? ”
“ 벼슬은 없어도 나라의 은혜를 입고 그 덕으로 향반반열에 시립하는 가문의 자손입니다.”
“ 책은 무엇을 읽었는가? ”
“ 사서삼경은 물론 천문, 지리, 주역, 음양학, 수리학 등 통달하지 않는 학문은 없습니다. ”
그 대답을 듣고 생각하니 촌락의 일개 서생이 유학, 잡학을 막론하고 통하지 않는 학문이 없다고 자랑하는 것이 하도 건방져 보여서 혼내줄 양으로 “ 그럼, 내가 운자를 낼 터이니 징을 한번 두드려 그 소리가 멈추기 전에 칠언절구 한 수를 지어낼 수 있는가? ” 하고 물었다. 이에 최문장은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 민판서는 징을 땅 울리면서 ‘ 아이 아(兒) ’ 를 불렀다. 이에 최문장은 “乎天地問男兒(슬프다, 하늘과 땅 사이의 대장부들아)” 하고 대답하였다. 이어 민판서는 ‘ 누구 수(誰) ’ 라고 운자를 불렀다. 최문장은 “知我平生者有誰(저의 평생 운명을 아는 자 누구이냐) ” 했다. 또 ‘ 자취 적(跡) ’ 하고 부르니 최문장은 “ 薪水三千里浪跡(부평초처럼 삼천리를 떠도는 손인데) ” 하였으며, ‘ 말씀 사(詞)’ 하고 부르니 “ 琴書四十年今詞(40년간 닦은 공부 오늘 이 글에 있구나) ” 했다.민판서는 이어 ‘ 원할 원(願) ’ 을 냈다.이에 “ 靑雲難力致宰願(뜻은 힘으로 이루기 어려우니 민 판서의 마음에 달렸구나)” 하였으며, 이어 나온 ‘슬플 비(悲)’에는 “ 白髮惟公白頭悲(백발에 오직 공도이나 벼슬 한자리 못함이 슬프도다)” 했다. ‘ 앉을 좌(坐)’ 에는 “ 驚패還鄕神起坐(고향에 돌아가는 꿈에 째어나 앉으니)” 하였으며 ‘ 가지 지(枝)’ 에는 “ 三更 鳥聲南枝(삼경에 넘어온 새소리가 남녘가지에 들리는구나)” 라고 읊었다. 이윽고 징소리가 그쳤다.
56자의 시를 다 지은 것이다. 민판서는 옆의 속기사가 받아 적어 주는 시를 받아 들고 검토하니 실로 명문이었다. 민판서는 최문장과 최문장이 쓴 시를 번갈아 바라보며 생각하였다. 징소리가 한번 울릴 때마다 한 수씩 지을 수 있다면 그 포부와 경륜과 학문은 가히 알고도 남음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에게 천거하여 기용하고 싶기는 하였으나 너무나 풍채가 보잘것없고 용모가 추하여 도저히 조정 반열에 세울 수 없으므로 다음 기회에 추천할 것을 약속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고향에 돌아온 최문장은 글공부를 계속하면서 기다리는데, 어느 날 민판서가 사람을 보내 왔다.청나라에서 국서가 왔는데, 그 국서에 잘 해득할 수 없는 구절이 있으므로 해득할 수 있는 사람을 찾던중 임금에게 최문장을 추천했으니 급히 상경하라는 것이었다.드디어 출세의 기회가 찾아왔다고 기뻐한 최문장은 불원천리하고 서울 가는 길에 올랐다.
민 판서의 안내로 대궐에 들어가니 왕이 청나라에서 온 국서를 신하를 시켜 보이며 ‘ 연식고초(鳶食枯草)’ 의 뜻을 해석해 보라고 하였다. 최문장은 도도한 능변으로 그 뜻을 즉석에서 해석하여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기뻐하며 최문장을 가상히 여겨 소원이 무었이냐 물었다.이에 최문장은 경상도 감사를 제수하여 주시면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겠다고 하였다.그러나 임금은 최문장의 용모와 풍채가 하도 보잘것없어 즉각적인 응답을 피한 채 고향에 돌아가 기다리고 있으면 추후에 부르겠다고 말하며 상을 주어 돌려보냈다. 고향에 돌아온 최문장은 서울 소식만 기다리다가 그만 지쳐 죽었는데 임종 때 자식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한다.
“ 사람은 신언서판(身言書判)이 조화를 이루어야 출세할 수 있는 법이다.그러니 자손들의 혼사 문제는 특히 신중을 기해야 한다.”
(자료: 포항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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