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無名)의 설움을 겪던 명태, 어쩌다 국민 먹거리가 됐을까
한식이야기. 명태
때는 조선시대 후기, 함경북도 명천(明川)에 사는 어부는 어제와 다름없이 나무로 만든 허름한 배를 이끌고 고기잡이에 나섰다. 추운 겨울이기 때문일까. 잡히는 물고기가 별로 없어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공물도 바치고 장에도 내다 팔려면 두툼하게 살 오른 대구 몇 마리 건져 올려야 하는데 녹록지 않다. 대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이름 모를 생선만 드문드문 올라온다.
별 수 있으랴, 이름 모를 생선이라도 잡힌 것을 천운이라 생각하며 파도가 사나워지기 전에 뭍으로 돌아왔다. 잡은 생선 정리해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그때, 시찰 나온 도백(道伯 오늘날의 도지사)이 그를 붙잡고 손에 든 생선이 무어냐고 물었다. 얼른 생선 이름을 고해야 마땅하지만 알 길이 없었던 그는 우물쭈물 서있기만 한다. 주변에도 그 생선의 이름을 아는 이가 없다. 이에 도백은 명천(明川)의 태(太)씨 성을 가진 어부가 잡았으니 오늘부터 명태(明太)라 부르자고 한다. 그렇게 무명(無名)의 생선은 명태(明太)가 됐다.
- 명태를 얼린 동태. 사진=쿡쿡TV
명태의 이름에 얽힌 설화다. 옛 문헌을 살펴보면 명태라는 명칭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는 조선 후기부터다. 조선 초기문헌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명태로 추정되는 무태어(無泰魚)라는 명칭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확실히 명태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현재 우리나라 인근 해에서는 온난화의 영향으로 명태의 어획량이 거의 없다시피 한 수준이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명태는 흔하디 흔한 물고기였다. 그럼에도 명태가 조선초기가 아닌 조선후기부터 각종 문헌에 등장하는 이유는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름없는 물고기는 먹으면 안 된다는 미신이 존재했다. 근거 없는 미신 때문에 한반도 지천에서 잡히는 명태는 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이름을 달고 난 후, 명태는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명태 어업이 이루어지며 관혼상제(冠婚喪祭)에서도 빠지지 않는 품목이 됐다. 각종 부산물도 빠짐없이 식용으로 사용했다. 명태의 알은 명란으로 명태의 창자는 창난젓으로 가공해 먹었고, 명태의 간은 물고기기름을 만드는데 사용했다.
무명의 설움 때문이었을까. 명태는 한가지 이름에 만족하지 않고 수많은 이름을 갖게 됐다. 말린 명태는 북어, 얼리면 동태, 얼고 녹기를 반복한 것은 황태, 반 건조하면 코다리, 명태 새끼는 노가리, 생물은 생태 등 가공방법에 따라 수많은 명칭이 부여됐다. 잡는 방법과 장소에 따른 이름도 생겨났다. 그물로 잡으면 망태, 낚시로 잡으면 조태, 강원도 인근 것은 강태, 함경도 연안에서 잡힌 작은 명태는 왜태라는 이름이 붙었다.
- 생태찌개(위)와 황태구이(아래)
우리나라에서 명태는 여전히 인기 있는 생선이다. 국내 어획량이 없다시피 한 생선치고 명태만큼 자주 먹는 생선도 드물 것이다. 잘 말린 북어를 결대로 쭉쭉 찢어 들기름에 달달 볶아 푹 끓여낸 북엇국은 술 먹은 다음날 해장용으로 그만이고, ‘후후’ 불어가며 먹는 얼큰하고 개운한 생태찌개는 계절상관 없이 입맛 돋우는 음식이다. 그 외에도 쫄깃한 황태에 매콤한 양념을 발라 석쇠에 구운 황태구이, 마른안주의 터줏대감 노가리, 콩나물 듬뿍 들어간 얼큰한 코다리찜 등 명태로 만든 음식 중 어느 것 하나 맛 없는 음식이 없다. 저렴한 가격도 매력적이다. 그야말로 국민먹거리다.
/조선닷컴 라이프미디어팀 정재균 PD (jeongsan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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