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영전에서
2006년 3월 3일(병술년 음력 2월 4일) 금요일 오전 11시경. 상옥 고향집에서 어머님과 단 둘이 살고 계시던 아버님이 가족들에게 한마디 말씀도 없이 다시올 수 없는 머나먼 길을 홀로 떠나 가셨습니다.
평소에 늘 자식 걱정에 내가 죽을 때 자식들 고생은 시키지 않고 자는 듯이 죽었으면 하시던 당신의 말씀처럼 가족들의 임종도 받지 않으신 체 아버님은 80세의 생을 마감 하시어, 남은 우리 가족들에게 이렇게 슬픔을 가득 남겨주시고 홀로 바람처럼 그렇게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평생을 자식 걱정만 하시다가 떠나시던 그날도 객지로 나가있는 자식들이 찾아 올 때 집앞 골목길이 좁고 비포장이라 차가 마당으로 쑥 들어오기가 어렵다고 골목길을 시멘트 포장 공사를 해 놓으시고, 너무 흥감하여 아침부터 몇 번이나 골목에 나가서, 우리들이 찾아 올 때를 상상하며 흐뭇해 하셨습니다.
골목길 거푸집 철거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작업을 끝내고 기다리는 동안 어머님이 인부들에게 마루에 술상을 보아 드리고, 아버님과 차를 한잔씩 타드리고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양지 마루에 세 분이 나란히 걸터앉아 차를 드시며, “이 정도면 큰 차가 마당까지 획획 들어올 수 있겠지요” 하면서 즐거운 이야기 나누시다가 갑자기 아버님이 “내가 왜 이렇노” “내가 왜 이렇노” 하시면서 옆으로 쓰러져 그 길로 깨어나지 못하셨다고 한다.
아무리 인생이 바람처럼 왔다가 구름처럼 흩어지면 끝나는 허무한 것이라고는 해도, 마지막 시간 그 얼마간이라도 편찮으시어 가족들을 모이게 하여 몇 마디 유언이라도 남기시고 돌아가셨더라면 그래도 아쉬움이라도 덜했을 텐데, 무엇이 그리도 급하시어 서둘러 홀로 떠나가시었나이까. 이렇게 갑작스러움에 임종도 못하고 아버님을 떠나 보낸 불효자의 마음은 그저 막막한 것이 너무나 애닯기만 합니다.
아버님 당신은 44세때(제 나이 13살 때) 병환으로 죽을 고비를 어렵게 넘기시고 난 후, 지금부터는 덤으로 살아가신다고 늘 말씀하시어, 36년은 덤으로 살다 가신 일생이라 생각 하시지만, 최근 몇 년간은 조금씩 편찮으시기는 하여도, 근래에는 새 봄과 함께 기력을 회복하시어 건강을 찾으시는 모습에 방심을 한 것이 지금은 너무나 때 늦은 후회가 됩니다.
<저의 기억으로 가장 젊은 시절의 아버님 모습입니다. 저는 항상 이 모습만 기억하고 싶습니다.>
가족사
증조부께서는 청송군 홍원동에서 농사를 지으시며 살다가 이웃에 재산보증을 선 것이 잘못되어 가산을 몰수당하시고, 남들 보기가 부끄럽다 하시면서 야밤에 할아버지 3형제 분의 손을 잡고 지금의 상옥으로 이주 하셨다. 밤이면 호랑이 소리가 곁에서 들리는 도장골 산골짜기에서 숯가마를 만들어 숯을 구어 연명 하시며, 어렵게 살다가 돌아가실 때에는 자손 대대로 남에게 보증은 서지 말라는 한 많은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단다.
할아버지는 3형제 분 중에 막네 이시며 상옥리 정골(지금 아버님 산소자리)에서 가정을 이루시어 1남 4녀를 두셨는데, 그 외동아들이 아버님이시다. 할아버지는 지병으로 내가 태어나기 오래 전에 돌아가셨어, 어릴 적 나의 기억 속엔 가는 귀 어두우신 할머니에 대한 기억과 향수로 가득 채워져 있다.
< 우리 가족의 족보... 장손 경욱이 기준>
아버님은 625사변 후 지역 동대산과 향로봉에서 활동하는 빨갱이 토벌대에서 수많은 주검을 목격하시다가, 1954년 육군으로 입대하여 4년간 군대생활을 하셨다. 군에 입대 할 당시 집에는 할머니와 어머님 두 분만 남겨두시고 집안에 양식도, 땔감도 하나 없는 상태에서 입대 준비 할 기간도 없이 징집 영장과 함께 바로 끌려가셨다고 한다.
무학이신 아버님은 어깨너머로 깨우치신 한글과 한문 실력으로 군대에서 선임하사로 착출되어 대체로 어렵지 않게 군대생활을 하셨으나 집에 남아계시던 어머님의 고초가 더욱 크셨다고 한다.
입대 후 집안이 완전히 망하여 뿔뿔이 흩어진 줄 알고 첫 휴가도 포기 하려고 하시다가 혹시나 싶어 재 너머 마을까지 왔어 소식을 들어보니 잘 살고들 있다고 하여, 한 걸음에 재를 넘어 달려왔다고 하셨다. 군대에서 고향의 가족생각을 하시며 늘 부르시던 노래 “남원의 애수”는 정말 사람의 애간장을 녹일 정도로 잘 부르셨다.
늘 고향의 가족 생각에 독한 고량주를 너무 많이 마시다 보니, 4년간 군대 생활 끝에 얻은 것은 술과 스트레스로 생긴 위괘양이라는 지병이었다. 10수년간 몸이 아파 밭고랑을 뒹굴면서 늘 시름하시다가, 내가 초등학교 6학년(13살) 여름 방학 때 오랫동안 앓아오던 위괘양으로 집에서 완전히 스러진 체로 들것에 실려 재종 형님들에게 들려서 버스도 다니지 않는 시골 산길 성법령을 넘어가셨다.
성법리에서 버스 맨 뒷좌석 긴 의자에 눕혀진 체 재종형님의 간호를 받으며 비포장도로를 달려 대구 파티마 병원으로 가던 도중 영천시 금오읍 근처에서 위장 파열로 실신하여 가까운 병원에서 진통제로 응급처치를 하고, 그 병원 의사의 소개로 대구 대학병원으로 찾아가셨다.
위급한 환자라서 통금이 있던 시절 일요일 새벽 4시에 대 수술을 받았다. 위가 파열 된지 너무나 장시간 지난 환자라 거의 가망이 없는 상태에서, 그 당시로는 특이한 방법으로 시험 삼아 대수술을 한 것이, 모진 것이 생명이라 깨어나셨다.
1차 대수술 후 겨우 상처가 아물 즈음에 수술한 곳에 이상이 생겨서 재수술을 해야겠는데 환자가 너무 약하여 마취가 어려워 마취를 하지 않고 생 배를 갈라서 재수술을 감행하여 2개월간의 병원 생활을 한 후에 새 생명을 얻으셨다.
퇴원하던 날 대학병원 원장이 직접 찾아와 참으로 모진 생명이니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퇴원하여 출생신고를 다시 하고 살라고 하였단다.
그렇게 모질게도 잘 참아오시던 아버님 당신이기에 아직 10년은 더 사실 수 있을 것이라고 이 어리석은 불효자는 믿고 또 믿었는데, 이번에는 어찌하여 근력을 두시고도 그리 쉽고 허망하게 무너지셨는지요. 아직도 제 곁에는 아버님이 계시는 것만 같아 돌아가셨다는 현실이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 당시 어머님은 간호하러 병원에 가시고 할머니와 우리 남매들은 완전 고아에 거지 신세로 전락해가고 있었는데, 긴 병원 생활로 인하여 집안은 풍비박산이 날 지경이었다. 나의 기억으로는 그 당시 20만원 남짓한 병원비가 엄청나게 커서 빗 더미에 올라 앉았다. 논은 평당 160원에 팔고, 새끼배인 암소를 청송군 부남면 장터에서 3만7천원에 팔고, 재산을 모두 팔아 모아도 모자라 월 5부 이자로 빗을 내어 치료비를 충당하고, 나중에 병원 빗을 갚는데 몇 년이나 걸렸다.
나는 자연적으로 중학교 시험공부를 포기하고 지게를 지고 어머님과 같이 농사를 지어야 했으며, 아버지는 처음 1년간은 안간힘을 쓰며 지팡이를 집고, 따라 다니시며 농사일을 도우셨다.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도우며 10살 때부터는 지게지고 아버지 따라 산으로 오르내린 관계로 그 당시에 나는 농사일에 매우 능숙해 있었다.
중학교 가려고 시험 공부 하다가 포기하고 농사일을 하면서 남몰래 흘린 눈물이 그 얼마였던 가. 힘들어서도 울었고, 중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워서, 신세가 서러워서 더욱 많이 울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지 2년이 지나서 성법령이 개통되어 상옥에도 처음으로 버스가 들어오고, 이어서 중학교가 설립된다. “기북중학교 상옥분교” 그 곳이 나에게는 구세주가 되었다.
남들보다 2년 늦게 출발한 중학교생활 3년은 나에게 주경야경 바로 그런 생활이었다. 학교란 것이 논들 한복판에 교실 하나, 복도하나 덜렁 지어놓고, 복도는 교무실로 사용하고, 오전에만 공부하고 오후에는 운동장 고르기 등 노역작업, 학교가 끝날 때쯤이면 동생이 늘 데리러 왔다.
집에서는 일을 할 사람이 없어 내가 빨리 학교에서 돌아오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책가방을 내려놓고 바로 리어카를 끌고, 지게를 지고 밭으로 나간다. 그런 생활이 3년간 이어졌다. 방학 때에는 계속 일할 수가 있었어 좋았다. 겨울방학 때에는 1년간 땔 나무를 다 해놓아야 했다. 중학교 들어갈 때에는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어나 지게 보다는 리어카가 중요 운반 수단이 되어 힘도 덜 들고 작업 효율이 대단히 증대되었다.
< 중학교 운동장 배수로 작업, 화단 만들기 작업 >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우리 집도 점점 안정이 되어갔어, 밀린 병원 빗도 5부 이자로 모두 다 갚았고 이제는 가정으로서의 어느 정도 면모가 갖추어져 갔다. 그리하여 나도 실업고등학교에라도 갈 수가 있게 되었고, 특례로 병력 면제의 길을 찾아 빨리 기반을 잡을 수가 있었으며, 동생들은 꿈같은 대학에도 갈수가 있었다.
고교시절에는 여름방학 때는 시골에 왔어 농사를 지었으며, 겨울방학 때는 1년간 땔 나무를 전부 해놓아야 했다. 1학년 여름방학 때 담님 선생님에게 일상 생활을 편지로 쓴 것이 계기가 되어, 고등학교 3년간 내내 등록금을 늦게 내어 남들이 손바닥이나 종아리 맞을 때에도 나는 늘 면제 되었으며 물론 등록금 독촉하지도 않았다. 담임들이 앞장을 서서 방위산업체에 실습을 보내 병력 면제의 길로 안내해 주셨다.
내가 결혼할 당시에는 우리 집은 시골에서 남부럽지 않았습니다. 부모님들이 열심히 하여 동생들은 대학에 다니고, 나도 직장에서 특례로 군대를 면제 받으면서도 직장 상사들의 신임을 받아 서울 본사로 옮겨서 근무하며 어려움 없이 잘 지내게 되었다.
< 1984년 4월 저의 결혼식장에서 긴장된 양 부모님의 모습>
< 1984년 4월 : 아버님, 당숙어른 두분 생전의 모습 >
< 1984년 04월 : 일가 친척들과 마루에서...>
< 결혼 다음해.. 1985년 추석 할아버지 산소 앞에서의 모습 >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몰아친 IMF 한파는 우리 가족들 모두에게 커다란 상처와 시련과 고통을 주면서 지나갔습니다. 모진 희생을 치른 뒤 이제는 우리 모두들 제각기 자리를 잡고 남부러움 없이 열심히들 살아가고 있었다.
< 정골밭에 모셔진 아버님 산소 >
< 산소 전경 : 환경보완 공사중 >
< 산소 옆에서 바라본 먹방골 마을 전경 >
그러던 중 이번 아버님 당신의 갑작스런 별세는 가족 모두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과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가족모두가 한 번 더 똘똘 뭉쳐서 화목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아버님이 저 세상에서 내려다 보시고 항상 평안하게 웃으실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 불초소생의 마지막 임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2006.03.07 불초 소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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