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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방산, 이승복 이야기

호젓한오솔길 2008. 2. 11. 22:39

   

계방산(1577.4m), 이승복 이야기

 

* 위   치 : 강원도 홍천군 내면, 평창군 진부면

* 일   자 : 2008.02.10(일요일)

* 동행자 : 경포산악회 동참(45명)

* 산행코스 : 운두령 - 깔딱고개 - 계방산(1577.4m) - 도동계곡 - 이승복 생가  - 아랫삼거리

* 산행거리 : 약 12 Km

* 산행시간 : 3시간 40분 소요

 

 남한에서 다섯 번째로 높다는 계방산 산행을 오늘 경포산악회를 따라서 가기로 예약하고 새벽에 집을 나선다. 아침 6시 40분에 포항시 북구 두호동사무소 앞에서 출발한 버스는 죽도시장내 산악회 사무실과 포항 공설운동장을 경유하여 계방산으로 향한다.

 

동해안 국도를 따라 계방산으로 가면 거리도 짧고 시간도 단축 되겠지만 아침에 산님들의 차 멀미를 염려하여 먼 거리인 중앙고속도로를 경유한다. 가다가 청통 휴게소에서 산악회에서 준비한 따끈따끈한 시락국과 김치 반찬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먼 길을 가다가 휴게소에서 두번을 더 쉬어가면서 계방산 운두령에 도착하니 정오를 넘어서 12시 30분경이다 각자 행장을 챙기고 단체 사진을 찍은후 12시 40분경에 산행길에 오른다.

 

겨울철 계방산 산행은 눈이 많고 눈꽃이 피어야만 제멋인데 오늘 산행길은 생각 보다 눈이 그리 많지가 않다. 바닦에 쌓인눈을 제외하고는 눈꽃이 없어 뭔가 시작은 허전한  기분이 든다. 산행길 내내 뽀드득 거리는 눈을 밟으며 걸을수는 있었으나 오름길 양지쪽 비알과 계방산 정상에는 눈이 다 녹아버렸으며 때로는 갈바닦이 눈이 녹아서 물이 줄줄 흐른다.

 

남한에서 랭킹 5위에 들어 가는 태산이면서도 바위가 별로 없는 육산이며 뚜렸한 특색을 찾아볼수 없는 계방산이다. 산행도 우리나라에서 자동차로 오를수있는 최고의 고개인 운두령(1089m)에서 출발을 하다 보니 오르기가 수월하다. 다행이 정상에서 하산길인 도동계곡에는 눈이 많이 쌓여서 아름다운 주목과 어우러진 겨울산행의 흥취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마지막 하산길에는 1968년 12월 무장공비 침투로 9살의 어린 나이에 무참히 살해된 이승복 생가에 들러서 분단된 역사 아픈 상처를 잠시 드려다 본다. 살아있었으면 나보다 한살 아래인것 같은데..... 부지런히 걸어서 오후 4시 20분에 아랫삼거리에 도착을 하니 몇몇분은 산행을 하지 않고 하산주를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커다란 찜통에는 오뎅국이 부글부글 끓고있는데 오뎅과 계란 떡국등 온갓 양념을 넣고 우러 낸 오뎅국은 추운 겨울 산행 후 하산주 안주로는 제일이다.

 

즐거운 하산주를 마치고 오후 5시 30분에 계방산을 출발하여 포항으로 돌아 오는길은 강릉을 경유하여 동해안 7번 국도를 따라 내려오는데 강릉에서 삼척 싸이의 고부랑길에서 차가 얼마나 뱅뱅 도는지 아침에 멀미약을 먹고 왔는데도 속이 울렁 거린다. 차 멀미로 진땀을 흘리면서 토하기 지직전에 파김치가 되어 밤 10시 30분에 포항 북부 해수욕장 앞에 내리면서 속이 뒤틀리로록 힘들었던 계방산 산행을 마무리 해봅니다....ㅎㅎ

 

 * 바람도 쉬어 넘는..운두령 고개에서 산행을 시작합니다..

 

 * 계방산 오름길에서 돌아본 운두령고개 풍경..

 

 * 초입의 길은 질퍽질퍽합니다..

 

 * 고개를 올라서니 미끄러워 아이젠을 착용합니다..

 

  * 길 바닦이 반들반들 하네요..

 

 * 다져진 눈위를 걸어갑니다..

 

 * 저 멀리에 계방산 정상이 보이네요..

 

 * 깔딱고개를 올라서니 넓은 헬기장에 도착합니다..

 

 

 

* 계방산 정상과 능선이 보입니다..

 

 

 * 정상이 바로 보이는 1,492봉 헬기장에서 ..

 

 * 오후 2시에 점심을 챙겨 먹습니다..

 

 * 먼저 올라와 서둘러 먹고는.. 앞서 계방산으로 올라갑니다..

 

 * 먼저 출발하여 정상에 오르면서 돌아보니..가물가물 멀리에서 아직도 식사를 하고 있네요..

 

 * 앙상한 가지끝에.. 눈꽃이 없는 아쉬움에..

 

 * 몇 장 담아봅니다..

 

 * 요기에 눈꽃이 피면 얼마나 멋 있을까..

 

 * 드디어 계방산 정상입니다..

 

 * 눈이 다 녹고 없네요..

 

 

 

 * 제2 야영장 쪽으로 갑니다..

 

 * 올라온 길 돌아보고..

 

 * 걸어가는 앞 길에는 눈이 많이 쌓여 있네요..

 

 * 오대산 쪽 능선이 가물거립니다..

 

 * 다저진 눈길 능선을 걸어서..

 

 * 주목 삼거리에 도착하여.. 계곡으로 하산합니다..

 

 * 삼거리 풍경..

 

 * 늠늠한 주목 풍경입니다..

 

 * 계방산의 주목들의 위용..

 

 * 생천년 사천년...

 

 

 

 * 독야청청하네요..

 

 

 * 유구한 세월을 한결같이 살아갑니다..

 

 * 회원님들이 따라오네요..

 

 

 * 검은 복면을 한 산행대장님의 등장입니다..

 

 * 세월의 주름살은...

 

 * 깊어만 가고...

 

 * 세월속에 지친몸.. 아예 누워서 살아갑니다..

 

 * 사진을 찍는동안..

 

 * 일행들이 몇 명 추월해 갑니다..

 

 * 뒤 모습들이 더 정겹습니다..

 

 

 

 * 얼음이 얼어붙은 개울가에서는..

 

 * 잠시 동심이 발동합니다..

 

 * 잎이 새파란..소나무 숲 길을 지나고..

 

 * 쭉쭉 뻗은 낙엽송 길을 지납니다..

 

 

 * 청소년 야영장에 세워진 등산 안내판입니다..

 

 

 * 이승복 생가에 도착했네요..

 

 * 집 뒤에서 바라본 풍경입니다..

 

 * 추모비입니다..

 

 * 추모비 앞쪽입니다..

 

 * 추모비 뒤쪽입니다..

 

이승복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찾아서 올려봅니다..

 

이승복

 

* 이승복 (1959년 12월 9일 ~ 1968년 12월 9일)은 북조선 무장간첩의 희생자이다. 이승복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지금의 용평면) 도사리에서 태어나 1967년 3월 2일에 속사국민학교 계방분교에 입학했다. 1968년 11월 2일 삼척시의 바닷가를 통해서 대한민국으로 무단 침입한 북조선의 무장간첩에 의해서 12월 9일 밤 어머니, 남동생, 여동생과 함께 살해당했고 그의 형과 아버지는 크게 다쳤다.

 

12월 11일 조선일보는 3면에 이 사건을 〈“共産黨(공산당)이 싫어요” 어린 抗拒(항거) 입 찢어〉라는 제목의 기사로 다뤘다. 이 기사는 현장을 목격한 이승복의 형의 증언을 인용하며, 무장공비가 이승복에게 북조선이 좋으냐, 남한이 좋으냐고 묻자 이승복이 “우리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대답하여 공비가 그의 입을 칼로 찢어 죽였다고 보도했다. 12월 13일에 제작된 대한뉴스 제705호 〈남침공비를 무찌른다 - 제3신〉 편에서는 이 사건을 “공산당이 싫다고 해서 어린 젖먹이를 돌로 때리고 입을 찢어죽인 이들의 만행”이라고 보도하면서 일가족의 시신을 공개했다.

 

이후 이 사건이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 실리고, 국민학교마다 이승복의 동상이 세워지는 등 반공정신의 상징처럼 되었다. 교과서에서는 이 내용이 제6차 교육 과정에서부터 빠졌다.

 

 

* 의혹 제기

계간 저널리즘 1992년 가을호에 당시 미디어오늘의 편집국장 김종배는 〈“공산당이 싫어요” 이승복 신화 이렇게 조작됐다〉라는 기사에서, 당시 조선일보의 기사가 허위라고 주장했다. 그는 조선일보 기사에서 이승복의 형의 이름을 잘못 기록했다는 점, 후에 이승복의 형이 조선일보 기자를 만난 적이 없다고 밝힌 점을 지적했고, 이승복 시신의 입이 찢어져 있지 않았다는 주민의 증언을 인용하면서 조선일보의 기사를 “작문”이라고 비판했다.

 

1998년 당시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인 김주언은 서울부산에서 ‘오보 전시회’를 열어 김종배의 기사를 전시했고, 이후 10월에는 미디어오늘과 월간 말을 통해 더 많은 근거를 들어 오보 내지는 작문이라는 주장을 했다.

 

1998년 11월 조선일보는 김주언 김종배 두 명을 명예훼손으로 형사 고소했다. 1999년 7월 서울지방검찰청은 두 명을 불구속 기소했고, 2002년 형사 1심에서 두 명에게 각각 징역 6월과 10월을 선고했다.

 

2004년 10월 28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있었던 항소심에서는 김주언 씨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 김종배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조선일보의 기사는 사실에 기초한 것으로 판단되지만, 거기에 대한 의혹보도 역시 충분한 구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언론의 자유에서 용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2006년 11월 24일 대법원에서 원심을 유지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이승복 사건의 진실


검찰은 이승복 오보조작사건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김종배씨에 대해 “대법원에 상고하겠다”면서 “김씨는 자신의 주장이 허위임을 알게 된 뒤 자신의 주장을 교묘하게 바꿨다”고 말했다. 다음은 검찰의 상고 이유.

 

 


◆찢어진 입에 대한 왜곡·묵살

김씨는 92년 ‘저널리즘’ 가을호에서 ‘언론이 만들어낸 허구, 공산당이 싫어요 이승복 신화 이렇게 조작됐다’는 기사를 작성할 당시, “이승복의 입 주변이 멀쩡했다”는 이웃 주민 강모씨(검찰에서는 “승복군의 시신을 자세히는 보지 못했다”라고 진술)의 인터뷰를 부각시켜 “형(이학관)의 증언에 석연찮은 대목이 많다”면서 조선일보의 이승복 기사를 ‘허구’ ‘조작’ ‘작문’ 기사라고 주장했다.

이후 김씨는 항소심 법정에서 “98년 이 사건의 진실 공방이 벌어져 추가 취재할 때 대한뉴스 사진을 입수했다”고 진술했다. 이 사진에는 승복군의 입 주변에 ‘+’ 모양의 칼 자국 2개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검찰은 김씨가 98년 10~11월 “조선일보 기자 현장에 없었다”는 기사를 작성할 무렵 대한뉴스 사진을 입수한 뒤 핵심 증인들의 증언 내용(입이 찢겨 죽었다)과 정확히 일치하자 엉뚱하게도 ‘조선일보 기자의 현장 부재’ 주장으로 초점을 옮겨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검찰은 “김씨가 명백한 물증을 접하고도 교묘한 말장난으로 또다시 사실을 왜곡하는 악의성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라며 엄벌을 요구했으나, 재판부는 이 대목을 판단하지 않았다.

 



◆다른 신문들 오류 묵살

김씨는 98년 10월 ‘미디어오늘’과 11월 ‘말’지를 통해 “조선일보 기자는 현장에 없었다”라고 허위 주장을 하면서 “조선일보 기사의 8가지 오보”라는 근거를 제시했다.

그러나 김씨의 방식대로 당시의 다른 중앙지 기사를 분석한 결과, A신문은 22곳, B신문은 15곳, C신문은 12곳, D신문은 10곳, E신문은 8곳에서 오류가 발견됐고, 그중에는 기사의 신뢰도를 먹칠하는 치명적인 오류도 많았다.

A신문은 “강순길(이승복의 할머니)씨는 참상을 보고 졸도해 사망했다”고 썼으나, 당시 강씨는 현장에 없었고, 사건 3년 후에 사망했다. D신문은 이승복 가족 5명의 이름이 모두 틀렸다. 사건의 전개 순서조차 틀린 신문도 3개였다.

김씨는 “다른 신문들을 뒤져 보면서 오류가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진술했다. 검찰은 “그러면서도 김씨가 조선일보만 문제삼아 ‘오보, 왜곡, 조작, 곡필, 작문’ 등의 용어를 반복해 사용한 것은 고의적인 비방과 매도일 뿐”이라고 밝혔다.

 




 

◇68년 12월 13일 제작된 대한뉴스 ‘남침공비를 무찌른다-제3신’에 실린 이승복군의 시신 사진. 오른쪽 입술 끝부터 귀밑까지 찢어진 상처가 있고 뺨 중간과 귀 근처에 +자 형태의 상처 2개가 뚜렷하다. 68년 12월 10일 오전 9시쯤 찍힌 이 사진은 현장에 대한 최초 기록이다./대한뉴스 자료사진


 






 

 

 

 

 

 

 

 

 

 



 


 

◇北공비에 살해당한 이승복군 일가족 강원도 평창군‘이승복 기념관’에 전시된 일가족 시신 사진. 북한 무장공비에 의해 살해된 이승복(당시 9세), 남동생 승수(당시 7세), 여동생 승자(당시 4세), 어머니 주대하(당시 33세?사진 위쪽부터)씨 시신이 나란히 놓여 있다.


 


검찰은 “92년 이후 무려 12년 동안 허위주장을 반복했음에도 법원이 고의성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납득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항수기자 hangsu@chosun.com

 

 

 

 

 

 

 

"이승복 '공산당이 싫어요'는 진실"

 

1968년 12월 9일 밤 이승복군 가족 4명이 북한 무장공비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사건은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이승복군의 발언이 발단이 됐으며, 이 사실은 조선일보 기자들의 현장 취재를 통한 특종보도로 세상에 알려졌음이 법원의 형사 항소심 재판에서 재확인됐다.

조선일보의 이승복군 사건 보도는 역사적인 진실이며, ‘이승복 사건 조작설’이 거짓이라는 뜻이다.



 

◇북한 무장공비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이승복군 가족의 기사가 실린 1968년 12월 11일자 본지 사회면. 법원은 28일 이승복군 사건에 대한 조선일보의 최초 보도는 역사적인 진실이며, ‘이승복 사건 조작설’은 명백한 허위라고 재확인했다. /조선일보 DB


 

 


그러나 지난 92년 ‘조작설’이 처음 제기된 이후 우리 사회 일각에 “이승복은 조선일보 또는 군사정권이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이라는 그릇된 인식이 퍼지고, 이승복군 동상이 철거되거나 이승복군의 유족들이 모욕을 당하는 등 엄청난 폐해를 낳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9부(재판장 강형주, 주심판사 곽윤경)는 28일 조선일보 1968년 12월 11일자 ‘공산당이 싫어요. 어린 항거 입 찢어’라는 제목의 기사를 ‘오보전시회’에 포함시켜 “거짓 보도·소설”이라며 허위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기소된 언론개혁시민연대 전 사무총장 김주언(50·현 한국언론재단 연구이사)씨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조선일보의 ‘이승복 보도’에 대해 “허구, 조작, 작문기사”라고 허위 보도한 혐의로 기소된 미디어오늘 전 차장 김종배(38)씨에 대해서는 “허위 내용을 보도한 것은 사실이나 기사 작성 당시에는 허위임을 인식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김종배씨가 92년 이후 최근까지 무려 12년간 허위 내용을 반복 주장한 것에 대해 허위임을 인식하지 못했다며 무죄를 선고한 것은 납득할 수 없다”면서 대법원에 상고하겠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사건 당시 “남한이 좋으냐, 북한이 좋으냐”는 공비의 물음에 이승복군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해 일가족이 살해됐다는 승복군의 형 학관씨의 진술과 당시 이를 전해 들은 이웃주민 최순옥·서옥자·최순녀·유경상씨 등의 일치된 증언, 시신 중 유일하게 입가가 찢어진 이승복군의 시신 사진 등을 종합할 때 이승복군이 공비들에게 공산당이 싫다는 취지의 말을 한 것은 사실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어 “ 조선일보가 보관해온 살해 현장을 찍은 사진 15장의 원판 필름과 사진의 내용 기사를 송고한 대관령 목장(고령지농업시험장)과 전화가 존재하는 점 당시 조선일보 기자들의 구체적인 증언 등을 종합하면 1968년 12월 10일 조선일보 강인원·노형옥 기자가 사건 현장에 직접 가서 취재·보도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따라서 피고인들이 주장해온 ‘허구, 조작, 작문, 오보, 소설, 조선일보 기자들은 현장에 없었다’는 등의 주장은 허위사실의 적시에 해당한다”고 결론지었다.

검찰은 1999년 7월 두 사람을 명예훼손 등 혐의로 기소했고, 서울지법은 2002년 9월 두 사람의 혐의를 모두 유죄로 인정해 김주언씨에게 징역 6월, 김종배씨에게 징역 10월을 각각 선고했다.


/이항수기자 hangsu@chosun.com
/금원섭기자 capedm@chosun.com

 

 

이승복 왜곡12년 유족은 피멍


 

◇29일 전북 무주에서 만난 이승복의 형 이학관씨는 “당시 상황이 가짜라는 주장이 제기된 지난 12년 동안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용수기자 hejsue@chosun.com


 


강원도 강릉시 교2동. 29일 이곳에 있는 고(故) 이승복군의 형 이학관(49)씨 집을 찾기 위해 부인 김인자(46)씨에게 전화하자 “제발 집에는 가지 말라”고 했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아버님(이승복군의 아버지)이 (기자가 왔다는 사실을) 아시면 우리가 3~4일 동안 시달린다”는 얘기였다.

이날 학관(남동발전㈜ 과장)씨는 전북 무주에 출장을 떠나 있었고, 부인은 이웃 3명과 함께 비명에 간 시동생·시누이 3명과 시어머니 위패를 모신 강릉시 등명락가사(燈明洛伽寺)에서 영혼을 달래고 있었다.

1980년 학관씨와 결혼한 김씨는 “(이승복 사건이 사실로 확인된 뒤)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미안함과 무거움이 더 앞선다”고 말했다.

1968년 12월 9일 강원도 평창군 노동리 계방산 중턱 초가집에서 일어난 이승복 일가 참살(慘殺) 사건 당시 가족 7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3명이다.

36곳에 칼을 맞고도 거름더미에서 살아남은 형 학관씨, 이웃집 이사를 돕다 돌아와 공비에게 붙잡혀 다리를 칼에 찔린 뒤 기적적으로 도주한 아버지 이석우(73)씨. 이웃집에 있다가 목숨을 건진 할머니는 80년 세상을 등졌다.


 

 


 

◇29일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노동리에 있는 이승복기념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당시 자료사진 앞에서 기념관 황태병 장학사의 설명에 귀기울이고 있다. / 최순호기자 choish@chosun.com


 


몸 상처는 곧 나았다. 하지만 가슴에 묻은 유족들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 우리 사회가 감싸고 또 감싸주어도 치유될 수 없는 유족들의 상처… 그런 가운데 1992년 돌연 제기된 ‘이승복 사건 작문(作文)’ 주장은 여기에 또다시 비수를 꽂았다.

전북 무주에서 만난 형 학관씨는 사건 직후 남은 가족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했다. “(사건 이듬해인) 69년부터 아버지와 할머니가 이상해지셨어요.

아버지는 동해와 춘천에 있는 정신병원을 전전하셨지요. 36년 동안 10년 이상 병원 신세를 진 것 같아요. 할머니는 생전에 시내에 나가 소리를 지르시고, 봉평시장에서 욕하고 힘도 세지셨고.
모자(母子)가 그러고 다니는 걸 보는 어린 제 심정이 어땠겠어요?

지금도 언론에 우리 가족 이야기가 나온 것을 아버님이 보면 큰일나요. 욕하고 따지고 흥분하시고. 매년 이승복 기념관에서 추모제를 여는데 아버지를 한 번도 모시고 간 일이 없습니다.”

학관씨도 마음의 병을 앓았다.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는 아들 창빈(23)씨는 기자와 만나 이렇게 설명했다. “목욕탕에 같이 가서 등을 밀어주면 등에 칼자국이 있어요.

머리에도 3개 정도 상처가 있고.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상처가 아직 남아있어요. 그거 보면 때를 밀다가도 눈물이 나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2년 정도 직장을 쉬셨어요. 그리고 계속 약도 드시고 병원도 다니셨죠. 요즘은 밤에 조그만 소리가 들려도 제대로 잠을 못 주무세요.”

이승복 사건 후 학관씨는 외가(外家)인 봉평을 전전하다가 강릉상고에 진학했다. 남은 식구가 강릉 현재 집으로 이사한 것은 81년. “국방부 정훈국에선가 와서 ‘어떻게 이렇게 사느냐’며 깜짝 놀랐어요.



 

◇29일 이승복기념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이승복 동상을 바라보고 있다. /최순호기자 choish@chosun.com


 


그 자리에서 국가유공자를 만들어줬지요. ‘이런 분이 강릉에 사는 것 알았냐’며 강릉시청을 혼내니 시유지를 주고 1000만원을 집 지을 돈으로 주더군요.” 이런 사회의 따듯한 도움이 학관씨를 지탱해주는 유일한 힘이었다.

“오보니 작문이니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는 (아버지 상태가) 더하셨죠. 그런 날이면 일찍 집에 와서 잠자리에 드셔도 한잠도 못 주무시는 거예요. 기침소리가 들려도 깨고. 그래서 어머니는 감기가 드시면 아예 딴 방에서 주무셨어요.” 창빈씨 스스로도 많은 고통을 겪었다고 했다.

“고3 때 오전 7시30분쯤 학교에 갈 때 MBC 기자가 집 앞에서 기다리며 학교 가는 길을 따라가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너희 아빠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고…’ 이렇게 말을 거는 거예요. ‘아빠가 뭘 잘못했는데요’ 이렇게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항상 집에서 어른을 공경하라고 배웠거든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매일 저러셔도 화를 한번도 내지 않으셨거든요. 그래서 저도 그냥 아무말도 하지 않고 학교에 갔죠. MBC는 올 때마다 집 앞에 차를 세우고 계속 있고 이상하게 보도가 나가서 제일 싫었어요.

나중에는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이 말을 패러디해서 웃기는 데까지 사용했어요. 그러면 그냥 TV를 꺼버려요. 화도 나고 마음도 상하고….”

학관씨는 “(판결 내용을) 전해듣는 순간 36년 동안 지내온 일들이 영화 필름처럼 머리에서 돌아가더라”고 말했다.

“세상이 야속했습니다. 내 말을 두고 거짓말이니 뭐니 했던 사람들…. 난 산골에서 태어나 자란 열다섯 살 아이였습니다. 아는 것이라곤 내가 살던 산골이 전부였는데….”


/강릉=김봉기기자 knight@chosun.com
무주=이용수기자 hejsue@chosun.com
서울=신은진기자 momof@chosun.com

 

 

[사설] 이승복의 진실, 세상에 다시 알려져야

 

서울중앙지법은 1968년 무장공비들에게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했다가 참혹하게 살해된 이승복군 사건이 역사적 진실임을 인정했다.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이 사건에 대한 조선일보 보도가 ‘조작’이라고 주장한 김주언 전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에서는 법률 해석과 적용의 타당성만 판단하므로 이승복 사건의 진실에 대한 사법부의 최종 판단이 내려진 셈이다.

지난 10여년 간 이승복군과 가족들의 명예는 이승복 사건에 ‘반공 조작극’이라는 색깔을 칠해온 좌파들의 선전선동에 무참하게 짓밟혀왔다.

언론개혁이라는 위장간판을 걸고 정권의 비호를 받아온 좌파세력들은 재판과정에서 당시 현장취재로 진실을 전했던 조선일보 기사가 “기자가 현장에 가지도 않고 쓴 소설”이라며 진실을 덮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해왔다.

법원의 판결로 이들의 거짓과 부도덕과 이념적 정체는 드러났으나 이들이 35년이나 지난 옛일을 거짓말로 재구성해 진실을 뒤엎고 이승복군을 두 번 죽여 쟁취하려던 목적은 사실상 달성됐다. 이번 판결을 받아든 가슴이 떨리면서도 답답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들이 10년 넘게 퍼뜨려온 거짓말은 상당수 국민, 특히 젊은 세대를 세뇌시키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흔드는 데 톡톡히 한몫을 해낸 것이다. 이념 앞엔 진실과 허위도 가리지 않는 그들로서는 ‘할 일은 다 했다’고 할는지 모른다.

실제로 이 나라의 많은 젊은이들이 이승복 사건이 반공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려는 군사정권에 의해 조작됐다고 생각하는 세상이 돼버렸다.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다”는 학생도 적지 않고, 이승복군이 존재하지 않았던 가공인물이라고 믿기도 한다. 이승복군이 “콩사탕이 싫어요”라고 했다가 죽었다는 듣기 참담한 말까지 지어낸 세력들의 꾸준한 공작의 결과다.

좌파세력들은 거둘 수 있는 선전·세뇌 효과는 다 거두고, 이승복의 진실은 잔해처럼 흩어져 땅바닥에 버려진 게 6년 재판의 결과다. 이제 그 어린 나이에 비명에 간 이승복군의 넋은 누가 무엇으로 달래고 거짓이 진실을 몰아세웠던 조작의 역사는 어떻게 되돌려 놓을 것인가.

장본인들은 1심 판결 때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반성과 사과의 한마디 하지 않고 있다. 좌파의 인민재판식 공세 속에서 10년 만에 진실을 되찾은 이승복 사건의 역사는 이 정권이 온 힘으로 매달리고 있는 과거사 뒤집기의 의도와 전개과정을 예고해주는 살아 있는 사례다.

 

 * 이승복 생가 터를 뒤로 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왠지 무겁고 씁쓸하기만 합니다..

 

 * 눈길을 부지런히 걸어서..

 

 * 오후 4시 20분에 아랫삼거리에 도착합니다..

 

 * 하산주를 준비하느라 분산하네요..

 

 

 * 과메기 회에 술상이 마련됩니다..

 

 * 따끔따끈한 오댕 국물은 감칠맛을 더합니다..

 

 

 * 오늘 산행의 즐거움으로 이야기 꽃을 피우며 주고 받은 하산주에 모두들 근아하게 취해 가고 오후 5시 30분에 계방산을 출발하여 강릉시를 경유하여 7번 국도를 따라... 밤 10시 30분에 포항 북부 해수욕장에 도착 하면서 경포산악회 23차 정기 산행을 성공리에 마무리합니다.

 

2008.02.10 호젓한오솔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