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의 향기 청량산
솔길 남현태
산에 가는 날은 늘 잠을 설친다. 아침 07시 30분에 일행을 만나기로 약속을 한 터라 새벽 5시에 눈을 뜨니 다시 잠이 오지 않아 인터넷으로 산행지를 한번 챙겨보고 07시에 집을 나와 시동을 걸고 출발한다. 포항공대 앞 주차장에서 2명을 태우고 죽장, 청송, 진보, 영양을 거쳐 청량산의 뒤쪽 입구로 들어가니 비포장도로에 녹은 눈이 빙판이 되어 승용차 진입이 불가한 상태라 매표소에는 아예 사람이 없다. 4륜 저속으로 조심조심 빙판길을 넘어서 산행 시작 지점인 입석에 도착하니 골짜기 주차장에는 벌써 많은 차가 안동, 봉화 쪽 정문 포장도로를 통해 들어와 있다.
각자 행장을 챙기고 10시 30분에 서둘러 산행을 시작한다. 리본이 주렁주렁 현란하게 달린 입석 산행 들머리를 잠시 올라가다 전망 바위에서 내려다본 골짜기는 안동, 봉화 방향 진입로의 전경이 아름답게 펼쳐지고 울퉁불퉁 한 바위들의 거친 표면에서 유구한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한다.
청량 정사에 이르니 고요한 정사 뒤 아슬아슬 한 모습이 위태롭게만 보이는 커다란 암봉의 웅장함이 하늘을 받치고 수만 년의 아득한 세월을 회상하듯 묵묵히 청량 정사를 지키고 있다. 정사에서 바라보는 전경은 첩첩산중인데 청량사의 우백호 연화봉의 아름다운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금탑 봉에서 바라본 암봉에 둘러싸인 청량사의 아늑한 경내 모습은 부처님의 자비가 가득하고 청량사 북 현무의 암봉들 병풍처럼 빼곡한 모습으로 청량사의 등을 가리니 연화봉의 고요한 침묵이 흐른다.
연적봉과 탁필봉 나란히 능선 위를 걸어가는 듯하고, 김생굴 위의 고드름은 어렵게 매달려 마지막 안간힘을 다하고는 있지만 오는 봄을 어찌 막을 수 있으리오. 그 옛날 여기 바위 아래서 총명 수를 마시며 10년을 수련하여 천하 명필이 되었다고 한다. 폐쇄된 등산로를 따라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가니 경일봉 정상부 음지 길에는 아직 잔설이 소복이 깔려있다. 이제는 정말 금년의 마지막 눈길이 될 것인가 경일봉 정상에는 찾는 이 별로 없으매 호젓하기만 합니다.
겨울 산행의 진미인 나무 사이로 은은한 암봉들의 경관이 흐르고 가야 할 바위능선 자소봉의 모습이 스쳐간다. 청량사 앞산 축융봉엔 아직 눈이 많이 쌓여 있고 청량사 뒤 능선에서 내려다본 연화봉의 모습 우람하기만 하다. 나무 사이로 바라본 자소봉은 파란 소나무 저고리로 얼굴을 가리고 수줍은 듯 살며시 고개를 들고 있다. 자소봉에는 오르는 철계단이 설치되어 있으나 중간까지이고 나머지는 쳐다만 보아야 하는데 바위 봉우리 자소봉 꼭대기에는 우아한 노송이 의젓하게 뿌리 내리고 있다.
피사탑처럼 생긴 탁필봉의 전경 뒤에는 연적봉이 나란히 등을 맞대고 앉아 있는데 탁필봉 정상도 오를 수가 없어 바위 봉우리 아래에 탁필봉 임을 알리는 정상석이 설치되어 있다. 연적봉에서 내려다본 연화봉은 아직 겨드랑이에 잔설을 부둥켜안고 있다. 가다가 뒤돌아본 연적봉도 소나무 가지 사이로 아름답게 얼굴을 비춘다. 오늘의 최고봉인 의상봉의 볼록한 모습이 앞에 보인다.
연적봉을 지나 마지막 의상봉을 앞에 두고 양지쪽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으며 휴식을 취하고 의상봉까지 1시간 30분이라는 이정표를 보고 정상 봉우리가 바로 저기 있는데 왕복 3시간이나 걸린다는 이정표가 잘못되었다고 비웃듯 하며 출발했으나 금방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건널 수 없는 깊은 계곡이 사이에 있는 줄은 그때까지는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의상봉을 바라보며 아직도 앞에 깊은 계곡이 있는 줄도 모르고 이제 다 온 줄만 알고 있는데 발밑에는 깊은 계곡 낭떠러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자란봉이 바로 앞이지만 낭떠러지 계곡이다. 자란봉과 선학봉의 아름다운 모습을 건너다보며 난간 끝에서 계속했어 셔터를 눌러 대지만 내려갔다가 건너갈 일이 가마득하다. 이 일을 어찌할꼬, 여기에 구름다리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모습이 이상하여 확 당겨서 본 의상봉 계곡이 마치 여자의 엉덩이와 거시기 처럼 망측하게도 생겼다.
빙판이 박힌 골짜기를 건너올라 갔다가 다시 건너와 청량사로 가야 하니 가다가 돌아본 빙판길 이따가 다시 올 생각을 하니 참말로 끔찍하다. 건너간 자란봉에서 의상봉으로 가기 위해 다시 내려가는 골짜기 빙판길 미끄러워 장난이 아니다. 고생 끝에 찾아간 오늘의 최고봉 의상봉 정상에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까마귀 떼처럼 흩어져 앉아서 왁자지껄하게 식사를 하고 있다. 밥을 먹는 사람들 틈에서 겨우 배낭으로 가려진 의상봉 정상석을 찾아 배낭을 치우고 어렵게 사진을 찍어본다.
어느 산이나 정상은 모든 등산객이 추억을 남기기 위한 사진 촬영지가 되고 정상석은 그 산의 전속 모델이 되므로 될 수 있으면 식사는 정상을 피했어 하고 어쩔 수 없이 정상에서 식사를 하더라도 정상석은 조금 비켜나서 식사를 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산 사람들의 자그만 배려가 아닐까 싶다.
밥 먹는 등산객이 우글거려 볼품없이 된 정상의 모습에 얼른 내려오다가 그래도 미련이 남아 뒤돌아보고 사진을 찍어본다. 지나온 저쪽이 훨씬 좋다. 그래서 청량사를 가기 위해 다시 내려갔다가 또 건너서 올라가야 한다. 다리에 힘이 빠지니 의상봉에서 내려오는 철계단 길이 위태롭고 청량사로 가기 위해 왔던 길로 되돌아 올라가는 철계단 길이 버겁게 느껴진다. 다시 올라가는 오르막 빙판길에서 돌아보니 일행들은 아직 보이지 않아 벼랑 위에서 기다리며 건너온 풍경들을 카메라에 담아본다.
뒷실고개에서 청량사로 나무계단 길을 따라서 내려가다 골짜기에서 쳐다본 연화봉 모습이 참 아름답다. 잔설이 아직 남은 골짜기 바위에 이끼는 푸른 빛이 짙어지고 상처 위에 꼬이고 감기고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괴목의 모습을 담으면서 웅장한 연화봉의 모습과 청량사의 뒷 모습 맞은편 금탑봉의 전경을 차곡차곡 카메라에 담아본다.
청량사 앞산 축융봉은 눈을 가득 안은 체 아직 겨울잠을 자고 있는데 뒷산의 암봉들은 저마다 그 위용을 자랑하니 청량사 경내에는 향냄새가 그윽하다. 뿌연 운무로 저녁 태양은 동그란 달 모습을 하고 나뭇가지에 걸려 가던 걸음 멈추니 마치 청량사의 달밤처럼 은은하게 느껴진다. 청량사 석탑 앞에서 오늘의 거북이 삼 용사들이 함께 나란히 사진을 찍어본다.
연화봉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청량사의 저녁 공양 짓는 연기는 모락모락 피어오르니 내려다보는 연화봉의 시장한 모습이 자비롭기만 한데 뒷산 암봉들의 우람한 조화가 석양을 드리우니 청량사의 고요한 하루가 서서히 저물어간다. 입석대로 돌아오는 길에 인간의 역사 속에서 상처 가득 입은 노송은 그래도 수줍은 듯 다리를 배배꼬며 하늘을 향해 온몸을 비틀고 있다.
입석에 도착하니 무려 6시간 동안 무수한 암봉들이 연출해내는 자태를 감상하면서 즐기는 산행을 하다 보니 예상보다 1시간 이상 지연되었다. 짐을 챙기고 아침에 넘어온 뒷문 영양 쪽으로 차를 몰았으나 한참을 올라가다 빙판길에서 낭패를 당한다. 아침에는 얼어서 빙판 위로 넘어왔던 길이 지금은 얼음이 녹아서 푸석푸석 한 것이 계속했어 미끄러진다.
위험한 시도에 타이어 타는 고무 냄새가 진동한다. 할 수 없이 차를 돌려 정문 쪽으로 나오니 도립 공원이라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우린 오늘 빙판길을 넘은 덕분에 공짜 산행을 했다. 안동, 길안, 도평을 거쳐 포항공대 주차장에서 일행을 내려주고 13시간의 청량산 산행 일정을 마무리한다.
경북에 있으면서 가깝고도 먼 거리에 위치한 청량산을 한번 간다 간다 하면서 기회가 마땅치 않아 계속 미루어 오던 곳을 오늘 드디어 그 아름다운 암봉들을 구석구석 답사하고 돌아왔다. 다만, 오후에 날씨가 우중충하게 흐려서 찍어온 사진들이 대체로 어둡게 나온 것이 흠이긴 하지만 그간 밀린 숙제를 하나 깔끔하게 해결한 듯 개운한 산행이다.
(2006.02.25 호젓한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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