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산 찍고 억산 눈길 따라
솔길 남현태
아침 일찍 운문산을 가기 위해 포항에서 출발 후 경주 건천 산내를 거쳐 언양을 지나는데 가지산을 비롯한 영남알프스가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다. 석남사 앞을 지날 때 가지산의 새하얀 모습에 그냥 올라가고픈 충동을 억제하며 급하게 차를 몰아 석남 터널을 지나 석골사 입구 주차장에 도착한다.
석남사 주차장에는 다섯 대의 차량이 주차되어 있고 한 대의 차 안에는 아직 사람이 있다. 앞서간 사람은 약 십 명 정도로 예측하고 서둘러 산행 준비 하여 낡은 운문산 등반안내 표지판에 "천년고찰 석골사"라고 적혀 있는 석골사 앞을 지나 운문산과 억산의 갈림길에서 운문산 쪽 골짜기 길을 따라 정상을 향해 걸음을 재촉한다.
운문산 자락의 기암에 눈을 뿌려 풍경을 더하고 뒤돌아 본 억산의 모습에 잠시만 기다리라 내가 간다고 혼자 구시렁거리며 올라가며 눈 덮인 계곡의 마른 단풍잎에서 지난가을의 절경을 연상한다. 갈수록 골짜기의 눈은 점점 깊어지고 협곡 맞은 편에 기암은 손에 잡힐 듯 자태를 뽐내는데 바위 위의 이끼 풀은 눈 속에서 따뜻한 새봄을 꿈꾸고, 벼랑 끝에 매달린 단풍나무는 엉크련 뿌리를 드러내고 살아남기 위해 벌벌떨며 처절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
오르막길에서 모두 열한 명을 추월하고 뒤돌아 보니, 오늘 운문산 정상엔 내가 제일 먼저다! 바위와 나무 하얀 눈의 조화들을 감상하면서 만국기가 펄럭이는 돌탑 군을 지나니 골짜기 바위에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렸고 얼음 위에 눈이 덮인 위험한 계곡산행 길에서 골짜기로 난 희미한 발자국을 따라올라 가니 커다란 빙벽이 앞을 막는다. 며칠 전에 이리저리 헤매면서 올라간 숲 속의 발자국을 따라서 나도 먹이 찾아 헤매는 멧돼지처럼 숨을 헐떡이며 골짜기를 한동안 허우적대다가 옆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 올라가니 상운암이 나온다.
상운암에 도착하니 오르막 초입에서 맨 먼저 추월을 한 걸음이 제일 느린 노부부가 나와 거의 동시에 다른 길로 올라왔다, "빨리 올라 오셨네요?"라고 물었더니 "앞에 빨리 가시더니 어디로 많이 둘러서 오시나 봐요."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중간에서 추월한 아홉 명의 등산객은 어디로 갔을까? 혹시 내 발자국 따라 오라오다가 산 골짜기에서 헤메고 있지나 않을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노부부를 뒤로하고 서둘러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눈길엔 지난 발자국만 몇 개 있다. 드디어 2시간 10분 만에 정상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고 바람만 휑하니 불어대는 운문산 정상석이 외로워 보인다. 정상석과 사방을 둘러보며 사진을 몇 장 담아본다.
사방이 구름에 가려 시계가 매우 흐리다. 가지산 쪽 조망은 운무에 가려 있고 정상에는 매서운 칼바람이 불고 나뭇가지에는 서리꽃이 점점 피어나고 있다. 억산 쪽 조망도 운무 속에 희미하니 영 아니다. 아무도 없어서 정상에서 왼손을 뻗쳐 자작으로 사진 한 장 찍었는데 그러나 날씨가 하도 추워서 나중에 사진을 보니 코밑에 고드름이 달려있다.
미끄러운 눈 비탈 길을 따라 억산으로 가기 위해 내려오는 길에 골짜기에도 기암과 소나무 풍경이 백설과 어우러져 아름답고 구름 속에 희미한 가지산 정상의 모습이 보인다. 능선길을 돌아 나오는데 아까 올라오던 석골 골짜기가 분산하게 시끄럽다. 아마도 내 발자국을 따라 올라오던 아홉 명의 산 꾼들이 길이 아닌 골짜기를 헤매면서 내는 고함인듯 한데 거의 다 올라 와가는 모양이다. 매우 미안한 생각은 들었지만 인제 와서 어쩔 도리가 없지 않은가, 대자연 속에서 눈 구경은 실컷들 하겠지 아마 내 욕도 많이 했으리라.
3시간 이상 쉬지 않고 눈 위를 혼자 외로이 걸었더니 이젠 뽀드득거리는 눈길이 싫증이 날 즈음에 드디어 억산의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 바위 아래 양지쪽에 자리 잡고 조금 늦은 점심을 먹는다. 보온병에 담아온 무 시래깃국이 꿀 맛이다.
암벽 올라가는데 암벽에 매달려 있는 가느다란 로프가 이 한 몸 맞기기에는 너무나 빈약하다. 청도군 지자체 예산이 부족한가 보다. 올라가다 쳐다본 바위가 하도 높아서 억! 소리가 난다. 그래서 억산이란다. 바위에 올라가다 돌아본 운문산이 안갯속에 희미하다. 머리카락 속으로 솔솔 기어다니는 이 처럼 우리네 등산객들이나 가끔 골짜기 걸어 오르며 잠든 자연을 깨울 뿐 심설 속에서 고요한 석골은 겨울잠을 즐기고 있다.
하얀 눈이 발린 바위의 아래쪽 벼랑을 내려다보려고 가까이 가려니 오금이 저린다. 바위 벼랑이 눈으로 얼어서 장관을 연출하고 양지쪽을 내려다보니 아늑한 경관인데 억산 바위 위에는 두 그룹 등산객들의 즐거운 만찬 시간이다. 억산 정상에 도착하여 또 자작으로 사진 한 장 찍고 걸어온 운문산 정상과 능선이 희미하게 바라보이는 억산을 뒤로하고 내려오다가 돌아본 억산의 풍경이 정말 대단하다. 천 년 바위의 위용에 기가 꺾인다.
눈길을 걸어서 전망대 바위에 도착하니 오늘 산행한 곳을 모두 바라볼 수가 있어 산행을 회상하기가 아주 그만인 곳이다. 저기 아래쪽 석골사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깊은 석골 골짜기를 걸어서, 저기 꼭대기에 높은 운문산 정상까지, 딱밭재로 내려와서 범봉에 올랐다가, 팔풍재로 내려와서 억산에 올라 요 뒤 능선길을 따라서 여기 전망대 바위까지 한눈에 보인다. 그리고 오늘은 가지 못했지만, 다음에 꼭 가야 할 저기 구만산과 육화산, 앙탈 지게 잘 빠진 북암산을 바라보면서 하산한다. 아침에 올라가던 운문산 갈림길과 만나고 이어 천년고찰 석골사를 뒤로 하고 주차장에 도착한다.
영남알프스의 한쪽 자락에 붙어 있는 운문산과 억산, 낙동정맥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어 산꾼들이 좀 뜸하게 찾는 곳인 것 같다. 그렇지만, 그 자태는 영남 알프스의 어느 봉우리보다도 더욱 웅장하고 아름답기만 하다.
오늘 산행은 흐린 날씨에 눈구름이 골짜기와 능선을 가려서 원거리 조망이 좋지가 않아 아쉬움이 많지만, 아침 9시 20분에 산행을 시작하여 5시간 40분간 뽀드득 노래하는 백설의 눈길을 열심히 걸은 산행이다. 중간에 길을 잘못 들어 눈 속에서 허우적대며 자연을 듬뿍 느낄 수 있는 추억은 만들어 좋았지만, 내가 길을 잘못 들어 뒤에 따라오든 다른 사람들이 고생했을 것으로 생각하니 그분들에게 미안한 여운을 남기면서 오늘의 즐산을 마무리해 본다. (2006.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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