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연산 6봉 칼바람 속으로
솔길 남현태
계방산에 가려고 "한솔 산악회"에 예약을 했더니 신청자가 적어서 취소되었다고 하여 갑작스레 산행할 곳이 마땅치가 않아 고민 끝에 겨울철 발가벗은 내연산이 그리워져 6개 봉을 종주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내연산 종주는 여름 산행으로 2번 해 보았지만 조금 힘든 산행이다. 지난 10월 초에 3차 종주하려고 같다가 보경교를 건너는데 천령산 입구에서 송이버섯 하는 노인네에게 통제당하여 몹시 화가 났지만, 노인네와 싸울 수도 없고 하여 아무 말도 않고 그대로 돌아서서 팔각산으로 갔었다.
아침 07시 25분에 집에서 일찍 출발하여 보경사 주차장에 08시 05분에 도착하니 설렁하다. 넓은 주차장을 골라잡아 천령산 쪽 모퉁이에 주차하고 매우 추운 날씨라 산행준비를 단단히 하고 08시 10분에 산행을 시작했다. 천령산은 11월 15일부터 5월 15일까지 입산이 통제되어 있기 때문에 살금살금 도둑고양이처럼 접근해갔다. 만약에 들키더라도 화내지 말고 그냥 위로 올라가 부처님께 공양하는 셈치고 당당히 입장료 내고 문수봉으로 먼저 올라 역주행할 각오를 하면서 보경교를 향한다.
보경교 건너에서 바라보니 이른 시간이라서인지 산불 감시원이 없다. 보경교를 건너 등산로 입구에 이르니 입산 통제 판이 뒤로 발랑 누워 있다. 이 정도라면 됐다. 만약에 경우 나도 시민으로서 분명히 할 말이 있을 것 같다. 우척봉으로 오르는 길은 송이 밭에 못 들러가게 마구 처 놓은 줄들이 흉물스럽다. 뒤돌아보니 넘실대는 동해가 장관을 연출하고 싸늘한 바람 소리에 쳐다본 파란 하늘과 하늘 바다에 흘러가는 구름이 아름답기만 하다.
길은 곧 얼어붙어 반들반들 한 빙판으로 변한 눈길을 걸으며 그냥 버리기가 아까워서 트렁크에 싣고 다니며 홀로 산행할 때만 사용하는 방수도 잘 안 되는 낡은 등산화를 오늘 신고 온 것이 몹시 꺼림칙했다. 조심해야 지를 되뇌며 출발 후 1시간 15분 소요되어 천령산 정상에 도착한다. 천령산은 이번이 5번째다. 정상에 아무도 없어 왼팔 뻗어 자작으로 사진 한 장 찍는다.
삿갓봉 쪽으로 내려서다 바라본 동해에 햇살이 비치고 저 멀리 가야 할 삿갓봉과 매봉의 능선길이 보인다. 양지 바른 무덤가엔 낙엽 융단이 펼쳐져 있어 원 없이 뒹굴고 싶었으나 혼자서 무덤가에서 뒹굴면 무덤 속에 주무시던 할아버지가 미친놈이라고 꾸지람하실까 봐 푹신한 낙엽 길을 홀로 밟으며 삿갓봉 아래 도착하여 마지막 오르막을 오른다.
삿갓봉에서 바라본 동해의 조망이 뿌옇다. 건너편 산불감시 초소에는 고향에 어느 후배가 지키고 있겠지? 입산 통제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곳을 지날 때는 마음이 결린다. 나는 오늘 불법 산행을 하는 것이다. 산불 예방을 위해 11월 15일부터 다음 해 5월 15일까지 입산 통제하며 적발되면 과태료 20만 원의 처벌을 받게 된다고 적혀 있다. 산행 통제를 위해 겁이 날 정도로 촘촘히 처진 밧줄 사이로 살짝 빠져나와 매봉으로 오르려는데 매봉 입구에 입산통제 표시가 현란하다. 또 양심이 저린다.
가파른 매봉에 오르다 이제는 안심이다 하며 돌아서서 내연산 수목원 전경사진을 한 장 찍어본다. 지난번엔 매봉에 오를 때 날씨가 더워서 몸이 축 처지고 무지하게 고생을 했는데 오늘은 싸늘한 날씨 덕분에 가뿐하다. 양지쪽 오르막길에선 처음으로 산행다운 땀을 흘리며 올라간다. 멀리 비학산과 아래쪽 쑥밭에서 마북골로 내려가는 길이 정겹게 보이고 올라선 매봉의 정상석 글씨가 깔끔하다.
향로봉으로 가는 길은 곧 눈길로 이어지고 지난여름 더위에 지쳐서 점심 먹던 자리 낙엽 위에 퍼지고 앉아 사과 한 개와 커피 한잔을 즐기고 수북이 쌓인 눈길을 걸어 향로봉으로 향한다. 내린 지 오래된 눈이 꽁꽁 얼어서 눈 위로 걸어가다가 뒤돌아 본 나무 사이로는 지나온 삿갓봉과 매봉이 멀어져간다.
꽃밭 등을 지나다가 잊지 못할 지난 일이 생각나서 돌아보며 사진 한 장 담아본다. 2004년 6월 27일 처음 내연산 6개 봉 종주 길에서 앞이 잘 안 보이는 안갯속으로 더위에 지쳐서 이곳을 지나오는데, 젊은 부부 3쌍이 모여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인사를 나누며 바람처럼 지나가는데 아저씨 여기 와서 소주 한잔하고 가세요. 여러 명이 한꺼번에 부른다. 예 됬습니다 많이들 드세요. 하고 돌아서는데 또 여럿이 합창을 한다.
인사치레로 권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되돌아가서 종이컵에 곱빼기로 소주 한잔 얻어 마시니 한 아주머니가 상추와 깻잎에 마늘 등 골고루 넣은 삼겹살 쌈을 정성껏 싸서 입에 넣어 주셨는데 그때 마신 한잔의 소주와 삼겹살 맛은 잊을 길이 없었다. 여태껏 그런 맛을 다시 느껴보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그날은 그렇게 그 맛과 기분에 취해서 향로봉 정상까지 힘든 줄 모르고 올라갈 수가 있었다. 그분들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맛은 감사한 마음과 함께 영원히 내게 남아 있다.
지난여름에는 무척 힘들었던 쭉쭉 뻗은 참나무 우거진 오르막길을 오늘은 낙엽을 즐기며 오른다. 전망대 바위에 올라서니 청하골과 지나온 봉우리와 능선길이 보인다. 향로봉 정상 가는 길은 눈길로 이어지고 정상직전 마지막 오르막 눈길을 오르니 드디어 오늘의 최고봉 향로봉에 도착한다. (출발 후 4시간 25분 소요)
향로봉에는 이번이 6번째라서 정상석이 몹시 친근감이 간다. 그러나 오늘은 내 고향 상옥 쪽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이 살을 에는 듯이 하도 차가워서 오래 머물 수가 없다. 지고 다니던 물병의 물에 살얼음이 얼어서 물을 마시니 얼음 조각이 입안에 자꾸 들어온다.
향로봉에서 바라본 동해는 운무가 흐릿하다. 눈길 내려가다 되돌아 본 향로봉 미끄럽고 위험한 눈길에서 곡예 행진은 삼지봉 까지 계속되고 삼거리 갈림길을 지나 눈이 없는 양지쪽 낙엽 위에서 점심을 먹고 눈길을 걸어서 삼지봉에 도착한다.
삼지봉(내연산) 정상을 둘러보며 사진에 담고는 곧바로 문수봉으로 향하여 출발 후 6시간 17분 소요되어 오늘의 마지막 봉우리 문수봉에 도착한다. 하산길 문수암의 뒤뜰엔 벌써 봄기운이 감돌고 문수암 앞의 길가에 돌탑이 쌓여 있다. 봄은 문수암에서부터 오는가 보다.
봄을 알리는 계곡물 소리가 들리는 청하골 골짜기 깊은데 산봉우리 높고 하늘은 맑기만 하다. 아쉬운 절경을 뒤로하고 돌아서는 내리막 돌 길에서 양쪽 다리도 힘이 들어 쉬어 가자고 한다. 주위의 경관들은 가는 걸음을 자꾸만 멈추는데 보경사 뒤쪽도 하늘이 너무나 맑다. 보경사 경내에도 어느덧 봄은 오고 있었다.
보경사 주차장의 자동차에 도착하니 종주 소요시간 7시간 03분, 예상보다 1시간 이상 일찍 도착했다. 믿어지지가 않은 시간이다. 그 미끄러운 빙판과 눈 쌓인 길을 내가 이렇게 빨리 걸었나? 잠시 휴식을 취하고 포항 집에 도착하니 16시 5분이었다. 아침 07시 25분에 출발하여 8시간 40분 만에 가뿐하게? 하루 일정을 끝내고 돌아왔다. 까만 모자에서 소금 꽃이 하얗게 피어난다.
오솔길의 내연산 6개 봉 종주기
2004.06.27 홀로, 안개와 무더위 속으로 무한질주 7시간 37분 소요
2005.07.30 홀로, 삼복 무더위 속에서 허우적대며 9시간 소요
2006.02.18 홀로, 칼바람 속으로 눈길과 빙판길을 걸어서 7시간 03분 소요
천령산, 삿갓봉, 매봉이 겨울철과 봄철에(11월 15일~5월 15일)는 산불 예방을 위해 입산이 통제되고 가을에는 송이버섯 딴다고 천령산을 틀어막고 그럼 산 님들은 언제 한번 마음 놓고 산행을 즐길 수가 있으리오 무더운 여름철에나 길 비켜주면 누구는 무더위에 헉헉거리며 등산하는데 저희는 시원한 계곡에서 목 감으며 고스톱하고 드러누워 놀려고 그러는가 보다. 그래서 오늘은 불법을 감수하고 한 바퀴 돌아버렸다.
잠시도 걸음을 멈출 수 없도록 불어대는 칼바람 덕분에 눈과 빙판이 깔린 산길을 달려서 개인종주 기록을 무려 34분이나 단축한 의미 있는 산행이 되었다. 정말 오늘 기분 좋고 상큼한 내연산 6봉 종주 산행을 마무리해 본다. (2006.02.18 호젓한호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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