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비 속의 침곡산
솔길 남현태
아침에 일어나 낡은 등산복을 찾아 입는다. 오늘은 기어코 고사리 산행을 하여 배낭을 채워 오리라고 배낭이 복잡하다고 아예 도시락도 싸지 못하도록 했다. 침곡산 고사리를 싹쓸이하리라 마음먹고 일찍 차를 몰아 용전지 아래 도착했더니 산불 예방 깃발과 함께 저수지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은 쇠말뚝에 쇠사슬과 자물통으로 단단히 막아놓았다. 할 수 없이 후진하여 내려와 다시 용전지 좌측으로 올라가 저수지 제방 옆에 주차하고, 목이긴 등산 양말에다가 겉에 각반까지 차고 단단히 준비하여 고사리 산행을 시작했다.
용전지 아래 과수원에는 이제 사과꽃이 한창이다. 병꽃들이 즐비하게 피어난 개울 건너 졸졸 물소리 들으며 솔밭으로 들어간다.
솔밭 지나 능선으로 올라가며 열심히 살폈으나, 며칠 전에 이미 산나물 꾼들이 쓸고 간 뒤였다. 노릇한 망개 꽃이 잎과 함께 피어나는 능선을 따라 올라가는 길에 사진발 받는 그럴싸한 바위도 있고 간간이 빠트리고 지나간 고사리들은 물론 초상화를 찍고는 목이 댕강 날아간다.
정상 부근에 다다를 때쯤 낙엽 위에 후두둑 빗방울 소리가 들린다.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고사리도 별로인데 비까지 내려 낙엽이 축축해진다. 서둘러 침곡산 정상으로 올라간다.
침곡산 정상에는 오늘 아무도 없고 조팝대 꽃이 활짝 피어 지금이 춘궁기임을 알린다. 정상에는 아직도 화사한 진달래가 만발하고 있다. 이제 진달래는 아래서부터 밀고 올라오는 철쭉에 정상까지 쫓겨와 더 갈 곳 없이 화려했던 생을 마감할 날이 그리 머지않아 보인다.
낙엽 속에선 각시제비꽃이 화사함을 대신하고 빗물에 씻긴 각시들의 모습이 더욱 청아하다. 산소 주변에 늦게 핀 할미꽃 한 쌍이 다정하게 자태를 뽐내고 홀로 남은 할미는 외로움에 맺혔던 이슬을 떨어뜨리며 다소곳한 모습으로 망부석처럼 주인의 묘지를 지키고 있다. 붓끝같이 부드러운 소털풀이 바람에 살랑인다.
골짜기로 빠지는 촉촉한 아름다운 낙엽길 이런 길은 혼자 걷기가 아깝다. 때늦은 산 벚꽃이 하늘을 가리고, 산등성이에는 온통 철쭉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보아주는 이는 없어도 철쭉은 내리는 빗방울로 세수하고 화장을 한다. 꽃잎에 맺힌 이슬이 철쭉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연분홍색이 더 아름다울까? 연지를 찍은 듯 화사하다.
딱따구리의 조각 예술품 썩은 고목도 사진에 담아보고, 싱그러운 으름 넝쿨은 가만히 서 있는 나무를 감고 조르고 기어오르면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여유를 보인다. 으름 넝쿨에 으름 꽃이 주렁주렁 피어 있다. 산딸기 꽃도 피어 있고, 복사꽃의 마지막 자태가 화사하다.
개울가엔 온통 병꽃 등 이름 모를 야생화가 화사하게 피어 있다. 나무 밑동에 기대어 핀 이름 모를 야생화, 산 더덕을 두 뿌리 만나 물론 사진을 찍은 후엔 뿌리를 확인한다. 꼴띠로 보아서 제법 오래된 놈인데, 내가 너무 잔인했나 봐, 그냥 둘 걸 그랬나 보다. 옛날 어린 시절의 간식인 부드러운 찔레가 눈에 띄어 추억을 그리며 꺾어 먹어보니 찔레향은 여전하다.
상수리나무에도 주렁주렁 꽃이 피고 바위 웅덩이에 졸졸 흐르는 송림 속의 목욕탕은 선녀탕인가 보다. 어느덧 계절은 개울의 맑은 물소리가 시원하게 들린다. 미나리냉이 꽃이 아름답다. 아래쪽에 내려오는 무덤가에 여기에도 할미꽃이 무슨 할 말이 있는 듯 비를 맞고 고개 들어 입을 방긋거린다.
지금의 내 모습이 궁금하여 외손을 뻗어 자작으로 한 장 찍었더니 야생화 속에서 멍청하게만 보인다. 야생화가 더 아름답다. 논두렁이 온통 은하수처럼 하얀 꽃들이 피어난 길을 따라, 조팝대 꽃이 하얗게 피어 있는 용전지에 도착하여 사진을 담아 본다. 용전지는 저수지 맑은 물이 특색이다.
고사리에 기대를 잔뜩 하고 온 산행인데 고사리는 별로 많이 꺽지는 못했으나 내려오면서 산나물도 조금 뜯고 하여 오늘 저녁에는 집안에 봄 나물 냄새를 풍길 수 있을 것 같아 체면치레는 한 기분이다. 지금까지 침곡산에 갈 때는 계속 능선길로 돌았는데 오늘은 골짜기로 빠져 내려온 덕분에 온갖 야생화가 흐드러진 침곡산 골짜기 풍경을 오랜 기억에 남길 수 있을 것 같다. (2006.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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