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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지나간 한 해. 어쩌면 빛보다 빠른 입자는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제네바에 위치한 유럽 입자물리연구소(CERN). 새로운 물리입자를 찾기 위해 양성자가 빛의 속도로 회전하듯 연구소는 1년 내내 정신없이 돌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씨 좋은 날 머리를 들자 저 멀리 북동쪽에 몽블랑산군이 선명하게 바라다 보인다. 세 개의 봉우리 몽블랑 뒤 타귈, 몽모디, 몽블랑이 나란히 의좋은 형제처럼 우뚝 솟아 있다. 바쁘게 돌아가던 연구소도 연말이면 다음 1년을 위해 재충전의 기회를 갖는다. 여기서 일하는, 산을 좋아하는 물리학자들에게 재충전은 산에 가는 것이다. 그들에게 알프스는 일의 연장이요 일상이다. 몽블랑 정상의 꿈은 이루었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나 보다. 겨울, 또 다른 꿈을 찾아 나선다.
- ▲ 안자일렌을 하고 스키로 북벽에 접근하는 김태정씨 뒤로 그랑 카푸셍 등이 보인다.
- 2011년 연말, 며칠간 눈이 줄기차게 내리다가 햇볕이 든다. 일기예보를 보니 내일이 햇볕이 나는 마지막 날이다. 모레부터는 날씨가 안 좋아진다. 휴가기간 내 마지막 기회이다 싶어 허긍열 선배와 당일치기 등반에 나서기로 한다. 하루 등반이니 간단하게 생각하고 배낭에 등반장비와 보온병, 사과, 식빵만 챙겨 새벽 6시에 집을 나선다. 한 시간 이상 운전해 샤모니에 도착했다. 곧 허 선배를 만나 상의한 결과 목표는 투르 롱드(Tour Ronde·3,792m)로 정한다.
투르 롱드를 처음 본건 2009년 여름에 동료 연구원들과 몽블랑산군 반대쪽 샤르푸아(Charpoua)산장으로 하이킹 갔을 때다. 산장에서 메르데빙하를 굽어보다 빙하 위 설원에 우뚝 솟은 북벽이 눈에 들어왔다. 그 후로 투르 롱드는 나에게 몽블랑, 몽블랑 뒤 타귈 삼각북벽 다음으로 꼭 오르고 싶은 대상이 되었다.
해발 높이는 3,792m, 등반 길이는 350m
투르 롱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에귀 디 미디까지 케이블카를 타는 것부터 시작한다. 겨울에는 첫차가 8시 30분이다. 케이블카에 문제가 있는지 30분이 지연된다. 출발시간이 늦어져 살짝 걱정되었지만 허 선배가 예상 등반시간이 대여섯 시간 정도라고 했으니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에귀 디 미디에 도착해 얼음동굴 쪽으로 향한다. 예전에 삼각북벽을 등반하고 등반이 늦어져 샤모니로 내려가는 마지막 케이블카를 놓쳐 전망대 화장실 앞에서 벌벌 떨며 비박했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이번에는 스키를 가지고 가니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 생각하니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얼음동굴 앞에서 장비를 차고 설릉을 내려간다. 이미 길이 나 있어 각자 내려가도 그리 어렵지 않다.
- ▲ 제앙빙하 위에 솟은 투르 롱드. 크레바스 지대를 지나야 북벽에 닿을 수 있다.
- 스키화를 단단히 조이고 스키에 몸을 얹는다. 신나게 설원을 타고 내린다. 너무 여유를 부렸나. 익숙하지 않은 산악스키로 몇 번 넘어지면서 설원을 가로질러 제앙빙하 하단에 이르니 오전 11시가 가깝다. 여기서 스키 바닥에 스킨을 붙여 오르막을 걸어 오른다. 얼마 못 가 거대한 크레바스 앞에서 스키는 벗어 배낭에 메고, 아이젠을 신고 조심해서 안자일렌을 하고 오른다.
크레바스 지대를 무사히 지나 투르 롱드 북벽 아래에 도착하니 벌써 11시 30분이다. 멀리서만 보아왔던 북벽이 바로 코앞에 있다. 커다란 얼음벽이 웅장하게 서 있다. 투르 롱드 정상 높이는 3,792미터, 등반 길이는 350m라고 등반가이드 책에서 확인하고 왔는데, 토왕폭보다 높아 보이지 않는 것은 왜일까. 주변에 몽블랑 동벽이나 몽모디 등 거벽이 있는 알파인 지대라 거리 감각이 무뎌졌기 때문이리라. 스키를 벗어 북벽 아래 설원에 꽂아 놓은 뒤 스키화에 바로 아이젠을 착용하고 등반을 시작한다.
나 또한 선등 욕심이 있지만 이번에는 루트 파인딩이 전혀 안 되기에 허 선배가 앞장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경사는 급하지 않다. 60~70도 정도라 난이도는 높지 않지만 길다. 일일이 확보를 보며 피치를 끊으며 오르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린다. 하단부에서는 도중에 아이스 하켄 한두 개 설치하고 거기에 자일을 통과시켜 함께 오른다.
- ▲ 발레 브랑쉬설원을 지나 제앙빙하에 접어드는 김태정씨. 빙하 위에 북벽이 보인다.
- 1년 내내 사무실에만 앉아 있다가 이렇게 당일 등반이라도 가려 하면 체력이 문제다. 다시 한 번 알파인 등반은 난이도보다 체력과 고소적응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등반이 어렵지는 않지만 한 사람이라도 미끄러지면 안 되기에 피켈 하나하나, 아이젠 하나하나 정확하게 찍고 차며 꾸준히 올라간다.
중간에 경사도가 급해지면서 강빙 구간이 나타난다. 여름이었다면 얼음이 물러 쉬울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서로 자일확보를 보면서 올라간다. 허 선배의 확보물 설치간격이 너무 멀다. 아마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일 것이다. 낙빙이 총알처럼 떨어진다. 한 번은 주먹보다 큰 얼음덩어리가 어깨를 때린다. 살짝 자리를 바꿔 바위 쪽으로 붙는다. 로프가 끝나고 나서 나도 출발한다.
강빙 구간이 끝나니 빙질이 좋아진다. 상단부에서 다시 함께 오른다. 60m 자일을 사이에 두고 아이스 하켄 한둘만 통과시키고 연등한다. 피켈이 잘 박힌다. 너무 잘 박혀 회수가 힘들다. 일부러 힘을 뺀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북벽 전체가 강빙으로 덮일 수도 있다고 한다. 그랬다면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해발 3,000m 이상부터는 고소가 온다고 한다. 고소 때문인지 동작이 느리다. 시간이 촉박해 물 한 모금, 간식 하나 제대로 먹지 못하고 오르니 더 힘들다. 수없이 반복되는 피켈질과 프런트 포인팅-. 어느덧 경사가 약해지면서 정상 암릉이 보인다. 암릉 아래에 도착하니 오후 3시가 넘었다. 곧 해가 질 시간이다. 여기서 성모 마리아상이 있는 정상까지 가려면 암릉을 바로 등반하거나 돌아서 일반 루트인 설릉으로 올라서야 한다. 겨울은 해가 짧다. 오후 5시면 어두워지기에 정상은 다음에 오르기로 하고 하강을 서두른다.
- ▲ 하산로인 남릉. 도중에 좌측으로 내려간다. 아래는 쿠르마이어계곡이다.
- 내가 로프 하강 하면 허 선배는 신속히 클라이밍 다운
정상부 설사면을 길게 남쪽으로 두 피치 우회하며 횡단한다. 이제 남릉으로 내려서야 한다. 프런트 포인팅으로 가파른 설릉을 클라이밍 다운을 한다. 그러기를 또 두어 시간 흐른다. 내가 내려가는 속도가 느려 중간에 하강 포인트가 박혀 있는 부분에서는 두 번 나만 로프 하강을 한다. 로프 하강이 끝나면 허 선배는 신속히 클라이밍 다운을 한다.
스키를 꽂아 놓은 북벽 아래까지 크레바스 지대를 지나 한참을 내려오니 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말았다. 숨 돌릴 여유도 없이 장비를 대충 배낭에 넣고 스키를 신고 바로 발레 브랑쉬계곡으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달은 떴지만 서쪽 하늘에 낮게 뜬 초승달이다. 그나마 운명대로 얼마 안 되어 지고 만다. 깜깜한 어둠, 어딘가에 펼쳐져 있을 크레바스들-. 1년 전 홀로 발레 브랑쉬계곡을 내려간 적은 있지만 이렇게 어두우니 어디가 어딘지 도저히 감을 못 잡겠다. 저 밑에 새까만 곳은 커다란 크레바스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것 같다. 마치 눈을 감고 스키를 타는 것 같다. 팔을 저어 스틱으로 스키를 밀어 봐도 스키가 가고 있는지 서 있는지 분간이 안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