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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동산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호젓한오솔길 2012. 3. 15. 19:01

 

[화폭에 솟아오른 히말라야 14좌 | 안나푸르나]
 
에덴 동산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 그림·글 곽원주 한국화가
 
포카라~담푸스~란드록~촘롱~시누와~도반~MBC~ABC

 

 

 

▲ 란드록에서 바라본 안나푸르나 남벽과 히운출리.

가장 좋은 여행은 언제 떠나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여행이고, 가장 좋은 여행지는 어디 있는지 어떤 곳인지 모르고 찾아가는 여행지라고 어느 현자는 말했다. 이는 히말라야를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자연과 동화되어 원초적 삶을 살아가는 히말라야 산중의 주민들에게서는 신비에 가까운 또 다른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고 신에게 복종하며 욕심 없이 살아가는 그들의 목석초화(木石草花) 같은 삶이 설산의 눈 녹은 물처럼 맑고 깨끗하게 느껴져 인간의 본성을 깨닫게 한다. 그런 곳이 히말라야인 듯하다.


선풍기가 멈추고 전등마저 꺼져버린 카트만두 국내선 대합실에서 더위를 참아가며 3시간을 넘게 기다리다 포카라행 큰 비행기에 탑승했다. 이곳 사람들은 30인승 포카라행 비행기는 큰 비행기라 하고 루크라나 좀솜행 16인승 비행기를 작은 비행기라 한다. 프로펠러 경비행기의 소음이 얼마나 심하면 기내 서비스 과자봉지에 솜뭉치가 들어 있겠는가.


포카라에 도착해 곧바로 전 국왕의 별장지인 피시테일 로지(Fish Tail Lodge)로 향했다. 에메랄드빛 호수에 보트를 타고 들어가는 숙소에는 잘 가꾸어진 넓은 정원에 야자수가 줄을 지어 서 있어 마치 파타야의 어느 휴양지를 찾아온 느낌이다.


다음날 이른 새벽 밖을 나서니 간밤에 내린 비로 짙은 숲 향이 후각을 자극한다. 하늘의 천막을 불끈 치켜든 마차푸차레(‘물고기 꼬리’라는 뜻)는 안나푸르나 연봉의 설산들과 함께 아침을 열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마차푸차레(Machhapuchere·6,993m)를 가장 신성시 여기며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등반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와 안나푸르나 남봉.

포카라에는 8,000m급 설산에서 녹아내린 맑은 물이 형성한 페와호수가 있다. 이른 아침 물안개를 가르며 여유로움으로 유유히 노를 젓는다면 혼자여도 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포카라는 인구 120만 명의 ‘네팔 제2의 도시’이자 아열대여서 겨울에도 따뜻한 네팔 최고의 휴양지이다. 노을이 물드는 강변의 거리에는 외국인 여행객들로 넘쳐나고, 맑은 자연과 넉넉한 인정 그리고 싼 물가는 여행자들을 미소 짓게 한다.


포카라에서 차량으로 30여 분 이동해 산행기점인 페디(1,130m)에 도착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산마루에 위치한 담푸스(Dhampus·1,650m)에 올라서니 건너편으로 보이는 끝없는 층층 다랑논은 네팔인들의 다양한 삶의 계층을 말해 주는 듯하다. 논둑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벼들이 이제 막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다.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곳에도 가을이 찾아오고 있다. 길가 오두막 사립문은 우리나라 제주도처럼 막대를 서너 개 빗장으로 쳐 놓았다. 역시, 돌아다니는 가축들이 많아 무단출입을 막기 위해서라 한다.


‘오전 쾌청, 오후 장대비’의 반복
마을을 지나는데 징소리와 나팔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장례 행렬이다. 대나무로 들것을 만들어, 관도 없이 시신을 천으로 덮고 그 위에 꽃송이들로 장식한 상여가 지나간다. 이들은 내세를 믿고 환생을 믿기에 지금의 이별은 또 다른 만남으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별다른 큰 슬픔을 표현하지 않는다. 상여는 화장터로 가서 화장한다. 네팔은 다종교 국가로서 신분과 계급에 따라 화장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입산신고처가 있는 포타나(Pothana· 1,890m)에 도착해 수제비로 점심을 먹고 나니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진다. 오전에 쾌청한 날씨라 해도 오후에는 장대비가 내린다. 6월에서 9월까지 몬순기에는 이 같은 현상이 반복된다. 지금은 몬순기가 끝나지 않아 우중산행을 해야 한다. 그러나 수시로 변하는 운무사이로 거대한 청록 산군이 또 다른 신비함을 더하고, 안개비가 농담을 달리하니 산천은 몽환적인 선화(仙畵)를 보는 듯하다.


▲ 데우랄리에서 올라서다 만난 무명 폭포.

오후 6시 30분 란드록(Landrok·1,565m) 셰르파 호텔에  도착해 따끈한 밀티(설탕+물소우유+녹차) 한잔을 마시니 가슴에 온기가 돈다. 셰르파 호텔은 전망이 좋은 곳이다. 어둠이 내려앉은 협곡의 건너편 더 높은 곳에 작은 불빛이 인적을 느끼게 한다.
새벽 5시에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서니 안나푸르나 남벽과 히운출리, 마차푸차레가 고래등 같은 검푸른 산줄기 끝자락에 백상어처럼 솟아올라 아침을 맞는다. 마당가의 붉은 달리아가 기지개를 켜고, 여기저기 굴뚝에는 아침을 준비하느라 하얀 연기가 솟아오른다.


요즈음 우리에겐 귀한 꽃이 되어버린 붉은 달리아(天竺牧牡丹·천축모란)꽃이 이곳에서는 집집마다 아름답게 피었다. 초가지붕에는 수북이 자란 잡초가 세월을 느끼게 하고, 텃밭에는 수확이 끝난 옥수수대가 여기저기 꼿꼿하게 서 있다. 골목에서 만난 해맑은 눈동자의 아이들은 인정 많은 한국인만 보면 유독 “나마스떼”하고는 두 손을 벌리고 “초콜릿” 한다.


진풍경에 빠져 사진촬영을 하다 쐐기풀에 종아리를 쏘였다. 쐐기풀은 약간 스치기만 해도 쐐기에 쏘인 것처럼 한동안 매우 따갑다.


히말파니에 도착했다. 티하우스 뒤로 거대한 폭포가 장관을 이루며 쏟아지고 집 앞으로는 강이 흐르며 청산 너머 설산이 우뚝하니 산천경계 좋은 이곳에서 세상 걱정 모두 잊고 그림이나 그렸으면 좋겠다.


여인은 수돗가에서 양털을 두들겨 빨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닭과 오리, 염소, 양, 개와 함께 공생하며 살아간다. 작은 텃밭에는 사탕수수와 야채를 심었다. 차와 함께 가져온 설탕도 텃밭에서 수확한 사탕수수로 정제해 만든 자연식품이라 한다. 셰르파 치링이 옥수수 볶은 것을 쟁반에 담아와 옥수수는 고소에 좋으니 많이 먹으라 권한다.


고사리를 채취하며 거대한 뉴 브리지를 건너 급경사를 다시 오르니 셰르파와 외국인 두 여인이 걸어온다. 한 여자는 셰르파의 손을 붙잡고 걷는다. 앞 못 보는 맹인이다.


▲ 도반에서 올라서다 만난 무명 폭포.

ABC까지 다녀온다고 한다.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이 왜, 무엇 때문에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다녀오는 것일까, 저 맹인은 무엇을 느꼈을까. 느낌? 그래, 여행은 나만의 느낌이다. 어느 누구도 느끼지 못했던 나만의 느낌을 화선지 위에 눈을 감고라도 그릴 수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가슴을 짓누른다. 자꾸 뒤돌아보며 맹인이 무사하게 내려가기를 기원한다. 어쩌면 히말라야는 꿈과 욕망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파른 계단을 힘들게 올라 지누단다(Jinudanda·1,780m)에 도착하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점심식사를 마치니 빗줄기는 더욱 세차게 쏟아진다. 이곳이 노천온천(Hot Spring)이 있는 곳이지만 지금은 관심이 없다. 판초우의를 입고 중무장을 한 후 우중산행을 시작했다. 급경사를 올라서니 땀이 비오듯 해 빗물인지 땀방울인지 분간이 안 간다.


아침엔 멀쩡하던 날씨가 점심때부터 밤늦게까지 장대비가 쏟아진다. 이같은 현상이 산행이 끝나는 날까지 반복되었다. 쇠똥을 밟고 종아리는 거머리에 물려 양말 위까지 피가 스며나왔다. 숲을 지날 때면 머리 위에서도 거머리가 떨어지니 신경을 쓰며 걸어야 한다.


이들의 행복지수가 우리보다 높은 이유
지누단다에서 촘롱(Chomrong·2,170m)까지는 상당히 급경사 오르막길이므로 인내심을 갖고 천천히 걸어야 한다. 계단을 오르며 운무 사이로 건너다보이는 끝도 없이 이어진 계단식 밭에는 물소들이 군데군데 모여 풀을 뜯고 있다. 빗줄기는 점점 세차게 뿌린다. 무대공연 시의 드라이아이스처럼 수시로 변하는 운무는 신들린 붓놀림으로 산수화를 그려댄다. 발아래 지누단다는 그림 속의 작은 오두막처럼 운무 속으로 점점 사라진다.


스케치 산행에서 날씨가 나빠 조망이 불가능하면 참으로 낭패다. 그래서 걱정이 앞선다. 깊고 거대한 협곡은 그 깊이를 알 수 없고, 솟아오른 봉우리들만 바다 위의 섬들처럼 다도해를 이룬다.


▲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와 마차푸차레의 위용.

빗속에 질퍽대는 쇠똥을 밟으며 힘들게 촘롱에 도착했다. 촘롱은 매우 번화한 마을로, 마차푸차레와 안나푸르나, 히운출리가 정면으로 잘 보이는 곳으로 매우 아름다운 마을이다. 이렇게 경사진 곳을 따라 마을이 발달한 이유가 궁금해지지만 아무튼 윗동네에 로지와 레스토랑이 밀집해 있고, 아랫동네에는 현지인들이 둥지를 틀고 산다.


여기서 다큐 차마고도에서 보았던 짐을 나르는 당나귀들의 행렬을 만날 수 있었다. 요란한 원색 장식에 어른 두 주먹만큼 큰 워낭을 목에 달고 등에는 무거운 짐을 지고 빗속의 계단을 오른다. 워낭소리가 유난히 청량하게 느껴진다.


KRPANA 게스트하우스에 숙소를 정하고 2층 베란다 조망 좋은 곳에서 안개 걷히기를 기다려 스케치북을 펼친다. 셰르파 치링이 밀티와 찐 감자를 가져다준다. 어쩌면 감자모양이 그리도 못 생겼는지. 그렇지만 고산감자라서 맛은 좋다.


함께한 블랙야크 문화원정대원 송현자씨는 피곤한 줄도 모르고 미리 준비해 온 앞치마를 두르고 포터들을 불러 이발을 해준 다음, 박상범씨와 함께 윗마을과 아랫마을 중간쯤에 있는 학교까지 찾아가 머리가 긴 학생들 이발도 해주고 돌아온다. 나는 그들의 봉사정신에 박수를 보냈다. 저녁식사에는 산을 오르며 채취한 살찐 고사리 무침 특별요리가 식욕을 돋운다.


아침에 일어나니 온 세상이 운무에 싸여 몽환적이다. 앞마당 달맞이꽃이 함초롬히 젖었다. 황진이가 가을비에 젖어 서화담을 찾았을 적에 그리움의 표현으로 한손에 달맞이꽃을 들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때도 저토록 애잔하고 초췌해 보였을까. 그래서 화담은 황진이를 선방으로 불러들였나. 지금 내 가슴엔 가을비를 맞으며 빗속으로 떠난 그 여인이 몸서리쳐지게 그리운 것은 무슨 연유일까. 서서히 운무가 걷히기 시작한다. 설산도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청록의 산비탈엔 하얀 폭포들이 장관을 이룬다. 비가 그친 지금 협곡의 안개구름은 산정을 향해 줄달음친다.

 

▲ 운무에 감싸인 히말라야호텔과 폭포.

안나푸르나를 오르는 길은 외길이다. 길바닥은 자연석이 깔렸다. 가축도, 사람도 모두 같은 길을 걸어간다. 길은 쇠똥천지가 되지만 오후가 되면 장대비가 말끔히 청소를 한다.


협곡을 흐르는 강(Chhomro khola)에 걸쳐진 출렁다리까지 내려섰다 다시 올라선다. 숙소에서 1시간 10분을 걸어왔다. 촘롱에 있는 학교를 가야 한다며 교복을 입은 어린 두 학생이 뛰어간다.


쉼터에서 아이들에게 초콜릿을 나누어주는 모습을 보며 한국 사람들의 인정 때문에 네팔 어린이들의 치아가 나빠진다는 말이 떠오른다. 이곳 사람들은 아이나 어른이나 양치질을 잘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누와(2,360m)에 도착했다. 시누와 주위에는 야생메밀꽃이 한창이다. 물봉선화와 다양한 색상의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피었다. 이렇게 지천으로 문밖에 야생화가 넘쳐나지만 작은 오두막집이라도 못 쓰는 용기들에 흙을 담고 화분처럼 꽃을 가꾼다. 이들은 천성이 착하고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사람들인가보다. 그래서 네팔사람들의 행복지수가 문명 세계 사람들보다 훨씬 더 높은가보다. 행복은 결코 물질문명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안의 행복인가보다.


영화 아바타의 한 장면 속에 든 듯
산모퉁이를 돌아서니 조망처까지 갖추어진 티하우스가 나오지만 주위는 온통 안개구름으로 조망이 불가능하다. 산 밑에서 불어오는 안개바람은 금방 냉기를 느끼게 하고, 강한 바람에 구름이 어쩌다 걷히며 파란 하늘과 검푸른 산 능선이 잠시 나타났다 사라질 뿐이다.


▲ 우중에 통나무 다리를 건너다.

원시의 정글지대로 들어섰다. 영화 아바타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히말라야가 아니라 열대오지를 찾았다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여기저기서 원숭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줄타기를 하고, 나뭇가지는 어느 것 하나 온전한 게 없다. 모든 가지가 이끼와 고사리과 식물들로 둘러싸여 있다. 살아 있는 가지에 마치 옷을 두른 듯하다. 이곳은 추위와는 무관하다. 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는다고 한다. 바위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야생화와 이끼로 뒤덮였다. 등산로 주위는 온통 꽃밭이다. 에덴동산이 따로 없다. 나는 천마를 타고 숲 속을 유영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숲 사이로 보이는 건너편 산자락에는 끝을 알 수 없는 폭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쏟아진다. 급경사에서 쏟아지는 끝이 없는 물줄기를 폭포라 해야 할지 강줄기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누군가가 나에게 낙원이 어떤 곳이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안나푸르나를 찾아 정글이 있는 숲을 걸어보라고 할 것이다.


숲속을 빠져나오니 섶다리가 나타난다. 수시로 불어나는 폭우에 고정 다리를 놓을 수 없나보다. 그래서 통나무와 풀로 엮은 섶다리를 놓은 곳이 많다. 산사태로 길이 없어진 바위사면에 옹색하게 설치해 놓은 통나무 길은 큰 용기가 없으면 건널 수 없었다.


목숨 걸고 통과해 뒤돌아보니 내려갈 일이 걱정된다. 평탄한 길을 여유를 갖고 오르는 것도 잠시. 가파른 계단 길은 우리를 협곡으로 끌어내린다. 야생염소 떼가 비탈진 바위틈에서 풀을 뜯으며 조롱이라도 하듯 자꾸 쳐다본다.


곳곳에 대나무가 많아, 죽순을 채취해 죽순요리를 한다고 한다. 대나무숲 터널을 통과하니 뱀부(Bamboo·2,310m)다. 유난히 꽃을 많이 가꾼 집에서 죽순요리로 점심을 먹었다.


▲ 영산(靈山) 마차푸차레를 바라보다.

오늘도 예외 없이 점심을 먹고 나니 장대비가 쏟아진다. 도반(Doban·2,600m)에 도착하니 비가 더욱 세차게 쏟아진다. 널어놓은 빨래가 빗속에 축축하게 젖고 있다. 빗물에 빨래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도반에서 올라서는데 거대한 폭포가 장관을 이루고 가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치링이 눈치를 채고 우산을 받쳐준다. 스케치북을 펼친다. 비오는 날의 수묵화 한 폭을 그린다. 저토록 거대한 폭포가 이름도 없는 무명폭포라고 하니 말이나 될 법한 이야긴가. 하기야 4,000~5,000m 되는 산봉우리들도 제 이름 하나 갖지 못하는 처지에 몇 백m 폭포쯤이야 이곳에서는 그저 산골짝 물줄기쯤으로 여겨지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우리나라에 있었다면 거창한 이름 하나가 붙었을 것이다.


세속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다
히말라야호텔에 도착했다. 따끈한 이곳 전통차 한 잔을 가져다준다. 히말라야호텔은 말이 호텔이지, 일반 로지와 다름없다. 이곳은 호텔, 게스트 하우스, 로지를 크게 구별 짓지 않는 듯했다. 중국도 주점, 반점, 빈관, 호텔의 구별이 없듯이.


숙소에 짐을 풀었지만 비에 젖은 몸을 녹일 온기라고는 어디에도 없다 .아직은 우기가 끝나지 않아 침상의 매트리스는 눅눅해서 누울 수 없다. 간밤에 비가 너무 많이 내리며 발전기에 오물이 덮쳐 작동이 안 된다고 가이드가 촛불을 가져다준다. 침상 위에 풀어 놓은 카고백에 생쥐가 들락거리며 벌써 빵봉지를 뜯고 있다. 아마 저녁에 함께 동침해야 할 모양이다. 제발 침낭 안에는 들어오지 말았으면 좋겠다.


밤을 지새우고 아침에 일어나 히말라야로지와 어우러진 장관을 스케치한 뒤 어른 키만큼의 높이로 자란 나무 숲길을 따라 40분쯤 오르니 ‘힌코케이브(Hinko cave·3,170m·커다란 바윗덩이)’가 나타난다. 그곳에서 바라본 데우랄리는 한 폭의 그림 같다. 산천의 녹색은 싱그러움을 더하고 파란 하늘은 더욱 푸르고 높아 청명하게 느껴진다. 고소증도 잊은 채 절경에 동화되어 발걸음도 가볍게 오른다.


▲ 네팔 여인의 귀가.

40분을 오르니 로지가 몇 채 있는 데우랄리마을(Deurali·3,230m)이다. 이곳에서 고소증으로 ABC 등정을 포기하고 동료를 기다리고 있는 한국인을 만났다. 그외에도 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길에서는 한국인을 수시로 만날 수 있었다.


완만한 분지 같은 곳에 모디콜라(Modi khola) 물줄기 옆으로 초원지대가 펼쳐졌다. 백두산 청석봉을 끼고 트레킹하는 느낌이다. 운무가 다시 밀려온다. 에델바이스를 닮은 하얀색 작은 꽃들이 지천으로 무리지어 피어 있다. 보라색과 노랑꽃이 함께 어우러지니 아름다움이 더하다.


12시 40분 MBC(3,700m·Machapuchare Base Camp)에 도착했다. 아직은 시즌이 아니라 로지가 한산하다. 캠핑장 곳곳은 감자밭이다. 이곳이 겨울철에는 텐트촌을 이룬다. 아직 고소증은 염려했던 만큼 큰 문제가 없다. MBC 주변은 기암군으로 병풍을 이루고 다시 이중으로 토성을 쌓은 듯 크레바스가 둘러쳐져 있다. 입출구가 확실하고 분지로 움푹한 중앙부에 깨끗한 게스트 하우스가 세 동 있다.


한밤중에 일어나 달빛 아래 마차푸차레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산의 울림을 들었고, 달빛에 비친 그 영산(靈産)의 웅이로운 자태는 나의 심장을 달아오르게 했다.


다음날 새벽 4시에 기상해 ABC(4,130m·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로 오른다. 검둥개가 계속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다. MBC에서 ABC로 오르는 길은 갖가지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어 마치 천상화원처럼 느껴졌다. 드디어 ABC에 올라 안나푸르나 ‘풍요의 여신’ 품에 안겼다. 과거와 미래가 함께 녹아 가슴을 파고든다.


안나푸르나의 달밤은 춥고 어두운 밤이 아니었다. 하늘의 둥근 달은 밝게 산정에 비추며 포근하게 나를 감싸 안았다. 세속의 무거운 짐들을 모두 내려놓고 가라 했다.


곽원주 화백 약력
순천대학교 졸업. 개인전 10회(조선일보미술관 3회, 중국 섬서미술관 외), 단체전 150회 이상(한중문화교류3인전, 국립현대미술관 외), 월간산 7년 연재(백두대간 및 중국산기행 외), KBS1TV 학자의 고향 45회 방송그림 연재. 대한민국미술전람회, 동아미술대전, 신미술대전 등 심사위원 역임. 저서 <백두대간을 화폭에 담아>. cafe.daum.net/ksejungart  화실 종로구 낙원동 280-4 건국1호빌딩 508호.